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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의 역사문화

배달국(倍達國)의 출현과 웅족(熊族) 및 호족(虎族)

by 바로요거 2009. 9. 3.

 

7.배달국(倍達國)의 출현과 웅족(熊族) 및 호족(虎族)

『신시(神市)개천경(開天經)』의 환웅(桓雄)에 대한 기록에 의하면, 환국(桓國)의 말엽에 자식들의 수장(首長) 이름은 환웅(桓雄)이었다. 환웅(桓雄)은 널리 인간을 구제하고자 하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이세(光明理世)의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 환웅(桓雄)은 천산산맥의 동남쪽에 있는 삼위산(三危山, 중국 서부 돈황현敦煌顯)과 백두산(백두산)을 두루두루 살펴본 후, 동방 땅의 백두산(白頭山)으로 가고 싶다는 뜻을 환인(桓仁)에게 알렸다. 환인(桓仁)은 아들 중의 장자(長子)인 환웅(桓雄)의 뜻을 끝내 허락하여 문명 개척단 3,000명과 함께 배달국(倍達國, B.C3,898~2,333)을 건설하게 했다.

『환단고기(桓檀古記)』의 환웅(桓雄)에 대한 기록을 보면, 시베리아와 연결된 발달된 문화를 지닌 환족(桓族)의 환웅(桓雄)이 보수적 문화 성격에 머무르고 있던 만주지역의 토착세력인 웅족(熊族)과 호족(虎族)을 동화시키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웅족(熊族)과 호족(虎族)은 모두 신석기 시대의 모계 사회였는데, 환웅(桓雄)이 거느린 환웅(桓雄)족이 남하 하면서, 모계(母系)사회에서 남성 군장 사회로 변하게 되었던 것이다.

환웅(桓雄)은 환국(桓國)의 환인(桓仁)으로부터 천부인(天符印) 3가지를 받고,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 등의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백두산(白頭山) 꼭대기의 신단수(神檀樹) 아래 내려와 신시(神市)를 개창하여 나라 이름을 배달국(倍達國, B.C3,898~2,333)이라 하였다. 「삼성기」상권을 보면, “환웅(桓雄)은 팔괘(八卦)를 그어 다가올 것을 미리 알고, 상(象)을 잡아 신(神)을 움직였다. 그는 웅(熊)씨 여인을 거두어 아내로 삼고, 혼인(婚姻)의 예법을 정하여 짐승가죽으로써 폐물을 삼고,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고 시장(市場)을 열어 물물을 교환하도록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경농과 목축은 신석기시대 이후에 나타나는 경제 형태로서 당시 사회상을 그대로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다. 환웅(桓雄)이 ‘혼인의 예법을 정했다' 라는 말은 가족단위 사회에로의 전환을 뜻하는 신석기 시대적인 표현인 것이다. 시장(市場)을 열고 교역이 이루어진 것도 신석기 시대의 생활 모습을 기록한 것이다. 이런 내용들은 실제의 내용을 그대로 서술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기록인 것이다.

태백일사의「신시본기편」을 보면, “풍백 석제라를 시켜 새와 짐승과 벌레와 물고기의 해를 제거하도록 하였지만, 사람들은 아직 동굴 속이나 흙구덩이 속에 살았기 때문에, 밑에선 습기가 올라오고 밖에서는 바람이 불어 와서 사람들에게 질병을 일으켰다.” 라는 기록이 있다. 신석기 시대의 주거지가 반지하식 움집이고, 동굴유적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부연할 필요도 없이 너무나도 일치하는 내용들이다.

『신시본기』에서는 환웅(桓雄)이 처음 내려왔을 때, 그 지역에 두 족속(族屬)이 있었다고 한다. 웅족(雄族)과 호족(虎族)인데, 새로 살기 시작한 어리석고 자부심 높은 웅족(熊族)과 옛부터 있었던 난폭하고 탐욕스러우며 약탈을 일삼는 호족(虎族)이 있었다고 한다. 이 두 종족들은 서로 어울리지도 않았고, 통혼(通婚)조차 없었다고 한다. 환웅(桓雄)이 두 종족을 교화시켜 같이 살게 하였는데, 웅족(雄族)은 교화되어 동화되고, 호족(虎族)은 끝내 깨우치지 못하여 이들을 사해로 쫓아버렸다고 한다. 이것은 환웅(桓雄)에게 쉽게 동화되어 같은 공동체를 이루는데 성공한 웅족(熊族)과 동화되지 못하고 차츰 사라지는 호족(虎族)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내용이다. 그래서, 한반도에는 호랑이 토템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는 배달국(倍達)의 환웅(桓雄)이 웅족(熊族)과 결합하면서, 호족(虎族)을 억압했기 때문이다.

구석기시대 말기부터 작은 돌을 깎아 수렵에 활용했던 세석기(細石器) 문화가 전개되고 있었다. 그후, 중국북부지역과 발해연안, 요동반도, 남만주 일대에서 농경과 목축을 하는 신석기(新石器) 문화가 B.C.6,000년경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고, 이들 신석기 문화는 주변지역의 중심 문화권으로 계속 발전해 가고 있었다. 두 문화는 지역적으로 뚜렷이 구분되고 있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특히 발해 북안, 만주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수렵생활 위주의 호족(虎族)과 농경생활 위주의 웅족(熊族)이 그 대표적인 예(例)였다. 그리고, 호족(虎族)과 웅족(熊族) 모두 모계(母系) 사회였는데, 환웅(桓雄)이 거느린 환웅(桓雄)족이 남하 하면서, 모계(母系)사회에서 남성 군장 사회로 변하게 되었던 것이다. B.C8,000~4,000년까지 모계(母系)씨족사회의 신석기인들이 황해 내륙과 만주 및 발해 연안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었다. 이들은 반지하식 수혈(竪穴) 움막에 살았으며, 죽어서는 수혈식 토갱(土坑)에 묻혔다. 그들은 모계(母系)의 근원인 할머니를 수장(首將)으로 삼았었다. 흥륭와(興隆窪) 유적지에서 나오는 돌조각 여인상이 그것을 대변해 주고 있다. 여자들은 농사도 짓고 곡식을 저장하고 또 익혀 먹기 위해 질그릇을 만들었는데, 주로 지자문(之字文) 문양의 빗살무늬를 새겨 넣었고 이것이 지자문(之字文) “빗살무늬 토기”인 것이다.

지자문(之字文) “빗살무늬 토기”는 B.C6,000년전에 시작되었고, 한반도와 산동반도 대문구(B.C5,000~3,000년), 압록강 접안, 요동 대련반도의 소주산, 심양의 신락(B.C5,500년), 길림시 서단산, 장춘시 좌가산, 그리고 서요하 상류, 내몽고 적봉시 홍산(紅山,B.C5,500년)까지 고루 발견된다. 부신시(阜新市) 사해 문화 유적지는 대릉하(大凌河)의 가지인 청하(淸河) 부근에 있는데, 이 곳에서 발견되는 옥도끼는 매우 특이한 의미를 지닌다. 옥도끼는 석병(石兵) 시대에 신권(神權)을 상징하는 옥병(玉兵)으로 등장하였고, 옥도끼는 빛을 발함으로써 당시에 무서운 역병을 일으키는 귀신들을 내쫓는 효험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다. B.C6,000년의 부신시(阜新市) 사해문화(査海文化)에서 옥병(玉兵)의 출현은 중원(中原,중국 황하)의 B.C3,000년 보다 빠른 것이다.

배달국(倍達國)은 B.C3,898~2,333년의 기간 동안, 18대의 환웅 계보를 갖고 있으며, 신시배달(神市,1~13대 환웅)과 청구배달(靑丘,14대~18대 환웅)로 나누어 진다. 첫째, 배달국(倍達國)의 신시(神市,1~13대 환웅)시대의 환웅 계보(系譜)는 다음과 같다. 제1대 배달 환웅(居發桓,B.C3,898~3,804년 재위,일명 거발한 환웅), 제2대 거불리 환웅(居佛理, B.C3,804년 즉위), 제3대 우야고 환웅(右耶古, B.C3,718년 즉위), 제4대 모사라 환웅(慕士羅, B.C 3,619년 즉위), 제5대 태우의 환웅(太虞儀, B.C3,512년 즉위), 제6대 다의발 환웅(多儀發, B.C3,419년 즉위), 제7대 거련 환웅(居連, B.C3,321년 즉위), 제8대 안부련 환웅(安夫連, B.C3,240년 즉위), 제9대 양운 환웅(養雲, B.C3,167년 즉위), 제10대 갈고 환웅(葛古, B.C3,071년 즉위), 제11대 거야발 환웅(居耶發, B.C2,971년 즉위), 제12대 주무신 환웅(州武愼, B.C2,879년 즉위), 제13대 사와라 환웅(斯瓦羅, B.C2,774년 즉위).

둘째, 배달국(倍達國)의 청구(靑丘,14대~18대 환웅)시대의 환웅 계보(系譜)는 다음과 같다. 제14대 치우 천황(蚩尤, B.C2,707년 즉위, 일명 자오지慈烏支 환웅), 제15대 치애트 환웅(蚩額特, B.C2,599년 즉위), 제16대 축다리 환웅(祝多利, B.C2,544년 즉위), 제17대 혁다세 환웅(赫多世, B.C2,453년 즉위), 제18대 거불단 환웅(居弗檀, B.C2,380~2,333년 재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