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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의 역사문화

배달국의 청구(靑邱)시대

by 바로요거 2009. 9. 2.

 

9.배달국의 청구(靑邱)시대

- 치우천황의 산동반도 용산문화

배달국(倍達國)의 제14대 치우 천황(蚩尤, B.C2,707년 즉위)은 중국의 유망(楡罔)과 유망의 뒤를 이은 황제 헌원(軒轅)과 탁록(꟔鹿)에서 결전하여 대승(大勝)을 거두었으며, 도읍을 청구(靑丘)로 옮기고 배달국의 청구(靑丘) 시대를 열었다.

여기서, 청구(靑丘)는 현재 산동반도의 태산(泰山)아래를 가리킨다.『대변경(大辯經)』을 보면, 치우(蚩尤) 천황은 천하를 평정하고 회대(淮岱)를 점령했는데, 그의 능(陵)이 동평군 수장현 관향성에 있다고 하였다.『진서지리지(晉書地理志)』에서도, 동평국(東平國) 수장현(壽張縣)에 치우사(蚩尤祠)라는 사당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신시본기』의 기록에는, 치우(蚩尤) 환웅은 갈로산(葛盧山)의 쇠(金)를 캐고, 옹호산(雍狐山)에서 야금(冶金)을 하여, 도개. 모극. 대궁. 호시 등을 만들었다고 한다.『규원사화(揆園史話)』에서는 치우(蚩尤) 환웅이 공상(空桑)에서 제위(帝位)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

2002년 월드컵 기간 중 경기장과 거리가 온통 붉은 물결로 장식되는 도깨비 형상의 “붉은 악마”가 고대사(古代史)에 등장하는 치우(蚩尤) 천황이라는 사실이 세상에 관심을 끌고 있다. 그리고, 치우(蚩尤) 천황은 중국 민족의 시조(始祖)인 황제 헌원(黃帝 軒轅)을 제압하고 동방 세계를 대통일(大統一)한 배달국의 14대 환웅(桓雄)이라는 사실도 세상에 알려지고 있다.

치우(蚩尤)천황은 백전백승(百戰百勝)의 용장이었으며, 신의(信義)와 인의(仁義)로써 백성을 다스렸고, 신력(神力)과 정의(正義)를 만고(萬古)에 떨쳤던 배달국(倍達國)의 왕이었다. 치우(蚩尤)천황은 탁록(꟔鹿)에서 동두철액(銅頭鐵額, 청동머리에 무쇠이마)의 투구를 하고, 중국의 황제 헌원(軒轅)과 싸워, 모든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한다. 한편, 치우(蚩尤)천황이 워낙 용맹했기 때문에 중국 역사에서는 전쟁의 신(神), 즉 군신(軍神)으로 추앙하였고, 큰 전쟁을 앞두고 반드시 치우(蚩尤)천황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특히 치우(蚩尤)왕릉에서 제사를 지내면 능(陵) 정상에서 붉은 기운이 솟아나와 붉은 깃발이 나부끼는 것 같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명나라 때에는 북경에 천단(天亶)을 세우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는데, 이 천단(天亶)에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의 삼신(三神)과 더불어 뇌사(雷師), 즉 전쟁신이었던 치우(蚩尤) 천황을 모셨었다. 여기서 풍백, 우사, 운사 등의 삼신(三神)은 단군(檀君)의 부하인 삼신(三神)과도 동일한 것이다.

치우(蚩尤) 천황의 청구(靑丘) 배달국(倍達國)은 황하 남쪽 하남성으로부터 산동반도 일대와 양자강 북쪽의 회대(淮代)까지 지배하였다고 한다. 배달국(倍達國) 청구(靑丘) 시대의 중심은 하남성 개봉시 진류(陳留)에서 시작하여 산동성 제하(濟河), 치하(淄河) 유역의 임제(臨濟), 임치(臨淄), 임구(臨丘), 안구(安丘), 청구(靑丘) 등으로 옮겨갔다. 그리하여 치우(蚩尤) 천황은 B.C 2,700년에 산동반도의 청구(靑丘)에 도읍하여 배달국(倍達國) 청구(靑丘)시대의 용산(龍山)문화를 일으켰다.







6. 무고자의 도살 / 피터 폴 루벤스


2005년 런던에서 4,950만 파운드에 낙찰



용산(龍山)문화가 최초로 발견된 곳은 산동성 제남시(齊南市)의 동쪽에 있는 용산(龍山)지역이다. 용산(龍山)문화의 옥기(玉器)는 옥면에 짐승이나 매. 독수리의 그림을 새기고, 삼태극(三太極)의 옥환(玉環)이 나타난다. 반월형 석도(石刀)가 출현했으며, 돌삽, 돌낫 등의 출현으로 농업이 혁신되었다. 가축 사육에서 개나 돼지 외에, 소와 양, 말이 사육되었다. 질그릇에서 채도는 줄고 회색, 흑색 토기가 주로 되며 손잡이 달린 세발 솥이 이 시대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용산(龍山)문화는 B.C 2,700~2,000년 사이에 하남, 섬서, 산동, 하북 지방으로 널리 통용되었다.

치우(蚩尤) 천황 시대에 가장 중요한 특징은 청동기(靑銅器) 문화의 도입이다. 치우(蚩尤)는 동두철액(銅頭鐵額, 청동머리에 무쇠이마)하였으니, 이미 청동기 시대에 돌입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과거에는 고고학적으로 B.C2,100년에 세워진 하(夏)나라 초기에 청동기가 시작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배달국(倍達國) 청구(靑丘)시대의 용산(龍山)문화 유적지에서 잔동추(殘銅錐), 동련사(銅煉渣)와 공작석(孔雀石, 구리와 탄소 결합 보석) 등의 동편(銅片)이나 동액(銅液) 흔적, 동령(銅鈴) 등의 다양한 청동(靑銅) 문화 흔적이 잇달아 발굴되고 난 후부터는 이제 용산(龍山)문화가 하(夏)나라 보다 앞서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배달국(倍達國) 청구(靑丘) 시대의 용산(龍山)문화가 동북 아시아에서 최초의 청동기 문화로 인정받게 되었다. 용산(龍山) 문화 유적지에서는 청동기 유물들이 매우 많이 발견되고 있다. 치우(蚩尤) 천황의 용산(龍山)문화는 중국에 청동기를 전파하기도 했는데, 이렇게 전파된 청동기의 흔적은 산동성의 교현, 유하현, 장도현, 일조현 등과 하남성의 정주, 임여현, 등봉현 등이며, 산서성의 양분현까지 널리 분포하고 있다.

현재 동북방에 남아 있는 청동(靑銅) 도검(刀劍) 중에서 가장 오랜 것은 금주시(錦州市) 수수영자(秀手營子)의 토갱묘에서 발굴된 청동과(靑銅戈)이다. 이는 B.C 18세기경 상(商)나라의 도검(刀劍)보다 앞선 것인데, 상(商)나라에서는 도검(刀劍)의 검날만 발굴되었고, 수수영자(秀手營子)의 청동과(靑銅戈)는 도검(刀劍)의 자루까지 청동으로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