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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의 역사문화

사대주의에 의해 농락된 단군신화(檀君神話)

by 바로요거 2009. 9. 2.

 

10.사대주의에 의해 농락된 단군신화(檀君神話)

우리의 역사는 사대주의(事大主義)에 의해 수없이 왜곡되고 농락되었다. 그 중의 하나가 단군신화(檀君神話)에 얽힌 내용이다. 다음은『삼국유사(三國遺事)』에 기록되어 있는 단군신화(檀君神話)와 그것을 정밀 분석해 놓은 것이다. 『고기(古記)』에 이렇게 전한다. 옛날에 환인(桓因)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 항상 천하(天下)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내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 태백(백두산)을 내려다 보니, 인간 세계를 널리 이롭게 할 만했다. 이에 천부인(天符印, 신권神權을 상징하는 도장) 3개를 주어, 내려가서 세상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桓雄)은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白山, 백두산) 꼭대기의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내려와서 이곳을 신시(神市)라 불렀다. 이 때의 환웅을 배달(倍達) 환웅(桓雄)이라 한다. 그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악 등을 주관하고, 인간의 360가지나 되는 일을 주관하여 인간 세계를 다스려 교화시켰다.

이때, 곰(熊) 한 마리와 범(虎) 한 마리가 같은 굴에서 살았는데, 늘 신웅(神雄, 환웅)에게 사람되기를 빌었다. 때마침 신(神, 환웅)이 신령한 쑥 한 심지와 마늘 20개를 주면서 말했다.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 곰과 범은 이것을 받아서 먹었다. 곰(熊)은 몸을 삼간 지 21일(삼칠일)만에 여자(熊女)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범(虎)은 능히 삼가지 못했으므로 사람이 되지 못했다. 웅녀(熊女)는 그와 혼인할 상대가 없었으므로 항상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 배기를 축원했다.

환웅(桓雄)은 이에 임시로 변하여 그와 결혼해 주었더니, 그녀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름을 단군(檀君) 왕검(王儉)이라 하였다. 단군(檀君)은 요(堯)임금(B.C2,357~2,258년 재위)이 왕위에 오른 지 50년인 경인년에 송화강 아사달(하얼빈哈爾濱)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朝鮮)이라 불렀다. 또다시 도읍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 아침 해가 비치는 곳)로 옮겼다. 그는 1,500년 동안 여기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주(周)의 무왕(武王)이 왕위에 오른 기묘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매, 단군은 장당경 아사달로 옮겼다. 후에 숨어 산신(山神)이 되었는데, 그때 나이가 1,980세였다.』

단군신화는 다음의 네가지 측면에서 사대주의(事大主義)의 졸렬한 필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중국의 눈치를 보며 억지(抑止)춘향(春香) 격으로 중국에게 절하고 있는 모습이 후세(後世)에 이르러 부끄럽게 드러난다.

첫 번째, 환인(桓仁, B.C7,199년 제위)과 환웅(桓雄, B.C3,898년 제위) 및 단군(檀君, B.C2,333년 제위)의 역사 시간대(時間帶)를 싹둑 잘라서 난도질해 놓은 것이다. 『단군신화(檀君神話)』의 기록은 고려(高麗)의 승려 일연(一然)이 지은 삼국유사 (三國遺事)와 고려 고종 때의 이승휴(李承休, 1224~1301)가 지은 제왕운기(帝王韻紀) 등이 있는데, 삼국유사의 기록이 단군신화의 기록 중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등의 기록은 각각 “고기운(古記云)”, “본기왈(本紀曰)”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고기(古記)”가 전하는 내용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인용했던 “고기(古記)”가 지금은 전해지지 않으므로 어떠한 책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삼국유사”나 “제왕운기”가 쓰여졌던 고려시대에는 공식적으로 단군(檀君) 왕검(王儉)이 국조(國祖)로서 인정받지 못했고,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事大主義) 사관에 입각해서 기자(箕子)조선(朝鮮)의 기자를 국조(國祖)로 인정했던 때이다. 단군 왕검이 정식 국조(國祖)로 인정된 때는 조선시대에 이르러서 였다. 이것은 신라(新羅)가 중국 당(唐)나라의 군대를 끌여들여 축소(縮小)통일을 이룩한 것에 대한 댓가이기도 했다.

그래서, 사대주의(事大主義) 사관(史觀)이 고려(高麗)시대까지 이어진 것이다. 당대의 사대주의(事大主義) 사관(史觀)이라는 것은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수입하고 답습하며 조공을 바치는 입장에 있으므로, 우리나라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 보다 높게 서술하지 않는 법이었다. 그래서 역사의 기록을 중국의 입장에서 기록했던 것이다. 그래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단군 신화 기록에서 사대주의(事大主義)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를 중국 역사의 잣대에 맞추다 보니까, 환인(桓仁), 환웅(桓雄), 단군(檀君)의 역사 시간대를 크게 압축해서 중국의 요임금 시대의 인물로 갖다 맞추어 놓았다.

단군 신화는 배달민족(倍達民族)의 삼성조(三聖祖) 즉 “환인(桓仁, B.C7,199년 제위), 환웅(桓雄, B.C3,898년 제위), 단군(檀君, B.C2,333년 제위)”의 역사 시간대(時間帶)를 싹둑 잘라서 난도질해 놓은 것이다. 아무리 설화적 구성을 통해 표현해 냈다 하더라도, 환인(桓仁)의 아들이 3,301년 후의 환웅(桓雄)이 되고, 환웅(桓雄)의 아들이 1,565년 후의 단군(檀君)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환국(桓國, B.C7,199~3,898), 배달국(倍達國, B.C3,898~2,333), 고조선(古朝鮮, B.C2,333~238)의 장구한 고대의 역사가 단군신화에서는 몇 마디 구절에 의해 짧달막하게 축소되고 왜곡되어진 것이다.


8. 자주붓꽃 / 빈센트 반 고흐


1988년 5,300만 달러




두 번째, 단군신화의 끝부분에 나오는『단군(檀君)은 요(堯)임금(B.C2,357~2,258년 재위)이 왕위에 오른 지 50년인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의 부분을 보면, 역사의 시간이 잘못 계산되어져 있다. 단군(檀君)은 B.C2,333년에 제위에 올랐고, 중국의 요(堯)임금은 B.C 2,357년에 제위에 올랐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요(堯)임금이 왕위에 오른 지 24년 되던 해에 단군(檀君) 왕검은 고조선(古朝鮮)의 제위에 오른 것이다.

세 번째, 단군 신화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주(周)의 무왕(武王)이 왕위에 오른 기묘년(B.C 1,134년)에 기자(箕子)를 조선(고조선)에 책봉했다.』라는 부분은 시간대도 맞지 않을뿐더러, 사실을 거꾸로 뒤바꾸어 왜곡해 놓았다. 주(周)의 무왕(武王)은 중국 주(周)나라의 2대 임금이며, B.C 1,134년에서 B.C 1,116년까지 통치했던 인물이다. 기자조선(B.C323~194)은 서부 변방의 번한(番韓) 지역에 세워진 고조선의 속국(屬國)이며, B.C 323년에 세워진 고조선의 제후국이다.

주(周)의 무왕(武王, B.C1,134년~B.C1,116년 재위)과 기자조선(B.C323~194)의 기자(箕子)는 서로 시간대가 맞지 않는다. 그리고,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제후는 주(周)의 무왕(武王)이 책봉한 것이 아니라, 고조선의 단군 왕검이 서부변방의 번한(番韓) 지역에 책봉한 것이다. “기자(箕子) 동래설”은 B.C300~200년경에 중국인들이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조작해낸 것이다. 실제로 기자(箕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면, 황하 유역과 만주, 한반도 지역의 청동기 문화가 긴밀하게 관련되어야 하는데, 동북아시아의 청동기 문화는 비파형(琵琶形) 동검문화로 특징되고, 중국 황하유역의 것과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것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기후(箕후)”라는 사람은 B.C323년 기자조선(B.C323~194)의 우두머리가 된 사람인데, 그는 B.C 342년부터 이미 서부 변방에 있는 수유족(須臾族)의 우두머리가 되어 있었다. 그는 번한(番韓) 지역에서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수유족(須臾族)의 우두머리가 된 후, B.C323년, 수유족의 무력을 이용하여 번한(番韓) 지역을 모두 장악하였다. 기후(箕후)는 번한(番韓) 지역을 장악한 후, 스스로 왕으로 자칭하면서 동시에 고조선에게는 예를 갖추어 번한(番韓) 지역의 제후가 되었다.

이중적인 전략을 구사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족보 위의 40여대의 선조까지를 왕으로 추존(追尊)했다. 그리고 기후(箕후)가 추존하는 제일 위의 40대 선조가 “서우여(徐于餘)”였다. 그런데, “기자(箕子) 동래설”이 역사기록에 나오게 된 이유는 사대주의 사상이 강한 고려 때 가덕왕의 후손들이 기자조선 세계를 다시 만들면서 그 세계(世系)를 빛내기 위하여 수유족(須臾族)의 우두머리 명칭을 “서우여(徐于餘)”에서 중국에서 동래한 “기자(箕子)”로 이름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이 때의 기자(箕子)라는 사람은 원래 은(殷)나라의 신하로 있었는데, 주(周)나라가 은(殷)나라를 멸망(B.C 1,122년)시키자, 고조선으로 망명하여 고조선의 서부변방을 다스렸던 인물이다. 기자조선은 나중에 위만조선(衛滿朝鮮)에게 멸망되었다.

한편,『위만조선(衛滿朝鮮, B.C194~108)』은 서기전 195년에 위만이 중국 서한(西漢)으로부터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기자조선으로 망명하여 기자의 40여대 후손인 준(準)으로부터 정권을 빼앗아 나라를 세우고, 단군 조선과의 연합의 고리를 끊은 나라이다.

그런데, 중국의 일부 사서(史書)들은 단군조선(B.C2,333~238)이 기자조선(B.C323~194)과 위만조선(B.C194~108)으로 계승되었다고 거짓 기록하고 있다.『단군조선(檀君朝鮮, B.C2,333~238)』의 역사 시간대를 좁혀 놓는 범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기자조선(箕子朝鮮, B.C323~194)은 전국시대인 B.C323년에 고조선의 번한(番韓) 지역에 거주한 수유족(須臾族)의 우두머리 기후가 번한(番韓) 지역을 장악하여 고조선의 제후(諸侯)가 된 나라이다. 고조선이 멸망(B.C238)한 이후 기자조선(箕子朝鮮)은 위만(衛滿)에게 멸망(B.C.194)당하게 되며, 그 뒤 한수 남쪽에 후삼한(後三韓), 즉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이 존재하게 되었다.

그런데,『사기』,『관자』,『산해경』등의 중국 사서(史書)에서는 고조선(古朝鮮)의 존재시기와 영역을 완전히 왜곡해 놓았다. 그들은 우리 민족의 역사는 위만조선(衛滿朝鮮, B.C194~108)부터라고 했다. 고조선(古朝鮮)시대의 삼한(三韓)을 없애버리고, 고조선(古朝鮮) 멸망 이후의 후삼한(後三韓)을 내세웠다. 그럼으로써, 우리 역사의 시간대를 낮추었으며, 우리 역사의 무대를 한반도 영역 안으로 축소시켰던 것이다.

네 번째, 단군신화(檀君神話)에서는 배달국(倍達國)의 환웅(桓雄)이 웅족(雄族)과 호족(虎族)과의 민족 연합에 관한 엄연한 사실이 외래 종교와 사대주의(事大主義)에 찌들어 있던 당대의 역사 기록자에 의해 “곰과 호랑이의 인간으로 환생하기” 라는 유치하고 우매한 신화로 전락(轉落)되고 말았다.

더욱 엉뚱한 내용은 배달국(倍達國, B.C3,898~2,333)의 초대 배달 환웅이 웅족(熊族)의 웅녀와 결혼하여, 약 1,500년 후의 고조선(古朝鮮, B.C2,333~238)의 초대 단군 왕검을 낳았다는 차마 웃지 못할 내용이다. 어떻게 B.C3,898년에 제위에 오른 배달국 환웅(桓雄)이 약 1,500년 후의 고조선 단군(檀君, B.C2,333년 제위)을 아들로 둘 수 있겠는가 말이다. 요절복통(腰折腹痛)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대목이다. 모든 것이 사대주의(事大主義) 때문에 생긴 일이다. 사대주의(事大主義)를 해야만 했던 약소국(弱小國)의 시대적 상황이 역사를 왜곡시켜 놓은 것이다. 역사는 세월이 흐르면서 쉽게 왜곡된다. 그러나, 왜곡되는 역사를 바로 바로잡는 일은 마치 홍수가 나서 강물이 넘쳐 흐를 때 둑(embankment)을 쌓고 제방(dike)을 쌓는 것 만큼 중요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