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과 단군조선
* 목차 *
01. 단군조선이 불신받고 있는 이유는
02. 광복 후 단군조선이 다시 굴절된 것은
03. 고인돌을 단군조선의 유적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04. 일제의 '단군조선'을 비롯한 한국사 왜곡과 말살 실태에 대한 자료는
05. 단군조선의 왜곡과 말살을 위해
06. 올바른 '단군조선(고조선)'의 역사
07. 단군조선을 계승한 열국시대
08. 단군조선의 고토(故土) 수복을 위하여
09. '풍물(농악)'이나 '강강술래'는 단군조선 시대의 춤을 계승하고 있는 것
10. 단군조선을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분리하는 사람이 있는데
11. 우리 한민족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반도와 만주의 토착인들에 의해 건국되었다
12. 중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한국의 옛 이름이 지금도 그대로
13. 단군조선과 함께 잊혀지고, 빼앗긴 민족사의 한 장인 '발해"
14. 일본 왕실도서관에는 일제강점기 때 약탈해 간 '단군'관련 사서가
01.단군조선이 불신받고 있는 이유는
기독교(개신교)인들은 민족 구성원으로서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지고 처신해야 한국교회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라고 본다.최근 한국교회 일부는 단군조선에 대한 역사적 이해 없이 단군의 신격화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단군조선의 존재를 부정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윤내현 단국대 부총장 겸 사학과 교수의 ≪고조선 연구≫(일지사)와 서희건 현 조선일보80년사사(社史)편찬실장이〈주간조선〉에 1985년 10월 20일자부터 1986년 10월 26일자까지 총 51회에 걸쳐 '특별기획'으로 연재한「단군조선은 이렇게 말살됐다」(그 뒤 책으로 나옴-≪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전3권, 고려원)) 등을 읽어보지도 않은 채, 단군조선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것은 자칫 반민족 행위로 비칠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상고사(단군조선) 연구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한편 윤내현 교수와 같이 올바른 역사를 하는 이들한테 그 연구를 지원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도 단군조선이 불신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군조선과 단군조선을 건국한 국조 단군이 불신받고 있는 이유는 '신화'로 왜곡한 일제와 어용학자들의 공(?)이 크지만, 이에 못지 않게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미흡한 역사교육과 국조 단군을 종교화ㆍ신격화한 단체들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고 본다.1980년대 중반「단군성전」건립 때도 일부 기독교인들이 반발을 한 바 있는데 이것은 일부 기독교인들만의 책임이라고 볼 수 없다. 그리고 현재 기독교인들이 국조 단군을 역사적 주체로서가 아닌, 종교화ㆍ신격화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4332년 우리 역사 중 2300년 실사인 '단군조선'을 건국한 국조 단군을 종교화ㆍ신격화ㆍ사상화 하는 것에 대해 대다수 국민은 반대하리라 본다.국조 단군은 역사적 주체로서 우리 한민족의 공통된 시조이지 어느 단체나 개인에 의해 종교화ㆍ신격화ㆍ사상화 되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국조 단군을 종교화ㆍ신격화 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우리가 잘 아는 광개토대왕,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가깝게는 내 할아버지를 종교화ㆍ신격화 해서는 안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02.광복 후 단군조선이 다시 굴절된 것은
광복 후 한글 보급과 함께 서서히 부활되던 단군조선이 다시 굴절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1963년 국사교과서 내용을 통일하면서, 그리고 1974년 '국정국사교과서'부터 부정ㆍ축소되는 이변이 일어났다.1963년이면, 정인보(鄭寅普; 1892∼?)ㆍ안재홍(安在鴻; 1891∼1965)ㆍ손진태(孫晋泰; 1900∼?) 선생 등 올바른 '역사'를 하는 사학자들이 모두 납북된 뒤이고, 장도빈 선생 마저도 타계하신 해이다.
1963년 5월 문교부의 위촉을 받은 국사학자와 검인정국사교과서 집필자, 국사담당교사 등 28명이 12차례의 회의를 열고, "단군은 민족의 '신화'로 취급한다!, 삼국의 건국에서 삼국의 시조인 주몽ㆍ온조ㆍ박혁거세는 부족사회에서 다룬다!, 삼국이 고대국가로서 발전한 때는 고구려는 제6대 태조왕(재위; 53∼146), 백제는 제8대 고이왕(재위; 234∼286), 신라는 제17대 내물왕(재위; 356∼402) 때부터 또는 몇세기 부터라고 한다!" 등 이와 같은 결론을 내린 이후이다.
이런 결론은 일제가 '취사선택'한 사료를 바탕으로, 특히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바탕으로 단군조선을 비롯 '한국사'를 왜곡ㆍ말살하면서 (일제가) 내렸던 결정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5ㆍ16 군사 혁명정부가 민족사관을 강화하기 위해 검인정 국사교과서의 내용을 통일하도록 한 것인데 이와는 반대로 일제가 그랬던 것처럼, 단군조선을 비롯 삼국의 시조와 삼국의 초기 역사마저 '신화'로 왜곡하고 축출하는 결과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말이 5천년 역사이지 2천년도 채 못되는「머리없는 역사」로 전락시켜 버리고 말았다.이처럼 1910년 강점 전ㆍ후와 광복 후 '국사교과서 변천과정'은 바로 일제와 식민사학자들에 의한 단군조선 등 '한국사' 왜곡ㆍ말살실태를 체계적으로 증명하는 자료가 된다.
결국 정인보ㆍ안재홍ㆍ손진태 선생 등을 비롯 올바른 역사를 하는 사학자들이 6ㆍ25 때 납북된 영향이다. 이들이 6ㆍ25 때 납북만 안되었다면 일제와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말살된 '역사' 그대로 굳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손진태 선생은 서울대 문리과대학장에 재직 중 납북되고 말았다.보성전문ㆍ고려대의 초대 도서관장이었던 손 선생은 ≪조선민족사개론(朝鮮民族史槪論)≫과 ≪국사대요(國史大要)≫를 저술했다.
단국대 초대학장을 지내기도 한 장도빈(張道斌; 1888∼1963) 선생은 일제와 어용학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말살된 우리 '역사'를 복원하려고 애를 많이 썼다. 예리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일생을 항일구국항쟁과 역사연구에 몸바쳤던 장 선생은 참으로 애국자이셨다. 단국대 교가는 장도빈 선생께서 작사한 것이다. 장도빈 선생은 3ㆍ1항쟁 당시 경성여고(현 경기여고) 학생으로 3ㆍ1항쟁을 주도했던 김숙자(金淑姿) 여사와의 사이에 5남 1녀를 두었다. 장치혁(張致赫; 1932∼) 고합그룹 회장이 장도빈 선생의 4남이다. 독립운동가인 아버지 장 선생을 따라 만주와 시베리아를 떠돌았던 장 회장은 블라디보스토크 러시아 국립 극동대학에「한국학대학」을 설립하기도 했다.장치순(張致順; 1944∼) 중앙대 무역과 교수가 장도빈 선생의 5남이다. 장도빈 선생은 오산학교에도 재직했었는데 당시 한경직(韓景職; 1902∼) 목사의 역사 교사였다.
03.고인돌을 단군조선의 유적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반도 전역에 수만기가 산재해 있는 '고인돌(支石墓ㆍDolmen)'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시아 일원의 고인돌을 '단군조선'의 유적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지구상에 존재하는 7만여기의 고인돌 중 절반에 가까운 4만여기의 고인돌이 한반도에 집중해 있다. 남한에 3만여기, 북한에 1만여기가 분포하는 것으로 확인되지만 일부 학자들은 그 수를 7만∼8만기까지 늘려 잡기도 한다. 지난 30년 동안 무려 4만여개 고인돌이 파괴ㆍ훼손된 것으로 조사돼 있다.
국내 고고학자들은 "한반도의 고인돌 문화는 동아시아 거석문화권의 중심권"이라는 사실에 누구나 동의한다. 중국에서는 황해에 인접한 랴오닝(遼寧)ㆍ산둥(山東)ㆍ저장(折江)일대에서 350여기, 일본에서는 한반도와 인접한 규슈(九州)지역에 550여기의 고인돌이 발견됐지만 그 형태의 다양성이나 분포도에서 한반도에 크게 못 미친다.일본 오키나와제도 끝부분 미야고 섬의 고인돌은 우리나라 제주도식 고인돌과 흡사하다.한반도 고인돌의 마지막 단계를 보여주고 있는 제주지역 고유의 고인돌 연구가 지속된다면 역사적으로나 문화관광자원으로서 가치가 높을 것이다.한반도 전체의 고인돌 중 제주지역의 고인돌은 140기로 대부분의 보존상태는 무난한 편이지만 체계적인 관리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적어도 1000여기 이상은 제주지역에 산재해 있을 가능성이 많아, 이 부분에 대한 각계의 발굴·보존노력이 이어져야 한다.
이처럼 한반도에 고인돌이 집중돼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목포대 이영문(李榮文) 교수도 말했듯이, 아시아지역 고인돌의 중심분포지가 한반도이고, 형식도 북쪽에 북방식 고인돌이 많고 남쪽에 남방식이 많으며, 돌널무덤과 비슷한 개석식 고인돌이 중국 랴오닝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되는 점으로 보아 한반도에서 남ㆍ북방의 문화가 융합된 독자적인 고인돌문화가 형성됐을 가능성이 높다.결국 한반도 고인돌은 세계 거석문화의 발생, 분포 및 전파과정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한반도의 고인돌은 특히 밀집 분포도나 규모, 다양한 형식에서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국내학자들을 중심으로 세계20여개국이 참가한 세계거석(巨石)문화협회(총재 유인학(柳寅鶴; 1939∼ㆍ한양대 법대교수))가 결성되고 2000년에는 한국에서「세계 '고인돌'축제」가 열릴 예정이다.
학계와 정부ㆍ지자체가 공동으로 고창ㆍ화순 고인돌지역에 대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도 추진돼 왔다.세계 고인돌의 과반수 이상을 보유하고 있는 우리나라가 세계 고인돌의 보존 연구 활동의 메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고창과 화순의 고인돌 지구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신청 노력은 관광 측면에서 볼 때도 유익한 일이다. 프랑스는 브리타뉴 카르냑의 고인돌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연간 500만명 가량의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317번지에 위치한 북방식 고인돌(지석묘) 남한에서 가장 큰 북방식 고인돌로 덮개돌의 무게가 무려 50t에 달한다 1963년 사적 제137호로 지정됐다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에 위치한 북방식 고인돌
*전라북도 기념물49호 도산리 고인돌
일제의 '단군조선'을 비롯한 한국사 왜곡과 말살 실태에 대한 자료는
일제강점기 때 중국이나 일본 본토는 물론 심지어는 남양군도로까지 한국인을 학병, 징병, 강제노역(징용), 일본군 강제 위안부(정신대)로 강제 동원하였던 장본인이자, 특히 일제 지도층의 명령아래 2300년 실사인 '단군조선'을 비롯한 한국사 왜곡과 말살에 앞장섰던 장본인이 바로 조선총독들이다.≪조선총독10인≫이라는 책자에서도 잘 나와 있듯이, 현재 구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는 됐으나 일제 통치는 총독부 건물이 한 것이 아니라 조선총독 이하 일제 관리들이 장본인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은 일왕의 대리권자로서 한국(조선)의 제반통치행정을 책임지고 있었던 장본인이자, 우리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처단 제1호'의 인물이었다. 조선총독은 행정ㆍ입법ㆍ사법ㆍ군사통수권까지 장악한 채 한국을 포괄적으로 통치했는데 형식상 일본총리하에 있었으나 한국통치와 관련해서는 대부분 전권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 바로 조선총독이었다.
'단군조선을 비롯한 한국사 왜곡과 말살 실태'에 대한 자료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살펴보자.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위원회가 편찬한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를 비롯, ≪제헌국회사≫, 일제강점기 때 군수를 했던 문정창 씨의 ≪군국일본조선강점 36년사≫, 30여년 동안 '단군조선' 관계 사료를 수집ㆍ정리한 이상시(李相時; 1932∼) 변호사가〈조선일보〉1985년 10월 4일자 11면 머리기사로 폭로한「일제의 한국고사서 대량분서」의 기사와「일제의 한국상고사 말살실태와 단군실사」라는 (표제의) 논문집, ≪단군실사에 관한 고증연구―우리 상고사는 다시 씌어져야 한다≫등 저서에 잘 나와 있다. 이상시 변호사는 "검사시절의 수사경험을 살려 한국상고사에 관한 한-중-일 문헌을 철저하게 비교분석 했다"고 말했다.
특히 서희건(徐熙乾; 1944∼) 현 조선일보80년사사(社史)편찬실장이 주간조선에 1985년 10월 20일자부터 1986년 10월 26일자까지 총 51회에 걸쳐 '특별기획'으로 연재한「단군조선은 이렇게 말살됐다」와〈조선일보〉의 광복 41주년 '특별기획'으로 1986년 8월 15일부터 말일까지 11회 연재한「국사교과서 새로 써야한다」에 잘 나와 있다.
1985년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으로 있던 서희건 씨의 「단군조선은 이렇게 말살됐다」를 장기 연재 할 수 있도록 지면을 할애해 주고 격려를 해 준 분들이 안병훈(安秉勳; 1938∼) 현 조선일보 부사장(편집인), 조병철(曺秉喆; 1935∼) 전 주간조선 주간(전 조선일보 편집국장대우), 이남규(李南圭; 1936∼) 전 조선일보 편집부국장 겸 문화부장이다.
1910년 8월 29일 한국을 강탈한 일제는 1906년에 설치했던 통감부를 '조선총독부'로 바꾸고, 1910년 10월 1일 관보(官報)를 발행하기 시작했다.조선총독부 '관보'를 근거로 하면 일본 군부의 최고 권력자였고, 한국민의 민족운동을 압살했던 초대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취임하자, 1910년 11월부터 전국의 각 도ㆍ군ㆍ경찰서를 동원하여 1911년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계속된 제1차 전국 서적 색출에서 '단군조선' 관계 고사서 등 51종 20여만권의 사서를 수거ㆍ불태웠다고 광복 후 출간된 ≪제헌국회사≫와 문정창(文定昌) 씨의 저서인 ≪군국일본조선강점36년사≫는 밝히고 있다.
사료 수집기간과 얼마나 많은 우리 서적을 압수하고 불태웠을까.
사료 수집기간은 1910년 11월부터 ≪조선사≫ 완간 직전인 1937년까지 27년간 계속되었다.일제의 조선총독부가 단군조선 등 우리의 역사를 왜곡ㆍ말살하기 위해 마련한, 1938년 6월에 발행된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朝鮮史編修會事業槪要)≫에서는 1923년부터 1937년까지 15년동안 차입한 사료가 무려 4천 9백 50종이라고 밝히고 있다.
1910년 11월부터 1년 2개월 동안 수거된 서적이 51종에 20여만 권, 그 뒤 15년동안 차입한 사료가 4천 9백 50종이라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우리 서적을 압수하고, 불태웠는지 알 길이 없는 것이다.일제는 단군조선 등 한국사 관련 사료 등을 수집시 한반도는 물론 일본, 중국 및 만주에 있는 것도 수집하였다고 한다.일본의 사학자이면서 평론가인 하라타사카에루(原田榮)의 저서 ≪역사와 현대≫(1981년 4월 25일 발행)에 보면, "1923년 7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찬위원회 구로이타(黑板) 고문이 대마도에 사료탐방을 하였을 때 한국과 관계가 있는 문서, 고기록 등이 다수 대주구 번주(藩主ㆍ영주) 종백작가(宗伯爵家)에 있는 것을 알고, 고문서류 6만 6천 469매, 고기록류 3천 576책, 고지도 34매 등을 은폐 또는 분서(焚書)했다"고 밝히고 있다.
일제의 우리 고사서 인멸은 단군조선 등 한국사를 왜곡하고 말살하기 위한 전초작업이었던 것이다.조선총독부 취조국은 단군조선 등 한국사를 왜곡편찬하는데 필요한 일부 서적만 남기고 모두 불태웠다고 한다.현재 단군조선에 대해 논란이 되고 있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같은 사서 등을 중심으로 남겨 놓았을 것이다.무단정치로 악명이 높던 초대총독은 취조국이 관장하던 업무를 1915년 중추원으로 이관하고, '편찬과'를 설치하여「조선반도사」편찬을 담당시켰다.
새로운 '역사'를 만들려는 일제는 전국에서 압수ㆍ분서한 이외에 한국사 왜곡을 위해 '근거자료'로 일부 사서를 남겨놓고, 총독부 취조국에서 1915년 중추원 편찬과로 편사업무를 이전하기 앞서 이들 사료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왜곡편사계획'을 수립했음이 분명하다.이완용과 권중현 등을 고문으로 앉힌 조선총독부 중추원은 1916년 1월 중추원 참의와 부참의 15명에게 편사업무를 맡기고, 일본 동경제국대학 구로이다 가쓰미(黑板勝美) 박사와 일본 경도제국대학 미우라(三浦周行) 교수, 경도제대 이마니시(今西龍) 등 3인에게 지도ㆍ감독을 의뢰하였다.
≪조선사편수회사업개요≫ 4∼7면을 보면, 한국사료의 대량 분서와 한국사의 왜곡편찬 배경을 극명하게 입증해 주고 있다."…새로운 사서(즉 왜곡된 역사서)를 읽히는 것이 조선인에 대한 동화(同化)의 목적을 달성하는 첩경이며, 또한 그 효과도 현저할 것이다…. 이것이 조선반도사 편찬이 필요한 이유요, 또한 편찬사업의 근본정신이다."
조선총독부가 중추원을 앞세워 전국적으로 각 도청ㆍ군청ㆍ경찰서 등 위압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벌린 제2차 '사료수색'에서는 '역사'와 '전통문화예술', '인물' 등 압수범위도 오히려 늘어났다.헌병경찰제도로 무단통치를 강행했고, 단군조선 등 한국사를 말살시키는데 큰 공헌(?)을 했던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일본 내각 총리대신으로 전임하고, 그 뒤 3ㆍ1항쟁을 철저히 탄압했던 제2대 총독에 이어, 1919년 8월 12일 문화정치를 표방하고 부임한 제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교활하게도 한국사람을 반일본인으로 만드는 소위 '교육시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먼저 조선사람들의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선조와 선인들의 무위(無爲), 무능과 악행 등을 들추어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조선인 청소년들이 그 부조(父祖)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그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 그 결과 조선인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 때에 일본사적, 일본인물, 일본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일본이 조선인을 반(半)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라고 1922년 총독 사이토가 '조선사편수사업'을 지휘하며 말하기도 했다.
05.단군조선의 왜곡과 말살을 위해
1920년대 일제의 정책은 수탈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우리민족을 분열시키고, '역사'를 단절시키는 수준에까지 나갔다. 일본은 '자생왕조'라는 허구의 합리화 이외에도, 당시 3ㆍ1항쟁으로 고조된 한국인의 독립의식을 희석시킬 고차원의 식민지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더욱이 '역사' 왜곡을 자행했다.한국인의 '역사의식'을 흐리게 하여 장기적인 식민지화의 포석을 굳히는데 있어서, 무력으로 한국을 병탄한 일제는 군사적ㆍ경제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역사적ㆍ문화적 측면'에 있어서도 일본이 한반도 지역보다 우위에 있었음을 조작, 교육하는 일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일제는 그 시책의 하나로서 1922년 12월 훈령(訓令) 제64호 '조선사편찬위원회' 규정을 제정, 공포하여 새롭게「조선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하고,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주요인물을 중심으로 한 15명의 위원회를 조직하였다.그러나 이완용, 권중현 등 부일역적들과 일본인 어용학자들이 합작한「조선사편찬사업」이 정인보(鄭寅普) 선생 등 한국인 학자들의 외면으로 조선사편찬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자 조선총독부 총독인 사이토는 '조선사편찬위원회'를 확대ㆍ개편하였다.명칭을「조선사편수회」로 바꾸고, 일왕(日王)의 칙령으로 설치근거의 격을 높였다. 1925년 6월에는 '일왕칙령' 제218호로 '조선사편수회' 관제를 제정ㆍ공포하고 조선총독부 총독이 직할하는 '독립관청'으로 승격시켰다.
관제(官制)를 새로 제정한 다음달인 1925년 7월 개편한 조선사편수회의 참여인물들을 보면, 일제가 얼마나 단군조선 등 한국사 왜곡편찬에 심혈을 기울였는가를 알 수 있다.조선사편수회 고문에 부일역적들인 이완용, 권중현을 다시 앉히고 박영효, 이윤용, 일본인 거물들과 어용학자들을 위촉하였다. 또한 이 편수회의 위원장급 회장들로는 현직 정무총감들이 맡아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일본인들을 참여시켰다.
1910년 11월부터 1937년까지 무려 27년간의 사료수집 기간을 제외한 35권의《조선사》편찬기간만도 1922년 12월 '조선사편찬위원회' 설치때부터 1938년 3월 완료되기까지 만 16년이 걸렸다. 이 사업을 위해 일제가 쓴 예산만도 엄청났다.일제가 본격적으로 그들의 역사보다 2천년이나 앞서있는 '단군조선' 등 우리의 역사를 왜곡ㆍ말살시키기 위해 '일왕칙령'으로 설치근거의 격을 높이고, 조선총독부 총독이 직할하는 '독립관청'으로 승격시킨「조선사편수회」에서 '단군조선'을 '신화'로 왜곡하고 말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장본인이 바로 일본인 이마니시(今西龍)이다.
이마니시는 ≪조선사≫ 편찬의 주역으로 '단군조선' 등 한국사 왜곡 업무에 조선사 편찬 초기부터 16년 2개월 동안 앞장서 관여해 왔다.그는 1921년 ≪단군고(檀君考)≫라는 '단군신화설'을 만들어 그의 모교인 경도제국대학에「조선고사의 연구(朝鮮古史の硏究)」라는 논문을 제출 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1916년 1월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 때는 새로 편찬할 한국사의 시대구분을「상고ㆍ삼한(上古ㆍ三韓)」, 즉 '단군조선'을 집어넣기로 결의 했으나, 7년 후인 1923년 1월 8일 조선사편찬위원회 제1차 위원회에서는「상고ㆍ삼한(上古ㆍ三韓)」을 단순히「삼국이전」이라는 한편으로 축소하여 놓고, 1925년 10월 8일 조선사편수회 제1차 위원회에서는「삼국이전」과「삼국시대」를 줄여「신라통일이전」이란 한편으로 하였다. 이처럼 일제는 '단군조선'을 없애려고 편찬기구의 개편 때 마다 상한선을 아래로만 끌어내렸다.
일제는《조선사》가 공명정대한 학술적 사서(史書)라는 것을 강조하였는데 이것을 가시적으로 보장해 주는 편찬체제가 바로 '편년체'였다.당시 사학계에 풍미되었던 실증사학을 보장해 주는 듯이 간주되었던 것이 편년체였는데 이것의 근본목적은 <'취사선택'하여 남긴 사서에서 이 사서들을 기준으로> 연도가 정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단군조선'을 사서에서 제외시켜 버리려는데 있었다.또한 이 연장선에서 단군조선을 계승한 부여 등 열국시대를 말살시키려 했던 데도 그 일단의 목적을 두었다.
단군조선의 왜곡과 말살을 위해 특히 한민족의 기원과 관련되는 사서들을 수집했던 일제는 단지 고려시대 중엽과 말엽의 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1145년 편찬)와 ≪삼국유사(三國遺事)≫(1285년 편찬) 등 '취사선택'하여 이와 같은 사서들만 남겨놓고, 그 이전의 사서들은 불태우거나 빼돌림으로서 그 의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그러나 무엇보다 단군조선 등 삼국이전을 제대로 기록하지 않은 ≪삼국사기≫와 단군조선을 불교신화로 각색한 ≪삼국유사≫는 이유야 어찌됐든, 결국 이 두 사서는 일제가 '단군조선'을 부정 4332년 우리 역사 중 2300년 역사를 말살시키는데 활용할 수 있는 '근거'를 일제에 제시해 주는 결과를 초래한 셈이다.
일제는 '취사선택'하여 남긴, 즉 단군조선을 제대로 언급하지 않은 ≪삼국사기≫를 한국상고사의 기본사료로 못박아 단군조선을 말살, '한국사'를 2천년 역사로 축소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단군조선을 불교신화로 각색한 ≪삼국유사≫의 기록은 사설(史設)로 규제해 버림으로써 단군조선을 '신화'로 왜곡처리하는 데 성공하였다.
단군조선을 비롯 우리 역사가 왜곡 말살된 이유는 많은 전란을 겪으면서 사료들의 소실과 새왕조가 역사에 등장할 때마다 전(前)왕조의 업적을 강등하고 파괴시킨 자괴행위, 중국을 위하는 사대사관이 낳은 역사왜곡 등이 있다. 그러나 특히 일제강점기 때 우리 역사를 왜곡ㆍ말살하여 교육하는, 즉 우리민족의 말살정책사관인 '식민사관'에 의한 철저한 역사왜곡이 그 근본이유이다.
06.올바른 '단군조선(고조선)'의 역사
한 시대의 역사를 바로 알기 위해서는 그러한 역사가 이루어지도록 만든 앞선 시대의 역사에 대한 바른 인식을 필요로 한다. 이 점은 우리가 잘알고 있는 고구려와 광개토대왕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인데 그 바른 인식을 위해서는 그보다 앞선 우리민족의 건국사인 '단군조선'에 대한 바른 인식이 필수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일반적으로 고구려라고 하면 ≪삼국사기≫에 기록된 서기전 37년에 건국되어 가야ㆍ백제ㆍ신라 등과 같은 시대에 존재했던 고구려를 말한다.
그러나 '고구려(高句麗)'라는 명칭은 이 고구려가 건국되기 훨씬전인 서기전 12세기 이전부터 요서지역에 존재했던 '단군조선'의 거수국(渠帥國, 중국에서는 제후국이라 부름)이었고, 그 위치는 후대의 고구려와는 달리 중국의 수도인 북경(北京, 베이징)에서 가까운 지금의 난하 유역에 있었다.이 두 고구려는 그들의 존재시기와 지리적 위치는 달랐으면서도 동일한 명칭을 사용하였는데 서기전 12세기는 단군조선 중기이고, 서기전 37년은 단군조선이 붕괴한 후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의 건국이 서기전 37년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중국의 옛 문헌에는 그보다 이른 시기부터 고구려가 존재했던 것으로 나타난다.주(周)나라의 역사서인 ≪일주서(逸周書)≫에는 서주(西周)가 성주(成周, 지금의 낙양(洛陽))에서 개최한 성주대회에 고구려가 참석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대회에는 서주가 건국된 후 제(齊)에 봉해졌던 태공 망(望)도 참석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망은 주족(周族)이 상(商, 은(殷))나라를 칠 때에 선봉장으로서 큰 공로를 세웠던 인물이다. 망(望)이 참석했던 것으로 보아 성주대회는 서주 초인 서기전 12∼11세기 경에 개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서기전 12세기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단군조선은 얼마나 많은 거수국을 거느리고 있었을까.
단군조선은 부여(扶餘)ㆍ고구려(高句麗)ㆍ고죽(孤竹)ㆍ예(濊)ㆍ맥(貊)ㆍ추(追)ㆍ진번(眞番)ㆍ낙랑(樂浪)ㆍ임둔(臨屯)ㆍ 현도ㆍ숙신(肅愼)ㆍ청구(靑丘)ㆍ양이(良夷)ㆍ양주(楊州)ㆍ발(發)ㆍ유(兪)ㆍ옥저(沃沮)ㆍ기자조선(箕子朝鮮)ㆍ 진(辰)ㆍ비류(沸流)ㆍ행인(荇人)ㆍ해두(海頭)ㆍ개마(蓋馬)ㆍ구다(句茶)ㆍ조나(藻那)ㆍ주나(朱那)ㆍ한(韓, 삼한(三韓)) 등의 거수국(제후국)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 가운데 부여ㆍ고구려ㆍ고죽ㆍ예ㆍ맥ㆍ추ㆍ진번ㆍ낙랑ㆍ임둔ㆍ현도ㆍ숙신ㆍ청구ㆍ양이ㆍ양주ㆍ발ㆍ유ㆍ옥저ㆍ기자조선 등은 지금의 요서지역에, 진ㆍ비류ㆍ행인ㆍ해두ㆍ개마ㆍ구다ㆍ조나ㆍ주나ㆍ한 등은 지금의 '요하(遼河)'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에 자리하고 있었다.실제로는 이 보다 훨씬 많은 거수국이 있었겠지만 역사에 남을 만한 사건과 관련을 갖지 못한 거수국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확인할 길이 없다.
단군조선의 강역에 대해 알아보자.
단군조선의 강역은 서쪽으로는 중국 북경 근처에 있는 난하로부터 북쪽은 어르구나하(額爾古納河), 동북쪽은 지금의 흑룡강을 국경으로한, 즉 한반도와 내몽골 자치구 동부와 재중동포들이 살고 있는 동북3성(흑룡강성ㆍ길림성ㆍ요령성)을 비롯한 만주 전 지역을 차지하고, 때로는 재러동포들이 살고있는 연해주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던 대국(서기전 16세기부터 단군조선 말기까지 대체로 이러한 강역이 유지됨)이었다.
단군조선은 2300년간 실재했던 동북아 최강국가였으며, 중국의 최초국가인 하(夏)나라보다 1백여년 앞선 나라였다.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을 그 통치영역으로 한 단군조선의 존속기간에 중국에서는 하(夏)ㆍ상(商, 은(殷))ㆍ서주(西周)ㆍ춘추(春秋)ㆍ전국(戰國)ㆍ진제국(秦帝國)을 거쳐 서한제국(西漢帝國)이라는 왕조와 시대의 변화가 있었고, 일본에서는 단군조선 말기(서기전 3세기 이후)의 영향을 받은 야요이(彌生)문화가 있었다.
단군조선의 국력은 어떠했을까.
단군조선은 중국 전국(戰國)시대 연(燕)나라(서기전 323∼222)와의 전쟁에서 일시침공을 받았으나 그것을 격퇴하고, 오히려 연나라의 동부의 땅을 빼앗아 침략에 대한 응징을 하였고, 서한제국은 단군조선과의 국경을 지키지 못해 뒤로 물린 바 있다.이러한 사실은 단군조선의 강한 국력(군사력)을 알게 해 주는 것이며 이러한 국력은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경제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단군' 한 사람이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을까.
'단군'은 군주(君主)를 뜻하는 말로서 오늘날의 대통령이라는 칭호와 비슷한, 단군조선을 통치했던 최고 통치자에 대한 칭호로서 단군조선 시대에는 수십명의 단군이 있었으며, 단군은 각 지역의 거수(渠帥)들만을 통솔하고, 각 거수국(渠帥國)의 주민들은 거수들에게 위임통치하였다.각 지역의 거수들은 '단군'에게 일정한 의무를 이행하면서 단군을 그들의 공주(共主)로 받들었던 것이다.
해모수는 우리말의 해머슴아가 한자화된 것으로 '단군'에 대한 다른 칭호였다.단군조선인들은 '단군'을 최고 지도자로하여 하느님을 믿는 동일한 종교를 가지고 있었고, 동일한 언어와 풍습을 가지고, 동일한 정치체제와 경제상황속에서 생활하였다.
이처럼 단군조선은 강력한 왕권을 갖추고 중국과 맞선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가이며, 그 중심지는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중국 북경 동쪽이었다.
07.단군조선을 계승한 열국시대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한사군은 어디에 위치해 있었을까.
단군조선의 서부변경인, 지금의 중국 북경 가까이에 있는 난하( 河) 동부유역에는 일찍이 서기전 12세기경에 기자 일족이 서주(西周)로부터 망명하여 자리를 잡고 기자조선(箕子朝鮮)이라는 단군조선의 거수국(제후국)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서기전 195년에 위만(衛滿)이 중국 서한(西漢)으로부터 기자조선으로 망명하여 기자의 40여대 후손인 준(準)으로부터 정권을 빼앗아 위만조선(衛滿朝鮮)을 건국하였다. 그리고 서한의 외신(外臣)이 되어 지금의 대릉하(大凌河)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렇게 되자 지금의 요서지역에 있던 단군조선의 거수국들은 그들의 영토를 잃게 되었고, 이런 와중에 요서지역에 있었던 거수국들의 지배층과 주민 일부는 동쪽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곳에 정착지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 뒤 요서지역에서는 또 한번의 큰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한사군(漢四郡)의 설치였는데 중국의 서한(西漢) 무제는 서기전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지금의 요서지역을 서한의 행정구역으로 편입시켜 그곳에「낙랑(樂浪)ㆍ임둔ㆍ진번ㆍ현도(玄 )」4개의 군(郡)을 설치했다
*위만조선과 한사군 위치도
이 때문에 단군조선의 서부영토였던 지금의 요서지역이 서한의 영토가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아직까지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일부 단군조선인들은 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이렇게 두번에 걸쳐 동쪽으로 이동한 사람들은 지금의 요하(遼河) 동쪽의 만주와 연해주, 한반도에 자리를 잡고 정치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그 뒤 단군조선이 통치능력을 잃게되자 그들은 독립국이 되었다.
동부여(∼494)ㆍ고구려(지금의 요동과 평안북도 지역ㆍ∼668)ㆍ읍루(연해주 지역ㆍ∼6년 이전)ㆍ동옥저(함경도 지역ㆍ∼56년)ㆍ최씨낙랑국(평안남도 지역ㆍ∼300년)ㆍ동예(강원도 지역ㆍ∼245년 이전)ㆍ대방국(황해도 지역ㆍ∼300년)ㆍ한(삼한)(∼300년경)ㆍ가야(∼562년)ㆍ신라(∼935년)ㆍ백제(∼661년) 등이 그런 나라들이다.
이렇게 해서 열국시대(서기전 1∼5세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처럼 단군조선이 붕괴된 후 사국시대(가야ㆍ고구려ㆍ백제ㆍ신라)로 정립되기 전까지 한반도와 만주에는 여러 정치집단이 있었다.그런데 기존 연구는 이 집단들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고 위만조선이나 한사군 등을 통해 중국이 한반도를 지배했던 것처럼 잘못 평가해왔던 것이다.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고 단군조선을 계승한 부여(扶餘)가 위치해 있던 지역이 어디였을까.
부여는 원래 중국 북경 근처에 있는 지금의 난하 북부유역에 있었다. 난하 동부유역에 위만조선이 건국되자, 다소 북쪽으로 이동하여 '북부여'라 불리게 되었다.그런데 서한(西漢)에 의해 위만조선이 멸망되고, 그 지역이 서한의 영토가 되자, 동으로 이동해 지금의 중국 길림성 북부에 도읍하고 내몽골자치구 동부와 흑룡강성 전부를 영토로하여 이를 부여 또는 '동부여'라 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동부여)를 북부여로 인식하는데 그것은 단군조선 거수국이었던 북부여가 난하 상류 유역에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 잘못이다.이 시기에 지금의 요하 서쪽과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에는 동일한 명칭이 병존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서한은 지금의 요서지역에 군현을 설치하면서 대부분 단군조선에서 사용했던 지명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낙랑군, 임둔군, 진번군, 현도군, 고구려현, 옥저 등과 후에 낙랑군에서 분리된 대방군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이 지역에서 동쪽으로 이동한 단군조선인들이 세운 최씨낙랑, 고구려, 동옥저, 대방국 등의 나라가 요하(遼河)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에 등장하게 되었다.지금도 이를 혼동하여 만주와 한반도에 있었던 이러한 국명들을 중국의 군현 명칭으로 해석해 중국의 군현이 만주와 한반도까지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예컨데 요서지역에는 고구려현이 있었고, 요동지역에는 고구려국이 존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이 원래 거주했던 곳과 새로 나라를 세운 곳에서 동일한 명칭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08.단군조선의 고토(故土) 수복을 위하여
서기전 37년에 요동에 세워진 고구려국이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고구려이다. 이 나라는 추모왕(鄒牟王), 즉 주몽과 그 집단에 의해서 건국되었는데 이들이 고구려라는 국명을 사용한 것은 추모왕(주몽)을 포함한 건국 주도세력이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던 옛 고구려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단군조선은 후기에 단군의 후손을 각 지역의 거수(渠帥)로 봉하여 혈연조직을 강화한 바 있는데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던 고구려도 그 때 거수가 단군의 후손으로 바뀌었다. 그러므로 추모왕은 고구려 거수의 후손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서기전 37년에 추모왕에 의해서 지금의 요동에 세운 고구려는 북경에서 가까운 난하 동부유역에 자리하고 있었던, 단군조선의 거수국 가운데 하나인 옛 고구려(高句麗)를 계승한 나라인 것이다.
고구려가 지금의 요동에서 재건된 후 어떻게, 어떤 의지를 가지고 영토를 확장했을까.
우선 주변에 있는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던 비류ㆍ행인ㆍ해두ㆍ개마ㆍ구다ㆍ조나ㆍ주나 등의 나라를 병합하였다. 그리고 고구려는 건국 후 오래지 않아 지금의 요서지역에 진출하여 그 후 계속해서 중국 북경근처의 난하 유역에서 중국과 전쟁을 하였다. 이렇게 줄기차게 지금의 요서 서부로 진출하던 고구려는 미천왕 때인 서기 313년부터 315년 사이에는 난하 동쪽에 있었던 한사군을 난하 서쪽으로 축출하고, 지금의 요서지역을 완전히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의 '요서지역'은 원래 단군조선의 영토였고,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던 고구려도 원래는 이 지역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요서 진출은 단군조선의 고토 수복이었으며, 동시에 자신들의 고토 수복이었던 것이다.
고구려가 지금의 요서지역에 진출하던 시기에 백제는 어떤 활동을 하였을까.
그 시기에 바다를 건너 지금의 중국 북경과 톈진(天津) 지역에 진출하여 그 세력을 남쪽으로 확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고구려와 백제의 활동은 단순히 영토를 확장하기 위한 전쟁만은 아니었고, 단군조선의 고토 수복과 중국의 단군조선 침공에 대한 응징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특히 고구려의 소망은 광개토대왕에 이르러 그 위광이 중국 북부는 물론 몽고의 동부와 연해주까지 미침으로써 일단 성취되었다.
1995년 SBS에서 광복 50주년 기념으로 다큐멘터리 6부작으로 최인호(崔仁浩; 1945∼) 씨의 '고구려, 그 중에서도 광개토대왕의 영광에 관한 역사물'인「왕도(王都)의 비밀」을 제작ㆍ방영했는데〈제4부 정복의 길〉에서 표현했듯이, 광개토대왕의 영토확장은 단군조선의 영토 수복에 그 목표가 있었다.광개토대왕의 요서 진출은 단군조선과 그 거수국인 옛 고구려의 단순한 영토 수복에만 목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군조선에서 추구했던 천하질서를 실현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09.'풍물(농악)'이나 '강강술래'는 단군조선 시대의 춤을 계승하고 있는 것
단군조선의 후계세력인 동부여ㆍ고구려ㆍ한 등에는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어 추는 춤이 있었다. 이러한 춤들은 단군조선의 춤을 계승한 것들이다.우리의 전통명절인 설날과 정월대보름을 맞아 전국서 정통농악과 강강술래 등 민속놀이를 비롯 세시풍속들이 펼쳐져 국민들에게 큰 호응을 받는데 오늘날의 '풍물(농악)'이나 '강강술래'는 바로 단군조선시대의 춤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음력설'은 우리민족이 역사이래 줄곧 지켰던 순수한 '우리 설날'이다.
단군조선은 한국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국가이자, 우리민족도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그런데 왜곡ㆍ말살로 인해 우리는 이러한 한국사의 실질적인 출발점이며, 한민족 '사회와 문화'의 원형을 지니고 있는 단군조선에 대한 연구가 그간 충분하게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한국사' 전체를 인식하는데 있어서 많은 문제가 있었다. 상식적으로 우리가 잘 아는 고구려ㆍ백제ㆍ신라ㆍ가야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는 않았을 거 아닌가?
한민족 '역사의 뿌리'와 '문화의 원형'은 우리민족의 건국사인 '단군조선'에 있으므로 그것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한민족의 정체(正體)를 바르게 인식할 수 없다.단군조선에 대한 이해 없이는 우리민족 본래의 모습을 알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변화를 거쳐 오늘의 모습에 이르렀는지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단군조선'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윤내현 교수한테 문의하고, '한국사 왜곡과 말살실태'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일본인들의 역사왜곡과 그에 동조한 국내학자들을 비판한 논문」을 쓰고, 정년퇴직한 이후로도 집요하게 '한ㆍ일관계사'를 추적해온 최재석(崔在錫; 1926∼) 고려대 명예교수와 서희건 조선일보80년사사(社史)편찬실장에게 문의하면 될 것이다.
윤내현 교수는 그 누구보다 민족에 대한 사명감으로 올바른 우리 '역사' 연구를 하는 분이다.모든 역사는 '사료'가 바탕이 돼야 한다. 윤내현 교수는 본래 중국 고대사가 전공이다. 따라서 그는 중국 사료들을 두루 섭렵할 수 있었다. 한민족 관련 기록이 있는 ≪후한서≫, ≪삼국지≫, ≪진서≫, ≪송서≫, ≪남제서≫ 등 방대한 중국 사료 및 고고학 자료, 우리 고대사 자료 등을 비교, 분석한 인물이다.
최재석 고려대 명예교수와 서희건 조선일보80년사사편찬실장도「한국사 바로잡기」에 있어서 그 누구보다 열성을 보이는 인물들이다.
단군조선이 언급된 중국문헌으로는 어떤 사서가 있을까.
≪사기(史記)≫, ≪한서(漢書)≫, ≪관자(管子)≫ 등 중국문헌에는 단군조선(고조선)이 많이 언급됐는데 특히 단군조선과의 전쟁, 국경문제, 교역을 한 내용 등이 많이 나와 있다. 조선일보사에서 발행한〈월간조선〉1998년도 1월호 뒷부분에 보면 40페이지에 걸쳐 '단군조선' 등 우리의 역사 범위가 일본, 만주는 물론이고 중국의 상당부분까지 미치고 있었음을, 그리고 황해와 동해, 남중국해를 주름잡던 선조들의 기상을 보여주고 있다.
10.단군조선을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분리하는 사람이 있는데
'단군조선'을 단군조선과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 분리 "단군조선은 서기전 2333년에서 서기전 1122년까지이고, 기자(箕子)조선은 서기전 1122년에서 서기전 194년까지, 위만(衛滿)조선은 서기전 194년부터 한무제에 의해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되는 서기전 108년까지 존속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단군조선은 2300여년간 지속된 강대한 광역국가였고, '기자조선'은 단군조선의 수많은 거수국(제후국) 중에 하나로서, 단군조선의 서부 변경인 중국 북경에서 가까운 난하 동부 유역에 서기전 12세기경(서기전 1122년경)에 기자일족이 서주(西周)로부터 망명하여 자리를 잡고 단군조선의 거수국이 된 것이 기자조선이다.
'위만조선'은 서기전 195년에 위만이 중국 서한(西漢)으로부터 단군조선의 거수국인 기자조선으로 망명하여 기자의 40여대 후손인 준(準)으로부터 정권을 빼앗아 나라를 세우고 단군조선의 거수국이 아닌, 서한의 외신(外臣)이 된 것이 위만조선이다.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이 단군조선을 계승했다, 즉 단군조선 ― 기자조선 ― 위만조선으로 계승되었다"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역사인식이다.
단군조선의 뒤를 이어 위만조선이 건국되고 그 뒤를 이어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서술된, "서기전 194년에 위만이 단군조선의 왕이 되고, 서기전 108년에 단군조선이 멸망하고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는 현행 국사체계는 사실과 전혀 다른 크게 잘못된 것이다.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낙랑ㆍ임둔ㆍ진번ㆍ현도의 4개군(郡))은 한반도에 있지 않았고, 당시 단군조선의 서부 변경이었던 중국 북경에서 가까운 난하( 河) 동부유역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우리 역사의 주류일 수 가 없고, 단군조선의 변방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우리 역사의 주류는 2300년 실사인 단군조선으로부터 단군조선을 계승한 동부여ㆍ고구려ㆍ읍루(이전의 숙신)ㆍ동옥저ㆍ최씨낙랑국ㆍ동예ㆍ대방국ㆍ한(韓, 삼한) 등의 열국시대로 이어지는 것으로 체계화되어야 한다. 이들은 원래 단군조선의 거수국이었는데 단군조선이 붕괴되자 독립국이 된 것으로 이 가운데 고구려가 북방을 통합하고, 남방은 가야ㆍ백제ㆍ신라로 분열되어 사국시대가 되었던 것이다.
한민족의 고대사를 단군조선 → 위만조선 → 한사군으로 설정한 체계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위만은 중국에서 망명한 자이고, 한사군은 중국의 행정구역일 뿐이다.
요동지역에서 고구려가 서기전 37년에 건국됐는데 한사군이 종말을 고한 것은 서기 313년이다. 기존 연구의 주장대로라면 우리가 단군조선 멸망 후 5백여 년간 중국 지배 아래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또한 같은 요동지역에 고구려와 한사군이 동시에 존재했다는 모순이 생긴다.한나라 무제가 멸망시켰다는 위만조선은 평양지역이 아니라 북경 근처 난하유역이었다. 위만조선이나 한사군은 알려진 것과는 달리 요동지역이 아닌, 요서지역에 있었던 것이다.한민족은 위만조선이나 한사군과는 별도로 요동지역과 한반도에서 단군조선을 계승한 고구려 등 열국시대를 거치면서 민족의 재통합과 독자적인 역사를 전개해온 것이다.
11.우리 한민족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반도와 만주의 토착인들에 의해 건국되었다
근래의 고고학 발굴과 그 연구 결과에 의하면 단군조선 지역의 신석기시대 개시는 다른 지역보다 늦지 않았으며, 청동기문화 개시 연대는 황하(黃河)유역이나 시베리아지역 보다 앞선 것으로 나타난다. 지난날에는 단군조선 영토였던 한반도와 만주지역은 중국의 황하유역이나, 시베리아지역보다 문화의 발전이 늦을 것으로 믿어왔다.지금까지 확인된「청동기문화」연대 가운데 가장 이른 것을 보면, 한반도에서는 전남 영암군 장천리의 청동기시대 유적(주거지 유적)과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의 청동기시대 유적(고인돌 무덤)에서 서기전 2500년경으로, 만주(요녕성)에서는 하가점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에서 서기전 2410년경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중국 황하유역의 이리두문화(二里頭文化)에서는 서기전 2200년경으로, 시베리아에서 가장 앞선 청동기문화인 미누신스크문화는 서기전 1700년경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단군조선 영토였던 한반도와 만주의 청동기문화 개시연대가 중국의 황하유역이나 시베리아지역보다 앞선다는 것이다.근래의 고고학 자료들을 통해 볼 때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한민족은 외부로부터의 이주민에 의해서 형성되었다"거나, "그 주체가 예ㆍ맥족(濊ㆍ貊族)이었을 것이다"는 등의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우리 한민족은 외부로부터 이주민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반도와 만주의 토착인들에 의해 건국되었다. 그리고 예ㆍ맥이라는 것은 단군조선의 수많은 거수국(제후국) 중에 하나이다.
일제는 단군조선을 말살하기 위하여 한반도에는 청동기 유물조차 없다고 부인했다. 또한 우리문화의 기원을「시베리아 → 연해주 → 한반도」로 이어지는「전파설」을 주장했다. 그런데 지금도 이렇게 교육되어지고 있다.
임효재(任孝宰; 1941∼)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전 한국고고학회 회장)가 발굴한 8천년(서기전 6천년경)된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유적(주거지 유적) 등을 보면 우리 선조들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고유문화를 형성한 후, 전파문화를 흡수했음이 분명하다(흑요석제 석기는 백두산이 원산지임). 오산리유적은 지금까지 알려진 시베리아 신석기 유적보다 2천년이상이나 앞서는데 현재까지도 일제의 잔재로 남아있는 '한민족의 기원'은 물론, '문화전파설'은 하루 빨리 수정돼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단군조선시대에 해당하는 이른 시기의 청동기 유적이 발견되지 않음으로 해서 청동기문화의 전개연대를 서기전 1000년경으로 못박아 단군조선 중기나 말기에 이르러 비로소 청동기 시대에 접어들었다거나, 특히 단군조선을 단군조선 ― 기자조선 ― 위만조선으로 분리, 이를 바탕으로 아예 단군조선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까지 있었다.
현행 국사교과서를 보게 되면
단군조선 건국: 서기전(BC) 2333년
청동기 시대: 서기전 1000년~1300년(?)
이라고 되어있다.
또한 철기문화의 보급연대를 단군조선 후기인 서기전 300년경으로 잡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윤내현 교수의 ≪고조선 연구≫에서도 잘 나와있듯이, 최근 발굴된 자료들에 의하면 철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서기전 800년경부터였고, 서기전 300년경부터는 강철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단군조선인들이 청동과 철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세계 역사상에서도 매우 이를 뿐만 아니라, 그 기술수준도 매우 높았다.
단군조선은 전기와 중기의 청동기시대로부터 후기는 초기 철기시대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단군조선의 영토였던 한반도와 만주에서 발견된, 그리고 앞으로 발견될 이 기간의 청동기와 초기 철기의 유적과 유물은 모두 단군조선의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대 최고의 희귀 장신구인 '유리'가 단군조선시대인 서기전 5세기 무렵에 우리나라에서 제작ㆍ사용됐음이 밝혀져 학계의 관심을 모았다. 동아일보 1997년 4월 12일자 29면에서도 잘 나와있듯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최 주(崔 炷: 65ㆍ책임연구원) 박사팀은 1995년 충남 보령시 미산면 평라리 유적지에서 발견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유리구슬에 대해 성분분석을 한 결과, 이 구슬이 서기전 5세기쯤 한반도에서 나는 납을 혼합해 제작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그간 학계에서는 우리나라의 유리문화가 초기 철기문화와 함께 서기전 2세기 무렵 중국에서 유입됐다고 밝혔었다.
이 유리구슬은 바륨(Ba)이 섞여 있는 중국계통의 유리와는 달리 바륨이 들어있지 않는 등 독창적인 방법으로 제작된 것이어서 이 땅에 일찍이 유리문화가 뿌리 내렸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증거이다.성분분석 결과 유리구슬에 산화납(pbo)이 1.7% 함유되어 있음이 증명됐는데 산화납은 낮은 온도에서 유리를 만들 수 있게 하면서 유리의 내구성을 높여주는 첨가물질로, 따라서 산화납의 존재는 유리제조 기술이 매우 앞서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서기전 5세기경의 유리구슬에서도 산화납은 발견되지 않았다.
최 주 박사가 "금강유역에 발달한 청동기문화는 중국에 비해 상당히 앞서 있음을 입증한 것"이라고 말했듯이, 이 실험결과로 유리 제조기술은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독창적으로 개발되었다는「새로운 역사」를 밝혀낸 것이다.
우리나라 '국보급'원로과학자인 최 주 박사는 특히 비파형동검이 남한의 원료를 써서 만들어진 것임을 입증, 중국으로부터의 유입설을 뒤엎었다. 그의 지적으로 우리 교과서의 단군조선 유물인 청동기 등 고대금속유물의 기원과 성분 특성 등에 대한 수정이 이뤄지고 있다.
중앙일보 1998년 4월 1일자 1면과 3면에 보면, 국내에 한점도 없던 단군조선의 미송리형 토기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는 기사가 실렸다.이런식이라면 단군조선에 대한 아직도 많은 유물과 사료들이 국내ㆍ외에 산재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12.중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한국의 옛 이름이 지금도 그대로
강대했던 단군조선, 단군조선의 서부 영토였던 중국 베이징(北京) 부근의 난하유역까지를 수복하고 중국을 향해 위용을 과시했던 고구려의 역사가 있었고, 바다를 건너 중국 베이징과 톈진(天津)지역으로부터 남쪽의 저장성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고 영향력을 행사했던 백제의 역사가 엄연히 존재했었는데 한국은 중국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문명을 전해받은 것으로 교육하고 있는 것 같다.중국의 각종 문헌에는 한국 관련 기록들이 많은데 일부 지역에서는 한국의 옛 이름이 지금도 그대로 쓰이고 있다.
고려하(高麗河), 고려포(高麗鋪), 고려영(高麗營) 등 고구려와 관련이 있는 지명이 베이징 인근에만 30여개에 이르고, 중국 남부 광서성에는 백제향(百濟鄕)이란 이름이 보이기도 하고, 무인도이긴 하지만 중국 동남해안에는 신라도(新羅島)라는 지명이 현지인들 사이에서 쓰이기도 한다.
1996년 9월 15일 KBS 1TV「일요스페셜」에서는 신라중심의 역사기술로 소홀히 다뤄져온 백제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다큐멘터리가 방영됐다.「속 무령왕릉, 잊혀진 땅 ─ 백제22담로의 비밀」이란 이 다큐멘터리는 백제 특유의 지방 통치체제인 '담로'를 화제로 삼아 6세기 당시 활발한 해상활동을 벌였던 백제의 구역을 추적한 것이다.
담로(擔魯)란 백제의 지방 행정 구역의 하나로서, 왕자나 왕족을 보내어 다스리게 한 행정 구역을 말한다. 백제는 22담로를 두었으나 시대와 지역의 대소에 따라 수효의 변천이 있었다. 과연 '담로'는 어떤 모습의 통치체제였고, 어디에 존재했는지 또, 해외에까지 뻗어 있었던 것인가! ─ 이런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얻기위해 제작진은 중국과 일본, 동남아시아 일대를 섭렵하며 8개월 동안 백제의 흔적을 추적했는데 가장 큰 성과는 중국에서 백제의 지명을 찾아낸 것 일 것이다.
제작진은 베이징에서 3천km나 떨어진 베트남 인접지역 광시좡족(廣西壯族)자치구에서 '백제향(百濟鄕)'이란 이름을 찾아냈고, 이곳이 바로 중국의 사서인《송서(宋書)》에 등장했던 백제의 옛 영토 '진평군'이란 것을 알아냈다. 백제향의 중심마을 이름이 백제허(百濟墟ㆍ백제 옛터)란 것도 눈길을 끄는데 이곳에는 전남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맷돌과 외다리 방아 등이 발견돼 백제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또한 지금의 중국 베이징과 톈진, 스자좡(石家莊)지역에까지 백제의 흔적이 퍼져있음을 확인했고, 더 나아가 중국사서에 기록된 백제 태수들의 임지가 중국 동해안을 따라 선을 잇듯 분포한다는 것도 밝혀, 중국 속의 백제 지배지가 베이징과 톈진지역으로부터 지금의 저장성(浙江省)지역까지 남하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줬다.
특히 제작진이 발견한 흑치상지의 묘지명(남경 박물관 소장)에서 흑치상지가 흑치지역에 봉해지면서 원래 백제의 왕성(王姓)인 부여씨를 버리고 흑치씨를 사용했다는 기록을 찾아냈는데 결국 흑치지역이 동남아시아를 뜻하기 때문에 백제의 통치지역은 동남아시아 일대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백제는 서기 246년(고이왕 13년)에 진충(眞忠) 장군을 파견하여 지금의 베이징지역을 공략하고「백제군」을 설치한 후, 남쪽으로 영역을 확장하여 지금의 하북성, 산둥성(山東省), 장쑤성(江蘇省), 저장성 지역의 동부해안을 차지하였다. 백제의 중국 동부해안 지배는 시기에 따라 그 영역에 차이는 있었지만 서기 588년까지 계속되었다.
백제의 남방경영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어 어떻게 전개 되었을까. 백제의 남방경영은 지금의 제주도 경영부터 시작되는데 오키나와를 중간 기항지로 필리핀 군도로 뻗어나갔다.즉 백제는 제주도를 기항지로하여 이전부터 진출해 있던 북규슈(北九州, 기타큐슈)를 잇는 상설 항로를 열었다. 그리고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지금의 오키나와를 중간 기항지로 삼고 대만(타이완)해협을 지나 필리핀 군도까지 항로를 연장시켰다.
필리핀 군도(群島)는 흑치국(黑齒國)으로 일컬었던 곳인데 이곳이 백제와 연관이 있음은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출토된 백제장군 흑치상지(黑齒常之)의 묘지석이 말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그 가문은 왕족에서 나왔지만 흑치(黑齒)에 분봉(分封)된 관계로 그 지명을 따서 씨(氏)를 삼았다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볼 때, 왕족을 지방의 거점에 파견하여 통치하는 담로제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13.단군조선과 함께 잊혀지고, 빼앗긴 민족사의 한 장인 '발해'
한반도 면적의 3배에 달하는 대제국을 건설한 발해(698∼926)의 개국 시조 대조영(大祚榮; ?∼719)은 고구려 멸망 30년만에 거란ㆍ돌궐족의 대두와 당제국의 혼란ㆍ약화라는 국제정세의 타이밍을 포착하여 동북아의 새로운 강대국을 세웠다. 서기 698년 고구려 장수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함께 고구려의 지배하에 있던(옛날 부여가 있던) 지역인 백두산 동북 송화강 유역인, 만주 길림성 돈화시 동모산(東牟山) 일대에 발해를 건국하였다.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자임(自任)하고, 독자적인 연호(年號)를 사용하였다.
남쪽의 통일신라와「남ㆍ북국관계」로 대립ㆍ교섭하면서 동북아 일류의 문화국으로 영화를 누렸던 2백 30여년간 존속한 선진 발해는 뛰어난 조선술과 항해술을 보유하기도 했고, 1천 300km 떨어진 일본의 보호자 역할을 하였다.
발해는 육상전투에서 능숙했던 대륙국이면서도 해양대국이었다. 일본과는 47회의 교류를 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발해인의 일본진출 루트는 동해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예로부터 동해는 발해의 내해(內海)였다. 평양∼원산 이북 지역부터 중국 동북부의 대부분과 러시아 연해주를 지배한 발해는 우리 역사의 중요한 부분이면서도 단군조선과 함께 잊혀지고, 빼앗긴 민족사의 한 장이다.
발해 북쪽의 강역은 고구려 북쪽의 강역보다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발해는 만주 동부에 중심을 두고, 북쪽으로는 아무르강까지, 남쪽으로는 한반도 북부를 호령하던 동북아의 대강국이었다.
발해의 152년간 수도였던 상경용천부의 동경성(현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은 둘레가 16km에 달하고, 궁전터만 37개가 발견되기도 했다. 발해는 고구려인 대집단을 기반으로 형성된,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이므로 동북아에서 '한국사'의 위치를 자리매김 하려면 단군조선과 고구려, 발해사를 분명히 해야 한다.
발해를 건국하는데 있어서 말갈족도 참여하였는데 말갈족은 단군조선의 속국이었다.
고구려 후손들은 비록 나ㆍ당연합군에 의해 왕조의 역사를 마감했지만 그 혼은 끈질기게 이어졌다. 고구려 후예인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당나라와 당당하게 맞서 고구려 옛땅을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이정기 장군은 중국 산둥반도를 거점으로 활동했다.고구려 유민의 후손인 이정기 장군은 고구려 멸망 100년 후 고구려인들을 모아 군사를 일으켰다. 그의 군대는 산둥반도를 비롯해 랴오닝성, 허베이성, 안후이성 등 무려 15개 주에 걸친 영토를 58년간 통치했다.이렇듯 우리는 단군조선∼현재까지 4332년의 역사를 가진 민족이다.
그런데 각 성씨(姓氏) 족보에 보면 성씨의 기원이 중국이라고 한 성씨들이 있다. 이것은 사대주의 때문이다. 중국이 강해지니까 단군조선을 비롯한 우리 '역사'를 말살하고는 중국을 상국(上國)이라고 여긴 영향 때문이다.
14.일본 왕실도서관에는 일제강점기 때 약탈해 간 '단군'관련 사서가
단군조선과 한ㆍ일관계사 등 우리 역사를 우선 정립하지 못한 상황아래서 '한ㆍ일 역사 공동연구'라는 것은 위험한 일이며 일본에 끌려다닐 소지가 있다고 본다. 특히 한ㆍ중ㆍ일 3국이 '역사'를 공동으로 연구하게 되면 우리만 고립하게 된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역사를 정립한 후에는 역사를 공동으로 연구하자고 우리가 적극 나설 필요성도 있다.우리 '문화'는 흔히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나 중국과는 크게 구별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동양문화권에 속하면서도 독창적 경지를 개척한 것이 우리문화이다. 그러나 왜곡된 '역사' 교육을 받은 우리 국민이나, 특히 전세계인들은 이를 잘 알지 못하고 있다.
광복이 된지 54년이 지나도록 '단군조선'과 '한ㆍ일관계사'를 바로잡지 못한 것은 중국이나 일본에 책임을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일제의 '한국사' 왜곡에 참여했던 인사들과 함께 이들에게 부화뇌동하여 스스로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우리 '문화'를 비하한 바로 우리 자신들의 책임이다.'사료'부족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제가 '취사선택'하여 남겨 놓은 사료만을 들먹이면서 "사료가 부족하다"는 주장만 되풀이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과거 일본이 가져간 수많은 사료 등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사료들을 모으려는 노력도 미흡했고, 외국 각국의 교과서에서 우리 '역사'가 심각하게 왜곡 서술돼 있거나 잘못 기술되어 있는데도 이런 왜곡실태가 현재까지도 개선되지 않고 그대로 방치된 실정이다.
일본 왕실도서관에는 일제강점기 때 약탈해 간 '단군조선'관련 사서 등 고문서가 많을 것이라고 본다. 2002년 월드컵 한ㆍ일공동개최를 계기로 일본 왕실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하는 우리 민족사 관련 수탈자료를 반환해오기 위한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그런데 과연 일본은 한국에서 약탈해 간 '단군조선'관련 사서 등에 대한 목록을 작성해 놓았을까.
사단법인 한배달에서 발행한 계간지 ≪한배달≫40호(1998년 겨울호) p.70∼p.74에 보면 일제강점기 때 일본 왕실문고(왕실도서관)에서 도서분류 및 내용분석 업무를 담당했던 박창화(朴昌和; 1889∼1962) 씨와 관련된 글이 실려있다.
충북 청원군 강외면 연제리가 고향인 역사가 박창화 씨는 1900년 초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그 학교에서 교관을 지냈다. 그는 그 뒤 충북 영동(永同) 소학교, 배재고보에서 교사로 근무했다.일본 궁내청 소료부(書陵部:일명 왕실도서관)에서 1933년부터 12년동안 조선전고(朝鮮典故) 조사사무 촉탁으로 근무했던 그는 이곳에서 일제가 한국에서 약탈해 간 '단군'관련 사서 등을 보았다고 그 뒤 청주사범학교 교장이었던 최기철(崔基哲; 1910∼) 서울대 명예교수(담수생물학연구소장)에게 이를 '증언'했다고 한다.
본란에서는 (사)한배달 최봉열 원로회 회장, 한애삼 부회장 등이 1998년 10월 최기철 서울대 명예교수를 탐방하고 녹취한 내용을 요약 정리해 본다.
▶ 최초 제보자: 이름/박창화(朴昌和ㆍ당시 56세)
▶ 2차 제보자: 이름/최기철(崔基哲) 서울대 명예교수
주소/서울시 관악구 신림본동 92-368 12/8
박창화와의 만남
본건의 제보자인 최기철 박사는 1945년 청주사범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며 처음 박창화를 만난다. 박창화는 왕실문고에서 우리 상고사 관련 사서를 분류하고 내용을 파악하는 일을 직접 담당하였다.당시의 박창화는 일본 왕실문고에서 일하던 중 자전거를 타다가 둑에서 넘어져 크게 다쳤고, 요양차 잠시 고향에 돌아왔다가 광복을 맞아 고향에 머물게 되었으며 청주사범학교 교장이던 최기철 박사를 찾아와 자주 이야기를 나누던 터였다.
그는 자신이 원래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교사였으며, 나라가 어려워지자 학교에서 아이들만 가르칠 수 없다는 생각에 만주로 떠나 독립항쟁을 하다 중국 안동에서 일본관헌에게 잡히게 되었다는 것. 거기서 독립항쟁에 대한 자신의 솔직한 신념을 밝히자 그 관헌이 박창화의 뜻을 좋게 여겨 일본 왕실문고에서 일하도록 해 주었다고 한다.박 씨는 왕실문고 재직 당시(8ㆍ15 광복 전) 왕실문고 내 소장된 사료 대부분이 조선총독부가 조선에서 수탈해간 우리 사서임을 직접 확인했고, 한국에서 수탈해간 중요한 고대사 관련 사서들은 모두 거기에 있다고 할 만큼 많은 분량이었다고 증언했다.
수탈된 사료들을 분류하고 내용을 검토하다 보니 중요한 사료들을 모두 읽을 수밖에 없었는데 사료의 대부분이 '단군(檀君)' 관련 사료였다. 소화(昭和) 일왕의 이름 '소화'를 내각총리의 의뢰로 박창화가 지어주기도 했다는 것.당시 그곳에서 같이 근무하던 한 일본인은 "조선의 고서는 다 가져왔기 때문에 여기 있는 것들은 조선에는 없는 것들이다"라고 자랑삼아 말하기도 했다.
청주사범학교 국사교사로 새출발
광복 직후 학교로 자주 찾아와 말동무를 하던 박창화는 최기철 박사에게 "이 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치고 싶다"고 요청하였고, 최기철 박사는 그의 해박한 역사지식을 인정, 청주사범학교의 국사교사로 채용하게 되었다.박창화는 마땅한 말동무가 없어 자주 최기철 박사를 방문하였고, 자신이 왕실문고에서 보았던 책들과 일하던 내용을 말하곤 하였으나, 역사에 전문지식이 없던 최기철 박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교사로 재직하던 박창화는 한 학기 동안 '단군'에 대해서만 강의할 정도로 단군에 관련된 많은 사실들을 알고 있었는데, 이는 왕실문고에서 일하면서 습득한 지식 때문이었다고 한다.
당시 박창화로부터 국사를 배운 제자로는 김준호 교수(현 서울대 명예교수, 생물학)와 임양재 교수(전 중앙대 교수)가 있다.
광복 직전 미국의 B-29의 폭격이 한창이자 일본정부는 '이것만은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오하리(尾張) 공작(또는 백작)집 지하실로 사서들을 옮겼는데 이때 박창화가 직접 왕실문고를 옮기는 일에 참여하였다. 그후 귀국하였기 때문에 정확한 행방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오하리의 집 지하실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거나 왕실도서관으로 다시 복귀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최기철 박사가 청주사범학교 교장(1년 재직)을 그만두고 충주사범으로 잠깐 옮겼다가 다시 서울로 옮긴 후 교수들 사이에서 박창화 문제가 대두된 적이 있었다. 당시 30세 정도의 일본사를 전공하던 김용덕 부교수(현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가 찾아와 "화랑도, 화랑정신을 알린 분이 박창화 씨라는데 그 박창화 씨를 만나보고 싶다"고 하여 박창화를 수소문한 결과 친지가 있는 괴산에서 요양하다가 별세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최기철 박사가 서울대에 재직할 당시 이병도 박사(당시 서울대 사학과 교수)에게도 일본 왕실문고에 소장된, 우리나라에서 수탈해 간 고대사 관련 사료의 존재와 이를 되찾아 와야 한다는 당위성에 대해 알렸으나 아무런 반응도 얻지 못했다. 또 1957년경 문교부 편수국장을 방문하여 박창화의 왕실문고에 관한 내용을 말해주었으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고 한다.
박창화 씨는 1950년까지 충북 괴산 국립여중고에서 근무했다.청주에 사는 박인규 전 초등학교 교장이 박창화 씨의 손자이다.
1999년 7월 10일(토) 저녁 8시 KBS-1TV [역사스페셜]에서 "일본 왕실도서관에는 일제가 한국에서 약탈해 간 '단군'관련 사서 등이 보관되어 있었다"고 증언한, 그 왕실도서관에서 근무했던 역사가 박창화 관련 기사가 방영됐다.
다음은 박창화 관련 기사 부분이다.
역사가 박창화는 일제강점기에 12년간 미공개된 우리나라 도서가 많은 것으로 알려진 일본 왕실도서관의 사서를 지냈다.박창화의 고향인 충북 청원군. 그는 1889년 이곳 박씨 집성촌의 한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힌 그는 유달리 똑똑했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아직도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박창화는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강역고, 영토연구에 애정을 쏟았다. 고려 때까지 '만주'가 우리나라 영토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박창화는 1902년부터 16년까지 자신이 겪은 일들을 이력서 형식으로 남겨 놓았다. 여기에 따르면 그는 1900년에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소설가 길팔봉의 회고에 따르면 그후 박씨는 충북 영동소학교의 교사를 역임했는데 조선어, 일본어, 체조를 가르쳤다. 그는 배재고보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광복 후 청주사범학교에서 함께 근무했다는 최기철 선생(현 서울대 명예교수)을 만날 수 있었다. 당시 최기철 선생은 36살의 교장이었고 박창화는 '역사'를 가르쳤다고 한다. 최기철 선생은 (박창화 씨로부터) 주목할 만한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중국을 갔는데 국경 넘어서 안동이라는 곳에 갔데요. 그런데 일본 관헌한테 붙잡혔답니다. 독립항쟁을 한다면 야단이 나는데 정중히 대하더래요.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어 역사공부라고 했더니, 그러면 좋은 수가 있소. 우리가 역사공부를 할 수 있는 장소를 안내할테니 오시오 해서 간 곳이 왕실도서관이라고 해요."박창화와 일본 왕실도서관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구체적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충북교육청을 찾았다."1950년 퇴임자 이력서 철인데요. 50년도 박창화라고 돼 있네요."1950년 퇴임자 명단에 박창화의 이름이 있었다."이거군요. 어떻게 돼 있죠?""최종적으로 충북 괴산 국립여중고에서 단기 4283년 의원 면직했는데요. 서기로는 1950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박창화가 왕실도서관의 사서로 근무했다는 기록이 있었다. 박창화가 1933년부터 12년 동안 일본 궁내성 즉, 왕실도서관에 있었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일본 왕실도서관에서 박창화의 이력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왕실도서관 측에서는 박창화에 대한 기록은 보여줄 수 없다고 했다.왕실도서관에서 박창화의 근무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던 취재팀은 일본국립국회도서관에서 1930년대에서 40년대 사이에 일본 궁내성에서 근무한 직원의 명단을 발견했다.그중 1935년 직원명부. 박창화의 이름이 보인다. 왕실도서관에서 조선의 '고서적'을 다루는 일을 했던 박창화는 당시 촉탁 즉, 특별계약직으로 월 수입은 85엔이었다.
12년간 일본 왕실도서관에서 근무했던 박창화는 광복직전 귀국했다. 광복 후 그는 정부관계자에게 왕실도서관에 중요한 책이 있는 곳을 알고 있으니 자신이 직접 찾아오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 하지만 번번히 무시되거나 정부에서 알아서 갈테니 목록을 적어보내라는 답변만 들었을 뿐이었다.박창화를 가정교사로 모셨던 제자 김준웅 씨는 그때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왕실도서관이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12년동안 여러 제약을 받으면서 있었는데. 그것은 한국에서 강탈해간 것인데, 자기네 나름대로 책을 잘랐다고 한다. 그런식으로 자기들 책이라고 하고 있는데 가르쳐 주겠느냐, 자기(박창화 씨)는 거기 근무하면서 어느 구석 몇 층에 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정부에서) 간다고 주겠느냐."
일본 왕실도서관에는 일왕의 족보는 물론 수많은 고서적들이 보관돼 있다. 일본이 가져간 조선의 중요한 '고서적'들도 이곳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는 고서적을 비롯, 도자기, 그림, 비석, 탑, 건물 등 우리 문화재를 마구 파괴하고 약탈해 갔다. 1999년 8월 현재 문화재청 자료에 따르면 해외로 유출된 우리 문화재는 일본, 미국 등 18개국에 6만 8천 5백 20여점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특히 일본에만 3만 3천여점이 있다. 이중 대부분은 약탈품인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반환은 5%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가 돈을 주고 구입하거나 재일동포 수집가의 기증이 대부분이어서 순수 반환은 미미한 편이다.
일본정부는 진정한 한ㆍ일우호증진을 원한다면 2002년 월드컵 한ㆍ일공동개최를 계기로 일제강점기 때 약탈해간 '단군조선'관련 고서적과 우리 문화재의 목록을 공개하고 이를 반환해야 할 것이다.정부는 교착상태에 빠져있는「외규장각 고문서」반환협상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병인양요 때 약탈당한 고문서 3백40여권 중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 2백96권이 보존돼 있다고 한다. 그러나 국제법학자인 백충현 서울대 교수가 지적했듯이, 우리 권리를 포기하고 프랑스의 역사적 불법성을 정당화시키는 협상은 피해야 한다고 본다. 프랑스가 외규장각 도서를 한국에 영구임대 형식으로 전시하되 한국도 같은 가치의 우리 문화재를 프랑스에 임대해주는 등가교환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이태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도 말했듯이, 프랑스군(軍)이 1866년 11월 강화도 외규장각에서 도서 340책을 약탈하고 건물과 나머지 고서를 불태운 사실은 프랑스 문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약탈된 외규장각 문화재를 추가로 확인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이태진, 백충현 두 교수는 1991년 서울대가 우리 정부를 통해 프랑스정부에 대해 외규장각 고문서 반환을 요청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이다.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한ㆍ일관계사', 특히 '단군조선'을 정립시킨 후 이를 세계에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각국의 교과서는 물론 우리의 '역사'에 대해 잘못된 부분이 어느 한 곳이라도 있다면 우리의 올바른 역사가 적히도록 노력해야 한다.
21세기에 한국이 일본을 추월하려면 먼저 국민의식 수준부터 높여야 하는데 특히 '역사의식'은 중요하다. 우리의 올바른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중심'을 잡지 못한다면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동북3성을 비롯한 만주와 연해주 등 한대륙에서 터를 열고, 한대륙과 한반도를 발판으로, 그리고 일본열도에서 천하를 누비며 사자후를 토하던 우리선조의 모습이 담긴 '단군조선'과 '한ㆍ일관계사' 등 올바른 우리 역사를 바로 보게되면 우리의 과거가 그리 답답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동안 왜곡된 '역사' 교육으로 인해 우리 자신을 너무도 잘못 보아왔고, 정치ㆍ경제ㆍ사회의 불안정으로 우리 '국가'를 불신하고, 우리보다는 외국을 선호하며 살아 온 이유로 우리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이젠 우리 언론매체가 앞장서서 '단군조선'과 '한ㆍ일관계사' 등 올바른 우리 역사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출처 http://www.dangoon21.net-정산님 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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