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두칠성과 고인돌에 숨겨진 비밀/한민족 신교문화
한반도 전역에 수만기가 산재해 있는 고인돌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왜 한반도에서만 그토록 많은 고인돌이 만들어졌을까.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하게 天孫을 자임하는 우리 민족의 뿌리는 어디일까. 인류 최대의 선사시대 거석물에 숨겨진 역사의 비밀이 베일을 벗게 될 날은….
고인돌에 숭숭 난 구멍 알고 보니 별자리였네
양홍진 박사 전국 260기 조사
고인돌은 우리나라 전국에 퍼져 있다. 고인돌 기행을 할 때 고인돌 표면에 파인 작은 구멍들을 예사로 넘길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선사시대 조상이 새긴 별자리가 있는 경우가 많다.
한국천문연구원 양홍진 박사는 17일 '한국의 고천문학과 천상열차분야지도' 워크숍에서 '한국의 별 그림 역사와 별자리 그림'이란 제목으로 고인돌과 고분 안에 새겨진 별 그림들을 발표했다. 고인돌의 경우 고등과학원 박창범 교수, 경북대 박명구 교수와 함께 전국 260기의 홈이 있는 것을 답사한 결과다.
고인돌에는 새끼손가락이 들어갈 정도의 구멍에서부터 더 크거나 작은 것들이 많이 있다. 마치 별의 밝기에 따라 크고 작게 그린 것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다. 많게는 100여 개가 넘는 구멍이 하나의 고인돌에서 발견됐다. 그러나 이런 구멍은 자연적으로 패인 것이 아니라 일부러 무엇인가를 표시하기 위해 사람이 판 것들이다. 그 구멍들을 선으로 연결해 보면 현대 별자리 그림이 나오기도 한다.
▼대구 동내동에 있는 고인돌. 표면에는 북두칠성(검은 선) 등의 별자리가 보인다.
대구 동내동 고인돌의 경우 북두칠성이 명확하게 표시돼 있으며, 은하수를 표시한 듯한 구멍들이 많이 눈에 띈다. 양 박사는 현대 별자리와 이 고인돌에 패인 구멍과의 상관관계를 연구 중이라고 말했다.
경남 함안의 한 고인돌은 남두육성을, 또 하나는 북두칠성을 파 놓았다. 경북 문경, 경남 함안의 한 고인돌은 북쪽 왕관자리를 구멍으로 표시했다. 이외에 묘수나 남두육성, 삼성 등을 파 놓은 고인돌도 있었다는 게 양 박사의 말이다. 함안 예곡리 야촌마을 고인돌에는 삼성과 남두육성, 묘수 등 여러 별자리가 그려져 있었다.
고인돌 덮개돌의 방향은 절반 이상이 해가 뜨는 방향인 남동쪽을 향해 설치해 놓았다. 이처럼 해가 뜨는 방향으로 고인돌을 세워 놓은 것은 유럽 등 외국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선사시대나 현대나 해가 뜨는 방향은 일상에 많은 영향을 주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박방주 과학전문기자 출처:[section] 과학과 미래
전세계 고인돌 절반 이상이 한반도에
◀가오하도 하점면 부근리 거인돌(사적 137호)은 탁자형의 북방식 고인돌이다. 덮개의 길이가 7m에 이르는 거석으로 남한에서 제일 큰 고인돌로 손꼽힌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10만여기의 고인돌 중 약 7만여기의 고인돌이 한반도에 집중해 있다. 남한에 5만여기, 북한에 2만여기가 분포한다.
최근에도 새로운 고인돌들이 발견되고있다. 이처럼 한반도에 고인돌이 집중되어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 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역사적인 유물이 산재해 있다. 그 가운데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이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겉으로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은 돌덩어리일 뿐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물들처럼 사람들의 눈길을 끌 수 있는 만큼 화려하지도 않다.
양구군 용하리 선돌에는 북두칠성과 남두육성(南斗六星:궁수자리에 속하는 6개의 별,북두칠성의 모습을 닮음)으로 보이는 홈이 나있고, 양구군 오류 2리의 자연바위에는 북두칠성과 삼성으로 추정되는 성혈(둥근 점)이 남아있다. 동일한 유형의 유물이 북한에서도 발견된다. 함경남도 지석리 고인돌 유적이 그것이다. 이곳 고인돌의 덮개돌에는 별자리로 추정되는 흔적이 남아있는데 이것이 아득이 마을에서 나온 돌판의 홈과 유사하다.
별자리로 추정되는 유물이 고인돌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연대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선사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바위에 새겨진 그림 즉 암각화가 그것이다. 암각화는 고인돌처럼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이 가운데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도항리의 암각화가 주목을 받는다. 이 암각화는 은하계의 천체도를 연상시킨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우리나라 칠성신앙의 자취
일반적으로 우리 나라의 천문지식은 중국에서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고인돌과 암각화를 통해서 우리 나라에도 일찍부터 자생적인 천문지식이 쌓여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고인돌 유적에 남아있는 홈은 별자리 가운데 북두칠성이라고 판단되는 경우가 많다. 이 점으로 보아 칠성과 우리 나라와의 관계는 일찍부터 각별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에도 칠성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전국 방방곡곡에 남아있어 칠성의 신앙적 전통이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힘 얻는 고인돌문화 한반도 자생설
고인돌의 부장품 유형과 관련된 것으로, 그동안 한반도 고인돌에서는 사람의 뼈와 돌칼(마제 석검)·돌화살촉(석촉)·붉은토기(紅陶)와 비파형 동검과 청동도끼·청동촉·무문토기 등이 함께 출토되었다.
이영문 교수는 “아시아지역 고인돌의 중심 분포지가 우리나라이고, 형식도 북쪽에 북방식 고인돌이 많고 남쪽에 남방식이 많으며, 돌널무덤과 비슷한 개석식 고인돌이 중국 랴오닝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되는 점으로 보아 한반도에서 남·북방의 문화가 융합한 독자적인 고인돌문화가 형성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한다. 일부에서는 발해 연안의 랴오둥·산둥반도와 한반도 고인돌이 서로 같은 계통임을 밝히고 고조선시대의 문화영역이기도 한 이 일대의 고인돌 문화가 자력 발생한 것으로 보는 연구결과도 나와 있다.
한반도 고인돌은 세계 거석문화의 발생, 분포 및 전파 과정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한반도의 고인돌은 특히 밀집 분포도나 규모, 다양한 형식에서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강화 고인돌, 사적 제137호, 인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칠성신앙'이라는 매우 특이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이 칠성신앙은 고대 이래로 우리 민족만의 독특한 고유 신앙이다.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나려면 이 우주에서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아서 태어나야 한다. (얼굴에는 일곱개의 구멍이 있다)
그래서 우리의 옛 할머니나 어머니들은 장독대 위에 정안수를 떠 놓고 '칠성님'에게 소원을 빌어 왔다. 우리 조상들은 인간의 길흉화복은 물론 수명까지 북두칠성(北斗七星)의 칠성님이 주관하고 있다고 믿었다. 북두칠성은 우리 조상들이 믿던 삼신 상제님을 별로 나타낼 때 붙여지는 이름이었던 것이다.
칠성신앙은 신교신앙의 하나였다. 북두칠성을 신격화한 표현들로서는 칠성님 외에도 칠성신, 칠성여래(如來), 칠원성군(七元星君)등이 있다.우리 조상들은 북두칠성을 섬겼다.
북두칠성은 배달국과 단군조선시대, 그리고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는 물론 고려와 조선의 별이었다.
고조선 시대에 만든 고인돌의 뚜껑돌 위에 이미 북두칠성이 새겨져 있었다. 특히 고구려 왕릉의 천장 벽화에서는 북두칠성의 형상이 다량으로 발견된다. 그리고 광개토대왕비 상단 경주 호우총 출토 청동 호우, 중원 누암리 출토 제기(祭器) 등 각종 고구려 유물에서는 정(井)자도 함께 발견된다.
소설가 최인호씨가 96. 8 SBS가 방영한 「왕도의 비밀」에서 고구려의 상징 문양으로 제기한 우물 정(井)자는 북두칠성이 있는 곳을 나타내는 것이다. 최인호씨는 이 井자를 백두산 천지일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井을 땅에 적용시킬 때는 맞을 것이나 하늘에 적용시키면 북두칠성이 있는 곳을 가리킨다.
광개토대왕을 비롯한 고구려인들은 스스로를 하늘 북두칠성의 자손 즉 천손민족으로 적고 있다. 고려시대 고분에도 북두칠성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격암유록과 토정비결에서는 말세 도탄의 위기에서 사는 방법으로 한결같이 석정水(石井: 돌우물 물) 또는 석정곤(石井崑)이라고 한다. 이 석정수는 바로 북두칠성의 정기가 고인 우물이다. 석정곤의 곤(崑)은 곤륜산의 약자다.
옛날 사람들은 북두칠성이 상조금궐 하부곤륜(上照金闕 下覆崑崙: 칠성경)이라고 하며, 위로는 금궐(호천금궐: 옥황상제가 계시는 곳)을 비추고 아래로는 땅의 중심인 곤륜산을 비추는 곳에 있다고 하였다.
이 곤륜산은 북두칠성의 정기가 비추어지는 지구 모든 산의 조종(祖宗: 아버지격)이다.
북두칠성에 얽힌 얘기를 하다가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우물 정(井)자 얘기까지 발전했지만, 아뭏튼 북두칠성은 우리 한민족의 열렬한 신앙의 대상이었다.
절에 가보면 대웅전 뒤편에 칠성각(또는 칠성당, 칠성전)이라는 전각이 있다. 이 전각은 한민족의 칠성신앙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사찰내에 수용되었던 것이다.
옛날 마을에 있던 칠성당도 바로 북두칠성의 성신을 모셔놓고 기원하던 사당이다.
민가에서는 앞에서 설명했듯이 장독대 한 옆이 칠성당(칠성단) 자리가 되어 정안수를 떠놓고 소원을 빌던 터전이었다.
앞에서 기술했듯이 중국 한족은 동이족의 주성인 북두칠성을 신앙하다가 진(秦)나라 이후 중원을 지배하고 동이족을 북방으로 몰아내면서 금성을 주성으로 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사람이 죽으면 '칠성판'이라는 널판을 관 밑바닥에 깔고서 그 위에다 시신을 눕혔다. 여기서 죽는 것을 '칠성판 짊어지고 간다'고 표현하게 된 것이다.
이 칠성판은 널판에다 북두칠성의 모양을 형상화하여 아래와 같이 7개의 구멍을 뚫거나 먹으로 표시를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장례풍습은 세계 어느 민족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한민족만의 독특한 풍습이다. 이것은 그 영혼이 본래 온 고향별인 북두칠성으로 돌아가라는 염원을 담고 있는 것이다.
신랑 신부가 결혼식을 올리면서 맨 먼저 지내던 초례(醮禮)는 칠성님께 드리는 인사였다.
우리나라 역대 임금들이 지내던 초재(醮齋)도 칠성님께 올리는 인사와 기원이었다. 이 칠성신앙인 초재는 조선 중종·명종조에 유명무실해졌다.
우리나라 역사상 북두칠성의 기운을 타고난 것으로 전해지는 인물로는 김유신(등에 칠성무늬), 강감찬 장군(문곡성), 정몽주(어깨 위 칠성모양의 검은 점 7개), 안중근(가슴에 흑점 7개, 그래서 칠성이 응했다 하여 '응칠'이라고 불렀다) 등이 있다.
경복궁과 창덕궁은 북두칠성이 있는 자미원과 북두칠성을 호위하는 28수(宿) 별자리를 본 따 조경한 독창예술품인 동시에 북두칠성 신앙과 삼신상제 신앙의 대표작품이었다.
우선 광화문 앞과 경복궁 안에 있는 해치('해태'라고도 호칭)는 자미궁(자미원을 궁궐에 비유한 표현)의 남쪽 하늘을 지키는 상서로운 동물이다.
경복궁 근정전 실내는 자미궁의 형상을 하고 있다. 내전 안의 장식 색깔은 자미원을 상징하는 검붉은 자주색, 비취색이다.
임금의 용상 뒤에 있는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는 용상이 해와 달의 음양과 다섯 개 산의 목화토금수 오행(五行) 즉 하늘의 칠정(七政)의 호위를 받고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한편 천장에는 용 두 마리가 각 28개의 발가락(하늘의 28수를 상징)으로 여의주(임금)를 호위하고 있다.
창덕궁의 인정전 실내도 경복궁 근정전과 같은 형상이다. 소요정(逍遙亭) 네 개의 기둥에 일곱자씩 쓰인 글귀는 자미천을 묘사한다. 소요정 앞의 어정(御井: 임금샘)은 북두칠성 모양을 나타내는 을(乙)자 모양으로 물길을 팠다.
소요정의 북쪽에 있는 청의정은 삼신신앙의 바탕인 원방각(○□ )형으로 지었다. 소요정의 동쪽에 있는 정자는 이름을 아예 천지인 삼신을 뜻하는 태극정이라고 지었다.
이와 같이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 조선시대의 고궁은 북두칠성이 있는 하늘의 궁궐, 자미궁을 본 따 지은 대궐이었다. 이 모든 것이 한민족 고유의 칠성신앙을 바탕으로 한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강점한 후 나라와 민족을 지탱하던 정신적 지주였던 칠성신앙을 몰아내기 위해 칠성신앙의 대표작인 경복궁을 허물고 그 자리에 총독부를 지으면서 미신을 타파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칠성신앙을 포함한 온갖 전통신앙을 탄압하여 없애 버렸다.
오늘날 우리의 전통신앙을 미신으로 보는 것은 근대에 와서 서양 기독교의 영향외에도 일제의 이와같은 음모의 영향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총독부는 95. 8. 15일 광복 50주년을 계기로 철거되어 지금은 옛 모습대로 복구되었다. 민족정신의 정기를 바로 세운 쾌거였으나, 궁궐만 복구하였을 뿐 아직도 우리는 경복궁 조성에 간직되어 있던 진짜 의미인 칠성신앙과 삼신상제 신앙은 복구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대다수 한국인은 경복궁에 그런 의미가 있었는지 조차 잘 모르고 있으니 또 한번 가슴을 치고 통탄할 일이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북두칠성과 북두칠성이 속한 자미원이 우주에서 어떠한 위치와 역할을 하기에 우리민족이 오랜 기간 그렇게 열렬히 신앙하여 왔고 궁궐조성에까지 그대로 모방하였는 가를 알아보자(중국에서도 북경의 자금성은 자미원을 본 뜬 것이고, 자미원의 색깔인 자줏빛 옷은 황제 이외에는 입지 못하는 황제의 색깔이었다).
하늘의 중심에는 북극성과 북두칠성이 있는 자미원이 있고, 그 밖으로 28수(宿) 안의 태미원과 28수 밖의 천시원이 있다. 우리 조상들은 천문의 분포를 3원, 28수 그리고 300의 성좌(별자리)와 1,460개의 별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자미궁은 하늘의 핵심으로 상제가 머무는 곳이며, 이러한 자미궁은 제후격인 28수(동서남북 각 7개)의 호위를 받고, 28수는 28수대로 해와 달, 목, 화, 토, 금, 수성의 7개 별인 칠정(七政)의 호위를 받고 있다.
하늘이 구천까지 전개되어 있다고 보았기에 자미궁을 구천(九天)궁궐이라고도하며, 이를 본따서 땅의 궁궐을 구중(九重)궁궐이라 부르는 것이다.
하늘의 모든 별들의 중심(자미원)에는 북극성이 자리잡고 있고, 바로 가까이에서 북두칠성이 북극성을 모시고 그 주위를 24시간을 두고 한 바퀴씩 돌면서, 하늘의 뭇별을 다스리고 있다. 북두칠성은 자미원에 흩어져 있는 각 별과도 연결되어 있으며, 별들을 연결하는 힘은 북두칠성이 보내는 중력의 힘이다.
북두칠성은 자미원 밖으로는 28수와 태양계 별들을 다스린다. 북두칠성을 따라서 28수와 오위(五緯: 목, 화, 토, 금, 수성)가 따라 움직인다. 모든 별들은 이 북두칠성의 힘에 이끌려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자기 갈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북극성은 우리가 속해 있는 우주의 중심이다. 태양계는 태양계의 모든 별들을 거느리고 태양계 자체의 축을 중심으로 하여 북극성 주변을 자전하면서 공전한다. 즉 태양계는 북극성 주변을 자전하면서 공전한다.
즉 태양계는 북극성이 주재하는 우주에서 볼 때 하나의 점인 것이다.
이 우주는 제 마음대로 도는 것이 아니고, '5·7·1 묘연(妙衍)'의 천부공식에 의해 정연하게 움직인다. 즉 북극성과 북두칠성의 운행관계도 5·7·1 묘연하고, 북두칠성 자체의 존재구조도 5·7·1 묘연하며, 우주 전체를 구성하는 28수(28수의 중심엔 작은 곰 별자리로 불리는 북극5성이 떠 있다)와 북극성의 관계 또한 5·7·1 묘연하다.
다음은 지구와 북극성의 관계를 살펴보자.
북극성은 우주의 북쪽 끝인 황도북극에서 동쪽으로 23.5도 각도인 천(天)의 북극에 떠 있다. 지구의 축은 이 북극성 을 향하여 23.5도 기울어져 있으며 태양 을 중심으로 공전과 자전을 반복한다. 문왕팔괘를 보면, 하늘(乾)이 서북쪽에 있고 땅(坤)이 서남쪽에 있는 데 이것은 지축이 23.5도 기울어져 있는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를 말한다.
지구는 황도 북극을 향하여 스스로 바로 서려고 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북극성과 반대편의 23.5도 각이 되는 곳에 있는 직녀성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세차(歲差)운동을 한다. 또한 북극성도 항상 같은 위치에 있지 않고 아주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이것은 지축이 23.5도 기울어져 있는 것은 별자리 28수의 배치가 3양 2음 운동을 하기 때문이다. 또한 3양 2음으로 양의 기운이 음의 기운보다 많아 선천인류 역사가 남성이 주도하는 분열과 발전의 상극의 과정을 걸어왔다는 것도 배웠다.
천문(天文)이란 하늘의 글월이란 뜻이다. 하늘에 글자가 써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는 인간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일들에 대한 어떤 예시(豫示)가 천체의 현상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선조들은 본 것이다.
즉 우리 조상들은 신교 정신에 따라 하늘에는 절대적인 주재자가 있다고 믿었고, 따라서 하느님을 공경하고 하늘에 제사 지내는 제천(祭天)의식이 오늘날 우리 생활속 깊이까지 전해 내려온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천지인 합일 사상에 따라 인간은 하늘의 이치에 따라야 인간다운 삶이 이루어진다고 믿었고, 하늘은 지상에서의 삶을 마치고 영혼이 돌아갈 고향으로 믿었다.
특히 우리 조상들은 빛이 1→3(삼원색)→7(일곱 무지개)로 전개되고 우리 몸이 1→3(삼혼三魂)→7(칠백七魄, 7개 챠크라)로 짜여 있듯이, 우주도 1(우주 본체)→3(자미원, 태미원, 천시원)→7(북두칠성 또는 4×7=28수)로 배치되어 있다는 것을 아셨다.
즉 북두칠성을 천제(天帝)를 대변하는 별로 보았고, 하느님의 자손인 한민족으로선 죽어서도 원래 왔던 하느님 고향인 북두칠성으로 돌아간다고 믿었던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옛날 아무런 망원경도 없이 하늘을 보고 오늘날 봐도 놀랄만큼 정확한 천문도를 작성하고, 그 수 많은 별자리와 천체의 움직임을 파악했다.
별자리를 그냥 눈으로 본 것이 아니고 정신적인 혜안을 가지고 보았다.
예로부터 도인들은 무슨 별을 봐야겠다고 응념하면 낮과 밤에 상관없이 해와 달, 별들을 관측하였던 것이다.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대첩에 앞서 고구려를 침입한 수나라의 우문중장군에게 '신책구천문 묘산궁지리'(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천문을 연구해서 천도에 따라 방책을 세웠고 땅의 이치를 깨우쳐 신묘한 전술을 개발하였다)라는 편지를 보내 철수를 미리 권고한 단적인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선조들은 천문지리에 통달했다(5세기말-6세기초 제작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가 우리나라- 고구려- 에서 제작된 것도 이에 따른 당연한 결과이다).
우리 선조들의 천문법은 인간과 천체는 하나라는 철학에 근거한 법이었다. 일식과 월식이 인간운명에 영향을 미치고 하늘의 별은 지상 인간의 운명과 직결된다고 보았다. 즉 천지인 합일사상 또는 인간은 소우주라 생각하신 것이다.
고조선의 감성(監星)에서 시작해 신라와 고구려의 첨성대, 고려의 태사국과 서운관, 조선의 관상감으로 수천년간 내려온 천문학 전통이 끊기기 시작한 것은 1894년 갑오경장 이후 서양식 천문학과 별자리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특히 일제는 우리 고유의 천문학을 정책적으로 축소 왜곡시켰으니, 우리의 왕립 천문대는 1904년부터 일개 측우소로 전락하고 말았다. 일제는 또한 우리 겨레가 별에 가지고 있던 전통적인 생각들을 미신이라는 누명을 씌워 제거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별자리, 특히 북두칠성 신앙은 제 자리를 잃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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