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인물탐구] 고구려의 위대한 임금 광개토太王
중원을 호령하고 백성을 사랑했던
고구려의 위대한 임금 광개토太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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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정신의 상징인 광개토태왕은 얼마 전 국내 CEO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1위로 선정됐다. ‘세종이 군사적 능력까지 갖춘 격’이라는 평을 받고 기록상으로도 ‘체격이 뛰어나게 크고 활달한 뜻을 가졌다’고 표현돼 있을 만큼 그는 철저히 준비된 지도자였다.
총 7회의 정복활동 중 5차례를 직접 군대의 선두에 서서 전쟁을 지휘함으로써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권위를 쌓아 나갔고 장거리 원정에서 승리를 거둔 후에는 정복지 주변을 순시하며 대규모 개선 퍼레이드를 벌임으로써 그 지역 귀족이나 토호세력의 저항의지를 꺾어놓기도 했다.
중국과 대등한 천하의 중심이라 하여 ‘태왕’, ‘호태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고,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처음 사용한 광개토태왕. “시대가 바뀌어도 평가가 달라질 여지가 없는, 거의 완벽한 군주”라고 평해지는 이 위대한 군주의 삶속으로 들어가 보자.
중원으로 뻗어나간 고구려의 太王
서기 374년, 고구려 왕실에 큰 경사가 났다. 이연(소수림왕의 동생) 부부가 드디어 아들을 낳은 것이다. 아이의 이름은 담덕. 아들이 없던 소수림왕은 담덕을 무척 사랑하였다. 담덕은 소수림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한 아버지 고국양왕 3년에(386년) 태자로 봉해진다. 일반적으로 성인의 대접을 받는 15세 전후로 태자 책봉이 거행되던 당시, 태자로 봉해진 담덕의 나이는 13세. 이미 그때부터 그는 남들과 달랐다. 담덕은 태자시절에 직접 군대를 지휘하여 백제, 후연과의 전쟁에 참여하여 용병술을 익혔고 그런 그의 용맹과 지략은 백제를 비롯한 이웃나라에 널리 알려졌다.
실제 담덕이 왕위에 오른 다음해에 직접 출정한 백제와의 전쟁에서 백제 아신왕(392년 즉위)은 감히 맞서 대적할 용기조차 못 내었다. 그때 담덕의 나이가 겨우 19세였다. 이처럼 어린 나이에 주위를 호령했던 담덕. 그가 바로 고구려 제 19대 왕위에 올라 한민족 역사를 찬란히 빛낸 광개토태왕이다.
광개토태왕.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쓰는 표현은 광개토대왕이다. 그러나 사실상 ‘광개토태왕’이라 해야 더욱 정확한 표현이다. 광개토태왕비문을 보면,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이란 긴 시호가 나온다. 또한 광개토태왕릉, 중원고구려비 등 고구려 유적에서 발견되는 호칭은 모두 ‘태왕’으로 되어 있지, ‘대왕’이라는 칭호는 어느 유적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대왕’ 이라는 칭호는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 이하 사대주의 학자들에 의해 중국에 대해 스스로 낮추고자 쓴 표현일 뿐이다. 밖으로 뻗어나가며 제국의 질서를 구축한 왕에게 붙였던 호칭이 태왕이었으며 태왕은 제국의 군주를 칭하는 보편적 용어였다. 지금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TV드라마 <태왕사신기>의 제목에서도 그러하듯 정식 호칭은 바로 ‘광개토태왕’이다.
‘선왕의 한을 풀리라’
어릴 때부터 체격이 크고 의지가 굳었던 광개토태왕의 가장 큰 관심은 고구려를 어떤 나라보다 강하게 키우는 일이었다. 광개토태왕의 할아버지 고국원왕은 백제의 근초고왕과 평양에서 싸우다가 화살을 맞고 죽었다. 전쟁 중에 왕이 죽은 이 사건은 고구려인에게는 최고의 수치였다.
뿐만 아니라, 고국원왕의 비극은 또 있었다. 342년, 연나라의 모용선비족에게 고구려의 수도가 점령당했다. 이때 연나라의 모용황은 고국원왕의 아버지인 미천왕의 시신을 파가고 어머니인 주씨 태후와 왕후를 끌고 갔다. 이에 고국원왕은 이를 돌려받기 위해 진귀한 물건을 바치고 볼모를 주는 등 13년 동안이나 모용선비에게 끌려 다녔다. 이러한 선대의 비극은 광개토태왕의 영역확장 계획에 강력한 동기를 부여했고, 장차 고구려가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지표가 되었다.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은 선왕의 수모를 씻는 일엔 비록 실패했지만 내치에 힘써 고구려의 국력을 크게 신장시켜 놓았다. 그리하여 고국양왕 때 고구려는 주변국들 가운데 가장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특히 공정한 조세수취, 진대법 시행 등으로 농민들이 잘 산다는 소문이 퍼져서 후연의 백성들이 대거 이주해오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늘어난 인구는 고구려의 생산력을 향상시켰고 국력을 증강시켰다. 이러한 두 왕의 노력이 있었기에 광개토태왕은 즉위하자마자 밖으로 팽창정책을 펼칠 수 있었다.
백제성을 함락하고 신라를 속국으로
391년. 왕위에 즉위한 광개토태왕은 즉위 바로 다음해에 백제의 10성을 빼앗았다. 또한 그 해 백제 북부 변경의 주요 요새인 관미성을 함락시켰다. 관미성은 삼면이 높은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은 바다와 접해 있어 관미성을 점령할 경우 수비와 공격 모두 유리해져 백제 도읍에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10월, 태왕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관미성으로 향했다. 관미성에 도착해서 성을 포위한 지 20일 만에 성을 함락시킨 태왕은 그 뒤 백제가 공격해 올 때마다 그들을 막아냈다. 그리하여 백제 땅 안에 있는 58개의 성과 700여 개의 부락을 점령했으며, 백제의 수도인 한성(漢城,하남 위례성)까지 포위하여 결국 아신왕(阿莘王)의 항복을 받았다. 그리고 백제 왕족과 대신 10명을 볼모로 잡아 국내성(國內城)으로 개선하였다. 이후 백제는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백제왕은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고구려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여 왕자 전지를 왜국에 볼모로 보내고 왜군 수천 명을 지원받았다. 399년, 왜군은 고구려와 연결되어 있는 신라를 공격했다. 신라에서는 고구려에 급히 지원군을 요청했다. 이에 광개토태왕은 즉각 기병 5만 명을 신라에 보내어 왜군을 몰아내고 가야지역까지 추격하였다. 이때 고구려의 철기 기마군대에 크게 혼난 왜군은 그 이후로는 고구려가 무서워 다시는 바다를 건너오지 못했다.
고구려군대는 경남 해안지방에 일시 주둔하여 신라를 보호하며, 경주에도 따로 군대를 주둔시켜 신라를 완전히 복종시켰다. 이후 100년간 신라는 고구려의 제후국으로 전락했다. 신라는 이 기간 동안 군사제도, 무기, 법률, 수공업 기술 등 많은 부분을 고구려로부터 배웠다. 훗날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한반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때 고구려의 높은 문명을 배워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경주 호우총에서는 광개토태왕 제사에 사용된 제기가 출토되었고, 서봉총에서는 장수태왕의 연호가 새겨진 은그릇이 출토되었다. 이런 유물들은 당시 신라가 고구려의 속국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거란 땅을 정복하다
한편 해마다 9월이 되면 거란족이 국경을 넘어 고구려인들의 농작물을 약탈해 가곤 했다. 태왕은 국경의 백성들을 위하여 출정을 했다. 그러나 그의 군사는 비단 국경만을 수호하지는 않았다. 그의 눈은 세상을 향하여 열려 있었고 그의 꿈은 웅장하고 원대했다. 그는 천 리 안에 있는 거란군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거란군의 심장부를 목표로 삼았다.
이때 거란 땅에는 잡혀오거나 흉년 등을 피해서 온 고구려인 1만여 명이 살고 있었다. 광개토태왕은 그곳에 살던 고구려인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설득해 귀순시켰다.
“나는 그대들의 조국 고구려의 대왕이다. 그대들이 이곳으로 온 이유는 고구려에서 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대들이 조국으로 돌아가면 풍족히 먹고 살 수 있도록 땅을 나누어 줄 것이다. 백성이 있고 난 후에 임금이 있는 것이 아니더냐. 나를 믿고 조국으로 돌아가서 대제국 고구려, 살기 좋은 고구려를 함께 만들어보자.”
또한 광개토태왕은 거란족과는 달리 어린이와 여자, 노약자를 보호해 주었고 군사들의 재물약탈을 금함으로써 거주하고 있던 거란인들의 마음도 얻었다. 단순한 정복활동만이 아니라 백성을 사랑하고 내실을 다질 줄 알았던 것이다.
후연을 제후국으로 삼다
광개토태왕의 정복활동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은 후연을 공격하여 멸망시킨 일이다. 태왕의 즉위 당시 고구려의 서변 정세는 고구려에 상당히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중국대륙은 361년 서진 멸망 이후 ‘5호16국’, ‘남북조시대’로 불리는 혼란기의 시대에 있었다. 이 혼란은 300년간이나 지속되었다. 백제를 굴복시킨 후, 드디어 광개토태왕은 402년 동안 기다려 왔던 후연 공격을 시작했다.
첫 목표는 후연의 평주자사가 있는 숙군성. 이곳은 후연의 수도인 용성과 멀지 않은 곳으로 현재의 조양시 부근이다. 광개토태왕이 숙군성을 공격하자, 후연의 평주자사 모용귀(慕容歸)는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후연의 왕 모용희(慕容熙)는 고구려 요동성을 공격했으나 고구려 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다음해 모용희는 후연의 북쪽에 위치한 거란을 공격하다가 실패하여 고구려군과 거란군에게 3천 리나 쫓겨나갔다.
이후 광개토태왕은 후연을 완전히 제압하기 위해 407년에 5만 대군을 동원하여 거란과 함께 사방합전(四方合戰)으로 대대적인 공격에 나섰다. 이때 고구려군은 유주성전투(柳州城戰鬪)에서 후연의 십만 대군을 격퇴시키고 적군의 갑옷 1만여 벌을 비롯한 군수물자를 빼앗는 대승(大勝)을 거두었다.
이렇게 되자 후연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 고구려 사람인 ‘고운’이 왕으로 추대되게 된다. 고운은 고구려 왕실의 자손이었다. 고운의 할아버지 고화는 모용황이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끌고 간 고구려 백성 5만 여명의 포로 중 한 명이었다. 고운은 자신이 고구려계임을 드러내고자 원래의 고씨 성을 되찾았다. 408년, 광개토태왕은 고운을 고구려의 제후왕으로 인정하고 그 지역에서 철수한다. 광개토태왕은 후연 지역이 한족과 선비족 등 이민족이 많은데다가 중원의 여러 나라와 자주 다툼을 벌여야 하는 특성이 있는 만큼 직접 지배를 하지 않고, 고구려에 복종하는 제후국으로 세우고 철수한 것이었다.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
광개토태왕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주위의 그 어떤 민족도 고구려를 넘보지 못했다. 장수가 선봉에 서서 위태로운 곳에 먼저 이르면 모든 병사는 더없이 막강해진다고 하였다. 광개토태왕은 위태로운 형세에 이르렀을 때도 피하라는 부하들의 권유도 뿌리치고 선봉에 서서 병사들과 더불어 싸웠다. 소수의 정예 병력으로 쏜살같이 달려가 공격하는 그의 전격전 모습은 구천지상(九天之上)에서 벼락치듯 했다고 한다. 또한 말의 머리까지 갑옷을 씌운 철기 기마군단과 개마무사, 그리고 당나라 화살의 한계가 500보임에 반해 무려 1000보, 즉 약 500미터까지 날라 갔던 활, 맥궁은 고구려의 막강한 군사력을 더욱 높여 주었다.
전쟁 후에는 나라의 부강에 전력을 기울였다. 백성들을 위해 모내기를 할 때, 집을 지을 때 태왕은 군사들이 직접 백성들을 돕게 하였고 성을 쌓아야 할 때는 농사기를 피하게 했다.
출산을 장려하여 임산부는 나라에서 돌봐주었고 아들을 낳으면 개 한 마리와 술을, 딸을 낳으면 돼지 한 마리와 술을 주었으며 쌍둥이를 낳으면 한 명의 양육비를, 세 쌍둥이를 낳으면 둘의 양육비를 나라에서 부담할 정도였다 한다.
태왕은 평화가 계속되자 아들 거련(이후 장수태왕)을 데리고 백두산에 오른다. 백두산에는 단군성조께서 풍백과 우사를 거느리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제단이 있다. 태왕은 태자 거련과 함께 신단수 아래에서 선조들께 제사를 지냈다.
“우리 고구려는 천손, 하늘의 후손이다. 선조들이 가꾸고 다스린 이 땅을 대대손손 물려주어야 한다.”
413년 10월. 광개토태왕은 남쪽지방을 순항하고 돌아와 병상에 누운 지 2달 만인 제위 22년, 39세의 나이로 서거한다.
고구려의 혼을 간직한 광개토태왕비
고구려 수도였던 만주의 집안시에 가보면 높이가 무려 6.39미터나 되며 무게만 해도 37톤이나 되는 거대한 돌에 광개토태왕의 업적을 새긴 비석이 있다. 청나라가 200여 년간 요동지역을 사람의 출입을 금하는 ‘봉금지역’으로 설정해 그 존재가 흙속에 묻혀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가 1877년경 다시 발견된 태왕비.
비석에는 고구려 건국에서 광개토태왕에 이르는 역사, 광개토태왕의 정복활동, 그리고 광개토태왕의 무덤을 지키는 수묘인에 대한 규정 등이 담긴 1,775자의 글귀가 있다. 태왕의 아들 장수태왕이 414년 부친의 무덤을 만들면서 함께 새긴 것으로 중국과 일제에 의해 많이 훼손당하였으나 대륙을 굽어보며 고고하게 1600여년을 견뎌온 고구려의 역사를 간직한 소중한 유산이다.
광개토태왕의 무덤은 집안시에 있는 태왕릉으로 알려져 있다. 장수태왕의 무덤으로 알려진 장수태왕릉(장군총)이 높이 12.4미터, 바닥 한 변의 길이가 31.6미터인 반면, 광개토태왕릉은 높이 30미터에 바닥 한 변의 길이가 65미터로 동양의 피라미드라 불리는 장수태왕릉보다도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
한민족 통일문명의 기틀을 마련하다
광개토태왕에 의해 고구려는 세계질서를 좌우하는 거대 국가가 되었고 이후 550년까지 큰 전쟁 없이 평화를 유지했다. 북중국의 백성들은 평화로운 고구려로 수없이 이주해 왔고, 고구려는 평화를 바탕으로 수준 높은 문명을 건설했다. 장안성을 비롯한 거대한 건축물, 고분벽화 등 위대한 예술품이 이때에 만들어졌다.
광개토태왕릉비에는 다음과 같은 노래가 씌어져 있다.
은혜로운 혜택을 하늘에서 받으시어
위엄 있는 무력을 사해에 떨쳤노라.
나쁜 무리들을 쓸어서 제거하시니
뭇사람이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도다.
나라가 부유해지고 백성이 잘 살아
온갖 곡식이 풍성하게 익었도다.
그가 죽은 후 고구려 사람들은 그를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즉 ‘국강상 지역 무덤에 계시는 넓은 영토를 개척하시고 나라를 평안하게 하셨던 사랑스런 큰 임금님’ 이라고 불렀다. 그의 업적이 넓은 영토개척에 있었음은 분명하지만, 고구려 사람들은 그를 영토를 넓혀준 임금일 뿐만 아니라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준 위대한 태왕으로 기억했던 것이다.
광개토태왕은 백성들이 편안히 살기 위한 여러 가지 제도를 정비하고, 고구려 국토를 개발하고 정비하는 일에도 힘썼다. 태왕이 개척한 지역의 평지는 백성들이 농사짓는 땅으로 개발되었으며 그가 개척한 거대한 영토는 더욱 많은 물자를 생산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국내 상업과 해외무역이 함께 발달하여 백성들의 삶은 더욱 윤택해졌다.
또한 광개토태왕의 업적 가운데 하나는 백제와 신라, 가야가 모두 고구려의 직간접적인 지배하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들 나라에 고구려 문화가 전파됨으로써 서로간의 문화적 일체감이 강화되고, 민족의식이 생겨남으로써 차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기반이 되었다고 하겠다. 고구려의 축성술이나 토기제작 기법, 무덤의 형태, 건축술, 무기와 갑옷, 여러 제도 등이 두 나라에 전파되어 5세기 이후에는 삼국간의 문화적 차이가 많이 줄어들었다.
22년간의 짧은 치세였지만 고구려의 전성기를 연 광개토태왕. 그는 단지 영토를 넓힌 것만이 아니라 고구려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한민족의 위대한 문명을 건설할 힘을 만들었다. 더욱이 광개토태왕의 정복활동으로 인해 삼국이 점차 하나의 일체감을 갖게 된 것은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전기점이 되었다고 하겠다. _ 김영현(포항 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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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도서>
『삼국사기』
『고구려 천하의 중심을 선포하다』효형출판
『고구려 문명기행』고구려 연구재단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창해 출판사
<일러스트 제공>
김산호 화백.『 한국오백대천황존영화집』
ⓒ증산도 본부, 월간개벽 2007.11월호 http://www.greatop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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