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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를 지켜낸 구국의 명장 을 · 지 · 문 · 덕 [역사인물탐구]

by 바로요거 2008. 10. 11.

 [역사인물탐구] 고구려를 지켜낸 구국의 명장 을지문덕

 

 


 

정주호 _ 서울 광화문


 
 “대개 동서고금에 역사나 야담이 많지만 그 중 전쟁을 하면서 적은 군사로 대군사를 물리침에 을지문덕만한 사람이 있었는가? 약한 세력으로 강한 세력에 대적함에 을지문덕만한 사람이 있었는가? 한 나라의 대신(大臣)으로 백만대군의 적진에 들어가 정탐함에 을지문덕만한 사람이 있었는가? 안으로는 정치와 교화에 힘쓰고 밖으로는 적국을 방어하여 한 몸으로 장수와 재상의 직을 겸임했으되 행동에 있어 여유 있었고 동요됨 없음에 을지문덕만한 사람이 있었는가?(후략)” - 단재 신채호 <을지문덕(乙支文德)> 中에서 -
 
 
 사천재제일대위인(四千載第一大偉人) 을지문덕
 고구려의 창업군주 주몽의 일대기를 다룬 MBC 드라마 <주몽>을 이어 <연개소문>이 방영되면서 고구려와 당시의 영웅들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700년 고구려사에 역사적 인물이 주몽, 광개토열제, 연개소문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사천재제일대위인(四千載第一大偉人)’이라며 우리나라 4000년 역사상의 인물 중에 첫 번째로 꼽았던 살수대첩의 주인공, 을지문덕 장군이야말로 고구려 역사에서 우리가 먼저 떠올려야 할 이름이다. 실제로 장군은 우리 역사에서 시대와 이념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으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몇 안 되는 인물 중의 한 명이다.
 
 장군에 대해서는 현재 『삼국사기(三國史記)』와 『환단고기(桓檀古記)』 등에 몇 줄의 기록만이 전해올 뿐이다. 하지만 단재 선생은 “역사책을 읽는 사람들이여, 을지문덕의 역사가 일부만 남아 있는 것을 한탄하지 말라. 다만 이 몇 줄의 기록만으로도 그 신(神)과 같은 인물됨이 다 드러난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비록 역사기록은 부족하지만 수나라 100만 대군을 무찌른 불세출의 영웅 을지문덕 장군의 활약상과 웅혼한 심법세계에 대해 알아보자.
 
 
 을지문덕 장군에 대한 전설
 『삼국사기』 「열전(烈傳)」 을지문덕 편에 따르면 장군의 가문이나 출생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고 한다. 장군의 성씨와 혈통에 대해서 지금도 말이 많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환단고기』「태백일사(太白逸史)」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와 『해동명장전』에서는 장군이 평양 석다산 출신임을 밝히고 있는데 실제로 이 부근에는 장군에 대한 전설이 많이 전해오고 있다.
 
 석다산은 해발 270m 가량의 나지막한 산으로 현재 평안남도 증산군 석다리에 위치해 있다. 석다리에는 장군이 어린 시절 석다산 아래 석굴에서 글을 읽고 무술 훈련을 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또 평안남도 평원군 화진리 불곡산에는 장군이 구렁이를 베기 위해 내려친 칼에 모서리가 떨어진 돌책상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은 장군이 이미 어린 시절부터 그 천성(天性)이 문무를 겸비하였으며 그 정신이 산과 같이 우뚝하였음을 잘 보여준다.
 
 
 피할 수 없는 대결, 고구려와 수(隋)
 581년 양견(楊堅:文帝)은 수(隋)를 건국하고 589년에 남조(南朝)인 진(陳)을 멸망시켜 통일왕조를 세우면서 400여년에 걸친 중국의 분열시대가 마감되고 중국 역사상 가장 강대한 국가가 들어서게 되었다. 당시 수의 기세가 워낙 대단하여 사납기로 유명했던 흉노와 돌궐도 수에 굴복하였고 그 밖의 수많은 나라들도 연이어 수에 굴복했다.
 
 이처럼 수나라의 힘 앞에 전 아시아가 벌벌 떨고 있었지만 고구려만은 홀로 강건한 태도로 수와 대치하였다. 천손민족을 자부하며 광개토열제 이래 대제국을 건설하여 안정된 평화를 누리고 있던 고구려와 천자국임을 자처하며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수나라, 자연 두 세력은 자웅을 다툴 수밖에 없었다.
 
 수문제의 중원 통일 1년 후인 590년, 고구려의 26대 영양제(�陽帝)가 즉위했다. 영양제 즉위 초에는 고구려와 수나라 모두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평화적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영양제 8년인 597년 수문제가 보낸 국서(國書) 한 통에 상황은 돌변한다.
 
 “넓은 하늘 밑은 다 짐의 신하가 되는 것이니, 이제 고구려 왕을 내쫓고 관리를 보내 다스리고자 한다. 그러나 왕이 이제라도 마음을 고쳐먹고 행실을 바꾼다면 짐의 좋은 신하이니 어찌 관리를 두랴. 요수(遼水)가 넓다한들 장강과 비교해 어떠하며, 고구려 군사가 많다한들 나에게 망한 진(陣)나라와 비교해 어떠한가? 짐이 왕의 허물을 문책하려 한다면 장수 하나만 보내도 족하지만, 그래도 개과천선할 기회를 주려하니 왕은 반드시 짐의 뜻을 알고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도록 하라.” (『수서隋書』)
 
 사실상의 선전포고에 크게 노한 영양제는 여러 신하들을 모아 어떻게 회답할 것인가를 논하였다. 이때 강이식(姜以式) 장군이 “이같이 오만무례한 글은 붓으로 회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회답할 것입니다.” 하고 개전하기를 주장하였다.
 
 이듬해인 598년 영양제는 말갈족(靺鞨族) 병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직접 요하를 건너 요서지방에 대한 공격을 단행한다. 4차에 걸친 고구려와 수나라의 16년 전쟁(598~614)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당시 수나라를 비롯한 외적의 힘은 강성하였지만 우리 민족은 그 영토와 힘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셋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수(隋)와의 일전을 앞두고 같은 민족마저 적으로 둔 고구려의 국운은 그 어느 때보다도 위태로웠다. 당시 신라는 수에 고구려 정벌을 청하는 이른바 걸사표(乞師表)를 보내기도 했으며, 백제는 수나라의 두 번째 고구려 침공에 길잡이를 자청하기도 했다.
 
 배달로부터 이어진 한민족의 종통(宗統)을 계승한 고구려의 위기. 러한 시대상황은 위기를 타개할 영웅을 간절히 필요로 했고 을지문덕 장군은 이 같은 시대적 상황이 탄생시킨 대영웅이었다.
 
 
 고수(高隋)전쟁과 을지문덕
 영양제의 선공에 격노한 문제(文帝)는 즉각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 정벌을 명했다. 이것이 바로 제1차 고수전쟁인데 단재 선생의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 따르면 당시 병마원수(兵馬元帥) 강이식 장군은 임유관1)에서 수군을 대파한다. 임유관 전투 이후 문제는 고구려를 크게 두려워하여 다시는 고구려를 넘보지 못하게 된다.
 
 단재 선생의 말대로 만일 고구려가 전쟁에만 능했다면 16년 동안 지속된 수와의 전쟁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고구려의 주변을 살펴보면 크게는 수와 대치하면서 아래쪽으로는 신라와 백제가 버티고 있고 북으로는 거란, 말갈, 돌궐, 선비 등의 나라가 있었다. 사방에 적을 둔 고구려가 고립되지 않고 수와 맞설 수 있었던 것은 실로 을지문덕 장군의 신묘한 외교수완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고구려는 말갈과 거란을 이용하였고 백제와 신라 또한 결국 중립을 지킬 뿐이었으며 돌궐도 수나라를 군사적으로 돕지는 못하였다. 수양제가 출병에 앞서 ‘고구려의 왕이나 을지문덕이 찾아오거든 잡아두라’는 명을 장수들에게 내린 것으로 보아 살수대첩 이전부터 수나라는 장군을 경계하고 있었으며, 이는 당시 고구려에서 을지문덕 장군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고구려를 지켜낸 살수대첩


 612년, 아버지와 형을 죽이고 등극한 수양제가 또 다시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니 이것이 제2차 고수전쟁이다. 고금의 전사(戰史)를 통틀어 짝을 찾아보기 힘든 최대 규모의 원정군을 맞아 을지문덕 장군은 그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이 전쟁에서 장군은 그 유명한 살수대첩을 승리로 이끌어낸다. 살수대첩은 장군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록이지만 장군의 진면목을 파악하기엔 부족함이 없다. 『환단고기』「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는 살수대첩의 상황을 아래와 같이 전하고 있다.
 
 “홍무(弘武) 23년에 수나라 군사 130만여 명이 바다와 육지로 쳐들어왔다. 이때 을지문덕은 기묘한 계책을 내어 병사들을 출동시켜 그들을 격멸하고 추격하여 살수에 이르러 드디어 크게 쳐부수었다. 수나라 수군과 육군이 함께 무너져 요동성(지금의 창려성)으로 살아 돌아간 자는 겨우 2700여 명 정도였다. (중략)
 양광은 임신년에 고구려를 침략한 도둑으로 그 군대의 규모는 전례 없이 가장 컸다. 우리 조의군 20만으로 양광의 군사들을 거의 모두 멸했으니, 이것은 을지문덕 장군 한 사람의 힘이 아니겠는가?
 을지공같은 이는 곧 만고의 한 시대를 창출한 거룩한 호걸이로다.”

 
 『삼국사기』는 조금 더 구체적인 내용을 전하고 있다.
 
 “양제(煬帝)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이에 좌익위(左翊衛) 대장군 우문술(宇文述)은 부여도(扶餘道)로 나오고, 우익위(右翊衛) 대장군 우중문(于仲文)은 낙랑도(樂浪道)로 나와서 아홉 개의 군부대와 함께 압록강에 이르렀다. 을지문덕이 왕명을 받아 그 진영에 나가 거짓 항복하니, 사실은 그 허실을 엿보기 위함이었다. 우문술과 우중문이 이에 앞서 황제의 밀지(密旨)를 받았는데 고구려의 왕이나 을지문덕이 찾아오거든 잡아두라 하였다. 우중문 등이 억류해두려 하였는데, 상서우승(尙書右丞) 유사룡(劉士龍)이 위무사(慰撫使)였는데 굳이 말리므로, 그만 을지문덕을 돌아가게 하였다.”
 
 

 

 


 개전 후 요동성을 공격하던 수양제는 성이 함락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우문술과 우중문에게 30만의 별동대를 주어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을 공격하게 한다. 별동대는 100일분의 식량을 짊어지고 진군하였는데 많은 병사들이 식량을 땅에 묻었기 때문에 압록강에 도착했을 때는 굶주림과 피로로 수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져 있었다. 이를 파악한 장군은 적을 평양성으로 유인하여 유명한 시 한 수를 보내어 수나라 장수들을 희롱한 후 두 번째 거짓 항복을 하게 된다.
 
 “신통한 계책이 하늘의 이치를 깨달은 듯하고
 기묘한 계략은 땅의 이치를 모두 아는 듯하네.
 이미 전투에 이겨서 그 공이 높으니
 이제 만족할 줄 알고 그만둠이 어떠한가?”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수나라 장수들은 을지문덕 장군의 말을 믿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매복해있던 고구려 병사들의 공격을 받으며 힘겹게 퇴각을 하던 수군이 도착한 곳이 바로 지금의 청천강, 즉 살수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수군이 살수에 도착했을 때 일곱 명의 승려들이 바지를 걷고 강을 건너고 있었다 한다. 이를 본 수군은 물이 얕다고 판단하여 앞 다투어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이 7명의 승려를 기념하여 칠불사가 세워졌다 한다). 그렇게 수군이 절반가량 강을 건넜을 때 갑자기 물이 불어나고 사방에서 고구려 군사들이 활을 쏘며 일제히 공격을 해 30만의 수군은 거의 전멸했고 살아 돌아간 자가 2700명에 불과했다.
 
 수나라 장수를 희롱하며 백만 대군을 물리친 장군의 지략도 지략이지만, 한 나라의 대신(大臣)으로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백만 대군의 진영에 단신으로 침투해 적을 기만한 장군의 대담함과 심법이야말로 더욱 대단하다 할 것이다.
 
 
 삼신 상제님을 받들었던 을지문덕
 14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의 기억 속에 구국의 영웅으로 남아있는 을지문덕 장군. 그는 누구보다 굳센 의지와 독립정신의 소유자였다. 수나라에 비해 국토는 10분의 1, 인구는 100분의 1에 불과했던 고구려가 수나라에 대항하는 것은 사실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국운이 걸린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을지문덕 장군은 타협 대신 당당한 투쟁을 택하였고 마침내 적을 크게 무찔러 고구려를 지켜냈다. 만약 살수에서의 대승이 없었다면 고구려는 수나라에 멸망당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면 신라와 백제 또한 무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동사강목(東史綱目)』에도 ‘을지문덕의 살수대첩과 양만춘(楊萬春)의 안시성전투(安市城戰鬪)로 많은 나라가 우리나라를 강국으로 여겨 감히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는 을지문덕의 공로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장군의 사후 비록 고구려는 망하였지만 장군의 이와 같은 정신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우리 민족은 수많은 국난을 이겨낼 수 있었다.
 
 희대의 명장 을지문덕 장군은 무(武)에서만 능한 것이 아니었다. 『환단고기』에는 장군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구절이 나온다.
 
 “을지문덕 장군은 고구려국 석다산 사람이다. 일찍이 산에 들어가 도를 닦다가 삼신 상제님을 뵙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 후 해마다 3월 16일에 강화도 마리산에 올라가 제물을 차려 경배하였고 10월 3일에는 백두산에 올라 상제님께 제사를 올렸다. 상제님께 제를 지내는 것은 곧 신시(神市)의 옛 풍속이다.
 을지문덕 장군이 말하기를, ‘도로써 삼신 상제님을 섬기고 덕으로써 백성들을 두터이 다스릴 수 있어야 천하에 할 말이 있다고 생각한다.’”

 
 
 을지문덕 장군은 살수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던 명장이기 이전에, 조의선인(?衣仙人)으로서 삼신 상제님을 모시고 상제님의 가르침을 받아 내린 진실한 신교의 구도자였다. 위로는 삼신 상제님을 모시고 아래로는 덕으로써 백성을 돌보던 을지문덕 장군이야말로 성과 웅을 겸비한 참 지도자였다.
 
 고구려는 장군과 같이 상제님을 모시고 국가와 민족의 번영을 위해 언제라도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조의선인들이 국가를 든든히 떠받치고 있었다. 살수에서 을지문덕 장군을 도와 눈부신 활약을 했던 이들은 고구려를 이끌었던 주역들이었으며 우리 역사의 기둥과도 같은 존재들이었다.
 
 
 대한이 필요로 하는 참 영웅
 단재 선생은 ‘영웅과 세계’라는 논설에서 영웅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영웅은 세계를 창조한 신성(神聖)이다. 세계는 영웅이 활동하는 무대다. 만일 상제(上帝)가 세계를 창조한 이래 영웅이 하나도 없었다면, 망망한 산과 들은 새와 짐승이 울부짖는 폐허가 되었을 따름이다.”
 
 고구려를 건져낸 을지문덕 장군이 바로 이와 같은 존재였다.
 
 오늘날 대한민국도 영웅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어 주체성을 잃어버린 채 무기력해진 대한민국에 희망의 새소식을 전해줄 영웅이 필요하다.
 
 지금의 대한에 필요한 21세기의 을지문덕, 21세기의 조의선인은 과연 누구일까? 과거 우리의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민족을 이끌어 온 영웅들이 그랬던 것처럼 위로는 우주의 주재자이신 상제님을 모시고 아래로는 상제님의 진리로써 이 세상을 밝혀 이 지상에 상제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지금 이 순간도 빨간 정성으로 분투하고 있는 ‘증산도의 제세핵랑 칠성도꾼’. 그들이야말로 바로 오늘날 우리 민족을 건져내어 대한을 진정 대한답게 만들 역사의 참 영웅일 것이다.

 

ⓒ증산도 본부, 월간개벽 2006.10월호 http://www.greatope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