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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 선견지명으로 나라를 구하다 [역사인물탐구]

by 바로요거 2008. 10. 11.

 

[역사인물탐구] 지행합일의 개혁가 율곡 이이

 

 


 

안수민 _ 서울 광화문


 “세상 사람의 상정(常情: 보통의 인정)으로 말하자면, 선비란 진실로 얄미운 자입니다. 선비는 정치를 논하라면 멀리 당(唐), 우(虞)의 고사를 인증하고, 임금에게 간하라면 어려운 일만을 권유하며, 벼슬로 얽어매도 머무르지 않고, 은총을 내려도 즐겨하지 않으며, 오직 자신의 뜻대로만 행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옹골찬 선비로서 시대적 사명을 다하고자 했던 율곡 이이가 말년에 선조께 올린 상소문에 나오는 말이다.
 
 어린 나이에 권력의 기반세력이 없는 상태에서 왕의 자리에 오른 선조는 조정의 신하를 그 누구도 잘 믿지 못했다. 하지만 율곡은 선조의 지지 하에 유가의 대동세계, 성리학적 이상세계를 구현해보려는 큰 뜻을 품고 있었다. 그리하여 관직에 나간 후로 줄곧 선조에게 성인이자 개혁군주로 거듭나기를 경책하다시피 직간했는데, 위 상소에는 여기에 대한 인간적인 미안한 마음이 엿보인다. 물론 이 때 올린 상소에도 속히 개혁을 단행키 바라는 한결같은 마음이 들어있다.
 
 16세기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 성리학’을 토착화시킨 거장이었던 율곡은 학문에만 전념했던 학자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정치에 참여한 경세가로서의 면이 더 돋보인다. 국가의 화(禍)를 눈앞에 두고도 조정이 분열되는 것이 안타까워 동분서주하고, 민생을 위해 사회적 폐단을 개혁하고자 고군분투했던 율곡의 생애는 49세로 마감한 것이 너무도 짧게 느껴질 만큼 치열했다.
 
 
 지고한 충정의 선비, 율곡
 율곡(1536 ~ 1584)의 어릴 적 이름은 현룡(現龍). 어머니 신사임당이 율곡을 낳던 날, 검은 용이 바다에서 침실 쪽으로 날아와 마루 사이에 서려 있는 꿈을 꾼 뒤 얼마 안 되어 율곡이 태어났기 때문에 붙여진 아명이다. 그래서인지 율곡은 어릴 때부터 총명함이 남달랐다.
 13세에 진사 시험에 합격한 후로 29세에 관직에 오르기까지 무려 아홉 번이나 각종 시험에서 장원을 휩쓸어 세상 사람들은 그를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불렀다. 게다가 율곡은 효성이 무척이나 지극했고, 학문의 폭이 넓어 당시에는 거의 금기시되던 불교와 선학에까지 두루 통했다. 그런 만큼 그는 당대의 인재들과 폭넓게 교우했는데 우계 성혼, 송강 정철, 구봉 송익필, 토정 이지함 등이 모두 그의 지기였다.
 
 율곡이 관직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할 무렵의 조선은, 건국이래 최대의 학문적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고려 말에 전래되었던 성리학이 ‘동방의 주자’라고 불렸던 이황에 의해 ‘조선의 성리학’으로 완성된 것이다. 이러한 선대의 학문적 성취는 성리학의 이념을 현실사회에 구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었다. 게다가 이황, 조식과 같은 당대 성리학의 거목 밑으로 포진해있던 쟁쟁한 인물들이 정계에 많이 진출함으로써 이상사회를 실현할 수 있는 자신감이 확산되어 있었다. 이런 때에 조정에 발을 들여놓은 율곡은 꿈과 포부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조선왕조가 개국한 지 200년이 지나면서 사회적 폐단들도 깊어지고 있었다. 사색당쟁으로 관료층 사이의 대립은 더해가고, 나라가 혼란한 틈을 타 농촌에서는 탐관오리가 백성을 괴롭히고 세력가들은 토지를 점점 넓혀갔다. 나라는 어지럽고 민생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들이 율곡을 학자로서보다는 경세가로 나서게 만들었다.
 
 율곡은 어렸을 때부터 도덕적 이상을 가진 군자라면 마땅히 현실에 참여해서 잘못된 제도와 법률을 고치는데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당시의 조선왕조는 이제껏 갖추어진 토대를 기반으로 이상적 국가로 도약하느냐 아니면 위험요소를 극복하지 못하고 위기의 나락으로 떨어지느냐 하는 분기점에 와 있었기에 율곡은 끊임없이 개혁을 주창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조정 관료들의 무사안일한 태도와 불화로 율곡의 개혁책은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또한 동인과 서인 양당을 조화시키고자 하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고르게 등용할 것을 주장했지만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조정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47세에 병조판서를 맡았을 때, 율곡은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국방에 힘쓸 것을 주장했다. 당시 조선은 근 100년 동안 평화로운 상태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국방력이 많이 약화되었고, 변경에선 끊임없이 오랑캐가 침입해와 나라를 소란스럽게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별세하기 바로 전해인 1583년(선조 16년), 왕이 참석하는 경연자리에서 ‘10만 양병’을 건의하기에 이른다.
 
 “국세의 부진함이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이와 같다면 10년이 되지 않아서 토붕(土崩: 국토가 무너지는)의 화가 있을 것이니, 미리 10만의 병력을 양성하여 위급한 때를 대비하소서.”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것을 평화시대에 맞지 않는 율곡의 지나친 걱정으로 보았고, 율곡은 시의를 민감하게 살피지 못하는 관료들을 보며 통탄해 했다. 설상가상으로 율곡의 입바른 소리를 싫어하는 신하들의 탄핵으로 심신은 지쳐 병이 더욱 깊어졌다.
 
 율곡이 병석에 누워 세상을 떠나기 이틀 전, 변방의 임무를 보러 떠나는 서익이 이전에 병조판서를 맡았던 율곡에게 조언을 구하기 위해 찾아온다. 이미 병색이 완연하여 가족들이 반대했지만 율곡은 서익에게 <육조방략>을 불러주며 이렇게 말했다.
 
 “내 몸은 단지 나라를 위한 것일 뿐이다. 이 일로 인하여 병이 더 심해진다 하더라도 역시 운명이 아니겠는가! 이는 나라의 대사이니 이 기회를 그냥 지나쳐버릴 수 없다.”
 
 <육조방략>을 부르고 바로 혼절해 쓰러진 다음날, 율곡은 다시 일어나 의관을 정제한 후 생을 마감하였다. 죽는 순간까지 흐트러짐이 없었던 그는 선비로서의 자기수양이 이미 입신의 경지에 다다랐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나라를 위해 마지막 남은 정력마저 쏟아낸 그의 지고한 충정은 진실로 역사의 귀감이 된다.
 
 
 임진왜란을 대비한 율곡의 선견지명
 
 一. 화석정에 얽힌 일화
 율곡은 생전에 국방에 대한 건의가 좌절되자, 몇 가지 대응책을 마련해 둔 것으로 보인다. 전해오는 설화에 따르면, 율곡은 관직생활로 바쁜 중에도 틈틈이 어릴 적 자랐던 파주로 가서 임진강 나루변에 있는 화석정(花石亭)에 들렀다고 한다. 화석정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사재(私財)인데, 그는 수시로 이 정자의 기둥, 도리, 서까래에 들기름을 듬뿍듬뿍 먹여두었다고 한다. 화재로 소실될 위험을 생각한다면 기이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율곡 사후 그의 말대로 10년이 되지 않아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남쪽부터 방어선이 줄줄이 무너지고, 한양에 가깝게 온 왜군을 피해 선조는 몽진을 떠나야했다. 억수같이 비가 퍼붓는 밤중에 파천행렬이 임진강변에 다다랐을 때는 방향을 가늠키 어려워 강을 건널 수 없었으나 뒤에서는 왜군이 쫓아오고 있어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기 어려웠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 그때 선조를 호위하던 이항복은 율곡의 화석정을 떠올렸다. 생전에 율곡이 무슨 연유에서인지 화석정에다 기름칠 해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석정에 불을 놓자, 과연 기름을 먹은 정자는 관솔마냥 폭우에도 끄떡 않고 활활 타올랐다. 덕분에 선조는 그 불빛에 의지해 무사히 강을 건너 의주까지 피난할 수 있었다. 화석정은 율곡이 임금을 위해 남겨둔 충심어린 배려였던 것이다.
 
 
 二. ‘섧지 않은 울음에는 고춧가루 싼 수건을…’
 또 다른 예로 도전 3편 95장을 보자.
 
 하루는 형렬이 아뢰기를 “고대의 명인은 지나가는 말로 사람을 가르치고, 확실하게 지적해서 일러 준 일은 없었습니다. 실례로 율곡이 이순신에게는 두보의 시를 천번 읽으라고 권하여 ‘독룡이 숨어 있는 곳에 물이 곧 맑네’라는 구절을 스스로 깨닫게 하였을 뿐이요 임란에 쓸 일인 것을 일러주지 아니하였고, 백사 이항복에게는 ‘섧지 않은 울음에는 고춧가루 싼 주머니가 좋다’고 말하여 직접 지시함이 없이 임진왜란 때 청병에 대처하도록 하였습니다.”
 
 이항복은, 율곡이 이조판서로 재직할 때, 나라의 동량이 될 것이라며 한음 이덕형과 함께 선조에게 추천했던 인물이다. ‘오성과 한음’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이 두 사람은, 임진왜란 7년 동안 선조를 모시며 각종 외교를 성사시켜 전란을 극복하는데 탁월한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를 모시고 호종길에 나선 이항복은 37세로서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도승지였다. 원병을 위해 명나라로 간 이덕형의 외교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마침내 4만의 원군을 끌고 조선으로 왔을 때, 이항복은 이들을 맞이하는 접빈사가 되었다.
 
 그런데 먼 조선까지 행군을 하느라 피곤했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그의 군사들은 적당히 봐서 싸움을 하는 척만 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려했지 크게 싸울 의사가 없었다. 그런 마음을 읽은 이항복은 율곡의 가르침이 떠올라 일부러 고춧가루를 싼 수건을 눈에 대고 문질러 눈물을 흘리며 조선의 다급함을 호소하여 명군을 감동시켰다. 이항복은 율곡이 10여 년 전에 화두처럼 남겼던 말의 의미를 비로소 깨달았다고 한다.
 
 
 三.‘독룡이 숨어 있는 곳에 물이 곧 맑네’
 율곡은 생전에 이순신이 급제한 후 조정에서 서로 만났을 때, ‘두보의 시를 천 번 읽으라’고 권하였다고 한다. 임진년에 쳐들왔다가 물러간 왜군은, 이후 정유년에 한 번 더 공격을 단행했다. 당시 조정에서는 앞선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이순신을 백의종군시키고 원균을 그 자리에 대신 앉혀놓고 있었다. 이윽고 벌어진 칠천량 전투에서 조선수군이 참패하자 조정은 부랴부랴 이순신을 복직시켰다. 이 때 이순신에게 남은 전함은 전멸 직전에서 건진 배, 단 13척 뿐이었다.
 
 부하와 배를 다 잃고 전쟁 중에 갖은 고초를 당한 이순신이 명량해전을 앞두고 있었을 때었다. 이순신은 명량(울돌목)의 물빛이 유난히 맑은 것을 보고, 두보의 시에 나오는 ‘독룡잠처수변청(毒龍潛處水便淸 독룡이 숨은 곳에 물이 오히려 맑네)’ 구절이 문득 떠올랐다고 한다. 그리하여 병사들에게 밤사이 일본군이 올 것이니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지시하였고, 조선 수군 모두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조선은 다시 해상권을 회복했다.
 
 율곡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후 이틀 동안 눈을 감지 못했다고 한다. 아마도 자신의 능력을 나라와 백성을 위해 온전히 발휘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데 대한 여한이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러나 후학들에게 임란을 미리 대비하게 했고, 역사적으로는 그의 제자들이 조선후기 영·정조 시대에 문예부흥기를 일구었기에 그의 꿈은 후대에나마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율곡은 사후 인조 2년에 문성(文成)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숙종 8년에는 문묘에 배향되어 유학자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일심어린 정성만이 성사재인의 관건
 도전 3편 95장의 상제님 말씀을 읽으면서 정말 궁금한 것은 왜 옛 사람들은 지나가는 말로 가르칠 뿐, 정확하게 일러주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기시(其時) 기인(其人) 기사(其事)’라는 말을 빌어서 보면, 그 때 그 일을 당한 그 사람이 자기 정성으로 알음귀를 받아내려 일을 성사시키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신도와 인사가 합일된 경지에서 맡은 바 사명을 실수없이 완수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조선사 최고의 위기였던 임진왜란 당시, 당대의 훌륭한 선각자와 그에 못지않은 인재들이 엮어낸 일화는 오늘날 상제님의 천하사를 성사재인하는 천명을 받은 우리 일꾼들에게 귀감이 된다. 역사상 가장 중차대한 ‘이 때’를 맞이한 우리들 역시 마침내 ‘그 일’을 성취하는 ‘그 사람’이 되어 역사 속에 남기를 기원하며 글을 맺는다.
 
 [참고문헌]
 이종호 『율곡, 인간과 사상』 지식산업사
 정옥자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선비』 현암사
 임철호 『설화와 민중의 역사의식』 집문당
 황훈영 『우리 역사를 움직인 33가지 철학』 푸른숲
 양재숙 『임진왜란은 우리가 이긴 전쟁이었다』 가람기획

 

ⓒ증산도 본부, 월간개벽 2007.01월호 http://www.greatopen.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