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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의 비밀코드

치우천황, 월드컵과 함께 되살아난 배달국의 영웅 [역사인물탐구]

by 바로요거 2008. 10. 11.

월드컵과 함께 되살아난 배달국의 영웅
 치우천황治尤天皇
 
 

 

 


 영광의 그날을 다시 꿈꾸며
 
 그 때만큼 순수한 열정이 온 국토를 들끓게 했던 때가 있었을까? 그때만큼 열렬히, 격의 없이, 너나 할 것 없이 함께 뛰었던 때가 있었던가? 2002년 6월의 여름을 생각하면, 어린아이처럼 해맑아지는 미소를 참을 수 없다.
 
 도대체 길거리를 가득 메운 그들은 어디서 온 누구란 말인가? 아니 그들과 함께 길거리에서 얼싸안고 하늘로 솟구치던 나는 또 어디에서 왔는가? 적어도 평화를 사랑하고, 조용한 아침의 나라로만 알고 있던 우리가 이런 ‘천방지축꾼’들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붉은색은 또 무엇인가? 그때는 물론 이런 낯설음이나 체면치레를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우리가 보았던 그때 모습이 도대체 어디서 불쑥 솟았으랴? 그것은 원래부터 우리 안에 있던 ‘멋’과 ‘신바람’이었던 것이다. 온 세계를 놀라게 했던 “대∼한민국!!!”의 함성은 ‘수천 년간 이어온 우리민족의 저력이 이런 것이었구나’ 하는 것을 모두에게 각인시키고도 남으리라.
 
 그 신명나는 풍류문화는 수천 년 전부터 하늘의 상제님께 제사 올리고 온 나라 백성들이 삼일밤낮을 축제로 보냈던 역사기록으로부터 시작되어, 그후로도 산천을 누비며 풍류를 즐겼던 풍류객들이 줄을 이었으니, 모두 한민족의 DNA 속에 각인된 문화코드랄까? 그러나 상고시대 이래 외세로부터 침략 당하고 억압받으며 짓눌려 왔던 한민족, 그 깊은 한이 2002년 마침내 터져나와 우리는 9천년 역사의 신명나는 한풀이를 시작했던 것이다.
 
 거기에다 이제는 우리에게 조금도 낯설지 않은 이가 있으니, 바로 동방배달 한민족 투혼의 상징인 ‘치우’이다. 그때 당시 ‘웬 도깨비?’ 하고 붉은악마의 마스코트를 바라보았다면, 이제는 자랑스럽게 치우기를 내보이며, 치우의 붉은 투혼이 우리를 승리로 이끌었을 거라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
 


 삿된 기운을 물리친다하여 창경궁 등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귀면와(鬼面瓦)와 온갖 무기에 새겨진 무서운 형상이 치우라는 걸 안다면 우리민족의 치우사랑이 낯선 사건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절에 가면 제일 먼저 우리를 반겨주는 사천왕상도 허리마다 치우의 형상을 두르고 있으니, 한민족에겐 치우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너무나 낯익은 미소였던 것이다.
 
 
 동방 무신(武神)의 시조, 치우천황
 치우가 국제경기에 첫 선을 보인 것은 1999년 브라질과의 축구경기 때 붉은악마가 치우를 공식캐릭터로 정하고 잠실경기장에서 4×3m의 치우기를 선보이면서부터다. 이 경기에서 1:0으로 승리하면서 치우는 ‘불패의 신’으로 다시 우리민족의 가슴에 각인되었다.
 
 그리고 2002년 한일월드컵 기간 중 경기장과 거리를 온통 붉은 물결로 장식한 도깨비 형상이 동양 고대사에 등장하는 치우천황(治尤天皇)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졌다. 치우천황은 중국 한족의 시조로 알려진 황제 헌원(黃帝 軒轅)을 제압하고 동방세계를 대통일한 배달국의 14대 자오지 환웅(慈烏支 桓雄)의 다른 이름이다.
 
 ‘환국(환인)-배달(환웅)-조선(단군)…’으로 내려오는 한민족사의 국통을 보면, 3301년간 일곱 분의 환인천제가 다스린 환국을 이어 환웅천황이 배달국을 건국한다. 그 배달국의 14대 자오지 환웅(BCE 2707년∼2598년까지 109년간 배달국을 다스림)이 곧 치우천황이다.
 
 ‘치우’에는 천둥이 치고 큰비가 내려 산천이 모습을 바꾼다는 개벽의 의미가 들어있다. 그러나 중국사서 및 우리 기록에는 ‘치’자가 벌레라는 뜻인 ‘蚩’로 표기되어 있어 우리를 당혹케 한다. 그러나 『환단고기』 「삼성기」상(上)에는 다스릴 ‘치(治)’로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우(尤)’ 자에 대해서는 ‘군에서 최고이며 제일인 수장. 군무에 제반적인 것을 관장하는 관직명’이라는 기록이 있어, 치우란 ‘군사를 다스리고 통제하는 으뜸가는 수장’이란 뜻이 된다.
 
 『환단고기(桓檀古記)』「신시본기」에는 치우천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대변경大辯經』에 말한다. 우리 치우천황은 신시의 옛 힘을 받으시어 백성과 더불어 새롭게 태어나셨다. 유망(楡罔)의 정권이 쇠약해지니 군대를 보내어 정벌하였다. 갈로산의 쇠를 캐내어 도개(刀鎧), 모극(矛戟), 대궁, 호시(弧矢)같은 무기를 대량으로 제작하여 탁록(琢鹿, 지금의 북경 일대)을 함락하고 구혼(九渾)에 올랐다. 연전연승하는 그 위세는 질풍과 같아서 만군을 겁에 질려 굴복케 하고 위세는 천하에 떨치었다…. 1년 동안에 모두 아홉 제후(諸侯)의 땅을 함락하고 … 서토(西土)의 백성들이 두려워하여 도망하여 숨지 않는 자가 없었다.”
 
 당시 중국 대륙은 염제 신농씨 나라의 8대 마지막 임금인 유망이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자 치우천황은 웅도(雄圖)의 대망을 품고 서방으로 출정하여 모든 제후들을 정벌하고 유망의 수도(공상)를 함락시킨다.
 
 “치우천황이 등극함에 이르러 구리와 쇠를 캐서 쇠를 달구어 칼과 창 그리고 대노(大弩)를 만들었고 그것으로 사냥하고 정벌함으로써 멀리 떨어져 있는 외족(外族)들이 치우를 신으로 알고 심히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치우가 만든 대궁(大弓)의 위력을 풍문에 듣고 간담이 서늘한 자가 많았다.” (『환단고기(桓檀古記)』「신시본기」)
 
 치우천황의 입성소식이 알려지자, 유망의 제후로 있던 황제 헌원은 천자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이에 대항해 온다. 그리하여 동방 고대사에서 저 유명한 탁록대전(배달국에 대한 서방 한족의 반란 사건)이 벌어져 10여 년 간 무려 73회의 치열한 공방전이 오고 간다. 치우천황은 도술로 큰 안개를 지으며 최초로 제작한 금속 병기를 동원하여 수적으로 우세에 있던 헌원의 무리를 밀어붙였다.
 
 대승을 거둔 치우천황은 황제 헌원을 사로잡아 오제 중 하나인 ‘황제’의 관직을 주었다. 이후 황제는 동방의 신교문화를 전수받았으며 차차로 정치, 병법, 금속제련기술, 농사, 음양론 등이 중원에 전수되게 된다. 최근 일고 있는 한류(韓流)열풍 뿐 아니라, 중국인들이 근원적으로 가지고 있는 공한증(恐韓症)도 사실 치우의 탁록대전 역사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한다.
 
 
 사마천 『사기』 ‘금살치우(擒殺蚩尤)’의 진실
 탁록의 대결전 중에 치우천황의 장수 치우비(蚩尤飛)가 헌원군에게 성급히 공격을 시도하다 몰살당한 사실이 있다. 이것을 두고 훗날 고조선과의 대전쟁에서 크게 패한 한무제와 그의 사관 사마천은 『사기』에서 ‘금살치우(擒殺蚩尤)’, 즉 ‘헌원이 치우천황을 사로잡아 살해했다’고 사실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놓았다. 또 당시의 상황을 ‘치우작란(蚩尤作亂)’, 즉 치우가 헌원에게 복종하지 않고 난을 일으켰다고 기록했다.
 
 설상가상으로 헌원은 중화민족의 시조로서 지존의 존재, 하늘과 같은 존재로 떠받들어 놓고, 치우는 수신인어(獸身人語, 짐승 몸에 사람 말을 함)로 묘사하여 짐승 같은 존재, 요술부리는 아주 하찮은 존재로 격하시켜 놓았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근원적인 역사 왜곡의 첫 페이지는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증산 상제님께서는 치우천황의 역사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황제(黃帝)가 난(亂)을 지으므로 치우(蚩尤)가 큰 안개를 지어 이를 평정하였나니, 난을 지은 사람이 있어야 다스리는 사람이 있느니라. (道典 2:38:1∼2)
 
 결론적으로 제후의 위치에 있었던 헌원이 천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천자인 치우천황에게 도전해온 것이니, ‘황제작란(黃帝作亂)’이라 함이 역사의 진실이다.
 
 훗날 강태공은 제나라에 봉후를 받아 팔신(八神)께 제사를 올리면서 치우를 병주(兵主)로 모셨으며, 후대에 이르러 치우천황은 무신(武神)의 시조로서 추앙을 받았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사기』의 기록이 전혀 역사적 사실과 다르게 왜곡되었음을 알 수 있다.
 
 
 치우천황, 그 불멸의 발자취
 탁록대전 후 치우천황은 동쪽으로 진격하여 회대(淮垈)의 땅을 취하여 성읍으로 삼았으며 지금의 산동성과 안휘, 강소성까지 영토를 확장시켰고 수도를 청구로 옮겨 배달국 역사의 새 기원을 열었다.
 
 그리하여 현재는 치우천황의 능이 중국 산동성에 남아 있는데 그 높이가 일곱 길이나 된다고 한다. 이후 진(秦), 한(漢) 시대에 이르기까지 동이족과 한족은 매년 10월에 치우천황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며 추앙했는데, 그때마다 붉은 기운이 비단처럼 솟아올라 사람들은 이것을 ‘치우기’라 불렀다. 그래서 치우의 이름이 ‘치우기(蚩尤旗)’라는 별[星]이름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중국 현지에 가면 지금도 치우가 팠던 우물이라든지, 진을 쳤던 자리 등에 대한 이야기가 무용담처럼 전한다.
 
 치우천황의 명성이 멀리까지 알려지자 이때부터 중국 한족들은 우리 동방 배달민족을 동이(東夷)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반면 헌원은 화하족의 조상이 되고, 당시 동이족의 일파였던 치우의 자손 중 일부는 묘족이 되었다. 심지어 동남아시아의 몽족도 스스로 치우의 후손이라 주장하고 있으며, 멕시코에서도 ‘치우’라고 쓰인 인디언의 유물이 발견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치우천황은 이제 신화라고 부르기엔 우리 곁에 너무 가까이 와있다. 고대로부터 치우천황에게 제사를 지내면 전쟁에서 불패한다는 믿음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한고조 유방은 치우천황에게 제를 지내고 항우에게 승리했으며, 불멸의 전승을 남긴 이순신 장군도 치우의 사당에 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난중일기에 전한다.
 


 2002년, 우리는 치우기를 들고 온 국민이 붉은악마가 됨으로써 이전에 없었던 승승장구를 이어갔다. 과연 2006 월드컵도 치우천황의 후손인 우리의 태극전사들이 그때의 신화를 이어갈 수 있을까.
 
 붉은 치우기의 물결 속에 4700년 전 탁록대전의 전설과 2002년의 신화가 독일의 스터디움에서 다시 재연되기를 기원해본다.
 Again 2002!!! 대한민국 아자!!!
 

이성욱 _서울 신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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