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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의 비밀코드

살아있는 민족정신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역사인물탐구]

by 바로요거 2008. 10. 11.

살아있는 민족정신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진국범(익산 신동)


 
 내가 이곳 해동조선에 지상천국을 만들리니 지상천국은 천상천하가 따로 없느니라. 장차 조선이 천하의 도주국(道主國)이 되리라. (증산상제님 말씀, 道典 7:83:7∼8)
 
 
 올해는 환기(桓紀) 9205년, 신시(神市) 5904년, 단기(檀紀) 4339년이다. 환국과 배달국, 고조선을 이어온 대한민국의 역사의 흐름 속에서 돌이켜 보면, 우리민족은 수많은 전쟁과 고난의 역경을 극복해왔지만 일제 36년 동안의 고통과 피눈물은 필설(筆舌)로 이루 다할 수 없는 과정이었다.
 
 그 암울했던 시절, 단재 신채호 선생은 오직 역사교육을 통해서만 민족정기를 회복시키고 조국의 광복을 성취할 영웅을 기르고 나아가 우리 한민족이 인류사의 주체세력이 될 수 있음을 역설하고 자신의 생명을 바쳐 몸소 이를 실천하는 거룩한 삶을 살았다.
 
 
 ◆∽ 탄생과 성장
 

단재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선생은 고령 신씨(高嶺 申氏) 26세손이며, 조선조 신숙주의 18세손이 된다. 단재 선생의 조부 신성우는 대원군의 집정기간 동안 사간원 정언 벼슬을 하였으나 낙향한 뒤에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으며, 부친 역시 외가(外家) 옆에 간신히 묘막을 얻어 살아야 할 정도로 가정형편이 어려웠다.
 
 단재 선생은 단기(檀紀) 4213년(1880년) 양력 12월 8일(음력 11월 7일), 할머니의 외가가 있는 충남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에서 태어났다. 단재 선생이 태어난 어남리는 두 부락과 함께 도리미를 이루고 있는데, 계족산(봉황산) 봉우리들이 이어지는 새둥지 같은 깊은 산속에 삼태기 모양을 하고 있어서 봉소골이라고도 한다.
 

 본래 이름은 채호(寀浩)였으나 나중에 채호(采浩)로 고치는데, 선생의 아호 단재(丹齋)는 최영 장군의 단심가에서 따온 것이다.
 
 조부로부터 한학을 배운 단재는 아홉 살에 『통감』을 통달하였고, 속독법도 익혔다. 16세가 되던 해에 풍양 조씨와 결혼을 하여 첫 아들 관일을 보았다. 그러나 부인이 분유를 잘못 먹여 관일은 우유에 체해 죽고 말았는데, 아들을 잃은 슬픔에 집 앞 도랑에 분유를 몽땅 쏟아 부으며 한탄하였다고 한다. 이 일을 계기로 결국 중국 망명동안 부인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고 이혼을 하게 된다.
 
 이후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중 북경 연변대학생이던 박자혜와 단기 4253년(1920) 재혼하여 수범과 두범 두 아들을 낳았다. 박자혜는 단기 4228년(1895)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수유리에서 태어나 숙명여학교 기예과(2회)를 졸업했다. 3 1운동 당시 서울 조선총독부 부속병원(현 적십자병원)에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소위 ‘간우회사건’을 주동한 인물이었으며 축구부 주장을 맡을 정도로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 글로써 민족정신을 깨우다
 단재는 독서에 몰두하여 이치를 궁구할 때면 집중력이 대단했다고 전한다. 19세에 성균관에 입교하였는데 당시 경학을 가르치던 이남규는 단재의 재능을 높이 사 어디를 가든지 “나의 제1 제자는 신채호, 제2 제자는 변영만이다” 라고 거침없이 이야기하곤 하였다.
 
 성균관 시절,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투옥되었으나 석방되고 문동학교에서 청년들을 가르쳤다.
 
 나라를 빼앗긴 참담한 조국의 현실에서 단재의 분노와 고뇌는 조국광복을 이루는 정신적인 계몽운동으로 승화되기 시작한다. 라디오조차 드물던 시절에 수많은 사람을 상대로 계몽운동을 펼치려면 신문이나 책을 통해서만 가능하였다. 장지연의 권유로 <황성신문>의 논설기사로 활동하게 되는데, 단재 선생의 예리하고 강렬한 필체는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이 인쇄된 뒤 황성신문은 무기 정간되고 만다.
 
 이후 <대한매일신보>에 초빙되어 뜻을 펼치기 시작한다. <을지문덕>에 이어 <이순신전>, <최도통전>을 연재했는데, 이는 조국 동포들의 응어리진 가슴속에 자부심을 심어준 단재의 혼이 담긴 명문들로 평가받는다.
 
 
 ◆∽ 굽힘 없는 붉은(丹) 정신
 단재선생에 대해서는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세수할 때 허리와 고개를 굽히지 않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그렇게 세수를 하다보니 바닥과 옷이 온통 물에 젖어 버리곤 했다. 주위의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말들을 하였지만 단재선생은 오히려 “옷 젖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소. 나는 다만 고개를 숙이기가 싫을 따름이오.” 라고 답했다.
 
 연재 글 작업을 하며 담배를 많이 피우게 되자, 단재는 담배부리가 뜨겁게 닳아 올라오면 식혀가면서 다시 피울 정도로 유명한 골초였다. 그러던 그가 <대한매일신보>에서 활동하던 시절, 즐기던 담배를 끊고 국채보상금으로 일금 2원을 냈다. 또 병들고 헐벗은 이웃이 누더기 담요로 생활하는 것을 보고 선물 받은 자신의 이불을 주고는, 정작 자신은 누더기 담요를 쓰면서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또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빠른 개화가 필요함을 절감한 단재 선생은 개화하되 주체성을 잃지 말아야 함을 주장하였는데 당시 안동출신 유림 동산 유인식과 상투문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보오, 동산은 앞으로 많은 일들을 해나가겠다면서, 대체 그 상투는 언제까지 고이 보존하시겠소?”
 
 “단재 자네가 단발을 했다고 나한테까지 그걸 강요할 수는 없네. 내게 있어서 상투는 바로 민족적 자존심이니까.”
 
 “내가 걱정하는 바는 동산 한 사람이 단발을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오. 온 민족이 하루 빨리 개화하여야 할 시기에 민족을 위하는 일에 앞장서기로 뜻을 모은 우리가 그까짓 상투하나 잘라내지 못하고 있다면, 저 산적한 일들을 누가 나서서 다 합니까? 재래 유생의 보수적인 몸가짐을 고집하면서 어떻게 구국의 혁신을 가져올 수 있다는 거요?”
 
 “….”
 
 단재의 논리가 하도 당당하여 결국 유인식은 고집해 온 상투를 잘라 버렸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애초에 상투에 민족적 자존심을 걸었던 내 소견이 좁았던 것 같네. 우리 민족의 자부심은 보다 더 큰데서 살려내야 하는 것을….”
 
 인재양성, 집필 등 구국의 노력을 펼쳤지만 국내에서의 활동에 한계를 느낀 단재 선생은 단기(檀記) 4233년(1910년) 1월 6일자 신문에 ‘한일합방론자들에게 고함’이라는 글을 마지막으로 안창호 등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한다.
 
 중국 망명시절, 한 친구와 함께 푸짐한 중국음식을 먹고 있을 때였다. 음식을 배달하는 소년에게 음식 맛이 아주 좋다고 칭찬하고 나서 물었다.
 
 “그런데 이 고기는 무슨 고기이기에 이처럼 맛이 유별나지? 어디서 온 거니?”
 
 “그 고기는 동양어라는 것으로, 일본에서 직접 가져온 희귀한 고기죠.”
 
 “뭐라고? 왜놈 음식이라고?”
 
 그는 노발대발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길로 화장실로 달려가 먹은 음식을 모두 토해 버렸다. 토하고 나서야 친구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미안하네. 하지만 왜놈 고기는 내 위장이 좀처럼 받지 않으니 별 수 없지 않은가.”
 
 단재의 정신은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1914년 중국 망명 중, 민족의 성산 백두산을 탐방하고 광개토대왕릉 등 수많은 고대사 유적을 둘러본 경험은 단재 선생의 역사의식을 크게 깨우고 비약시켰다. 자신이 구상하던 고대사에 관한 새로운 인식이 시작되고 구체화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후 신민회 인사들과 국외에 항일기지를 만들려고 했으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가서 <해조신문>, <청구신문>, <권업신문>, <대양보> 등의 발행에 참여하여 웅혼(雄渾)한 필치로 수많은 망명해외 동포들의 주목을 받으며 항일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승화된 역사의식으로 「조선사연구초」, 「독사신론」, 「조선상고사」 등을 탈고했다. 그리고 신규식의 도움을 받아, 단군의 얼을 살려 민족의 살길을 찾아보고자 하는 뜻으로 ‘박달학원’을 개설하여 청년들을 가르쳤다.
 
 
 ◆∽ 삼신신앙관과 낭가정신
 단재 선생은 상고사에 대한 인식을 토대로 ‘삼신신앙관(三神信仰觀)’1)을 가지고 있었다. 삼신신앙관은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가지고 있던 신교(神敎)에 바탕을 둔 것이다. 단군께서는 민족적 구심점인 수두제전(祭典)을 거행하였고, 이것은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삼한의 소도로 면면히 이어져 왔는데, 선생은 이러한 제천의식이 민족정신의 상징이라고 밝혔다.
 
 또한 낭가정신(郎家精神)을 회복해야 함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배달국의 제세핵랑군, 고구려의 선배(조의선인)제도, 신라의 화랑제도 등이 낭가사상의 전통맥을 이은 것인데 고려 중기까지 그 명맥이 이어지다가 묘청의 난 때 국풍파가 유학파에게 패하여 몰락함으로써 소멸하였다는 것이다. “엄격한 신분사회였던 삼국시대에 있어서 고구려 선배제도와 신라 화랑제도의 ‘선배’와 ‘화랑’이 신분을 초월하여 능력에 따라 선출되었다”고 하여, 유불선 삼도의 진액이 스민 전인적(全人的)인 다수의 근대적 영웅이 탄생하기를 고대한 것이다.
 
 역사의 중요성을 강도 높게 주장했던 단재 선생은 특히 우리 민족의 뿌리역사인 상고사(上古史)를 체계화하여 전후삼한설(前後三韓說)2), 단군 부여족의 중국식민론3)과 백제의 요서경략설(遼西經略說)4), 남북 양(兩)낙랑설5)을 발표하였다. 또한 자주적인 역사사관을 지향하고 가야 발해를 새롭게 조명하여 신라의 삼국통일을 망국통일로 혹평하였다.
 
 김부식 이래 내려오는 사대주의사학, 일제의 식민주의사학을 철폐하고 민족사학을 성립시키는데 크게 공헌한 단재선생의 정신과 노력은, 아직도 사대주의, 식민주의 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오늘의 역사현실 속에서도 찬연히 빛나고 있다. 단재 선생이 쓴 『조선상고사』는 뒷날 대종교의 교본이 되기도 했다.
 
 
 ◆∽ 투철한 이론가, 치열한 행동가
 단재 선생은 글로써 뿐 아니라 몸소 항일운동의 최전선에 투신했던 치열한 행동가였다.
 
 임시정부의 수립에도 적극 참여했던 그는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추대되자 위임통치를 미국에 건의한 경력을 들어 이에 반대를 표명하였으나 무산되었다. 그러면서 임시정부가 발행하던 <독립신문>에 맞서 <신대한>을 창간하고 임정의 잘못된 노선을 비판하는, 소위 ‘신대한 사건’을 주동하게 된다.
 
 1918년, 조국의 광복과 독립을 최초로 선포한 ‘무오독립선언’(일명 대한독립선언)에 주요 인물로 참여한 선생은 타협적이고 온건한 외교론을 배격하고 비타협적이고 무력에 의한 절대독립론을 주장하며 이를 몸소 실천한 불굴의 독립투사였다.
 
 기미(1919)년 3월 1일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소식은 단재 선생에게도 전해져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크게 실망하고는 탄식하다 못해 “에잉~” 하는 그 특유의 말을 내던지며 독립선언서를 찢어버렸다. “불과 몇 년짜리 운동을 선언했군. 이 판에 평화 운동이 다 뭐하자는 거요?” 라고 그는 말했다.
 
 무력에 의한 절대독립을 주장한 단재 선생은 임시의정원으로 참여하면서 한성정부의 법통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임시정부의 초대 수반으로 이승만이 거론되자 단재 선생은 ‘없는 나라마저 팔아먹어, 있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보다 더 나쁘다’며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결국 의정원회의에서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추대되자 단재 선생은 사임하고 임시정부 내의 준비론과 외교론에 대한 성토에 나섰다.
 
 그러는 동안에도 선생은 대동청년단(大同靑年黨) 단장, 대한독립청년단 단장, 신대한동맹단(新大韓同盟團) 부단주, 프랑스 조계 의영학교(義英學校) 교장이 되어 청년교육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신대한 사건을 계기로 상해 임정과 결별하고 북경으로 돌아온 그는 보합단(普合團), 다물단(多勿團)에서 활약하고, 무정부주의 기관지인 <정의공보> <탈환> <동방>에 많은 글을 기고하였다.
 
 특히 1923년, 의열단의 이념과 운동방향을 천명한 ‘조선혁명선언’은 항일민족운동사상 가장 강건하고 웅혼하면서 정교하게 독립운동의 이론과 방향을 체계화하고 구체적으로 제시한 문서로 손꼽힌다.
 
 그 즈음 단재 선생의 명성은 중국인에게도 많이 알려져 중국 유력지 <베이징일보>와 <중화보> 등에 논설을 실어 신문의 발행부수도 많이 늘어났고, 중국 언론계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단재 선생은 자신의 글을 한 자라도 고치게 되면 그 신문에 기고(寄稿)하는 것을 당장 그만두었다. <베이징일보>에 보낸 원고 중에 ‘의(矣)’라는 토씨를 하나 빠뜨리고 인쇄되자 당장 집필을 거부하였다. 그 신문의 사장이 찾아와 사죄하였지만 ‘중국인의 한국인에 대한 우월감으로부터 나온 것’이라 하여 끝내 집필을 거부하였다.
 
 1928년, 본격적으로 무정부주의 운동에 참여하면서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한 끝에 외국위조지폐를 만들어 이를 폭탄제조소 설치에 사용하려 하였다. 그러나 발각되어 여순감옥에 수감된다. 형기를 3년 정도 앞두고 병(뇌일혈)이 악화된 단재 선생은 결국 단기 4269년(1936년) 2월 21일, 이국의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57세의 일기로 순국한다. 순국 이전에 병보석으로 감옥문을 나설 기회가 있었지만, 보증인이 친일파라는 이유로 거부하였다.
 
 
 ◆∽ 민족사의 주역으로, 새 시대의 영웅으로 깨어나자
 그런데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은 단재 신채호 선생뿐 아니라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역사 속에 몸을 던진 독립운동가들의 상당수가 아직도 무국적 무호적자라는 사실이다. 1912년 일제는 조선통치를 위해 새 민법인 ‘조선민사령’을 공포했는데, 단재 선생은 “일제가 만든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며 신고를 거부했다. 그렇게 신고를 거부했던 독립운동가 200∼300명이 지금도 무국적 상태로 남아있다.
 
 거기에 반해 친일세력들의 권력과 지위는 대를 이어 전해지고, 그것도 모자라 당시 일제로부터 받은 땅까지도 다시 찾겠다며 야단들이다.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 또한 제대로 대우도 받지 못하고 삶도 평탄치 못하다. 단재 선생이 임시정부 초기 이승만의 정책에 반대했기 때문에 첫째 아들 신수범은 신변을 위협받아 몇 번의 위기를 넘겨야 했다. 고철장사에 넝마주의, 부두노동자를 전전하다가 결국 아버지의 족적을 따라 북만주로 갔다. 둘째 아들 신두범은 단기 4275년(1942년)에 영양실조로 타계했다. 그리고 단재 선생의 부인 박자혜 여사는 단기 4277년(1944년)에 병사했다. 신수범은 단재 선생의 국적을 찾으려 했으나 찾지 못하고 결국 단기 4324년(1991)년에 타계했다.
 
 선생의 며느리 이덕남씨는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이 땅에서 자부심을 갖는다는 것은 사치”라며 “일생을 재판과 재판을 거듭하며 법정에서 자신의 정체를 확인받으며 살아야 하는 존재”라고 토로했다.
 
 뒤늦게 정부에서는 순국선열 단재 신채호의 큰 뜻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단기 4311년(1978년) 묘소(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305)옆에 사당을 지어 영정을 봉안하고 기념관을 세웠다. 그러나 단재 선생은 조국 땅에서도 여전히 편치 못하다.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고 있는 묘소를 이장하려는 유족들과 청원군이 땅보상 문제로 난항을 겪고 있다고 한다. 광복된 조국을 물려준 선열들에 대한 후손의 도리로서 송구하기 그지없다.
 

 

 


 단재는 천지의 바른 정기를 받는 구도자의 자세로 뿌리로 돌아가 역사혼을 되살렸다. 이론가이면서 실천가로서 항일운동을 했던 그는 신교(神敎)의 종주국으로서 제천의례(祭天儀禮)를 회복하고 낭가정신(郎家精神)을 이어 세계사의 주역이 되는 다수의 영웅들이 출세하기를 학수고대하며, 일편단심 투철한 애국애족(愛國愛族)의 삶을 살았다.
 
 아! 고결하고 거룩한 단재 신채호 선생의 혼백이 수호하시는 이 땅 대한민국. 9200년 민족사의 주역으로, 새 시대의 영웅으로, 동포여 깨어나자!!!
 
 
 <참고자료>
 신채호, 『조선상고사』1, 2, 일신서적출판사, 1995년 4월 20일
 신채호, 『조선사 연구(초)』, 범우사, 2004년 2월 10일
 계연수 엮음, 고동영 옮김, 『환단고기』, 한뿌리, 2005년 3월 20일)
 신채호, 정필선 번역, 『을지문덕』, 단재문화사, 1955년 6월 25일
 김삼웅, 『단재 신채호 평전』, 시대의창, 2005년 08월 15일
 단재문화예술제전추진위원회

 
 
 글쓴이 진국범은 치의학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익산에서 치과를 운영하고 있다. 원광대학교 치과대학 외래교수를 하고 있으며 익산시 치과의사회 이사를 맡고 있다. 또한 인터넷 까페 <역사왜곡의 진실을 밝히자> 부운영자로 활동중이다.

ⓒ증산도 본부, 월간개벽 2006.03월호 http://www.greatope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