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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의 역사문화

한글과 닮은 일본 신대문자의 미스테리를 밝힌다!

by 바로요거 2007. 11. 14.

한글과 닮은 일본 신대문자의 미스테리를 밝힌다!

한글과 닮은 일본의 신대문자?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보다 훨씬 앞선 시대에 있었다는데 어떻게 된거지 하는 마음으로 보신 분들이 많을텐데요

백만불 미스테리라는 프로를 보고서 .. 어처구니가 없어서 바른 정보 공유차원에서 보내드립니다 많은 회원님들께서 한글의 원형이 신대문자라고 주장하는 일본인들을 프로에서 보고 분노하시는 모습도 보았는데요

한글의 원형인 단군조선시대의 가림토문자에 대해서는 입을 딱 닫으셨더군요. 가림토를 이야기 하지 않으니 당연 신대문자는 조작이다라는 방향으로 편집될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역사교과서가 바뀌어야 하는 부분이니 방송에서는 어쩔수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할수도 있지만,,.
가림토문자에 관해서는 이미 KBS역사스페셜 등에서 다루어진바 있습니다

자 그럼 한글과 신대문자 그리고 원시한글 가림토문자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할까요


백만불미스테리 바로가기 클릭

 

<한글과 닮은 신대(神代)문자는 누가 만들었나>  [연합뉴스 2005-02-12 13:46]

 '구 Iㅏ 아 ㅅㅗ △ㅣ 다 ㄴㅗ' 일본 신사(神社)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문자다. 일본 사쿠라 신궁의 축문에서부터 신사 깃발과 신사 앞 석비까지 신사 여기저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본에서 한자 이전 고대에 사용했다고 해 신대(神代)문자라고도 불리는 이 문자는 한글과 유사한 생김새 때문에 한글의 원형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일본의 신대문자 연구자들은 이 문자가 조선 세종대왕 이전부터 사용됐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하지만 일본 정통 역사학계에서는 일본에는 고대 문자가 없었다고 보고 있다. '일본서기'에도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신대문자는 누가 왜 만들었을까. 14일 오후 7시 5분에 방송하는 SBS TV '백만불 미스터리'는 일본 신대문자를 둘러싼 이런 의문에 관심을 표시한다.

프로그램은 국내 신대문자 전문가의 입을 빌려, 19세기 일본 국학자 히라타 아쓰네가 메이지유신을 앞두고 한글을 신대문자라고 이름 붙여 사용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당시 불교와 유교를 배척해야 할 일본에 신도(神道)를 옹립할 수 있는 새로운 문자가 필요했다는 것. 조선통신사의 잦은 왕래로 일본에 들어와 있던 한글을 신의 문자라고 포장해 세상에 내 놓았다는 가설이다.

아울러 방송에서는 일본이 신대문자를 만들어내고 한글의 원형이라고 주장하는 숨은 의도에 대해서도 알아본다. cool@yna.co.kr (끝)


훈민정음은 옛 글자를 참고했다

<<세종실록과 훈민정음 해례본에 나오는 고전(옛 글자)를 참고했다는 구절>>

(1)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받아 되었고, 새 글자는 아니다. 언문은 전(前)조
선시대에 있었던 것을 빌어다 쓴 것이다...... (세종실록 103권 ; 세종23년에
발표한 글)

(2) ....이 달에 상감께서 친히 스물 여덟자를 지으시니, 그 자는 고전(古篆)을 모방한 것이다.... (세종실록25년;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첫 발표문)

(3)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옵서 정음 스물 여덟자를 창제하시고, 간략하
게 예의를 들어서 보이시면서 이름지어 가로되 훈민정음이라 하시니, 상형하되 글자
는 옛날의 전자를 본따고
.
......
(정인지 (해례서문) : 훈민정음 제작원리 등을 설명한 책으로 현재 고려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음)

(4)....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근본 삼은 것으로 새로운 글자가 아니며 곧 자형은 비 록 옛날의 전문을 모방했더라도 용음과 합자가 전혀 옛 것과 반대되는 까닭에 실로 근거할 바가 없는 바입니다.....
(한글 재창제를 반대하는 최만리와 당대유학자들의 집단 상소문)

한문과 한글은 누가 만들었는가?

@정보화시대 의 필수품, 한글의 우수성
21세기의 벽 두, 우리나라는 정보화시대의 선진국 지위를 자리매김 했습니다.
이웃나라인 중국과 일본은 정보화에 있어서 우리나라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왜일까요?

다름 아닌 한국인이 사용하는 한글의 우수성 때문이지요. 컴퓨터 자판을 보시면 왼손은 자음 오른손은 모음을 치게 되어 있습니다. 오른손 왼손을 번갈아 가면서 아주 빠른 속도로 타이핑이 가능합니다.
세상에 이런 문자는 없습니다. 외국인들을 상대로 우리 한글을 가르치면 불과 40분만에 한글로 표기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학창시절 영어 알파벳 다 배우는데 며칠 걸렸죠? 또 휴대폰을 보면 천지인 삼재를 형상한 ·ㅡ ㅣ 세 개면 모든 모음을 표기할 수 있지요? 세상에 이런 문자가 있나요? 없습니다. 한민족 고유종교인 증산도의 경전인 『도전』에는 머지 않은 장래에 우리말과 글을 세계인들이 배워간다고 예고되어 있습니다.
일본을 봐요. 히라까나 가타카나를 쓰는데 이걸 외워서 타이핑하려면 골치 좀 썩을 겁니다. 중국을 봐요. 한자를 컴퓨터로 입력하려면 얼마나 힘든지 여러분 다 아실 겁니다. 삼재(三才)와 오행(五行)의 우주원리가 담긴 한글, 정말 대단한 문자입니다. 알파벳보다도 월등히 우수한 단연 세계 최고의 문자입니다.


@한글은 세종대왕과 집현전 신하들의 창작품일까?
2년 전 KBS 역사스페셜에서는 한글과 관련된 특집방송을 한 적이 있지요. 한글은 집현전 학사들과는 무관하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도리어 세종대왕은 집현전 학사들이 알면 모화사대(慕華事大)에 어긋난다고 반대할까봐 아예 비밀리에 작업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세종대왕께서는 한글을 창제하시는데 뭘 갖고 작업을 하셨을까요?
조선시대 어떤 학자는 몽골 글자(蒙字)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원나라 때 라마승 파스파가 만든 파스파문자란 뜻이죠. 그런데 그것을 한글과 비교해보면 한두 글자 빼고는 닮은데가 없습니다. 어떤 학자는 또 범자(梵字, 산스크리트 문자)를 모방한 거 아닐까? 라고 했는데 역시 한두 글자 빼고는 전혀 안 닮았습니다. 정인지가 쓴 서문에는 옛 전(篆)자를 모방했다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여기에 해답이 있는 것 같군요. ^^;

@한글은 고조선문자
옛 전자(篆字)라고 한 것으로 보아 다른 나라 문자 모방한 것이 아니라 우리 문자를 개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때는 고조선 3세 단군이신 가륵 임금 때입니다. 단군께서 신하인 삼랑(관직명) 을보륵에게 명하셔서 가림토(加臨土) 문자를 만드셨다고 합니다.(『환단고기』)

이게 한글의 첫 작품입니다. 이것은 고조선 후기까지 사용되다가 사용빈도가 줄어든 것으로 보입니다.

 
 
 


 
 
 고조선 3대 가륵단군 [김산호 화백 그림]
 
@일본열도로 건너간 한글
가림토 문자는 고조선시대와 열국시대 초기에 한민족이 일본열도로 이주하면서 건너갔습니다. 일본 역사의 초창기를 『일본서기』에서는 신대(神代)라고 부르는데요. 이 무렵에 일본으로 유입된 문자이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신대문자라 부르지요.
일본의 수많은 신사(神社)에는 신대문자가 새겨진 명문과 비석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와 더불어 일본 고대사의 귀중한 사료라 할 수 있는 『고사기(古事記)』는 백제인 태안만려(太安麻呂)가 완성했는데요. 원래는 아래 사진처럼 신대문자로 표기되었습니다.

<일본 신대문자 : 한글과 비슷하네요 > 

@인도로 간 한글
가림 토 문자는 기원전 21세기경에 인도로 건너간 것으로 보입니다.
송호수 교수님이
인도 구자라트 지방(인도 서북부지역)에서 그 지역 사람들이 사용하는 문자가 한글과 거의 흡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국내에 보고했지요. 많은 학자들이 주목했습니다. 구자라트에는 주로 드라비다인(후술)들이 거주하고 있는데요.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까지도 우리와 흡사하다고 하지요.

가림토 문자가 건너간 계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환단고기』「단군 세기」에 의하면 5세 단군 구을 임금 때 신독(身毒: 인도)사람이 표류하여 동쪽 바닷가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당시 인도에는 게르만계 백인인 아리안족이 아닌 드라비다족이 살고 있었는데요. 이들은 백인도 흑인도 황인도 아닌 희안한 인종이라고 하지요. 최근의 연구결과 한국인과 드라비다인은 공통의 유전자가 발견된다고 하는군요. 언어 비슷해서 무려 6백 개가 넘는 단어가 같습니다. 예를 들어 엄마, 아빠, 오빠, 다리, 벼, 메뚜기(드라비다어 메디), 쌀 등등.... ^^;
여기서 쌀과 메디, 벼 등을 통해 농업교류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기원전 3천 년경에 벼농사가 시작되었음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경기도 일산에서 발견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가 이를 말해주고 있어요. 따라서 쌀과 메디, 벼는 우리말이 인도로 건너간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인도 구자라트 지방에서는요. 아낙네들이 빨래 방망이로 세탁을 하는 모습, 조랑말 같은 조그만한 말들이 보인다는 군요. 고조선의 과하마가 건너간 모양입니다.
이처럼 고조선시대에 인도와 우리나라는 엄청난 교류가 있었던 것입니다. 고조선시대는 팍스 코리아시대였어요.(멋지다 ^^)

우리나라는 4천 년 전부터 국제화, 세계화의 문을 열었던 것입니다 .가림토문 은 공용문자로 사용되었겠지요.
인도 구자라트문자는 훗날 산스크리트 문자로 변형되었고 이것은 다시 티벳문자가 된 뒤 원나라 승려 파스파에 의해 몽골문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조선시대 몇몇 학자들이 훈민정음을 범자(梵字)나 몽자(蒙字)라 오해한 것이지요.
충청도 제천지역의 고인돌에서는 드라비다인으로 추정되는 인골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가야 김수로왕의 왕후인 허왕옥도 인도 아유타국에서 왔다고 하지요.
 
@한문의 기원은 배달국의 녹도문
다음은 한문에 대 해 알아보지요.
일반적으로 표의문자인 한문의 기원을 은나라의 갑골문자에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골문자는 어디서 온 것일까요? 그 이전시대의 중국에는 창힐문자가 있었습니다. 중국문자의 시초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창힐은 배달국 14세 치우천황과 동시대(B.C.28세기∼B.C.27세기)의 인물이었습니다. 창일의 고향 산동반도 지역에서는 창힐문자가 발견되고 있습니다.그런데

자아~ 그림을 보세요. 중간에 있는 비석(倉聖鳥跡書碑)문이 창힐문자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오래된 문자가 있습니다. 그 왼쪽에 보이는 신지문자 이른 바 녹도문입니다.
『환단고기』「태백 일사」소도경전본훈 기록에 보면 환웅천황께서 신지(神誌: 벼슬이름) 혁덕에게 명하여 녹도의 글로써 천부경을 기록케 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그 당시에 녹도(사슴 발자국 모양)란 문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1942년에 발행한 『영변』지에 실려 있습니다. 『환단고기』의 저자 계연수 선생이 평안북도 영변군 묘향산에서 천부경이 새겨진 옛 비석을 발견한 내용과 더불어 신지 전자(篆字)를 옮겨 놓은 것이지요.
『환단고기』를 세상에 공개한 이유립 옹도 저서 『대배달민족사』에 평양 소재 법수교 고비(古碑)라고 밝히면서 신지 전자를 소개해 놓았습니다. 그밖에 구한말 서예의 대가인 김규진 선생이 저술한 『서법진결』과 백두용(白斗鏞) 편, 『해동역대명가필보 (海東歷代名家筆譜)』에도 신지 전자가 실려있습니다.

이 신지 전자의 초기 모습이 바로 위 그림 맨 왼쪽의 낭하리 암각화입니다. 『환단고기』에 인용된『대변설』의 주에 이르기를 "남해현 낭하리에 계곡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古刻)이 있다. 그 글에 환웅천황께서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린다고 했다"고 했습니다. 이 문자는 5세 환웅이신 태우의 환웅천황의 막내아들 태호 복희씨께서 육서(六書)의 원리로서 개량하게 됩니다. 그래서 좀더 세련된 형태가 되었지요. 이것을 용서(龍書)라고 하며 이것이 널리 통용되던 신지문자입니다. 주로 중국보다는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다가 14세 치우천황 때 창힐이 배달국의 자부 선생으로
부터 배워 중국에 널리 보급했습니다. 그전에는 주로 결승문자(結繩文字: 노끈문자)가 사용되고 있었죠. 결승문자는 남미 인디언, 잉카제국에서 통용된 것입니다.

창힐이 중원에 유통시킨 신지문자는 훗날 동이족인 은나라 사람들에 의해 한문의 기원이 되는 갑골문자로 개량되었습니다. 갑골문자는 동이족이 만들었지만 현대 중국어의 어순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왜냐면 당시 중국은 화하족(중국 한족)과 동이족이 뒤죽박죽 섞이다보니 머릿수 많은 중국인들 언어체계로 통합되었기 때문이지요.

중국사서의 고전(古典)인 사마천의 『사기(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은나라가 망하고 은나라 왕실의 기자(箕子)가 은나라 유민을 고조선으로 도망쳐 왔다고 합니다. 당연히 갑골문자를 들고 왔다고 봐야겠죠. 신지문자보다 더 진보된 형태라고 할 수 있겠구요. 그가 정착한 지역은 현재 유물, 유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지금의 발해 북안, 요하 서쪽입니다. 은나라 계통 유물인 네모진 솥이 출토되었는데요. 거기에 기후(箕侯)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따라서 당시 고조선의 국경선이 그 지역(요서)지역을 포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고조선에는 별도의 문자가 사용되고 있었지요. 하나는 가림토문 하나는 신지문자입니다. 요녕성 여대시 윤가촌에서 출토된 토기의 접시부분에는 신지문자가 새겨져 있습니다.(위의 그림 오른쪽 위)
거기에다 중국에서 사용된 갑골문자(한자)까지 들어왔습니다.
 
그리하여 무려 3가지의 문자가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열국 제후들의 노력으로 산업생산량과 교역이 급속히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자연 고조선과의 교역량도 급증하게 되었지요 따라서 시간이 흐를수록 한자사용이 증가하게 되었고 동아시아의 공용문자가 되었습니다. 가림토문과 신지문자는 점차 소멸된 것이지요.
 


▶ 일본의 신대(神代)문자 관련 보충자료

일본에는 한글을 닮은 고문자가 있다. 대마도의 아히루 가문에서 전해져왔기 때문에 아히루 문자라고 하며 신들의 시대에 신들이 쓰던 문자라 해서 신대문자라고 한다.

신대문자는 지금도 일본 대마도 이즈하라 대마역사 민속자료관과 일본의 국조신인 천조대신을 모신 이세신궁 등에 아직 보관되어 있다.

일본 이세신궁에 소장된 신대문자의 기록은 서기 708년의 유물이다.

서기 700년 무렵은 대조영이 고구려 멸망 후 발해를 건국했을 무렵이며, 세종대왕은 1446 년에야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단군조선 시대가 신화였고, 가림토 문자도 한단고기에 나왔으니 믿을 수가 없다고 전제한다 면, 1446년의 훈민정음에서 708년의 신대문자가 나왔다고 말할 수는 없고, 그렇다면 일본의 신대문자에서 훈민정음이 나왔는가?

실제로 일본의 오향청언(吾鄕淸彦 고쿄 기요히코)이란 학자 등도 708년의 신대문자의 유물을 증거로 들면서 "일본의 신대문자가 조선으로 건너가 훈민정음을 낳게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환단고기가 세상에 나오고 그것을 연구한 결과, 자신의 "일본의 아히루 문자가 조선 훈민정음의 뿌리다."는 주장을 철회하고

"신대문자의 원형인 원시한글이 환단고기에 수록되어 있다."고 인정했다.

일본의 천황가 자체를 비롯, 일본이 단군조선이래 한국인이 건너가 세운 나라라는 것은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뿐 일본인들에게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그것을 인정하기를 기본적으로 꺼릴 뿐 아니라 오히려 기회만 있으면 거꾸로 왜곡하려고 애를 써왔다.

그런데 그런 풍조 속에서 일본의 학자가 그때까지 자신의 주장을 뒤엎고 가림토 문자에서 일본의 아히루 문자가 나왔고 그 뿌리임을 학자적 양심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정통 사학계와 국어학계에서는 아직도 "훈민정음이 세종대왕 혼자서 만들었는지 신하들과 함께 만들었는지" 논쟁 중인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가림토 문자는 단군조선의 역사적 실제를 입증해준다.

단군조선이 있었다면 단군할아버지도 실제하셨던 민족의 조상임을 믿을 수 있고, 가림토 문자가 발견되는 곳은 단군조선의 강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단군조선의 가림토가 일본에 보급되어 아히루 문자가 된 것이다.

 

 

출처:한민족의 비밀과 사명(다음까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