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이 힘들여 말할 때에는 설혹 그릇된 점이 있을지라도 일에 낭패만 없으면 반박하지 말라. 그도 또한 척이 되느니라. (2편 79:3)
인간은 홀로 사는 것이 아니다. 남과 어울려 살아가게 되어 있다. 남과 어울리는 과정에서 是非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상제님께서도 친히 남과 같이 하여야 된다고 말씀하셨다.
* 상제님께서 어느 주막을 들르시든지 항상 사처를 치우지 않으시고 반드시 봉놋방으로 들어가시므로 성도들이 그 이유를 여쭈니 말씀하시기를 "봉놋방은 복으로 늙은 방(福老房)이니 진실로 좋은 방이라." 하시고 또 “모든 것을 남과 같이 하여야 좋으니라.” 하시니라. (9편 31:1~3)
태을주 수행이 讀誦을 바탕으로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음으로 읽거나 아니면 호흡수련만을 고집할 경우에는 다른 사람과의 관련성이 줄어들고 외부와는 차단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독송을 할 때 남과 어울리지 않으면 수행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수행을 방해하게 된다. 소리가 나기 때문이다.
함께 어울린다는 말은 조직생활이라는 뜻이다. 사람과 사람간에 어울림을 더 쉽게 하기 위해 인간은 조직 생활을 한다.
다음 상제님 말씀으로 유추하면 시시비비라는 것은 세속적인 욕망으로 인한 것이다. 또 상제님께서 "시속에 어린 학동들에게 통감(通鑑)을 가르치나니 이는 첫 공부를 시비(是非)로써 들여 넣는 것이라. 어찌 마땅하리요."(9편 107:6) 하셨다.
* 하루는 성도들에게 글 한 수를 외어 주시니 이러하니라.
天是天非修道道(천시천비수도도)요 不求俗地得長生(불구속지득장생)이라
- 하늘이 옳다 그르다 하지 말고 '도를 닦겠다'고 말하라. 세상의 욕망을 버리고 영원한 삶의 길을 구하라. (9편 111:1-4)
是非라는 것은 분열, 분산을 조장한다. 선천에는 분열발달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시비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주가 하나로 통일하는 마당에 분열이라는 것은 당연히 지양해야 할 것이다.
태을주 수행은 핵이자 씨앗, 뿌리, 근본을 찾아 가는 것이기 때문에 태을주를 많이 읽으면 시야가 넓어진다. 조직 생활속에서 시시비비가 자꾸 드러나 보인다는 말이다. 마음이 시시비비에 어울리게 되면 물론 즉시 참회하여야 한다. 태을주를 읽으면서 시시각각 넓혀지는 사고를 통해 드러나는 나의 더러운 마음을 참회를 통해 닦아야만이 태을주를 제대로 읽는 보람이 생기는 것이다. 참회없이 태을주를 열심히 읽어봐야 다음 태모님 말씀처럼 두통이 될 뿐이다.
* 태모님께서 문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도통(道通)이 두통(頭痛)이다. 이놈들아! 어른거려서 못사느니라." 하시고 (11편 147:1)
시시비비의 마음이 일면 마음이 바르지 못함을 참회하고, 행동함에 있어서는 내 생각을 너무 주장하지 말고 포용하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일에 낭패만 없으면 반박하지 말라는 상제님의 말씀을 다시 새겨보기 바란다.
여하튼 인간의 마음이 넓지 못하면 남의 생각에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고 부정적인 생각이 말로 표현되면 그 말에 독기가 실리게 된다. 상제님께서 "네가 아직 언행이 덜 풀려서 말에 독기(毒氣)가 있도다."(3편 15:3)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 "惡將除去無非草요 好取看來總是花니라."
- 밉다고 베어 버리면 풀 아닌 게 없고 좋게 취해 보면 모두가 꽃이니라.(3편 15:4)
포용하라는 말씀이시다. 포용하는 마음은 들어주는8) 마음이다. 상제님께서 "시속에 어린 학동들에게 통감(通鑑)을 가르치나니 이는 첫 공부를 시비(是非)로써 들여 넣는 것이라. 어찌 마땅하리요."(9편 107:6) 하셨다. 시비하지말고 남의 말을 들어줘 보라. 포용하는 마음이 생기면 내 잘못이 하나하나 탄로나기 시작한다. 잘못된 마음이 드러나면 즉시 참회하여 고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태을주 수행은 근본을 향해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조직의 중심을 향할 줄 알아야 한다. 중심을 향하지 못하면 결국 태을주 수행 자체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길로 들어설 수 있다.
조직속에서 중심을 향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 리더를 중심으로 신앙하는 것이 태을주 수행의 기본이라는 말이다.
상제님께서 천지의 근본은 心法이라 하신 말씀이 있다.
* 道心柱를 박아 놓으면 짜구로도 못 깎고, 도끼로도 못 깎고, 불로도 못 태우고, 벼락이라도 못 때릴 터이니 부디부디 도심주를 잘 가지라. 천지 집을 지으려면 기둥이 완전히 서야 천지공사가 무궁하리라. (9편 49:6~7)
도장 조직생활를 하다보면 이꼴 저꼴 많이 보다보면 조직을 떠나고 싶어진다. 마음이 흔들린다는 말이다. 이 마음을 붙들지 않으면 태을주 수행이 안되는 것이다.
설령 도장의 간부들이 잘못하는 것이 보여도 다음 상제님 성구를 생각하면서 조직이 흔들리지 않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 알지 못하는 사람이 제 노릇 하려고 하는 말을 네가 탄하여 같이 하면 너도 그와 같은 사람이 될지니 무엇으로 대인을 이루겠느냐. (3편 178:10)
여하튼 마음에 도심주를 박아놓아야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도장이라는 조직을 떠나지 않는다. 천지집의 기둥이 되어 조직자체가 되어버리면 떠날 수가 없지 않는가?
왜 필자가 조직중심의 신앙과 태을주 수행을 연관지어 말하는가? 증산도 도운은 상제님께서 보신 공사대로 움직이고 있다. 혹여 판안의 눈으로 잘못되어 보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생각일 뿐이다. 그리고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상제님의 천지공사가 잘못되었다 판단하는 것과 같은 말이 된다.
생각해 보라. 어찌 상제님의 일을 감히 평할 수 있겠는가? 한치 앞도 모르면서 어찌 안다고 하느냐는 말이다. 상제님께서 "나는 판밖의 남모르는 법으로 한다. 그리고 도통한 사람도 모르게 한다"(4편 9:3-5) 하셨으니 내가 판단하는 것은 결국 잘못 판단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상제님께서 다음 말씀처럼 순결한 마음으로 정심 수도하여 천지공정에 참여하라 하신 것이다.
* 이제 말세의 개벽 세상을 당하여 앞으로 무극대운(無極大運)이 열리나니 모든 일에 조심하여 남에게 척을 짓지 말고 죄를 멀리하여 순결한 마음으로 정심 수도하여 천지공정(天地公庭)에 참여하라. (2편 20:2-3)
그래서 내 생각을 버려야 한다. 마음을 비우고 내 주장을 버리고 천하사에 임해야만이 그것이 正道요 태을주 수행의 지름길이다.
상제님께서 "統以氣主張者也라. 내가 주재하는 천지 4계절의 만물 창조원리는 모두 氣로써 주장하느니라."(2편 110:8) 하셨으니, 주의주장이 강하면 그것이 옳든 그르든 기가 강하게 뭉치게 된다. 몸에 기가 뭉치면 수승화강의 순환을 막아버리게 되어 죽음으로 내몰게 된다.9) 나 욕하는 마음을 보고도 마음에 걸리지 않아야 기가 순환을 원할히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태모님께서 "道通이 頭痛이다"(11편 147:1) 하신 것이다. 우리가 수행을 하는 것은 결국 通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道通은 先知後覺 이후에 열리는 것이다. 선지후각이라 함은 이치를 알고 이를 바탕으로 체험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覺이 궁극으로 가면 通하는 것이다. 사물의 내면을 그냥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물의 내면을 객관적으로 볼려면 내 주장을 버려야 한다. 마음을 크게 비움으로써 근본적인 인격혁명이 일어난다. 태을주 수행을 통해 성공하려면 주의주장을 버리고 크게 마음을 비워야 한다. 순수한 마음으로 천지공정에 참여하여야 한다.
내 생각을 버려야 한다. 논리적이어야 하지만 그 논리를 버려야 내 생각을 버릴 수 있다. 내 생각이 고집덩어리가 되면 그것이 외부와 반응하여 갈등을 일으키고 그 상극기운으로 남을 파괴하며 또한 자신도 파괴한다. 내 생각으로 가득찬 이 마음을 꺼집어 내버려야 한다.
참고로 동식물의 세포는 몸의 명령에 따라 자살로 생명 지킨다.10) 아포토시스(apoptosis)가 그것이다. 이 순간에도 우리 몸 속 세포 수백만개가 죽어간다. 늙거나 병들어서가 아니라 몸의 명령에 따라 자살을 한다. 정상적인 생명활동이다. 만약 세포가 명령대로 자살하지 않으면 암11) 발생 등 문제가 생긴다.
물갈퀴 같던 태아의 손발 부위에서 손가락과 발가락이 형성되고, 월경 때 자궁 점막조직이 떨어져 나가는 것, 눈의 수정체와 피부가 생기는 것은 모두 세포 자살의 결과이다. 사람이 아니라도 올챙이 꼬리가 없어지고 낙엽이 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세포 자살은 몸에 닥친 위험을 제거하기도 한다. DNA가 손상돼 암이나 기형을 일으킬지 모르는 세포, 바이러스에 감염된 세포에는 자살 명령이 내려진다. 하루에 2억 마리가 만들어지는 사람 정자의 `품질'을 유지하기도 한다. 해로운 돌연변이를 일으킨 정자에게는 자살명령이 떨어진다.
이처럼 인간의 몸속에 내생각의 갈등으로 인해 생겨난 氣덩어리를 없애야 한다. 그래야 전체를 살릴 수 있다. 만약 이를 없애지 못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 다음 성구말씀에서 물로 뛰어내리라 하신 그 어처구니없는 그리고 믿기지않는 말씀이 바로 너를 죽이게하는 너의 생각에게 자살명령을 내리시는 것이다.
* 10년이 찬 뒤에 주인이 그 성의를 칭찬하며 '선술을 가르쳐 주리라.' 하고 그 부근에 있는 연못에 데리고 가서 이르기를 '물위로 뻗은 버들가지에 올라가서 물로 뛰어내리면 선술을 통하게 되리라.' 하거늘 (8편 9:3-4)
자살명령을 받지 않는 세포가 생명을 죽이듯이, 반발심 불평심등이 있는 한 결코 通을 얻을 수 없다. 무조건 순응해야 한다. 반발심을 끊어라. 삶을 살면서 누구에게든 반발심을 끊어버려야 한다. 마음이 넓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상제님께서 "파고 또 깊이 파라. 마음 얕은 것이 가장 큰 한(恨)이 되리라.(6편 2:1-2) 하셨다. 깊이 파기 위해서는 필히 마음을 넓혀야 한다. 좁고 깊게 파기는 쉽지 않다. 넓고 깊게 파는 것이 쉽다. 넓게 파는 것과 깊게 파는 것은 體와 用의 관계에 있다. 그래서 모든 상황에 대해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는 포용력을 가져야 한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무조건 긍정적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내생각을 가지지 않을 수 없고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각자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외부의 반응에 의해 갈등의 소지를 항상 가지고 있다. 이것이 상극원리이다. 내생각을 없애려면 먼저 이런 상극기운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상극기운에 의해 크게 발현되지 않았던 내생각이 돌출하는 것이다. 뚜렷이 표현되는 것이다. 이렇게 표현될 때 이 허물을 닦아내어야 한다. 내생각이 강하면 강할수록 닦아내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너무 주관이 강한 사람은 태을주 수행을 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내생각이 너무 없는 사람은 리더의 자격이 없지 않는가? 인간조직은 궁극적으로 다스림의 문제로 귀결된다. 상제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每人이 6인씩 전하라. 포교의 道가 먼저 六任을 정하고 차례로 전하여 천하에 미치게 된다."(8편 55:1-2) 하시고 柳贊明과 金自賢에게 "각기 10만 명에게 布敎하라."(8편 55:3) 하시면서 다음 성구에서처럼 治天下의 문제를 언급하셨다.
* "평천하(平天下)는 내가 하리니 치천하(治天下)는 너희들이 하라. 치천하 50년 공부니라." 하시니라. (8편 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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