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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사 바로알기

단군조선의 강역도 다시 그려야 한다.

by 바로요거 2010. 1. 20.

단군조선의 강역도 다시 그려야 한다.
강도 위만에게 패한 번조선왕 기준이 간 곳은 어디?
 
성훈 컬럼리스트
본 글은 아래 시리즈의 (3부)입니다.
(1부) 동북공정보다 무서운 시조(始祖)공정
(2부) 조선과 연의 경계인 패수는 어디인가?
(3부) 단군조선의 강역도 다시 그려야 한다.

(2부)에서 조선과 연나라의 경계였던 패수(浿水)의 위치가 정확하게 밝혀짐으로서 단군조선의 강역이 어디까지였나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조선은 이천년 넘게 존속한 연방국가라 당시주변국과의 세력판도에 따라 축소된 적도 있고 팽창된 적도 있기 때문에 국경선을 하나로 그어 그것이 단군조선의 강역이라고 말하기는 사실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강도 위만(衛滿)이 배반하여 번조선의 기준(箕準)왕을 축출할 BC 194년 당시는 2,096년을 이어온 조선은 이미 망했고, 북부여의 해모수단군이 그 뒤를 이은 지 40년이 조금 넘은 상태이기 때문에 세력이 전성기 때보다 많이 축소된 때로 보아야 한다. 

불과 27년 전인 BC 221년 연나라가 장수 진개(秦開)를 파견하여 조선의 서쪽 변두리 땅 침략해 만번한(?)을 경계로 한 적도 있다. <사기 흉노열전>에는 “진개가 돌아와 동호를 습격해 쳐부수니 동호가 천여리를 물러났다 (秦開...歸而襲破走東胡 東胡却千餘里)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동호는 번조선을 의미한다. 

그 후 번조선과 연왕(燕王) 노관은 패수를 국경선으로 삼게 된다. 패수는 황하북부 하남성을 흐르는 심수와 황하 사이를 흐르는 강이고, 燕지역은 당시 황하부근 하남성에 있었기 때문에 번조선과 연나라는 거의 황하를 경계로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즉 쉽게 말해 단군조선의 남쪽 경계는 황하까지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당시 중국과 조선의 동쪽 경계는 발해(渤海)였다. 1926년 이후 지금은 중국의 내해(內海)를 발해로 부르고 있으나, 당시 중국의 동쪽 경계인 동해(東海)는 대야택(大野澤) 또는 거야택(鉅野澤)으로 불렸던 발해였다. 즉 발해의 동쪽에 있는 산동성 일대도 배달국과 단군조선의 강역이었다.
 

 

 

▲   고대 발해는 하남성과 산동성의 경계로 남북 300km 동서 100km나 되는 큰 내륙호수였다. 고대 중국은 이 발해를 동해(東海)로 불렀다. 당나라 측천무후가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봉했다. 그 이유는 대조영이 세운 대진국이 발해 부근 하남성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단고기>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이 오랫동안 섬서성까지 관할하고 있었던 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고대 중국은 지금의 섬서성과 하남성을 동시에 차지한 적이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고대 중국은 아무리 넓게 봐줘도 섬서성과 하남성 일대 뿐으로 보인다. 그를 제외한 나머지 중국 땅은 모두 조선의 강역으로 보아야 한다. 

<단군세기>에 따르면, “13세 흘달단군 B.C 1767년 낙랑과 합쳐 진격하여 관중(關中:섬서성)의 빈.기(邠.岐)의 땅에 웅거하며 관청을 설치하였다.”라는 기록과 “22세 색불루단군 B.C 1266년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기(邠.岐)에 웅거하도록 하면서 나라를 여(黎)라 칭하고 서융(西戎)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를 차지하고 있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빈(邠)은 섬서성 함양시(진시황의 도읍) 일대이고, 기(岐)는 섬서성 기산현의 동북이다. 

 

 

▲  고대 지도에 표시된 빈.기는 섬서성 서쪽이다.  이 지역을 단군조선이 오래돗안 점령하고 있었던 기록이 있다.

 
결국 조선과 중국의 국경은 거의 황하라는 이야기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조선의 강역을 나중에 삼국(고구려.백제.신라)이 그대로 이어받게 되는데, 고구려는 조선의 적통으로서 대연방제국을 형성하게 되는데 패수는 중국의 여러 사서에 고구려의 남쪽 경계(南界)로 분명히 명기되어 있다. 패수가 고구려의 남계란 말은 패수는 백제의 북쪽 경계(北界)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이 이와 같음에도 현 식민사학계에서는 단군조선은 신화이고 있지도 않은 기자조선과 그 뒤를 이은 위만조선의 도읍인 왕검성이 대동강 평양이고, 고조선의 강역이 만주와 한반도 일대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우리의 역사강역을 엄청나게 축소.왜곡하는 망국의 식민사학이라 아니할 수 없다.
 

 

 

▲  국영방송인 KBS 역사스페셜에서도 식민사학계의 이론과 마찬가지로 조선의 영토를 만주와 한반도로 비정하고 있다. 만주와 한반도는 고조선이 아니라 근세조선의 영토였다.

 
강도 위만에게 패한 기준이 간 해(海)는 어디인가?

<한단고기 북부여기>는 “BC 194년 번조선왕(기준)은 오랫동안 수유(須臾)에 있으면서 항상 많은 복을 심어 백성들이 매우 풍부하였다. 뒤에 떠돌이 도적떼(위만)들에게 패하여 망한 뒤 海로 들어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後爲流賊敗亡入于海而不還).”고 기록하고 있다. 참고로 <북부여기>에서 도적떼로 표현한 위만을 식민사학계는 위만조선을 세운 인물로 표현하고 있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궁인들과 해(海)로 들어가 한의 땅(韓地)에 살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하였다(將其左右宮人走入居韓地自稱韓王)”고 기록하고 있으며, <후한서 동이전>에는 “처음에 조선왕 준이 위만에게 패해 남은 군사 수천명을 데리고 해(海)로 들어가 마한을 공격해 깨고 자립해 한왕(韓王)이 되었고 준 이후에 멸망해 마한인이 다시 진왕이 되었다.(初朝鮮王準爲衛滿所破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攻馬韓破之自立爲韓王準後滅絶馬韓人復自立爲辰王)”라는 기록이 있다.

위 기록에서 중요한 것은 기준이 도망간 해(海)라는 곳이 어디인가인데, 이를 바다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대부분이다. 하북성 난하를 패수로 보는 재야사학에서는 번조선 도읍지인 창려(하북성 진황도시)에 있던 기준이 도망간 海를 바다가 아니라 산동성에 있는 海라는 지역으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는데 지금까지 학자들 간에 서로 해석이 분분했었다. 

식민사학계는 대동강 평양성에 있던 기준이 황해 바다로 배를 타고 남하하여 한반도 남부로 와서 한을 세웠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식민사학계의 태두 이병도가 청천강을 패수로 비정했기 때문인데, 이 말은 당시 연나라가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까지 들어왔단 말과 같다. 海자만 나오면 황해바다로 해석하는 엉터리 식민사학자들에게 대한민국의 대학들은 월급을 주고 연구비까지 지급하고 있다.

동북공정에 대항하기 위해 국가에서 설립한 동북아역사재단은 아직도 단군신화와 반도사관을 말하고 있으면서 연 200억원 가량의 국가 예산을 낭비하고 있다. 그러면서 중국과 일본의 엉터리 역사이론에 장단을 맞추고 있는 중이다. 일제의 ‘조선사편수회’와 ‘동북아역사재단’이 도대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   오른쪽 적색의 화살표는 식민사학계의 위만과 기준의 이동도이고, 청색과 녹색은 재야사학게의 대표적 두가지 이론이다. 모두 연나라를 북경지역으로 놓고 해석한 것은 같다. 단지 식민사학계처럼 한반도에 비정했느냐 , 재야사학처럼 중국 땅 황하변에 비정했느냐가 그 차이이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황하변 하남성에 조선과 연의 국경선인 패수가 있었므로 연나라는 당연히 하남성으로 내려와야 한다.  좌측 보라색으로 표시한 것이 역사의 진실이다.


그렇다면 기준이 들어간 해(海)는 과연 어디인가? 기준이 들어간 해(海)는 황해바다가 아니라, 바로 고대 중국에서 북해(北海)로 불렀던 현 지명 운성염지(運城鹽池)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산서성 남부에 있는 운성염지는 크기가 동서로 35Km 남북으로 7Km 되는 큰 내륙호수로 소금이 생산되는 염호(鹽湖)이다. 

그렇게 비정하는 사서의 근거로는, 사마천이 지은 <사기 백이열전>에 이런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집해에서 마융이 말하기를 수양산은 하동의 포판 화산의 북쪽에 있고 강이 꺾이는 곳에 있다.... 역시 맹자가 전하기를 백이.숙제가 주무왕을 피해 산 곳은 북해의 해변으로 수양산이다 (集解馬融曰: 「首陽山在河東蒲阪華山之北,河曲之中。」,... 又孟子云 :「夷齊避紂,居北海之濱。」首陽山)

백이.숙제가 고사리를 캐먹다가 죽은 곳이 수양산으로 지금의 산서성 영제시 황하변에 있으며 북해(운성염지)와 인접해 있는 곳이란 말이다. 그곳이 유주에 속한 요서군(幽州遼西郡)이며, 기자가 살던 곳과 인접한 곳이다. 그리고 북해(염지) 일대는 마한 지역으로 추정되며, 백제를 세운 온조의 형인 비류의 미추홀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   패수를 건너온 위만이 기준왕을 공격하자 기준왕은 해로 들어가 한의 땅에서 살았다. 성까지 기씨에서 한씨로 바꾼다.  한씨의 고향 상당은 산서성 임분시 동쪽 장치시 서쪽이다.  海는 북해로 불렸던 운성염지로 보아야 하며, 한의 땅은 삼한의 땅 즉 단군조선의 땅으로 봐야 한다. 당시 조선을 계승한 북부여는 산서성 태원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한단고기 단군세기> 21세 소태단군 48년(BC 1286년) “백이와 숙제도 역시 고죽군의 자손들로서 나라를 버리고 동해(東海)의 해변가에 살며 밭갈기에 힘써 스스로 살아갔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 동해는 바로 산동성 서쪽에 있던 큰 내륙호수였던 대야택 즉 발해(渤海)인 것이다. 백이.숙제는 동해변에 살다가 북해변 수양산에 와서 굶어 죽었다. 
 

기준이 간 한(韓)의 땅은 어디인가?

그리고 기준이 가서 산 곳이 한의 땅(韓地)이라 하였는데 이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재야사학자학자는 기준이 도읍이었던 현 하북성 창려에서 바다(海)를 거쳐 남하하여 황하와 회수 사이에서 살았다고 말하고 있고, 또 어떤 학자는 전국시대 韓나라의 땅이라 하는 등 해석이 제각각이었다. 

그러나 한(韓)나라는 전국시대의 나라 중 가장 약했던 나라로 사방 구백리에 불과했고, 또 <사기>의 기록에 보면 韓나라는 하남성 낙양과 정주 사이에 있었던 조그만 나라이므로 기준이 간 韓地를 전국시대 한나라의 땅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또 한나라의 위치는 황하 바로 남쪽인데, 이곳은 燕이 있었기 때문에 기준이 그리로 도망갔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기준은 韓의 땅에 가서 한왕(韓王)이 되어 성을 기씨(箕氏)에서 한씨(韓氏)로 바꾼다. 그리고는 자신의 40대 조상인 기자(箕子)를 문성대왕으로 추존하면서 모든 기씨 조상을 한왕으로 추존한다. 그래서 기준은 청주 한씨의 시조(始祖)가 되며, 기자는 비조(鼻祖)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추존된 기자와 후손들이 조선왕조의 사대주의자들에게 의해 허구의 기자조선(箕子朝鮮)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기준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강도 위만을 위만조선(衛滿朝鮮)이라 불러 단군조선의 역사를 반으로 잘라내 버린 것이다. 그래도 조선왕조 때는 단군은 우리 민족의 국조로 그리고 조선은 민족 최초의 국가로 남아 있었으나, 

일제에 의해 단군이 신화가 되면서 조선 뿐 아니라 그 이전의 배달국과 한국도 모두 신화가 되어 6,000년의 우리 상고사가 졸지에 사라지게 된 것이다. 즉 우리의 역사는 처음부터 인민족이 세운 기자조선에서 시작되어 위만조선과 한사군으로 이어진 식민지배의 역사이므로, 우매한 조선 민족은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이 일제의 식민사학 이론이다.

그런데 문제는 1945년 일제가 물러가고 이 땅을 우리가 통치하게 되었지만, 해방 64년이 지나도 민족의 얼이며 혼이며 정신인 역사는 아직도 일제가 만들어준 치욕의 역사를 우리 역사의 진실로 배워서 알고 있는 실정이다. 그 이유는 정부가 아직도 일제 식민지배의 향수를 느끼는 식민사학자들이 고수하고 있는 망국의 역사를 바꾸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 중국인들 스스로 고백한 노.연.제나라의 위치이동도. 하남성이 있던 세나라를 산동성과 북경 근처로 옮김으로서 단군조선이 차지하고 있었던 강역을 지워버렸던 것이다. 이걸 인정하기 위해 한.중.일 공동 역사를 정립하자는 말인가?  식민사학계는 조선사편수회와 다를 바 없다.

 
기준이 간 곳은 한지(韓地)인 상당(上堂)으로 지금의 산서성 임분시 동쪽에 있는 장치(長治)시 일대이다. 조선왕조 세조 때 계유정난의 일등공신인 한명회(韓明澮)가 받은 군호가 상당군(上堂君)으로, 상당은 한씨를 상징하는 지명이다. 참고로 산서성 임분은 단군조선(三韓)의 도읍지로 추정되는 곳이기도 하다.

조선과 연(燕)나라의 경계인 패수(浿水)의 위치가 정확하게 밝혀짐으로서 식민사학계가 지금까지 주장했던 만주일대와 한반도가 고조선의 영토라는 이론은 모두 축소.왜곡된 거짓임이 만천하에 밝혀지게 되었다. 그리고 식민사학계의 엉터리 거짓 이론에 나름대로 반론을 제기했던 재야사하계의 이론도 모두 사실과는 거리가 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패수의 위치가 밝혀짐으로서 강도 위만에게 패한 기준왕이 도망간 지역이 어디임이 밝혀지고, 더불어 단군조선의 도읍인 왕검성의 위치도 추정할 수 있게 되었고, 아울러 식민사학의 핵심인 한사군의 낙랑군의 위치도 정확하게 밝힐 수 있게 되었다. 즉 우리 역사의 진실을 거의 다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  위만이 망명하면서 건넌 추수 = 패수는 제수로 불리다가 지금은 망하로 불린다. 바로 이 강이 조선과 연나라의 경계이며, 고구려의 남쪽 경계인 것이다.  <사기 조선열전>의 기록에 따르면 패수는 반드시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야 한다. 그러나 식민사학계가 비정한 청천강은 반대로 서쪽으로 흐르는 강이다. 강 흐름이 맞지 않는데 어떻게 청천강이 패수란 말인가? 분명한 것은 한반도에서는 서쪽으로 흐르는 강이 없다는 것이다.

 

 

▲ 중국 대륙 깊숙한 하남성(하북)에 있었던 패수가 역사왜곡을 위해 하북성 난하나 한반도 청천강으로 옮겨진다.

다음 (4부)에서는 식민사학계가 한반도 경주로 말하고 있는 ‘신라의 초기 도읍인 금성(金城)’의 위치가 밝혀집니다. (이 지면을 빌어 금사지리지와 중국군사지도를 제공해 패수를 찾을 수 있게 한 심제선생께 감사를 드립니다.)


기사입력: 2010/01/18 [18:09]  최종편집: ⓒ 뉴스웨이브

출처: 뉴스웨이브 http://www.newswav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