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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의 역사문화

해모수, 고두막한, 고주몽의 성씨 연구

by 바로요거 2010. 1. 6.

해모수, 고두막한, 고주몽의 성씨 연구

[자료:해모수와 고두막.고추모의 성씨 연구]

고구려 건국 시조 고주몽 성조는 법통과 혈통을 각기 다르게 받았다. 법통은 사실상 동명국의 시조 고두막한으로부터 시작하는 북부여 6세 단군인 ‘고무서’로부터 물려받았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옥저후 ‘불리지’니, 그의 혈통은 북부여의 시조인 해모수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가 물려받은 법통과 혈통이 북부여 이전부터 경쟁관계에 있었다는 것이다. 


먼저 그가 물려받은 법통인 북부여 5세 ‘고두막’ 단군 집안의 내력부터 살펴보자.


북부여 5세 단군인 고두막은 원래 단군조선의 마지막 황제인 47세 단군 ‘고열가’의 후손이다. 그리고 이 고열가 단군은 단군조선 43세 물리 단군의 고손자다.

환단고기에서는 단군조선 29대 마휴 단군부터 43대 물리 단군까지는 하나의 혈통인 아들(단 한명의 자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태자로 기록함)에게 대를 전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에는 고주몽의 혈통을 알아보도록 하자.


고주몽의 아버지는 불리지이며, 불리지는 고구려후 고진의 손자이며, 고진은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다.


그렇다면 해모수의 조상은 누구일까?

해모수의 조상을 추측할 수 있는 단어로 우리는 종실이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환단고기 단군세기에는 종실 대해모수가 웅심산에서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에 고열가는 분명히 아들이 있었다. 더 나아가 태자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후손인 동명왕 고두막한도 존재할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런데 해모수는 고열가의 아들이 아니다. 고열가 단군 퇴위 일년 전에 해모수가 웅심산에서 일어나 북부여를 개국했으므로 해모수는 명백히 고열가의 아들이 될 수가 없다.


환단고기에는 당대 단군의 아들에게는 ‘태자나, 자’로 기록하고 동생에게는  ‘제’라는 용어를 분명히 사용하였으므로, 해모수는 당대 고열가 단군과는 태자나 자의 관계에 있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종실이란 적어도 당대 단군의 형제 관계에 있는 사람의 후손이거나, 아니면 전 단군의 후손을 가리킨 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해모수는 고열가 형제의 자손은 아니다. 고열가 단군의 나이를 보았을 때 이미 장성한 아들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 아들을 제쳐두고 형제의 아들이 제위를 탐할 수도 없고, 제위에 도전할만한 국내 정세도 아니었다. 이 때는 군웅이 할거하여 경쟁하는 시대였음으로 집안 내의 골육상쟁으로 제위를 얻을 가능성은 애초부터 없다 할 것이다. 또한 “부여에는 덕이 있어야 임금이 될 수 있고, 재앙에는 반드시 책임을 지었다” 하였고, 고열가 단군조차 단군세기에 ‘백성의 사랑. 큰 전공, 물리 단군의 혈통’에 의하여 단군에 오른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 해모수는 고열가 형제의 자손이 될 가능성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나라에 별다른 공도 없이 황제의 아들을 제쳐두고 감히 그 형제의 자식이 반란을 일으키면, 그 불의한 만큼 백성들의 민심을 얻지 못하므로, 해모수가 고열가에게 도전할려면 적어도 그 조상이 종실로서 명망과 덕망이 있는 유력한 가문이어야만 한다.


종실로서 명망과 덕망이 있는 유력한 가문이되 당대 단군의 형제 자손이 아닌 혈통이어야 한다면 해모수 단군은 44세 구물 단군의 후손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인물이다. 


44세 구물 단군의 태자는 45세 여루 단군이며, 45세 여루 단군의 태자는 제46대 보을 단군이다. 단군세기에 46대 보을 단군은 후사가 없었다고 하였음으로, 해모수 단군은 44세 구물, 또는 그 아들인 45세 여루 단군의 후손일 가능성이 가장 많다.  


단군세기에는 단군조선 말에 두 집안에서 역사적 사건과 맞물려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제위 계승을 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태자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43세 물리 단군은 우화충의 난을 당하여 백민성 욕살이었던 구물에게 반란 진압을 명하였고, 욕살 구물이 덕망이 있었던지 모든 제후들의 군사 원조에 힘입어 난리를 평정하였음으로 구물 단군이 제장들의 추대를 받아 44세 단군이 되었던 것인데, 다시 46세 보을 단군에 이르러 한개의 난을 당하게 되었고, 물리의 현손인 상장군 고열가의병을 일으켜 난을 평정하였으므로 마침 보을에게 후사가 없던 차에 고열가에게로 47세 단군의 자리가 돌아갔던 것이다.  


이를 정리하면 '43세 물리, 47세 고열가'가 한 핏줄이고 '44세 구물, 45세 여루, 46세 보을'이 한 핏줄이다. 그렇다면 고열가의 아들이 단군이 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응당 그 다음 단군의 자리는 46세 보을 단군의 자손에게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보을은 후사가 없었으므로 44세 구물, 또는 45세 여루의 후손이 단군이 되어야 한다.

고열가 단군의 아들이 단군이 될 수 없는 운명이란 것은 이 때는 이미 단군 조선이 국운을 끝낼 즈음에 이르러 어명은 나라 전체로 전달되지 못했고, 여러 장수들이 힘만 믿고 서로 다투었으므로 나라 살림은 펴지지 못하고 백성들의 삶은 점점 더 쇠약해진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해모수는 44세 구물 단군의 후손이었을까?

아니면 44세에서 45세로 이어지는 여루 단군의 후손이었을까?

필자는  다음 점에 있어서 두가지의 경우가 각각 다음과 같은 가능성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첫째, 해모수가 구물 단군의 후손이 될 까닭은 구물의 이름에서 찾고자 한다. 구물의 한자는 丘勿로 쓴다. 물은 다물多勿할 때의 물勿이며, 구丘는 고구려高句麗의 구句와 통하는 글자다.


단군세기에 “해모수의 선조는 고리국槀離國 사람이었다”하였음으로 45세 여루 단군의 장자는 태자가 되어 제위에 오르고 45세 단군의 차자가 있어 고리국에 장착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해모수의 첫째 아들인 태자 모수리는 제위를 이어받고 둘째 아들인 고진이 가업을 이어받아 고구려후가 된 것처럼, 구물단군의 기반이었던 고리 지방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백민성의 소유권을 이어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때문에 단군세기의 “대체로 북부여가 일어남은 이에서 비롯하고 고구려는 곧 해모수가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에 또한 고구리高句麗라 일컬었다.”의 기록은 이것을 증명한다 하겠다.

해모수는 자신의 세력 기반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열한쟁패 시대에 있어서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이 세력기반이 된다. 더불어 앞에서의 고리를 여기서는 고구리라 하였으므로, 고리는 고구리이며, 달리 구리라 부른다 하겠다.


역사적으로 성씨는 황제의 벼슬한 곳이나 출신지를 성씨로 삼기도 하며, 그 조상의 이름에서 따기도 한다. 태호복희씨의 성씨인 풍씨가 풍산에서 온 것이나, 배달국의 신하 소전씨가 둔병사령관을 함으로 신농씨가 성씨를 강씨로 삼은 것은 다 그러한 것들이다. 그리고 성씨 외에 황제의 이름에는 종통 계승 의식이 깃들기도 한다.

고구려 고주몽 성제가 연호를 다물로 쓴 일이나 단군조선 제38대 단군의 이름이 다물인 것은 모두가 종통 계승의 의지로서 영토 회복의 신념을 담은 것이다.


둘째, 해모수가 여루 단군의 후손일 까닭도 역시 그의 이름에서 찾을 수 있다. 45세 여루余婁 단군의 여余는 광명의 나라인 부여夫餘의 여餘와 같은 뜻이며, 루는 역시 광명을 뜻하는 부루扶婁의 루婁와 같은 뜻이므로, 여루의 의미에는 아버지 구물 단군이 선포하신 대부여를 이어받는 뜻이 강하다. 실제 해모수는 북부여를 건국하였고, 구물 단군은 단군조선 말에 이르러 나라 이름을 대부여로 고친 이다. 그러므로 해모수는 단군조선 초기 왕검 단군의 막내 부여의 부여국 문화를 존경함과 더불어 자기 직계 조상이 건국한 대부여를 잇는다는 의미에서 북부여 건국을 선포했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에 이것은 북부여를 접수한 고두막한이 처음 나라 이름을 동명으로 지은 것은 이와 대조를 이룬다 할 것이다. 동명제 고두막한은 해모수의 조상이 사용하여 해모수 가문의 이미지가 강한 부여 대신 새로운 국명 동명을 원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군세기에 고열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왕도가 쇠미해져 웃 왕들이 세력을 다툰다. 그대 오가들은 현자를 찾아 추대하도록 하라."

이 말은 조선에서 대부여로 국명을 바꾼 44세 구물 이후로 단군이 되는 방법을 뜻한다.

옛 기록에 “이빨의 많고 적음으로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란 구절이 있다. 이것은 부여의 왕권을 이야기 한 것으로 역설적으로 유력 세력들 간의 세력 균형에 의한 왕권 추대로, 왕권이 강하지 못하다는 반증이 된다. 대신 세력 균형만큼이나 경쟁 세력의 학살을 금하고 그 법통을 계승하였으니, 그 편린을 엿볼 수 있는 단어를 환단고기에서 찾아보면 종실이나 황실이란 단어가 될 것이다.


종실이나 황실이란 말은 제위에 도전할 수 있는 실력과 덕망 그리고 단군의 유명과 더불어 황제가 될 수 있는 필수불가결한 조건이 된다. 사정이 그와 같으므로 전임 단군의 후손인 해모수는 당연히 종실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고, 더불어 그 능력에 의하여 화랑의 우두머리에 오를 수 있었으며, 그리고 그 가문의 세력 기반인 '고구리'를 중심으로 황위에 도전한 것이라 하겠다.


이것은 해모수 보다 한 세대 앞선 고열가가 물리 단군의 후손으로서 상장군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되기도 한다. 해모수가 종실의 대접을 받았던 것처럼, 응당 열가도 종실의 대접을 받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의 세력기반은 졸본지역이 될 것이다. 그의 후손 고두막한이 졸본지역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의 대권 도전의 명분은 "이민족인 한무제의 침입을 격퇴하고 국가와 인민을 수호하지 못한 무능한 황제를 쫓아내고, 천제의 아들로서 한무제의 침입을 격퇴한 자신이 단군이 되는 것."이 될 것이다.  


부여 시대의 시대상을 중국에 비춰보면 춘추전국시대라 정의할 수 있다. 대부여 시대는 이미 내부적으로 백한이 쟁패하는 열국 분열시대를 이루었고, 그것이 터져 나온 분열상이 북부여 시대이며, 이것을 수습해 가는 과정이 고구려의 역사라 하겠다.


열국 시대란 제후국들이 강력한 황권아래 통일되지 못하고, 자신들이 각자 병권을 쥐고서 서로 다투는 것을 말한다. ‘부여에는 왕이 재앙의 책임을 지었다’는 책화의 기록은 부여가 이미 열국 분열시대에 들어섰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 때의 단군은 그 힘이 약화되어 여러 제후들의 추대에 의하여 단군이 되는 일이 많았고, 그리고 자신의 지역을 기반으로 제위를 노리는 일이 잦았으며, 나라에 큰 난리가 일어났을 때는 당대 단군의 자손이 아닌 그 변란을 평정한 타인에게 제위가 넘어갔다 할 것이다.


종실 해모수는 자신의 세력 기반인 ‘고구리’를 중심으로 북부여를 건국하였고, 또한 당대 화랑의 우두머리로서 천왕랑을 자처하였다.


천왕랑天王郞이란 국선 중에서도 천왕지자랑天王之子郞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천왕지자란 천왕의 아들로서 화랑이 된 자를 말한다. 고구려시대 때를 보면 명림답부, 을파소, 을지문덕, 연개소문 등은 당대의 국선으로서 모두가 황족이 아니었지만, 해모수는 당대 단군인 고열가와 혈통 상에 있어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전대 단군의 자손이라는 특수 관계로 인하여 그 자신의 우수한 자질과 더불어 화랑의 우두머리가 될 자격을 얻었을 가능성이 크다 할 것이다.

참고로 천왕은 하늘의 천제에게서 나왔다. 천제란 하늘의 상제를 말한다.

해모수, 고두막, 고주몽은 모두가 스스로 천제의 아들이라 외쳤던 분들이다. 

'천제지자'를 다시 말하면 천제의 법통을 계승한 황제의 유일한 법통을 계승한 아들을 뜻한다. 그 법통이란 황제의 혈통을 계승하고 국통을 수호한 자라 하겠다. 


환단고기에는 종실이라는 말과 더불어 황손이라는 말이 나온다. 고모수는 불리지의 본명이며, 황손 고모수라 불렸을 때는 이미 전북부여 황실은 후북부여 황제 고두막한에게 제후로 격하되어 가섭원으로 쫓겨나고 없는 망한 황실의 후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에는 황손 고모수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종통 계승의식 때문으로 보아야 한다.

동명국의 개조인 고두막한은 북부여를 계승하여 그대로 북부여라는 국명을 사용하고 그 법통을 그대로 계승하였으므로 불리지는 망한 황실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황손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미 깨어지고 망한 황실이었다 할지라도 국통 계승의 명분 때문에 전 황실을 명목상으로라도 대우해 주었다 할 것이다.


이제 한가지 생각해 볼 것은 해모수나 고두막한이나 모두가 고씨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고씨의 기원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단군조선 제2기를 열었던 제22대 색불루 단군의 할아버지인 고등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등의 손자인 제22대 색불루 단군은 그 제위를 그 후손을 통해 제27대까지 이어오는데 환단고기에는 28세 계모, 29세 마휴 단군이 태자나 자로서 제위에 올랐다는 기록이 없다. 다만 천재지변이 심해서 정상적인 가운데 제위가 이루어지기 어려웠던 점을 짐작하게 하는데, 과연 이 두 황제가 누구의 후손이냐가 문제된다. 이 경우 두 황제는 색불루 단군의 핏줄로 보아야 한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 29세 단군의 후손은 제43대 물리 단군까지 혈통이 이어진다. 물리의 고손자가 고열가이고, 그 고열가의 손자는 고두막이다. 고열가는 46세 보을 단군 조에 상장 고열가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그 성은 다름 아닌 고씨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소급하여 그의 선조인 고등도 21세 소태 단군 때 욕살 고등으로 등장하므로 그의 성은 고씨임이 분명해진다. 


아울러 해모수의 후손인 북부여 3세 고해사, 4세 고우루 단군의 이름을 볼 때 해모수 단군의 조상도 이 고씨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 있어서 구물, 여루, 보을 단군도 그 조상은 고씨로서 22세 색불루 단군의 후손이 된다 하겠다.


끝으로 해모수는 그 성씨에 있어 북부여의 개조로서 성씨를 고씨에서 해씨로 바꾸었거나 고씨와 해씨를 둘 다 썼다고 여겨진다.

해씨를 사용했다고 보여지는 것은 북부여 1세 해모수, 4세 해우루, 그리고 해우루의 동생으로서 동부여 임금이 된 해부루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고씨를 사용함을 보이고 있는 것은 ‘3세 고계사와 4세 고우루’다.

여기서 4세 단군은 고씨와 해씨를 동시에 썼음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해모수의 둘째 아들은 그 이름이 고진으로서 고씨를 쓰고 있고, 그 현손인 불리지는 그 본명이 고모수로서 역시 고씨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아들인 고주몽은 그의 선조의 출생지와 고씨의 고리국이란 뜻에서 고구리라고 붙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북부여 2세 단군의 이름이 모수리라는 것이다.

‘모수리란 해모수를 계승하는 태양’으로 해석되는데, 이것은 달리 해모수의 성을 뺀 모수를 성으로 삼고 여기에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역대 성씨를 보면 유명한 조상의 성명에서 성씨를 빼고 이름의 글자를 따서 성으로 삼아 계승한 경우가 여럿 있다. 신안 주朱씨(고구려국본기 : 졸본에서 눌현으로 천도하니 눌현은 지금의 상춘 주가성자朱家城子다)가 고주몽의 후손으로서 이름의 주朱자를 따서 주씨로 삼았음은 널리 알려진 경우다. 

그런 점에 있어 2세 단군 모수리의 이름도 그런 개연성이 충분하다 할 것이다.


아울러 우리는 해모수 단군이 고씨 대신 해씨를 쓴 뜻으로, 새로운 나라를 개국함에 있어 성씨에서도 새로움을 추구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만약 해모수 황실이 필자의 추측대로 성씨를 바꾸려 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일 것이다.

그것은 바로 고열가 집안과의 경쟁 때문이다. 환단고기에서는 47세 고열가가 제43대 물리의 고손자임을 정확히 밝히고 있는데, 해모수 단군은 단지 종실 해모수라고 함으로서 조상을 분명히 밝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시 생각해 볼 때 고열가는 색불루 단군의 직계임에 비하여 해모수는 단군의 방계라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해모수와 그 아들 모수리 단군은 성을 새로이 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한가지 덧붙여 대진국의 황실은 무엇보다도 서압록하에서 천제 지내는 것을 큰 행사로 여겼으니, 이것은 그들의 뿌리 의식을 드러낸 것이라 할 것이다.

대진국본기에 “3월 16일에 삼신일체의 상제를 서압록하의 강변에서 제사를 지냈다. 서압록하는 고리의 옛 땅이다”란 기록을 보면 대진국의 대씨 역시 고씨에서 오지 않았나 의심해 본다. 이 심증을 더욱 깊게 하는 것은, 고리의 옛 땅에서 태어난 해모수를 일러 종실 대해모수라 하였음으로, 그 대해모수의 이름 중에서 대를 따서 대씨로 삼았을 가능성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해모수를 일러 대해모수라 하였고, 고무서를 일러 소해모수라 하였다.


고씨의 시조는 누구일까? 삼국사기에는 중국측 기록을 들어 고양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고양씨는 황제헌원의 방계 후손이다. 그것은 중국측이 우리 역사를 폄하시키기 위하여 내놓은 술책이다.

고씨의 기원은 배달국 거발한 환웅천황의 신하인 고시씨로 보아야 한다.

신시본기에 치우씨, 고시씨, 신지씨의 후손들이 그 공덕에 의하여 가장 번성하였다 기록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고시씨가 색불루 단군의 선조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출처: 이너모스트 http://innermos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