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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의 역사문화

대조선 역사를 부활시킨 동명성왕, 고두막한

by 바로요거 2009. 5. 23.

 

대조선 역사를 부활시킨 동명성왕, 고두막한



  
한 무제는 그 여세를 몰아 고조선의 뒤를 이은 북부여로 쳐들어온다.
그런데 당시 북부여의 4대 고우루(高于婁) 단군은 워낙 심성이 유약하여 제대로 맞서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중에 병사하고 만다. 그리하여 우리 조선 민족이 다 넘어가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하는데, 이를 지켜보고 있던 고조선 47대 고열가 단군의 후손 고두막한(高豆莫汗)이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한 무제의 군대를 물리치고 나라를 구한다.
  
  
고두막한은 기원전 108년, 졸본(卒本)에서 나라 이름을 ‘북부여’에서 동방의 대광명이라는 뜻의 ‘동명(東明 : 동명부여, 또는 졸본부여)’이라 바꾸고 동명왕으로 즉위한다. 그리고 기원전 87년에는 북부여를 계승하여 조선 역사 부활의 푯대를 다시 세우니, 이분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동명성왕(東明聖王)이시다.
  
  이 때 본래 북부여 4대 단군의 승계자인 해부루(解夫婁)가 동쪽으로 가서 가섭원(迦葉原) 땅에다 나라를 세우는데, 동쪽에 있는 부여라는 뜻으로 동부여(東夫餘)라 했다. 해부루는 북부여 4대 단군의 동생이다.
  
  그리하여 고두막한이 북부여의 5대 고두막 단군 되는데, 그때부터 북부여의 후기시대[後北夫餘]라고 한다. 북부여시조 해모수(解慕漱) 단군으로부터 6대 만인 고무서(高無胥) 단군 때에 막을 내린다.
  
  6대 고무서 단군은 딸만 셋이었다. 그 둘째딸이 소서노(召西弩)인데, 고주몽과 혼인을 시켜 사위로 삼아 주몽으로 하여금 북부여를 계승토록 한다. 그리하여 고주몽이 북부여의 7대 단군이 되었으며, 그 후 기원전 37년에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로 변경하여 고구려 700년 역사의 창업 시조가 된 것이다.
  
  이것이 고조선이 멸망한 후 열국시대로 들어서는 과정이다.
 
  <道紀136년( 2006년) 양력 5월 13일, 증산 상제님 어천치성 증산도 종정님 도훈 중에서>

 

존칭명 : 단군 - 7대 (6959~?, BC239∼?)  

왕      명

즉위

(환기-B.C)

약       사

1

해모수(解慕漱)

(6959-BC239)

본래 고리국 사람으로. 즉위 8년(B.C232년)에 五加(오가)들에 의해 단군으로 추대됨.

사) 신천지 역사가 열리는 결정적 분기점.

2

모수리(慕漱離)

(7004-BC194)

 

3

고해사(高奚斯)

(7029-BC169)

 

4

고우루(高于婁)

(7078-BC120)

해우루(解于婁)

5

고두막(高豆莫)

(7090-BC86)

동명(東明), 졸본사람. 7090(BC108)년에 즉위하더니, 이때에 부여를 계승하였다.

사) 한나라 무제를 의병으로 격퇴. 중심인물이 고두막한. 몽고에서는 고두막한을 따로 모심. 역사가 살아있다는 증거.

6

고무서(高無胥)

(7139-BC59)

 

7

고주몽(高朱蒙)

(7138-BC58)

해모수의 아들 고구려후 고진의 3세손으로 고무서의 사위로 이어서 고구려의 시조인 추모이다.

 

왜 중국인들은 부여사를 말살했을까?

 
  북부여가 단군조선을 계승하였다. 이것이 한민족 고대사의 국통맥을 바로잡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 역사에서는 북부여 역사라는 게 완전 말살됐다.
  
  그 역사의 원형이 『환단고기』 「삼성기」상, 하 두 편과 「단군세기」에 나온다. 「단군세기」에는 47대 단군 역사가 나오고 「북부여기」상, 하에는 북부여의 역사가 나온다.
  
  「북부여기」상에 해모수 단군서부터 역대 단군들이 나오는데, 5대 단군 고두막한이 바로 동명성왕이다. 고두막한은 중국 한족의 침략을 받아 완전히 멸망할 위기에 놓인 우리 동방 조선의 역사를 부활시킨 인물이다.
  
  그런데 중국 한 무제가 고두막한을 죽이려고 덤벼들었다가 참패를 당했다. 한 무제가 패퇴한 대사건, 이것은 중국 역사상 최대의 수치였다. 중국 5천년 역사에서 당태종이 안시성에 와서 양만춘 장군한테 화살을 맞아 눈 빠진 것보다 더 부끄러운 사건이다.
  
  그래서 중국의 역사가들과 국내 사대주의자들이 이 북부여 역사를 완전히 뿌리 뽑아 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민족 역사의 맥, 사통의 허리가 잘려버렸다. 그래서 국통 맥이 연결이 안 된다.
  
  지금 역사학자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부여의 역사를 중국의 사료에 맞추어 꿰매고 있다. 그러니 너덜너덜하다. 이렇게 꿰매면 이런 작품이 나오고, 저렇게 꿰매면 저런 작품이 나오고, 전부 애꾸눈이처럼 찌그러져 버렸다. 그 결과가 바로 다음 주부터 방영하는 주몽이야기다. 이 드라마에서는 고주몽이 해모수의 아들로 나온다. 그게 다 중국 측 사료를 보고 만들어서 그렇다. 해모수와 주몽은 무려 120여년 이상 차이가 난다. 해모수는 북부여의 초대 단군이고 주몽은 6대 마지막 단군 고무서의 사위인데, 어떻게 주몽이 해모수의 아들이란 말인가!
  
  북부여는 단군조선과 고구려를 이어주는 잃어버린 열국시대의 역사의 맥을 이어주는 고리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부여사를 잘 알아야 한다. 우리 한민족을 제대로 알려면, 한민족 정신의 뿌리를 알려면 부여사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왜 이 부여역사의 맥을 가지고 오셨는지를 알 수 있다.
 
  <道紀136년( 2006년) 양력 5월 13일, 증산 상제님 어천치성 증산도 종정님 도훈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