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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의 역사문화

고구려(高九黎)의 역사(歷史)

by 바로요거 2009. 5. 23.

2. 高九黎의 歷史

 1). 해모수계 고구려 역사

 해모수는 B.C 239년에 고구려를 건국하여 다음 해 B.C 238년에 왕검조선을 멸망시키고, B.C 232년에 왕검조선의 잔류세력인 오가 회유에 성공하여 前에 왕검조선의 진한이 관할하던 지역을 장악하고 나라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단군이 되었다. 이때부터 해모수계가 4대 동안 고구려(북부여)를 통치하였다.

환단고기 북부여기에 적혀 있는 해모수계 고구려의 역사를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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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 단군 해모수 

 「임술 원년(B.C 239년) 단제께서는 자태가 영용하고, 눈에서는 신광이 쏘아져 나오니,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면 천왕랑(註 천제의 아들)이라 할만 하였다. 나이 23세에 하늘에서 내려오시니, 이때가 단군 고열가 57년 임술년 4월 8일이었다. 웅심산에 의지하여 일어나 궁실을 난빈에 쌓았다. 까마귀 깃털로 만든 관을 쓰시고 용광검(註 손잡이 등에 용의 문양을 한 칼)을 차시며 오룡거(註 하늘나라 천제가 탔다는 5마리의 용이 끄는 상상 속의 수례)를 타셨다. 종자 500인과 함께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저녁에는 하늘로 오르더니 이에 이르러 즉위하였다. 壬戌元年 帝 天姿英勇 神光射人 望之若天王郞 年二十三 從天而降 是檀君高列加五十七年壬戌四月八日也依熊心山而起 築室蘭濱 戴烏羽冠 佩龍光劒 乘五龍車 與從者五百人 朝則聽事 暮則登天 至是卽位」 桓檀古記 北夫餘紀

「계해 2년(B.C 238년) 이 해 3월 16일에 하늘에 제사 지내고 연호법을 제정하였으며, 오가의 병력을 나누어 배치하고 둔전을 두어 자급하게 함으로써 뜻밖의 일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癸亥二年 是歲三月十六日祭天設烟戶法 分置五加之兵 屯田自給 以備不虞」

「기사 8년(B.C 232년) 단제께서 무리를 이끌고 가서 옛 도읍의 오가들을 회유하니 마침내 공화정치를 철폐하게 되었다. 이에 나라 사람들이 추대하여 단군이 되니, 이를 일컬어 북부여의 시조라 한다. 己巳 八年 帝率衆 往諭故都 五加 遂撤共和之政 於是 國人推爲檀君 是謂北夫餘始祖也」

「임신 11년(B.C 229년) 북막의 존장 산지객륭이 영주를 습격하여 순사 목원등을 죽이고 크게 약탈하고 돌아갔다. 壬申 十一年 北漠尊長山只喀隆 襲寧州 殺巡使穆遠登 大掠而去」

「신사 20년(B.C 220년) 명을 내리어 백악산아사달에서 하늘에 제사지내게 하고 7월에 새로운 궁궐 336칸을 지어 이름을 천안궁이라 하였다. 辛巳 二十年 命祭天于白岳山阿斯達 七月 起新闕 三百六十六間名爲天安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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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 단군 모수리

 「무신 2년(B.C 193년) 단제께서 상장 연타발을 파견하여 평양(註 요양 방면)에 성책을 설치하고 도적 위만에 대비케 하였다. 위만 또한 싫고 괴로운지 다시는 침범하지 않았다. 戊申 二年 帝遣上將延陀勃設城柵於平壤 以備賊滿 滿亦厭苦 不復侵擾」[註 북부여기는 고려 때 지어졌는데, 위에 나온 평양은 뒤에 부른 명칭으로 적은 것이다. 고구려 때 평양으로 불린 곳 중 해성과 가까운 곳은 요양과 심양인데, 위에 나온 평양은 요양으로 추정된다.]

「기유 3년(B.C 192년) 해성을 평양도에 속하게 하고 단제의 동생 고진을 시켜 수비하게 하니 중부여 일대가 모두 복종하므로 양곡을 풀어먹이었다. 겨울 10월 경향분수의 법을 세워 서울은 天王이 친히 총괄하여 위수하고 지방은 네 갈래로 나누어 군사를 주둔시키니, 마치 윶놀이에서 용도의 싸움을 보고 그 변화를 아는 것과 같았다. 己酉 三年以海城屬平壤道 使皇弟高辰守之 中夫餘一域 悉從 糧餉 冬十月 立京鄕分守之法 京則天王 親總衛戍 鄕則四出分鎭 恰如柶戱觀戰 龍圖知變也」

 

3세 단군 고해사

 「임신 원년(B.C 169년) 정월 낙랑왕(註 평안도지방 낙랑) 최숭이 곡식 300섬을 해성에 바쳤다. 이보다 앞서 최숭이 낙랑(註 이 낙랑는 멸망하기 전 기자조선을 지칭한 것이다)로부터 진귀한 보물을 산처럼 가득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註 한반도 지칭)의 서울 왕검성(註 평양)에 이르니, 이때가 단군 해모수 병오(B.C 195년) 겨울이었다. 壬申 元年 正月 樂浪王崔崇 納穀三百石于海城 先是 崔崇自樂浪山 載積珍寶而渡海 至馬韓 都王儉城 是檀君解慕漱丙午冬夜」

「계축 42년(B.C 128년) 단제께서 몸소 기병과 보병 1만명을 이끌고 위만 도적을 남여성에서 크게 쳐부수고 관리를 두었다. 癸丑 四十二年 帝躬率步騎一萬 破衛賊於南閭城 置吏」[註 남여성은 고구려의 남쪽 담당 제후 남여가 있었는 성으로, 사서를 지을 때 뒤에 부른 명칭으로 적은 것이다.]

 앞에 나온 계축년조 문구에 의하면 고구려는 B.C 128년에 위만조선으로부터 요동반도를 빼앗아 그 곳에 남쪽 담당 제후 남여를 두었다.

같은 해 한나라는 위만조선을 포위하기 위하여 고구려의 남쪽 담당 제후 남여를 재물로 꾀어 한나라에 복속시키고 요동반도에 창해군을 두었는데, 창해군의 설치경위와 남여에 대하여 살펴본다.

한서에 의하면 예군 남여 등은 원삭 원년(B.C 128년)에 우거왕을 배반하고 28만구를 이끌고 요동군에 내속하였다.

 「元朔 元年 濊君南閭等 畔右渠 率二十八萬口 詣遼東內屬 武帝以其地爲蒼海郡 數年乃罷」後漢書 

「元朔 元年 東夷薉君南閭等 口二十八萬人降爲 蒼海郡」前漢書

위 후한서 문구에는 예군 남여가 우거왕을 배반하고 요동군에 내속하였다고 적혀 있으나, 당시 남여는 고구려의 남쪽 담당 제후였으므로, 예군 남여는 우거왕을 배반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를 배반한 것이다.

 

4세 단군 고우루(일명 해우루)

 「신유 원년(B.C 120년) 장수를 보내 우거를 토벌하였으나 이로움이 없었다. 고진을 발탁하여 서압록을 수비하도록 하니 병력을 늘리고 성책을 많이 설치하여 능히 우거를 대비하는데 공이 있었으므로 승진시켜 고구려후로 삼았다. 辛酉 元年 遣將討右渠 不利 擢高辰 守西鴨綠 增强兵力 多設城柵 能備右渠有功 陞爲高句麗侯」桓檀古記 北夫餘紀 

 B.C 120년경은 한나라가 창해군을 폐지한 후이다. 이 무렵 위만조선이 요동반도를 다시 영유하고 있다는 것은 위만조선이 B.C 126년경에 한나라로부터 창해군 지역 즉 요동반도를 빼앗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계해 3년(B.C 118년) 우거 도적(註 위만조선의 군사)이 대거 침범하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해성 이북 50리 땅이 모조리 오랑케(註 위만조선)의 땅이 되었다. 癸亥 三年 右渠賊 大擧入寇我軍大敗 海城以北五十里之地 盡爲虜有」

 계해년조 문구는 위만조선 군사가 해성 남쪽 방면에서 북쪽으로 쳐 올라와 해성 이북 50리까지 점령하였다는 내용이다. 

 「갑자 4년(B.C 117년) 단제께서 장수를 보내어 해성을 공격하였으나 3달이 걸려도 이기지 못하였다. 甲子 四年 帝遣將攻海城 三月而 不克」

「병인 6년(B.C 115년) 단제께서 친히 정예군 5千을 거느리고 해성을 불의에 쳐서 깨뜨리고 추격하여 살수에 이르니 구려하(註 요하)의 동쪽이 모두 항복하였다. 丙寅 六年 帝親率精銳五千 襲破海城追之薩水 九黎河以東 悉降」

 위 문구는 고구려가 요하 동쪽 위만조선 지역을 모두 빼앗았다는 내용이다. 이때부터 위만조선의 동변은 멸망할 때까지 요하였다.

 「정묘 7년(B.C 114년) 좌원에 목책을 설치하고, 군사를 남여에 두어 뜻하지 않은 사태에 대비하게 하였다. 丁卯七年 設木柵於坐原 置軍於南閭 以備不虞」

 위 문구는 고구려가 요하 동쪽 위만조선 지역을 모두 빼앗아 남여성에 군사를 두었다는 내용이다. 고구려의 방위체제는 서울은 천왕이 친히 총괄하여 위수하고 지방은 네 갈래로 나누어 군사를 주둔시켰는데, 고구려는 이때 요동반도를 지키기 위하여 남여성에 군사를 두었다.

 「계유 13년(B.C 108년) 한나라 유철이 평나(註 위만조선 지역 지칭)에 쳐들어와 우거를 멸망시키고 4군을 두고자 군사를 내어 사방을 침략하니, 이에 고두막한이 의를 부르짖으며 군사를 일으켜 가는 곳마다 한나라 도적들을 연파하니, 유민들이 사방에서 호응하여 싸우는 군사를 도와 크게 떨쳐 보답하였다. 癸酉十三年 漢劉徹 寇平那 滅右渠 仍欲置四郡盛以兵 四侵 於是 高豆莫汗 倡義起兵 所至連破漢寇 遺民四應以助戰 軍報大振」 

 계유년조 문구는 한나라가 군사를 보내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이어서 요하 동쪽 고구려 지역을 침략하였다는 내용이다.

B.C 108년부터 한나라 군사와 싸우고 있던 동명은 B.C 87-86년경에 세력이 강해졌다. 세력이 강해진 동명은 B.C 86년에 해모수계 무리를 수도 백악산아사달(장춘 방면) 동쪽에 있는 분릉(길림 방면)으로 밀어내고 수도에 입성하였다.

 「갑오 34년(B.C 86년) 10월 동명왕 고두막한이 사람을 보내어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장차 이곳에 도읍을 두려고 하니 왕은 이 땅에서 피해 가시요"하니 단제는 매우 난처해 하다가 그 달에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어 하였다. 동생인 해부루가 즉위하였는데, 동명이 군사를 내세워 위협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군신이 매우 난처해 하였다. 이에 국상 아난불이 아뢰기를 "통하 가에 가섭의 들이 있는데 땅이 기름지고 오곡이 썩 잘됩니다. 도읍을 둘 만한 곳입니다" 하고 왕에게 권하여 마침내 그 곳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를 가섭원부여라 하고 혹은 동부여라 한다. 甲午三十四年十月 東明王高豆莫汗 使人來告曰 我是天帝子將欲都之 王其避之 帝難之 是月 帝憂患成疾而崩 皇弟解夫婁立 東明王 以兵脅之不已 君臣頗難之 國相阿蘭弗奏 曰 通河之濱 迦葉之原有地 土壤膏  宜五穀 可都 遂勤王移都 是爲迦葉原夫餘 或云東夫餘」

 환단고기에는 이때 동명에 밀리어 길림 방면으로 이동한 해모수계 무리가 가섭원부여 또는 동부여로 적혀 있다. 이때부터 해모수계 무리는 동명계 무리에 복속하면서 우두머리의 칭호를 단제라 칭하지 못하고 왕의 명칭에 천제를 상징하는 글자를 넣지 못하였다. 

 

2). 동명계 고구려 역사

5세 단군 고두막. 일명 동명

 B.C 108년에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요하 동쪽 고구려 지역을 점령하였을 때 동명은 스스로 장수가 되어 한나라 군사와 싸웠다.

 「계유 원년(B.C 108년) 이 해는 단군 고우루 13년이다. 단제는 사람됨이 호협하고 뛰어나며 군사를 잘 다루었다. 일찍이 북부여가 쇠약해지고 한나라 도둑들이 강성해짐을 보고 분개하여 세상을 구할 뜻이 있었는데, 이에 이르러 졸본에서 즉위하여 스스로 동명이라 하였다. 혹은 고열가의 후손이라고도 하였다. 을해년(B.C 106년)에 단제는 스스로 장수가 되어 격문을 전하니 이르는 곳마다 무적이었다. 열흘이 못되어 5천명이 모였다. 한나라 도적들은 싸울 때마다 멀리서 그 모습만 보고도 무너져 흩어졌다.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구려하(註 요하)를 건너 추격하여 요동의 서안평에 이르니, 이곳은 옛 고리국의 땅이었다. 癸酉元年 是爲檀君高于婁十三年帝 爲人豪俊 善用兵 嘗見北夫餘衰 漢寇熾盛 慨然有濟世之志 至是 卽位於卒本 自號東明或云高列加之後也 乙亥三年 帝 自將傳檄 所至無敵 不旬月 衆至五千 每與戰漢寇望風而潰 遂引兵渡九黎河 追至遼東西安平 乃古藁離國之地」

 동명의 원래 이름은 고두막이고, 동명은 천제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부른 칭호이다.

 「갑오 22년(B.C 87년) 이 해는 단군 고우루 34년이다. 단제는 장수를 보내어 배천의 한나라 도적들을 쳐부수고 유민과 힘을 합하여 향하는 곳마다 한나라 도적들을 연파하고는 그 수비장수를 사로잡고 방비를 갖추어 방어하였다. 甲午 二十二年 時爲檀君高于婁三十四年 帝 遣將破裵川之漢寇 與遺民幷力 所向連破漢寇 擒其守將 拒以有備」

 위 문구는 동명이 배천(요원시 방면)에서 현도군 군사를 쳐부수고 유민과 힘을 합하여 한나라 군사를 연파하고 한나라 수비장수까지 사로잡았다는 내용이다. 이때 현도군의 속현인 서개마현(요원시 방면)과 상은대현(개원 방면) 및 난하에서 요하 사이에 있던 임둔군과 진번군이 괴멸되었다.

다음해 B.C 86년에 동명은 해모수계 무리를 수도 백악산아사달(장춘 방면)의 동쪽에 있는 길림 방면으로 옮기게 하고 도성으로 들어와 북부여라 칭하였다.

 「을미 23년(B.C 86년) 북부여가 성읍을 들어 항복하고 여러번 보전하고자 애걸하므로, 단제가 이를 듣고 해부루를 낮추어 제후로 삼아 분릉으로 옮기게 하고는 북을 치며 나팔을 부는 이들을 앞세우고 수만 군중을 이끌고 도성에 들어와 북부여라 칭하였다. 乙未 二十三年 北夫餘擧城邑降 屢哀欲保 帝聽之 降封解夫婁爲侯 遷之  陵 帝 前導鼓吹 率衆數萬而入都城仍稱北夫餘

 그 해 8월 동명은 서요하 상류에서 현도군 군사와 여러 차례 싸워 크게 이겼다.

 「을미년(B.C 86년) 가을 8월 한구(註 한나라 군사를 비하한 것)와 서압록하 상류에서 여러 차례 싸워 크게 이겼다. 乙未年 秋八月 與漢寇 屢戰于西鴨綠河之上 大捷」

 삼국지에는 이때 현도군이 구려(심양 방면) 서북으로 이동했다고 적혀 있다.

 「후에 이맥이 침범하여 군을 구려 서북으로 옮겼다. 지금 소위 현도고부라는 곳이다. 後爲夷貊所侵 徙郡句麗西北 今所謂玄菟古府」三國志 東沃沮傳

 현도군은 이 전투에서 동명에게 패배함으로써 구려(심양 방면) 북쪽 지역을 모두 상실하였다. 반면에 동명은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고구려 무리의 신망을 얻어 패자가 되어 해모수계 무리를 백악산아사달(장춘 방면) 동쪽에 있는 분릉(길림 방면)으로 밀어내고 수도에 입성하였다.

 동명의 한군현 공격(B.C 87년)

A:현도군 서개마현, B:현도군 상은대현, C:현도군 고구려현, D:요동군과 낙랑군

 

6세 단군 고무서

 B.C 59년에 고무서 단군은 요하 동쪽 지방을 모두 수복하고 수도를 백악산아사달(장춘 방면)에서 골본(심양 방면)으로 옮겼다.

 「임술 원년(B.C 59년) 단제는 졸본천(註 혼하)에서 즉위하고는 백악산아사달에서 부노들과 만나 사례대로 하늘에 제사할 것을 약속하니 모두가 크게 기뻐하였다. 단제는 태어나면서 신과 같은 덕이 있어 주술로서 바람과 비를 불러 백성들을 잘 구휼하므로 민심을 크게 얻어 사람들이 단제를 소해모수라고 불렀다. 때에 한나라 오랑캐들이 요하의 왼쪽(동쪽)에서 널리 소란을 피웠으나 여러 차례 싸워서 크게 이겼다. 壬戌 元年 帝 卽位于卒本川 與父老會于白岳山 立約祭天 頒行事例 內外大悅 帝 生而有神德 能以呪術呼風喚雨 善賑 大得民心 有小解慕漱之稱 時 漢寇騷亂 遍于遼左 屢戰得捷」

 위 문구는 고무서 단군이 한나라 군사와 요하 동쪽에서 여러 차례 싸워 크게 이긴 후 수도를 백악산아사달(장춘 방면)에서 골본(심양 방면)으로 옮기고 백악산아사달에 있는 장로들을 불러 회유하였다는 내용이다.

 「계해 2년(B.C 58년) 겨울 10월 단제가 붕어하고 고주몽이 유명에 따라 대통을 이었다. 이보다 앞서 단제는 아들이 없었는데, 고주몽을 보니 사람이 범상치 않으므로 딸로서 아내를 삼게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즉위하니 이 해 나이가 23세였다. 이때 하부여인(註 심양 방면 부여 무리)이 그를 죽이려 하였는데 주몽은 어머니의 명을 받들어 오이, 마리, 협보 등 덕으로 사귄 세 사람과 함께 길을 떠나 분릉수에 이르러 건너려고 하였으나 다리가 없는지라 추병에게 붙들리까 염려되어 물에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으로, 지금 도망가는 길인데 잡으러 오는 군사가 뒤를 쫓고 있으니 어찌하란 말인가?" 하였더니 이때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므로 주몽이 건너가자 물고기와 자라는 다시 흩어졌다. 癸亥二年 冬十月 帝崩 高朱蒙以遺命入承大統 先是帝無子 見高朱蒙 爲非常人 以女妻之 至是卽位 時年二十三 時 下夫餘人 將欲殺之 奉母命 與烏伊摩離陜父等三人爲德友 行至분陵水 欲渡無梁 恐爲追兵所迫 告水曰我是天帝子 河伯外孫 今日逃走 追兵垂及 奈何 於是 漁鼈浮出成橋 始得渡 於鼈乃解女妻

 위 문구는 고주몽이 동부여(길림 방면)에서 도망하여 고구려(북부여)의 수도인 골본(심양 방면)으로 와서 고무서 단군의 사위가 된 후, 고무서 단군이 죽을 때 유언에 따라 고구려의 대통을 이었으나, 하부여인이 죽이려 하므로 다시 도망갔다는 내용이다. 이때 고주몽을 따라간 오이, 마리의 “伊,離”는 부여 무리를 뜻하는 "黎.與.餘"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 글자이고, "摩"는 "馬"를 뒤에 같은 발음의 다른 한자로 적은 것이다.

왕검조선 때는 단제를 보좌한 비왕을 번한(飜汗,番汗:새 임금), 마한(馬汗:말임금)이라 불렀는데, 고구려 때는 단제를 좌우에서 보좌한 최고위 관리를 오이(烏伊:새 대신), 마리(摩離,馬離:말 대신)라 불렀다. 따라서 고주몽이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를 데리고 갔다는 것은 고구려의 최고위 관리를 모두 데리고 갔다는 뜻이다.

이후 고구려 무리는 졸본천(혼하상류 방면)의 (고주몽)고구려 무리, 골본에 잔류하여 고구려후에 복속한 무리, 장춘 방면의 북옥저 무리, 길림 방면의 동부여 무리 등으로 갈라져 서로 싸웠다.

 

3). B.C 58년에 장춘 방면으로 이동한 동명계 무리의 역사

 B.C 58년에 고구려(북부여)가 분열되었을 때, 고구려의 수도 골본(심양 방면)이 현도군에 점령당하자 골본에 있던 동명계 무리 중 일부는 장춘 방면으로 북상하였는데, 사서에는 이 무리가 북옥저 또는 북부여로 적혀 있다. 

「동명성왕 10년(B.C 28년) 겨을 11월 왕은 부위염에게 명하여 북옥저를 쳐 없애고 그 땅으로 성읍을 만들었다. 十年 秋九月 鸞集於王臺 冬十一月 王命扶尉염 伐北沃沮滅之 以其地爲城邑」三國史記 高句麗本紀

 북옥저 무리는 이때 장춘 북쪽 농안 방면으로 북상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농안 방면으로 북상한 북부여 무리가 황룡국으로 적혀 있다.

 「유리왕 27년(A.D 8년) 봄 정월 왕태자 해명이 고도에 있으면서 힘이 세고 용맹을 좋아하는지라 황룡국왕이 그 소문을 듣고 사자를 보내어 강궁을 선물하였더니.후략 二十七年 春正月 王太子解明在古都有力而好勇 黃龍國王聞之 遣使以强弓爲贈.후략」三國史記 高句麗本紀

 그후 고구려가 수도를 요원시 방면에서 비류수상류 방면으로 남천하자 황룡국도 농안 방면에서 장춘 방면으로 남천하였다.

A.D 48년에 장춘 방면의 부여는 한나라와 교류하였다. 이는 후한이 당시 고구려의 세력권에 들어 있는 부여를 이탈시켜 고구려를 약화시키고 고구려를 포위하기 위한 것이었다.

A.D 120년에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를 후한에 보내어 한.부여 동맹이 결성되었다. 이 동맹에 따라 부여는 고구려가 한군현을 공격하였을 때 부여 왕자 위구태와 군사 2만 명을 보내어 한나라를 도왔다.

A.D 136년에 부여 왕이 후한을 방문하였다.

A.D 167년에 부여는 2만 군사를 동원하여 현도군을 공격하였다.

A.D 174년에 한.부여 관계 다시 회복되었으나 부여는 현도군을 통하지 않고 요동군을 통하여 한나라와 교류하였다.

A.D 204년 10월에 부여왕 위구태는 장춘 방면의 부여 무리를 이끌고 공손강이 황해도 지방에 설치한 대방군으로 이동하여 구태백제를 세운 후 다음해 7월에 온조백제와 마한을 정복하였다.

 「초고왕 39년(A.D 204년) 겨울 10월 혜성이 동쪽 우물에 나타났다. 冬十月 星孛于東井」

「초고왕 40년(A.D 205년) 가을 7월 태백이 달을 침범하였다. 秋七月 太白犯月」三國史記 百濟本紀

 부여왕 위구태가 한반도로 이동하여 구태백제를 건국한 후부터 구태백제, 장춘 방면의 부여, 요동의 공손씨는 동맹세력이었다.

A.D 238년에 위나라와 고구려가 연합하여 구태백제의 동맹세력인 공손씨를 토벌할 때 구태백제는 만주로 출병하여 부여를 보존하고 부여를 구태백제의 분국으로 만들었다.

 「고이왕 5년(A.D 238년) 봄 2월 부산으로 사냥 가서 50일만에 돌아왔다. 여름 4월 대궐 문기둥에 낙뢰가 있었다. 황룡이 그 문에서 날아 나왔다. 五年 春 二月 田於釜山 五旬乃返 夏四月 震王宮門柱黃龍自其門飛出.」

  "釜山"의 "釜"는 부여를 뜻하는 고대말 불달(해님의 아들이 사는 땅)을 한자로 적으면서 해님을 뜻하는 불(不)을 부(不)로 읽고 뒤에 같은 음의 다른 한자인 "釜"로 적은 것이고, "山"은 들을 뜻하는 고대말 "달"을 한자로 적으면서 "達" 또는 "山"으로 적었는데, 이 경우는 "山"으로 적은 것이다. 그리고 사냥은 동족을 평정할 때 자주 사용된 은유법 문구이고, "震"은 임금을 뜻하는 "辰(龍)"을 은유법으로 적은 것이며, "黃"은 역(易)에서 중앙 또는 수도를 뜻하고, 용은 임금을 뜻한다.

위 文句는 A.D 238년에 위나라의 사마의가 고구려와 연합하여 구태백제의 인척 되는 요동의 공손연을 토벌하자 구태백제는 부여를 보존하기 위하여 만주로 출병하였다가 50일만에 돌아와서 4월에 부여 지역을 다스릴 분국왕을 임명하였다는 뜻이다. 이때 백제가 장춘 방면의 부여를 구태백제의 분국 체제로 전환한 것은 그때까지 요동의 공손씨와 구태백제(장춘방면의 부여 포함)가 동맹세력이었는데, 위나라가 요동의 공손씨를 토벌함으로써 장춘 방면의 부여가 고립되자 고구려와 위나라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부여를 중앙정부에서 직접 관장하지 않고 분국왕이 관장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분국왕으로 간위거가 임명되었다. 삼국지 부여전에는 위구태가 죽은 후 간위거가 즉위하였다고 적혀 있으나(尉仇台死,簡位居立), 간위거는 이때 이미 즉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후 간위거왕은 A.D 246년에 위나라의 유주자사 관구검에게 고구려를 공격하는데 필요한 군량미를 공급하였다. A.D 238년부터구태백제와 위나라는 적대국이 되었는데, 간위거왕이 구태백제의 적대국인 위나라에 군량미를 공급한 것으로 보아 장춘 방면의 부여는 위나라의 이간전술에 넘어가 A.D 246년경부터 구태백제의 세력권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 뒤 간위거가 죽은 후 적자가 없어 서자 마여가 즉위하였다. 이때 우가가 반역을 하여 마여가 죽으니 마여의 아들이 6살 나이로 부여왕이 되었다.

그 후 태강 6년(A.D 285년)에 선비 모용외가 부여를 침공하니, 부여왕은 칼을 빼어 자살하고 자제들은 도망쳐서 옥저(부여)의 사직을 보전하였다.

 「부여는 무제 때 자주 와서 조공하였는데, 태강 6년에 이르러 모용외가 처들어가 깨뜨렸다. 부여왕 의려는 자살하고 자제는 도망쳐 옥저를 보전하였다. 제가 조칙을 내리기를 부여왕은 세세토록 충과 효를 지키었다. 나쁜 오랑케에게 멸망을 당하니 걱정스럽다. 남은 무리들이 다시 복국하도록 계책을 세워라" 하였다. 한 신하가 주청하기를 호동이교위 선어영이 임기응변의 계략을 잃어 부여를 구하지 못했으니 조칙으로 선어영을 해직하고 그 직무를 하감이 대신토록 하라고 하였다. 다음해 부여왕 의라가 하감에게 사신을 보내어 백성을 이끌고 옛 나라로 돌아가기를 청원하였다. 하감이 황제께 보고하고 독우 가침을 보내어 병사들로 하여금 의라가 옛나라로 돌아가는 것을 호송토록 하였다. 모용외가 요로에서 이를 막자, 가침이 모용외와 싸워 크게 패하였다. 모용외가 무리를 이끌고 퇴각하니, 의라가 다시 나라를 얻었다. 이 후 모용외가 자주 부여를 노략질하여 부여인을 중국에 팔았다. 제가 이를 불쌍히 여겨 조칙으로 이들을 속환시켜주고 사, 기 2주에 조칙을 내려 부여인의 매매를 금하였다.武帝時 頻來朝貢 至太康六年 慕容所襲破 其王依慮自殺 子弟走保沃沮 帝下詔曰 '夫余王世守忠孝 惡虜所滅 甚愍念之若其遺類足以復國者 當之方計 使得存立' 有司奏 護東夷校尉鮮於嬰不救夫余失於機略 詔免嬰 以何龕代之 明年 夫余後王依羅遣詣龕 求率見人還復舊國 仍請援 龕上列 遣督郵賈沈以兵送之 又要之於路 沈與戰 大敗之 眾退 羅得復國 爾後每為廆掠其種人 賣於中國 帝愍之 又發詔以官物贖還 下司 冀二州禁市夫余之口」 晋書 列傳第六十七 夫餘

「부여는 처음 녹산(장춘 방면)에 거주하였는데, 백제의 침공을 받아 부락이 쇠산해짐에 따라 서쪽으로 연나라와 가까운 곳으로 옮겼다. 그런데 연나라에 대한 방비를 전혀 하지 않아 연왕 황이 세자 준을 보내어 모용군을 이끌고 부여를 습격하게 하였다..중략..마침내 부여를 공략하고 그 왕 현과 부여인 5만여 구를 사로잡아 귀환하였다. 황은 그 왕 현을 진국장군으로 임명하고 딸을 처로 주었다(初夫餘居於鹿山 百濟所侵 部落衰散西徙近燕 而不設備 燕王황遣世子俊帥慕容軍 慕容恪..중략..遂拔夫餘 虜其王玄及部落五萬餘口而還 황以玄為鎮軍將軍 妻以女).」 資治通鑑 卷97 晋紀 永和 2年條

 그후 4세기 중엽에 장춘 방면의 부여 지역은 고구려의 영역이 되었다.

모두루 묘지에 의하면 고구려는 광개토왕 이전에 이미 장춘 방면의 부여 지역으로 진출하였다.

「전략. 조부 대형 염모(재모?)..중략..조부00, 대형 자0, 대형 00를 거치기까지 대대로 관직의 은혜와 물품을 하사받아 왔다. 조부는 벼슬길에 나가 성민과 곡민을 함께 다스렸다. 전왕들의 보살핌이 이와 같았다. 광개토왕 대에 이르러 조부의 인연에 따라 노객인 모두루와 00모에게 북부여를 다스리도록 하였다. 前略. 祖大兄冉(再?)牟壽盡00於彼喪亡사由祖父00大兄慈0大兄000世遭官恩恩賜祖之0(出?)道城民谷民竝領前王0育如此還至國岡上大開土地好太聖王緣祖父0爾恩敎奴客牟頭婁00牟敎遣令北夫餘守事」

 장춘 방면의 부여 무리는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고구려에 복속하였다.

 

4). B.C 86년에 길림 방면으로 이동한 해모수계 무리의 역사

 1세 왕 해부루

 고구려 4세 해우루 단군이 수도 백악산아사달을 내어놓으라는 동명의 위협에 못이겨 병을 얻어 죽자 해우루 단군의 동생 해부루는 해모수계 무리를 이끌고 백악산아사달(장춘 방면) 동쪽에 있는 가섭원(길림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사서에는 이 나라 이름이 동부여 또는 가섭원부여로 적혀 있다.

환단고기 가섭원부여기에 적혀 있는 동부여의 역사를 살펴본다

 「을미 원년(B.C 86년) 해부루 왕은 북부여 때문에 제약을 받아 가섭원 또는 분릉이라고도 하는 곳으로 옮겨 살았다. 오곡이 잘 되었는데, 특히 보리가 잘되었다. 또 범, 표범, 곰, 이리가 많아 사냥하기가 편했다. 乙未元年 王爲北夫餘所制 徙居迦葉原 亦稱분陵 宜五穀 尤多麥 又多虎豹熊狼 便於獵」

「정유 3년(B.C 84년) 국상 아란불에게 명하여 구휼제도를 만들어 원근의 유민들을 불러 위로하고 제때에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살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또 밭을 주어 경작하게 하니 몇 해 안되어 나라는 부유해지고 백성들의 숫자는 많아졌다. 때에 필요할 때마다 비가 내려 분릉이 번성해지니 백성들이 왕에게 정춘의 노래를 지어 불렀다. 丁酉 三年 命國相阿蘭弗設賑招撫遠近流民 使及時飽暖 又給田耕作 不數年 國富民殷 時有時兩滋분陵 民歌王正春之謠」

「임인 8년(B.C 79년) 앞서 하백녀 유화 부인이 나가 노는데 부여의 황손 고모수가 유혹하여 강제로 압록강변에 있는 집 속으로 끌고가 사욕을 채우고는 고모수는 승천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유화의 부모는 유화가 중매도 없이 고모수를 따라간 것을 책망하며 쫓아내어 구석진 방에 살게 하였다. 고모수는 본명이 불리지이고 혹은 고진의 손자라고도 한다. 왕께서는 유화를 이상히 여겨 수레를 같이 타고 궁으로 돌아와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다. 그 해 5월 유화 부인이 알 하나를 낳았는데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이름이 고주몽이다. 생김새가 영특하고 나이 겨우 7세에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 말에 활 잘 쏘는 것을 주몽이라 하였는데, 이로서 이름으로 하였다고 한다. 壬寅 八年 先是 河伯女柳花 出遊 爲夫餘皇孫高慕漱之所誘强至鴨綠邊室中而私之 仍升天不歸父母責其無媒而從之 遂謫居邊室 高慕漱 本名弗離支 或曰高辰之孫 王異柳花 同乘還宮而幽之 是歲五月五日 柳花夫人生一卵 有一男子 破殼而出 是謂高朱蒙 骨表英偉年甫七歲 自作弓矢 百發百中 夫餘語 善射爲朱蒙 故以名云」

「갑진 10년(B.C 77년) 해부루 왕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어느 날 산천에 제사지내고 아들 있기를 빌었더니 타고 있는 말이 곤연에 이르자 큰 돌을 마주보고 서서 눈물을 흘렸다. 왕은 이를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그 큰 돌을 굴리게 하였더니 어린애가 있었는데 금색의 두꺼비 모양이었다. 王은 몹시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나에게 좋은 아들을 주신 것이로다" 하며 이를 거두어 기르고 이름을 금와라 하였다. 그가 자라자 태자로 삼았다. 甲辰 十年 王老無子 一日 祭山川求嗣所乘馬 至鯤淵 見大石相對浹淚 王怪之 使人轉其石 有小兒金色蛙形 王喜 曰此乃天賚我令胤乎 乃收而養之 名曰金蝸 及其長立爲太子」

 위 문구에는 해부루의 아들이 금와로 적혀 있다. 고구려의 신앙에 두꺼비는 비왕을 뜻하는데, 이 시기 동부여는 백악산아사달(장춘)에 수도를 둔 동명계 고구려에 복속하고 있었다.

 「임술 28년(B.C 59년) 나라 사람들이 고주몽이 나라에 이롭지 못하다 하여 죽이려고 하였다. 고주몽은 어머니 유화 부인의 명을 받들어 동남쪽으로 도망하여 엄리대수를 건너 졸본천에 이르렀다. 이듬해 고주몽이 나라를 세우니 이 이가 (고주몽)고구려의 시조이다. 壬戌二十八年 國人以高朱蒙爲不利於國 欲殺之 高朱蒙奉母柳花夫人命東南走 渡淹利大水 到卒本川明年(B.C 58년)開新國 是爲 高句麗始祖也」

 고주몽은 처음 동부여(길림 방면)에서 살다가 나라 사람들이 죽이려 하므로  동부여에서 동남쪽으로 도망하여 고구려(북부여)의 수도 졸본(일명 골본, 심양 방면)으로 와서 고구려 6세 고무서 단군의 사위가 되었고, 다음해 고무서 단군이 죽을 때 유언에 따라 고구려(북부여)의 대통을 이어 받았으나, 하부여인(下夫餘人)이 죽이려 하므로 졸본천(혼하상류 방면)으로 도망가서 (고주몽)고구려를 세웠는데, 위 문구에는 중간과정이 일부 생략되어 있다.

 

2세 왕 금와

 「갑술 원년(B.C 47년) 왕이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어 방물(註 지방 특산물)을 바쳤다. 甲戌 元年 王遣使高句麗 獻方物」

「정유 24년(B.C 24년) 유화 부인이 돌아가셨다. 고구려는 호위병 수만으로 졸본으로 모셔가 장사지냈는데, 황태후의 예우로 옮기고 산 같은 능을 만들고 그 옆에 묘사를 지었다. 丁酉二十四年 柳花夫人薨高句麗以衛兵數萬 返葬于卒本 命以皇太后禮 遷就山陵 建廟祠于其側」

「갑인 41년(B.C 7년) 왕이 돌아가니 태자 대소가 즉위하였다. 甲寅四十一年 王薨 太子帶素立」

 

3세 왕 대소

 「을묘 원년(B.C 6년) 정월 왕은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어 아들을 인질로 하여 수교할 것을 청하였다. 고구려의 열제가 태자 도절을 인질로 보내려 하였으나 도절이 가지 않으므로 왕이 노여워하였다. 겨울 10월 군사 5만을 거느리고 가서 졸본성을 쳤으나 큰 눈이 내려 얼어죽은 군사가 많으므로 이에 물러났다. 乙卯 元年 春正月 王遣使高句麗 請交質子高句麗烈帝 以太子都切爲質 都切不行 王에之 冬十月 以兵五萬 往侵卒本城 大雪多凍死 乃退」 

「癸酉 19년(A.D 13년) 왕께서 고구려를 침공하여 학반령 밑에 이르렀다가 복병을 만나 크게 패하였다. 癸酉十九年 王侵攻高句麗 至鶴盤嶺下 遇伏兵大敗」

「임오 28년(A.D 22년) 2월 고구려가 온나라의 힘을 다하여 쳐들어 오므로, 왕은 몸소 무리를 이끌고 출전하였다가 진구렁을 만나 王의 말이 빠져 나오지 못하였다. 고구려의 상장 괴유가 바로 앞에 있다가 왕을 살해하였다. 그래도 우리 군사는 굴하지 않고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는데, 짙은 안개가 7일이나 계속되니, 고구려의 열제는 밤에 몰래 병사를 이끌고 포위망을 벗어나 샛길을 따라 달아나 버렸다. 壬午二十八年二月 高句麗擧國來侵 王自率衆出戰 遇泥 王御馬陷 不得出 高句麗上將怪由 直前殺之我軍猶不屈 圍數重 適大霧七日 高句麗烈帝 潛師夜脫 從間道而遁居.

여름 4월 왕의 동생은 종자 수백인과 더불어 달아나다가 압록곡에 이르러 해두왕이 나와 사냥하는 것을 보고 그를 죽이고 그 백성들을 취하여 갈사수 가로 와서 그 곳을 차지하고는 나라를 세워 왕이라 칭하니 이를 갈사라 한다. 태조 무열제 융무 16년 8월에 이르러 도두왕은 고구려가 날로 강해짐을 보고 온나라를 들어 스스로 항복하니 3세 37년만에 나라가 망했다. 고구려는 도두를 우태로 삼아 집을 하사하고 혼춘을 식읍으로 주고 동부여후에 봉하였다. 夏四月 王弟與從者數百人 奔至鴨綠谷 見海頭王出獵遂殺之而取其民 走保葛思水濱 立國稱王 是爲葛思 至太祖武烈帝 隆武十六年八月 都頭王 見高句麗日强 遂擧國自降 凡三世歷四十七年而國絶 命都頭爲于台 賜第宅以琿春爲食邑 仍封爲東夫餘侯.

가을 7월 왕의 종제가 그 나라 백성더러 말하기를 "선왕은 시해당하고 나라는 망하여 백성들은 의지할 곳이 없다. 갈사는 치우쳐 있어 안락하지만 스스로 나라를 이루기 어렵고 나 역시 재능과 지혜가 부족하여 나라를 새롭게 일으킬 수가 없으니 항복함으로써 살기를 도모하리라" 하고 옛 도읍의 백성 만여 명과 함께 고구려에 투항하니, 고구려는 그를 봉하여 왕으로 삼아 연나부에 안치하고 그의 등에 낙문이 있으므로 낙씨의 성을 하사하였다. 秋七月 王從弟 謂國人曰 先王身弑國亡 人民無所依葛思偏安 不能自國 吾亦才智魯下 無望興復 寧降以圖存 以故都人民萬餘口 投高句麗 高句麗封爲王 安置椽那部 以其背有絡文 賜姓絡氏

 위 문구에 의하면 동부여가 고구려에 패한 후 1 무리는 압록곡으로 이동하여 해두왕을 죽이고 갈사수 변두리를 차지하여 갈사국을 세웠다가 3세만에 고구려에 항복하였고, 길림 방면에 있던 무리들은 대소왕이 죽은 그 해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삼국지 위서 권 30 읍루전에는 읍루는 한나라 때부터 부여에 예속되었고, 부여가 읍루에 과중한 공납을 매겼기 때문에 읍루 사람들이 황초년간(A.D 220-226년)에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으며, 부여가 반란을 진압한 후 반란자들을 징벌하였다고 적혀 있다. 이로 보아, 동부여는 A.D 22년에 고구려에 항복하였으나, 후에 다시 자립하여 연해주 방면의 읍루를 속국으로 거느리는 등 강력한 국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후 영락 20년에 동부여는 광개토왕에게 항복하였다.

 「영락 20년은 경술이었다. 동부여는 옛부터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고 조공하지 않으므로 대왕은 몸소 대군을 거느리고 토벌하러 갔다. 대군이 부여성에 도착하자 동부여 전국이 두려워하여 복종하고 000000을 바쳤다. 대왕의 은덕이 동부여에 넓게 미치게 됨에 이에 회군하여 돌아왔다. 후략. 二十年庚戌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中叛不貢王躬率往討軍到餘城而餘城國駭000000000王恩普0於是旋還」

 그후 동부여 무리는 다시 자립하여 서쪽으로 백랑곡(대릉하 방면)까지 이동하였다가 문자왕 3년에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문자왕 3년 2월 부여왕이 자기 처자와 함께 와서 나라를 맡기고 항복하였다. 二月 扶餘王及妻 以國來降」三國史記 高句麗本紀

「뒤에 차츰 자립하여 개원 서북으로부터 옮겨가 백랑곡에 이르니, 연나라 땅에 가까운 곳이었다. 문자열제 명치 갑술(A.D 494년)에 이르러 나라가 고구려의 연나부에 편입되니 낙씨는 제사가 끊겼다. 後稍自立 自開原西北徙到白狼谷 又近燕之地 至文咨烈帝明治甲戌 以其國折入于高句麗椽那部 絡氏遂不祀」桓檀古記 迦葉原夫餘紀 

 
 
  북부여
BC 239    (해모수계) BC 239
BC 239   1세 단군 오우관, 용광검, 오룡거  
  해모수
BC 238 왕검조선 멸망   연호법제정     BC 238
   
   
BC 232     오가 회유, 공화철폐   BC 232
   
BC 229     북막/산지객륭 습격   BC 229
   
BC 220     백악 아사달, 336칸 궁궐, 천안궁 BC 220
   
BC 193   2세 단군 연타발, 평양에 성책   BC 193
  모수리
BC 192     해성을 평양도에 복속, 중부여 총괄 BC 192
   
BC 169     낙랑왕 최숭, 곡식 300섬 해성에 조공 BC 169
해모수계  
BC 128     기병. 보병 1만, 위만/남여성공격 흡수 BC 128
   
BC 120   4세 단군 고진 발탁, 서압록수비 (창해군폐지) BC 120
  고우루, 해우루
BC 118     우거(위만) 침입, 해성 이북 50리 빼앗김 BC 118
   
BC 117     해성이북 50리 회복 실패   BC 117
   
BC 115     단제 친히 정예군 5천 동원, 해성이북 50리, 살수 회복 BC 115
    구려하(요하) 동쪽 모두 흡수  
   
BC 114     좌원에 목책, 서울은 친정 지방 4구역군사 주둔   BC 114
   
BC 108     한나라, 위만조선 멸망, 고두막한(동명왕-유민 보호 활동) BC 108
   
BC 106   (졸본) 고두막(동명) 즉위, 5천명 동원   BC 106
    요동의 서언평, 고리국 영토회복  
   
BC 87     현도격파, 서개마현(요원시), 상은대현(개원), 임둔, 진번 괴멸- 현도군 서북으로 이동 (심양 방면) BC 87
   
BC 86 동명왕계          (북부여) 5세 고두막한  해모수계를 백악산 아사달(장춘) 동쪽 분릉으로 밀어내고   분릉에서 해부루왕 즉위 - 동부여 (가섭원 부여) BC 86
(동명왕)  수도입성 (장춘-북부여 개국)          
BC 84   오곡풍성, 사냥 왕성   BC 84
  유민정책, 번성  
BC 79   고모수-유화 -> 고주몽 탄생   BC 79
       
BC 77   해부루왕 - 금와태자 얻음   BC 77
       
BC 59 6세 고무서 졸본천(혼하) 에서 즉위   BC 59
(소해모수) 백악산 아사달에서 졸본 (심양)으로 천도  
  BC 58년 (북부여 분열) 1. 고주몽-고구려 무리 2. 졸본(심양) 무리   3. 장춘-북(옥저)부여, 4. 길림- 동부여 무리  
                       
    BC 58
BC 58   고주몽 엄리대수 지나 졸본천에서 개국 즉위    
    동명계 - 현도군에 의해 졸본 점령당하고 장춘으로 북상천도 - 북(옥저)부여    금와왕 즉위   BC 47
BC 47        
        BC 28
BC 28 주몽계   동명계/부위염 - 북(옥저)부여 멸망    
    유화 부인 사망   BC 24
BC 24        
       
BC 7     대소왕 즉위   BC 7
       
BC 6       10만으로 졸본성 공격-패배 BC 6
       
AD 8   유리왕 27년 황룡국에서 조공 (황룡국- 농안으로 북상한 북(옥저)부여)         AD 8
       
    황룡국 - 장춘 천도    
       
AD 13       학반령 패배 AD 13
       
AD 22     도두왕  고구려 침입 - 대소왕 피살 AD 22
    7일공격후 고구려 열제 후퇴
    도두왕 갈사국 건국
    3세/37년후 멸망
AD 48     황룡국 - 한나라와 교역, 고구려 약화정책   AD 48
   
AD 120     부여왕-위구태를 후한에 보내 한.부여동맹 결성     AD 120
    고구려 공격시 위구태 2만명 협조      
               
AD136     부여왕-후한 방문         AD136
               
AD 167     부여-한의 현도군 공격         AD 167
               
AD 174     한.부여 관계 회복         AD 174
               
AD 204 근초고 39년   부여왕 위구태-대방군에 구태백제 건국       AD 204
               
AD 205     구태백제- 온조백제, 마한 정복       AD 205
               
AD 238 고이왕 5년 위-고구려 연합 공손씨 토벌(구태백제 인척)       AD 238
      구태백제는 부여 보존, 분국화      
      부여(장춘) - 분국왕은 간위거      
AD 246     위/관구검 고구려 공격시 식량지원      
               
      간위거 사후 서자 마여 등극      
               
      우거 반역 - 마여 아들 6세 등극      
               
AD 285       선비/모용외 부여 침공- 부여왕/의려 자결    
               
4세기 중엽       장춘/부여국은 고구려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