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북쪽에 큰 사막(大漠)이 있었다
조선의 지리서인 <택리지>에 보면 신라의 북쪽에 "大漠"이 있다고 했다. 말하자면 무지하게 넓은 큰 사막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大漠은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찾아보면, 동쪽으로 흥안령에서 서쪽으로 천산산맥까지 이르는 사이에 뻗어져 있는 사막을 말한다. 그 지리적 구분이 흥안령이 동쪽 끝이라고 했으므로, 지금의 만주벌판과는 상관이 없다. 그러니 한반도 북쪽을 두고 신라의 북쪽이라고 한다면 전혀 설득력이 없다.
큰 사막을 기록한 <택리지><대동여지전도><중국고금지명대사전><산해경>의 내용은 같은 지역을 두고 말한 것임에 분명하다. -최두환-
경주의 위치는 큰사막(大漠) 남쪽 순화현(淳化縣)
위 지도에서 확인해 보니 금성(金城)의 북쪽에 큰사막(大漠)이 있습니다.
신라의 위치에 관한 토막글들
글쓴이 : bc8937
건강한 남성의 성기 처럼 대륙의 끝에서 불쑥 튀어나온 모양인 현재의 우리국토, 바로 이 땅의 원주인격인 선거주인들은 고구려계가 확실하다고 봅니다.
물론 대륙의 남부나 동부해안지대에서 황해를 건너 이 땅에 들어 온 이주민들도 많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도 되지만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이 땅으로 오는것 보다 말을 타거나 아니면 걸어서 따뜻한 곳을 찾아 동진 . 남하 하는 것이 열배는 더 쉬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부터 말하면 신라인이 한반도에 들어오게 된 것은 4~5세기경 이라고 억지로 추정해(망명, 유배, 피란 등) 볼 수는 있어도 그 이전의 유물로는 도저히 신라가 이 땅에 있었다고 보기 어럽다는 것이 저의 견해 입니다.
중앙아시아의 스키타이/알타이/시베리아 문화라고 하는 것이 통칭하여 단군문화인 것입니다. 즉, 한반도의 스키타이식 유물이나 매장방식 등등은 그 기원이 중앙아시아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고구려계통의 북방민족의 문화가 이 땅에 자리잡은 것입니다.
단지, 경주라는 지명이 한반도에 있다고 해서 영남권전체를 신라 . 가야 라고 규정짓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처사입니다. 그러한 사실들을 잘 증명해 주는 증거가 '환단고기' 입니다. 이 땅에서 환단고기가 발견 되었고 환단고기는 삼국사기 와는 다르게 고구려를 정통으로 내세웠다는 점이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럼, 신라는 어디에서 그 기원을 찾아야 할까요? 신라는 고구려보다 훨씬 늦게 국가 체제를 갖추게 되는데 바로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키워 비단을 생산하고 그 교역을 통하여 부자나라가 되기시작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게 됩니다. 그 근거지는 바로 실크로드의 바틀네크(요충지) 감숙성 靑海와 金城(지금의 난주) 부근인 것입니다.
신라는 진(秦)나라의 유민이 세웠기 때문에 秦나라가 있었던 지역에서 생겨났습니다. 秦나라가 망하고 대부분의 가난한 백성들은 흉노의 무리에 섞여 들어갔습니다. 그 속에서 약 200년의 세월이 흐르고 신라가 태어납니다. 초기의 신라는 서역에서 건국했으므로 천축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잊혀진 돌궐의 역사를 파헤쳐 보면 신라와 유사한 점이 많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초기 신라가 돌궐민족의 흥망사 일지도 모를 정도입니다.
유목민족제국사 57쪽∼ 돌궐
金山(알타이山)의 양지바른 쪽에 거주하며 茹茹(연연)의 철공들이 되었다.
金山의 모양이 투구(兜 )와 비슷하고, 그 俗語에 투구가 <突厥>이라 그에 따라 돌궐이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42쪽. 돌궐은 본거지가 알타이산맥 지역으로 연연에 복속되었던 부족이었으며, 주로 철물업에 종사하였다.
48쪽. 말과 비단무역의 대부분을 장악한 돌궐제국의 확장으로 토곡혼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58쪽 …그중 하나가 阿史那 A-shih-na라는 성을 가지고 家系를 세웠는데 여기서 몇 세대 후에 돌궐족이 일어났다.…
돌궐이 처음으로 중국사료에 언급된 시기는 3세기 중이었다. 그들의 본거지는 알타이산맥 지역이었다.…
중국인과 희랍인의 여행기에는 돌궐인의 직업으로 철공업의 중요성이 분명히 기술되어 있다.
鐵門- 분명히 실제로 철로 만든 문이었던 것 같다.-은 돌궐제국의 경계를 구획하였다.
71쪽…돌궐제국에서는 교역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연연( )을 멸망시킴으로써 중앙아시아의 교역로와, 따라서 중국과 비잔틴 간에 시행되어 온 이익이 많은 비단무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59쪽. 돌궐족이 패권을 장악하게 된 것은 그 첫 天子 부민 Bumin(土門:돌궐의 건국시조 이름은 중국기록에는 <土門> 혹은 <伊利可汗>으로 기술되어 있고, 突厥文碑에는 Bumin이다)의 업적 때문이다.
…중국사료에 부민에 관한 최초의 중요한 언급은 546년 記事에 나타난다.…부민의 군사들은 그들의 남방에 거주하고 있던 丁零 Ting-ling(중국기록에 보통 鐵勒으로 자주 나타난다. 다른 형태로는 칙勒, 狄歷등. 北魏시대의 高車도 동일한 민족으로 추측되어 왔다)을공격하여 복속시켰다. 이 丁零은 돌궐족의 一支派였던 것 같다.
위의 기록을 보면, 신라와 돌궐간에는 유사한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① 철기문화와 비단무역의 주도세력.
② (한)asi,가 쇠(金)을 의미한다면, 阿史那 A-shih-na의 성은 결국 김씨(金氏)라는 뜻으로 풀어볼 수 있습니다.
김(金)씨라는 성 역시, 쇠/철의 뜻입니다.
무리한 억측일 수도 있으나, 공교롭게도 돌궐족의 패권을 장악한 천자의 이름은 부민이고,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문무왕의 휘(諱)는 법민(法敏)인데, 1백년 정도의 연대차이가 있기는 합니다.
③ 왕의 호칭 돌궐→한(汗), 신라→간(干)
④ 돌궐의 경계를 구분 지었던 철문(鐵門)과, 신라의 금성(金城).
돌궐이 복속했던 철륵(鐵勒) 역시 철과 관련이 있는데, 신라가 병합했던 가야 역시 철의 왕국으로 불렸다.
금관가야가 있던 섬서성 안강현, 고령가야가 있던 섬서성 의천현 일대는(율곤학회/고대사/가야 참고) 당시 철륵이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
⑤ 동동궐의 멸망(634년)은 고구려의 멸망 시점과 비슷하고, 서돌궐은 당(唐)에 의해 적대관계였던 동돌궐이 와해되자, 683년경 당(唐)과 4년동안 11차의 전쟁을 감행하여 제2돌궐제국시대를 열게된다. 이 역시 통일신라의 과정과 비슷한 경로를 밟게된다.
⑥ 삼국 병립 시기와 나란히 하며 그토록 위력을 떨쳤던 돌궐이건만, 이상하게도 삼국사기에는 돌궐에 대한 기록이 한 줄도 보이지 않는다.
이상과 같이, 철과 연관된 언어와 철기문화의 주도민족들은 모두 알타이산을 중심으로 펼쳐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초기 왕력을 살펴보면 이상하게도 천축국의 영향 많이 받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탈해니사금(脫解尼師今)은 본시 다파나국(多婆那國)사람 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다파나국(多婆那國)은 다섯천축국의 제후국으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 나옵니다. 그리고 파사니사금(婆娑尼師今)은 유리니사금(儒理尼師今)의 둘째아들이므로 탈해니사금(脫解尼師今) 과는 처남 매부관계인데 파사(婆娑)의 뜻이 무었입니까? 파사(婆娑)의 뜻은 범어로 婆bha 娑sa 바사 즉, "페르샤" 를 이르는 말이지요. 아마도 파키스탄의 접경지대 일것 같은데 역시 천축국입니다. (천축국은 지금의 인도가 아님, 돌궐지역)
초기신라는 처음에 세력이 작았기 때문에 여러가지 명칭으로 불려져 오다가 정식국호인 신라라는 명칭을 사용하기까지는 약 30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삼국사기에는 기림이사금 10년에 신라(新羅)를 다시쓰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 전 기록에는 신라 라는 국호를 사용한 흔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신라(新羅)라는 명칭을 쓰기까지 쓰여졌던 이름들을 나열해보면 걸의식국(乞衣食國), 비집기국(飛集基國), 시라(尸羅), 사라(斯羅), 시림(始林), 유계(有鷄), 계괴(鷄괴), 계림(鷄林), 서야벌(徐耶伐 또는 徐羅伐) 유잠국(有蠶國) 등으로 주로사용하던 이름이 모두가 누에치기와 관련지어 부른것이 특이 합니다.
신라는 감숙성 난주(금성)에서 시작하여 차츰 세력을 키워 동으로 이동해와 위(魏 220~265 AD. 46년간)나라를 삼킵니다. 이때 위(魏 220~265 AD. 46년간)나라는 신라와 백제에 동화 되면서 없어졌습니다. 신라는 처음에 고구려 안에서 소국으로 지내다가 차츰 세력을 키워 산동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세력을 확장해 왔습니다. 이런 신라가 망했을때 유민은 그대로 고려로 계승이 되었습니다.
다시말해 신라는 한반도에 그런 유물을 매장 할 이유가 없는 나라입니다.
경주는 역사상 모두 다섯군데 있었던 것으로 사서(史書)에는 기록되어 있다.(우리나라 제외)
세종실록지리지에 보면 경주(慶州)는 처음 정주(定州)였다. 정주(定州)는 감숙성(甘肅省) 무위현(武威縣) 서북이다. 두 번째 경주는 순화현(淳化縣)이다. 이 곳은 지금의 섬서성 서안 위쪽, 세 번째 경주는 산서성(山西省) 기현(祁縣) 동쪽, 네 번째 경주는 섬서성(陝西省) 경양현(涇陽縣) 북쪽, 다섯 번째 경주는 사천성(四川省) 기주부 인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세종실록지리지」경상도 경주편에 의하면, 경주는 별호로 낙랑(樂浪)이라 하며, 낙랑은 순화(淳化)에 정해 있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爲慶州府別號樂浪也 淳化所定』
(1, 3, 4, 5는 별로 중요하지않다.)
주목할 것은 두 번째 경주가 순화현(淳化縣)이라는 것이다. 이곳은 고려태조 왕건이 경순왕 김부에게 내려준 봉지이다. '관광순화 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 정승식읍 팔천호(觀光順化衛國功臣上柱國樂浪王政丞食邑八千戶)'가 그 봉호이다.
경주의 위치는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 바로 위쪽에 있는 순화현(淳化縣)에 있었다.
그리고 경주(慶州)란 이름도 신라가 망했기 때문에 생긴이름이다. 즉, 신라의 수도가 아니라 경순왕이 태조왕건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왕건으로부터 동맹(同盟)의 답례로 태조의 딸 낙랑공주와 혼인하고 식읍으로 받은 땅에 경주(慶州)라는 이름을 왕건이 내려주었던 것이다.
원래 수도는 계림, 또는 금성인데 지금 한반도 경주에는 계림도 있고 금성도 있고, 낭산, 명활산, 황룡사, 포석정 등이 마치 영화셋장 처럼 한 곳에 뭉뚱거려져 있으니 말이 되겠는가?
고려사절요 태조 을미18년
○ 봄 3월에 , 견훤의 아들 신검(神劒)이 그 아버지를 금산(金山 금제(金提))의 불사(佛寺)에 가두고 , 그 아우 금강(金剛)을 죽였다.
견훤이 아들 10여 명이 있었는데 넷째 아들 금강이 키가 크고 지혜가 많으므로 견훤이 특별히 그를 사랑하여 왕위를 전하고자 하니 , 그 형 신검․ 양검(良劒)․ 용검(龍劒) 등이 이를 알고 근심하며 번민하였다.
이 때 양검과 용검은 지방에 나가서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신검만이 홀로 옆에 있었다. 이찬(伊粲) 능환(能換)이 사람을 시켜 양검․ 용검과 함께 몰래 모의하고 , 신검을 권하여 난을 일으키게 하였다.
○ 여름 4월에 왕이 여러 장수에게 이르기를 , “나주(羅州)의 40여 군(郡)이 우리의 울타리가 되어 오랫동안 풍화(風化)에 복종하고 있었는데 근년에 후백제에게 침략되어 6년 동안이나 바닷길이 통하지 않았으니 누가 능히 나를 위하여 이 곳을 진무(鎭撫)하겠는가” 하니 , 공경(公卿)들이 유금필(庾금弼)을 천거하였다. 왕은 이르기를 , “나도 역시 이를 생각해 보았으나 그러나 요사이 신라로 가는 길이 막혔던 것을 금필이 이를 통하게 하였으니 그의 노고(勞苦)를 생각하니 다시 명하기가 어렵다” 고 하였다. 금필이 아뢰기를 , “신이 비록 아니 이미 노쇠(老衰)했사오나 이것은 국가의 큰 일이오니 감히 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왕은 기뻐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이르기를 , “경이 만약 명을 받든다면 어찌 이보다 더 기쁨이 있으랴” 하고 , 금필로서 도통대장군(都統大將軍)을 삼아 예성강(禮成江)까지 전송하고 어선(御船)을 주어 보내었다. 금필이 나주(羅州)에 가서 경략(經略)하고 돌아오니 , 왕이 또 예성강까지 행차하여 맞아 위로하였다.
○ 6월에 견훤이 막내 아들 능예(能乂)와 여자(女子 나인(內人)) 애복(哀福)과 사랑하는 첩 고비(姑比)등과 함께 나주(羅州)로 도망 나와서 고려에 들어와 붙어살기를 청하므로 장군 유금필과 대광(大匡) 만세(萬歲)와 원보(元甫) 향예(香乂)와 오담(吳淡)․능선(能宣)․충질(忠質) 등을 보내어 바닷길로 그들을 맞이하였다. 견훤이 이르매 , 다시 견훤을 일컬어 「상부」(尙父)라 하고 , 남궁(南宮)을 사관(舍館)으로 주고 , 위(位)는 백관의 위에 있었다. 양주(楊州)를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고 , 겸하여 금과 비단과 노비 각 40명과 말 10필을 내려주고 , 후백제에서 항복해 온 사람 신강(信康)으로서 아관(衙官)을 삼았다.
○ 가을 9월에 서경(西京)에 행차하여 황주(黃州)와 해주(海州)를 순시하고 돌아왔다.
○ 겨울 10월에 임술(任戌)에 신라왕 김부(金溥)가 시랑(侍朗) 김봉휴(金封休)를 보내어 들어와서 조회하기를 청하므로 왕이 섭시중(攝侍中) 왕철(王鐵)과 시랑(侍郞) 한헌옹(韓憲邕) 등을 보내어 회보 하였다.
11월 갑오(甲午)에 신라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왕도(王都)를 출발하니 , 사대부와 서민(庶民)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 향거(香車)와 보마(寶馬)가 30여리에 뻗혔고 , 길은 사람으로 꽉 차서 막혔으며 , 구경꾼들이 쭉 둘러 서 있었다. 길 가에 있는 주(州)․현(懸)에서는 접대가 매우 성대하였고 , 왕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하고 위로하였다.
계묘(癸卯)에 신라왕이 왕철 등과 함께 개경(開京)에 들어오니 , 왕이 의장(儀仗)을 갖추어 교외에 나가서 맞이하고 들어와서 유화궁(柳花宮)에 머무르게 하였다.
계축(癸丑)에 왕이 정전(正殿)에 나아가 문무 백관을 모으고 예(禮)를 갖추어 맏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신라왕에게 시집보내었다.
기미(己未)에 신라왕이 글을 올리기를 , “본국이 오랫동안 위란(危亂)을 겪어 나라의 운수가 이미 다하였으니 다시 기업(基業)을 보전할 희망이 없습니다. 원컨대 , 신하의 예(禮)로써 뵈옵고자 합니다” 하니 ,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12월에 신유(辛酉)에 뭇 신하들이 아뢰기를 , “하늘에는 해가 둘이 없고 땅에는 임금이 둘이 없사오니 , 한 나라에 두 임금이 있으면 백성이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원하옵건대 , 신라왕의 청을 들어주옵소서” 하였다. 임신(任申)에 왕이 천덕전(天德殿)에 나아가서 재신(宰臣)과 백관을 모으고 이르기를 , “짐(朕)이 신라와 서로 피를 마시고 동맹(同盟)을 맺어 두 나라가 각기 사직(社稷)을 보전하여 영원히 잘 지내기를 바랐었는데 이제 신라왕이 굳이 신하로 일컫기를 청하며 , 경(卿)등도 역시 옳다고 하므로 짐이 마음으로는 부끄럽게 여기나 의리로써 굳이 거절하기가 어렵다” 하고 , 이에 김부(金傅)의 뜰 아래서 뵈옵는 예(禮)를 받으니 뭇 신하들이 칭하(稱賀)하여 그 소리가 궁궐에 진동하였다.
김부를 제수하여 '관광순화 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 정승식읍 팔천호(觀光順化衛國功臣上柱國樂浪王政丞食邑八千戶)'로 봉하고 , 위(位)가 태자(太子)의 위에 있었다. 해마다 녹(祿) 1천석을 주고 , 신라국을 없애고 「경주」(慶州)라하여 김부에게 주어 식읍(食邑)으로 하게 하였다. 그따라온 사람들도 모두 채용(採用)하고 토지와 녹(祿)을 주어 그전보다도 더 우대되었다. 또 신란궁(神鸞宮)을 세워 김부에게 주었다. 김부를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삼아 부호장(副戶長) 이하 관직(官職) 등의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이에 여러 공신(功臣)들도 역시 이를 본받아 각기 그 주(州)의 사심관이 되었으니 , 사심관은 이 때에 시작되었다.
※ 梁書 新羅篇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新羅者其先本辰韓種也. 辰韓亦曰秦韓. 相去萬里. 傳言秦世亡人避役來適馬韓.
馬韓亦割其東界去之以秦人故. 名之曰秦韓. 其言語名物有似.
신라는 그 선조가 본래 辰韓의 뿌리이다. 辰韓은 역시 말하자면 秦韓이라고 했다.
서로 거리가 만리(萬里)였다.전하는 말로는 진(秦)나라 세상이었으나, 진나라가 망하자 사람들이 마한의 동쪽 지역으로 가서 살았다. 그러므로 진한(秦韓)이라고도 한다.
※ 三國志 辰韓篇에는, 진(秦)나라가 망하여 그 유민들이 마한(馬韓)인 한국(韓國)으로 피난왔으며, 진나라 사람과 마한 사람이 같았다고 했다. 다시말해 본래 낙랑 사람들의 남은 무리와 진한(秦韓)사람들로 처음 6개국을 이루었으나, 그 후 12개 나라로 나누어졌고, 그 중 일부인 육부(六部)의 사람들이 뭉쳐 서야벌(西耶伐)인 신라(新羅)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新羅가 六國을 병합하여 나라를 세웠다고 하는 것이나 秦나라가 六國을 병합하여 중국을 통일 했다는 말은 그 설정이 똑같은 것으로 이에대한 연구도 한번 해보면 좋을 것이다.
新羅人自以小昊金天氏之後. 故姓金氏.
※ 三國史記 百濟本紀 第六 義慈王篇에는, 신라의 조상이 소호 금천씨(小昊金天氏)로 되어있다.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는 황제(黃帝)의 아들이다.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 BC.2578년)의 후손인 진시황제(秦始皇帝 BC.255년)의 진(秦)나라는 감숙성(甘肅省) 천수현(天水縣)에 도읍하여 六國(魏 . 韓 . 趙 . 燕 . 楚 .齊)을 통일했다. 그 후 진(秦)나라인 진한(秦韓)이 망하자 동쪽으로 조선유민들이 몰려와 서야벌(徐耶伐)이 아닌 서야벌(西耶伐)을 세웠다.이때 육촌(六村)이 아닌 육부족(六部族)들이, 서쪽에 있는 자들을 정벌하겠다는 의지로 서야벌(西耶伐)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진(秦)나라인 진한(秦韓)이 망했기에 다시 별처럼 일어나겠다는 뜻으로 진한(辰韓)이라고도 했다.
시조 혁거세 거서간(赫居世 居西干)
http://www.koreandb.net/Sam/bon/samkuk/04_0101.htm
삼국사기 신라본기1 '혁거세거서간' 의 재위 38년 부분이다.
혁거세거서간
38년(서기전 20) 봄 2월에 호공(瓠公)을 마한(馬韓)에 보내 예방(禮訪)하였다. 마한왕이 호공을 꾸짖어 말하였다. "진한과 변한 두 나라는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공물(貢物)을 보내지 않으니,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의가 이와 같은가?" [호공이] 대답하였다. "우리 나라는 두 성인이 일어나서부터 인사(人事)가 잘 다스려지고 천시(天時)가 순조로와, 창고는 가득 차고 백성은 공경하고 겸양할 줄 압니다. 그래서 진한의 유민으로부터 변한 , 낙랑 ,왜인에 이르기까지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임금님은 겸허하게 신하인 저를 보내 안부를 묻게 하였으니, 예가 지나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서는 크게 노하여 군사로써 위협하니 이것이 무슨 마음입니까?" [마한]왕이 격분하여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좌우의 신하들이 간언(諫言)하여 말리니, 이에 돌아갈 것을 허락했다. 이보다 앞서 중국 사람들이 진(秦)나라의 난리를 괴로워하여 동쪽으로 오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 다수가 마한의 동쪽에 터를 잡고 진한 사람들과 더불어 섞여 살았다. 이때 이르러 점점 번성해진 까닭에 마한이 그것을 꺼려서 책망한 것이다. 호공이라는 사람은 그 종족과 성(姓)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본래는 왜인이었다. 처음에 박을 허리에 매고서 바다를 건너온 까닭에 호공(瓠公)이라 불렀다.
三十八年 春二月 遣瓠公聘於馬韓 馬韓王讓瓠公曰 "辰·卞二韓 爲我屬國 比年不輸職貢 事大之禮 其若是乎" 對曰 "我國自二聖肇興 人事修天時和 倉庾充實 人民敬讓 自辰韓遺民 以至卞韓·樂浪·倭人 無不畏懷 而吾王謙虛 遣下臣修聘 可謂過於禮矣 而大王赫怒 劫之以兵 是何意耶" 王憤欲殺之 左右諫止 乃許歸 前此 中國之人 苦秦亂東來者衆 多處馬韓東 與辰韓雜居 至是 4)盛 故馬韓忌之 有責焉 瓠公者 未詳其族姓 本倭人 初以瓠繫腰 渡海而來 故稱瓠公
39년(서기전 19) 마한 왕이 죽었다. 어떤 사람이 임금을 달래어 말하였다. "서한의 왕이 지난번에 우리의 사신을 욕보였는데 지금 상을 당하였으니 그 나라를 치면 쉽게 평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임금이 말하기를 "다른 사람의 재난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다." 하고는 따르지 않고,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三十九年 馬韓王薨 或說上曰 "西韓王前辱我使 今當其喪 征之其國 不足平也" 上曰 "幸人之災 不仁也" 不從 乃遣使弔慰
40년(서기전 18) 백제(百濟)의 시조 온조(溫祚)가 왕위에 올랐다.
四十年 百濟始祖溫祚立
이 부분을 자세히 보면 김부식이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서 년대를 축소하고 짜맞춘 것이 드러난다.
" 중국 사람들이 진(秦)나라의 난리를 괴로워하여 동쪽으로 오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 다수가 마한의 동쪽에 터를 잡고 진한 사람들과 더불어 섞여 살았다. 이때 이르러 점점 번성해진 까닭에 마한이 그것을 꺼려서 책망한 것이다."
이것은 秦나라가 망하던 시기의 일이기 때문에 전한(前漢) 효선제(孝宣帝) 때 라고한 김부식의 말은 거짓이 된다. 즉, 진(秦)나라가 망한지 200년이 지났는데 마한의 동쪽으로 아직도 피난민이 밀려든다는 말을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년대를 짜맞추기 위해서 그 다음장 에는 백제(百濟)의 시조 온조(溫祚)가 왕위에 올랐다. (四十年 百濟始祖溫祚立) 라고 기록을 하여 은근히 쇄기를 박고 있다.
이렇게 역사는 왜곡 되어 버렸다.
"三國史記 新羅本紀 第一篇에 보면 한(漢)나라 효선제(孝宣帝) 오봉(五鳳) 원년(元年 BC.57년) 갑자(甲子) 4월 병진(일왈 정월15일) 거서간(居西干)이 즉위..."
분명히 앞에서는 4월 이라고 해놓고 주석을 달아 1월15일에 즉위 했다고 하는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이다.
혹시라도 개국년대를 조작한 것이 탄로 날까봐 교묘히 감추어서 나중에 들통나면 변명으로 삼으려는 수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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