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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의 역사문화

왜곡된 부여사 바로잡기

by 바로요거 2009. 5. 23.

 

왜곡된 부여사 바로잡기

 

지난 5월 15일 첫 방송이 시작된 역사드라마 ‘주몽’은 몇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 첫 번째는
한국역사 드라마 관심범위의 상한선을 고작해야 고려 초기(태조왕건) 정도로 생각했던 일반의 관심을 깨고 그로부터 1,000여년을 끌어올려 서기전 삼국의 초기역사로 드라마의 영역을 확대했다는 것이다. 상당한 진전이라 평가된다.

두 번째는
고구려의 건국을 다루는 ‘주몽’이 더욱 평가 받는 이유로써 최근 중국정부의 사주 아래 조직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소위 ‘동북공정’이란 이름의 고구려 역사 퍼가기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도 있는 폭발성이 있는 이슈를 다루었다는 것이다.

고구려 건국과 이민족과의 투쟁사를 다루면서 국민적 관심을 고조시켜 국민 다중으로 하여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케 하고 고대역사에 대한 상식의 지평을 확대할 수 있도록 하여 정부와 학계 및 역사연구자의 역사 지키기에 우군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처음 다루는 고대 초기 역사에 대한 자주적 인식을 환기시켜, 신화로 치부되어 왜곡 축소 되어있는 이 이전의 상고시대 특히 고조선의 역사 및 강역 등을 이해하는 기본 인식을 제공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수 있다 하겠다.

그러나 최근 몇 달 동안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역사왜곡에 대한 비판과, 최초로 다루는 고구려의 초기역사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다.

‘주몽’의 스토리 중 픽션을 가미한 부분은 제외하고, 실제 역사책에 기술된 내용과 상반되게 진행되는 즉 역사왜곡 가능성이 심각하게 제기되는 부분에 대하여 역사서의 기록을 통하여 이를 바로잡아 역사인식을 다시 해볼 필요가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우선 드라마의 오류로 지적되는 몇 가지 스토리의 전개를 살펴보면,

① 해모수는 한사군에 대항하여 의병을 주도한 고조선 유민의 지도자이며, 서하 하백의 딸인 유화와 사통하여 주몽을 낳았다. 즉 주몽의 아비가 해모수이다.

② 주몽은 나이 20이 되도록 사내다운 기질과 재주가 없는 덜 떨어진 자이다. 그러다가 그 부친 해모수와 극적으로 만나 무술과 기를 전수받아 영웅의 기질을 보인다.

③ 만주 북동부에 자리 잡은 동부여는 만주 집안 인근 압록강 북부를 중심으로 한 현도군 태수의 철기군의 위세와 수시로 가해오는 내정간섭에 눌려 크게 힘을 못 쓰는 소국에 불과하다.

④ 동부여 국성 인근에 계루군장 연타(취)발과 그 딸 소서노가 상단을 운영하고 있으며, 고주몽이 일시 왕성을 나와 생활하는 그 곳에서 소서노를 만나 맺어지게 된다.

고대사의 영역은 그 관련 사료가 극도로 부족하여 역사적 실체규명이 아주 난해한 영역에 속한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드라마가 작가의 상상력과 역사인식에 의해 엮어지는 점에 있어서는 크게 탓할 것은 못된다.

그러나 현존하는 여러 역사책에, 상호 모순된 기록이 혼란을 주는 측면에도 불구하고, 객관적 판단이 가능한 史實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이 무시되고 한국 고대사가 재단된다는 것에 심각함이 있다.

‘동북공정’에 대항하는 민족 드라마라고 수차례 홍보했음에도 불구하고, 한족과 동이예맥족의 활동영역을 크게 잘못 설정했음은 물론, 한나라 지방군현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반면에 동부여 등 한민족의 조상역사를 축소왜곡 했으며, 최소한의 기본적 혈통관계(부자관계, 혼인관계 등)가 무시되고 후대에 맺어질 인간관계가 시대를 앞서 전혀 엉뚱한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등으로 수십 년 내지는 수백 년에 걸쳐 진행되는 역사가 압축되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는 점이 지적된다.

그러다 보니,
민족사의 여명기가 마치 한족의 식민지에서부터 고구려 국가의 독립(수립)되었다는 이미지가 강조되어 오히려 ‘동북공정’을 도와주는 결과를 초래하고, 혈통관계가 흐트러져 각 세대 전승(世系)에 왜곡이 일어나고, 역사가 압축되어 중요한 역사적 시발점들이 늦추어져서 역사가 단축되는 결과를 낳아 한민족 초기역사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만들고 있다.

역사서에 기록된 고구려 건국시기 전후의 기사를 통하여 그 구겨진 역사를 복원해 본다.


동명(東明)과 주몽(朱蒙)이 동일 인물인가?

우선 해모수로부터 주몽에 이르는 기간의 세대전승과 국가 창업의 기록을 통해 삼국이전 열국시대를 살펴보기로 한다. ‘백제와 고구려는 부여(夫餘)에서 나왔다 하며 그들 모두가 동명이라는 인물을 공동의 시조로 받들고 있다. 이들이 받들어 모시고 있는 동명이라는 인물에 대해 일반적으로 고구려의 건국자인 주몽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만약 백제의 건국자인 온조왕이 고구려 주몽의 아들이라면 그들은 부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고구려에서 나왔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러나 <위서>에서 언급되어 있듯이 백제인은 항상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다고 인식하였다.’

<오순제, 논문「百濟의 東明과 高句麗의 朱蒙」발췌>


주몽을 동명으로 인식하게 한 원류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 각각 첫머리에서 제공되었다.

<삼국사기> 권30 고구려본기에 “시조 동명성왕의 성은 고씨이고, 이름은 주몽[혹은 추모 혹은 중해라 한다.]이다.”<始祖東明聖王, 姓高氏, 諱朱蒙[一云鄒牟, 一云衆解]>,

<삼국유사> 권1 기이편 고구려에 “국사 고려본기에 이르길 시조는 동명성제로 성은 고씨이고, 이름은 주몽이다.”<國史高麗本<紀,記>云, 始祖東明聖帝, 姓言高氏, 諱朱蒙>라 표현하여 주몽을 동명성왕 또는 동명성제로 동일시 하는 혼란을 초래했다.


그러나 <북사> 권94 열전 백제전은 “백제는 색리국의 동명으로부터 나왔다”<百濟之國 蓋馬韓之屬也 出自索離國...>고 하며 계속해서 색리국에서의 동명의 탄생신화를 싣고 색리왕의 위협으로부터 남쪽으로 탈출하여 부여에 이르러 그곳의 왕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또한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1대 온조왕조에 “원년 여름 5월,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元年, 夏五月, 立東明王廟>라 했으며, 온조왕 이후 8명의 왕들이 동명묘에 제사를 지낸 기록이 있으며,

<삼국유사> 권2 남부여/전백제조에, “백제 성왕 26년 도읍을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했다.”<百濟聖王二十六年戊午春, 移都於泗?, 國號南扶餘.>하여 부여의 전통을 계승하였음을 천명하고, (졸본)부여 왕가의 후예임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의 경우, <삼국유사> 권1 고구려조에 주림전(珠琳傳)을 인용하여, “동명제는 졸본부여의 왕을 말한다. 이 졸본부여는 또한 북부여의 또 다른 도읍이다. 그래서 부여왕이라 한 것이다.”<卽東明帝爲卒本扶餘王之謂也, 此卒本扶餘, 亦是北扶餘之別都, 故云扶餘王也.>하였고,

<삼국유사> 권1 북부여조에, “동명제가 북부여를 계승하여 일어나, 도읍을 졸본주에서 세워 졸본부여라 했으니, 곧 고구려의 시조이다.”<東明帝繼北扶餘而興, 立都于卒本州, 爲卒本扶餘, 卽高句麗之始祖>했다.

고구려나 백제가 모두 동명을 자신들의 시조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조와 국가 창업의 1대왕(국조)과는 그 개념이 다르다. 백제의 국조는 온조왕이나 시조는 동명으로 여기고 있고, 고구려의 국조는 주몽 또는 동명성왕이나 시조는 또한 동명으로 인식하고 있다.


동명과 주몽이 동일 인물인가? 다음의 기록이 두 인물을 구분해 주고 있다.


첫째,
<해동역사> 고구려조에는 조선 성종때 문신인 김천령의「고구려부」를 인용하여, “동명은 그 밝은 위업을 열었고, 주몽은 그 나머지를 이어 받았네.“<東明啓其赫業, 朱蒙承其餘波>라 했고,

둘째,
연개소문의 차자 남산의 묘지명인 <천남산묘지명>에는 “옛날에 동명이 기를 느끼고 호천을 넘어 나라를 열었고, 주몽은 해를 품고 패수에 임해 수도를 열었다 ... 동명의 후예가 진실로 조선을 세워 호?제맥을 제압하였으며 서주와 통하고 연을 막았도다.“<東明感氣 踰?川而開國, 朱蒙孕日 臨浿水而開都 ... 東明之裔 寔爲朝鮮, 威胡制貊 通徐拒燕>했고,

셋째,
<만주원류고> 권1 부여조에는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고 부여는 색리에서 나왔는데, 부여는 고구려의 북쪽에 있고 색리 또한 부여의 북쪽에 있었으므로, 동명은 (색리에서) 남쪽으로 달아나 부여에 이르렀고 주몽은 역시 (동부여에서) 남쪽으로 달아나 고구려에 이르렀다.”<高麗出自夫餘 夫餘出自索離, 夫餘在高麗北 索離又在夫餘北, 故東明南走而至夫餘 朱蒙亦南走而至高麗>로 기록되어있다.

정리하자면, 동명이란 인물은 주몽보다 세대를 앞선 인물이며, 동명은 색리국으로부터 탈출하여 북부여에 당도하여 이 나라를 (어떤 방식으로든) 계승하고 졸본주에 나라를 여니 이것이 졸본부여이다.

이 졸본부여는 뒤에 일어나는 고구려의 시조국가가 되는 셈이다. 후에 주몽이 동부여로부터 탈출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러 동명의 나라(졸본부여)를 이어받아 조선의 나라(고구려)를 세워 호맥을 제압하고 중원 땅 서주와 통하고 연나라를 막아내는 한 국가로 성장하게 된다는 말이다.

고구려인들은 주몽이 계승한 그 시조의 나라 졸본부여를 자신들의 시원으로 여기며, 그 설립자인 동명을 받들어, 이를 국조인 주몽과 동일시하는 건국신화를 만들어 내고 국가적 정체성을 확립했다고 볼 수 있다.



주몽(朱蒙)은 해모수(解慕漱)의 아들인가?

그렇다면, 주몽이 해모수의 아들인가? 기록상 해모수의 아들이라는 해부루, 그리고 해부루의 양자 금와는 주몽의 모친 유화와 동시대인이고, 주몽은 금와의 장자 대소와 동시대인이다. 즉 해모수의 증손자 뻘인 대소와 해모수의 아들인 주몽이 동부여의 왕자자리를 놓고 다툼이 벌어진다는 모순이 생긴다. 해모수라는 한 자연인의 일반적인 생존연대를 따져보아도 당대 기록의 어딘가에는 모순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삼국유사> 권1 북부여조에는 해모수의 출자와 해부루와의 관계기사가 나온다. 즉 “천제가 흘승골성[요나라 의주경계에 있다]에 오룡거를 타고 내려와 도읍을 세우고 왕을 칭했다. 나라 이름은 북부여이다. 스스로 칭하길 해모수라 했다. 아들을 낳았는데 부루이다. 해로써 씨를 삼았다.”<天帝降于訖升骨城[在大遼醫州界], 乘五龍車, 立都稱王, 國號北扶餘, 自稱名解慕*漱, 生子名扶婁, 以解爲氏焉.> 하여 해모수의 아들이 해부루로 되어있다.

후에 해부루는 정치적 역학관계에 의하여 북부여를 버리고 동쪽 바닷가로 도읍을 옮겨 동부여라 칭하게 된다. 즉,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동명성왕조에 “그 나라 국상 ‘아란불’이 말하길「어느날 천제가 내려와 저에게 말하길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게 할것이니, 너희들은 이곳을 피하라. 동쪽 바닷가에 ’가섭원‘이라고 하는 땅이 있는데, 땅이 기름져서 오곡을 재배하기에 적합하니 가히 도읍을 정할 만하다’고 하였습니다.」‘아란불’은 마침내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게 하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 하였다.”<其相‘阿蘭弗’曰 : “日者, 天降我曰 : ‘將使吾子孫立國於此, 汝其避之. 東海之濱有地, 號曰’迦葉原‘. 土壤膏?宜五穀, 可都也.’” ‘阿蘭弗’ 遂勸王, 移都於彼, 國號‘東扶餘’>

동부여 천도와 관련된 유사한 기록이 또한 <삼국유사> 권1 북부여조와 동부여조에 나온다.


신화의 형태로 표현된 천도기사 즉 ‘천제가 제 자손으로 하여 나라를 세우게 할 것이니 그 자리를 피해 옮겨가라’하는 말은 사실은 정치세력간의 갈등과 세력싸움에 밀린 해모수 후손세력의 도피행위에 다름이 아니다. 이를 순수하게 꿈으로 포장하여 이주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몇 개 기록이 있다.

도읍을 옮겼다는 기록 직후의 <삼국사기> 기사에, “그 옛 도읍에는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자칭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면서, 그곳에 도읍을 정하였다.”<其舊都有人, 不知所從來, 自稱天帝子解慕漱, 來都焉.>하고 있으며,

<삼국유사>의 동부여 천도기록 다음에도 “동부여로 도읍을 옮겼다. 동명제가 북부여를 계승하여 일어났다. 졸본주에 도읍을 세워 ‘졸본부여’로 하니, 즉 고구려의 시조이다.”<移都于東扶餘. 東明帝繼北扶餘而興, 立都于卒本州, 爲卒本扶餘, 卽高句麗之始祖.>

해모수의 아들인 해부루를 밀어내고 들어온 동명이 자칭 해모수라 표현되고 있다. 아란불의 꿈에 해모수의 자손으로 하여 나라를 세운다 했고, 그래서 해모수의 아들인 해부루가 도피해 갔고, 해모수의 자손이 차지해야할 북부여의 옛 땅에 동명이란 사람이 들어와 자칭 해모수라 칭했고, 도피해 간 해부루 세력은 자신을 밀어낸 세력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근본을 모르는 세력이라 한다. 이런 기록모순이 있겠는가? 형제 내지는 방계혈족 간의 다툼이 아닌, 전혀 이해를 달리하는 정치세력간의 충돌로 새로운 국가가 정립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동부여로 이주한 해부루 세력의 이후 세대전승을 보자.

<삼국유사> 권1 동부여편에, "해부루가 늙도록 자식이 없어, 하루는 산천에 후사(상속자)를 바라는 제사를 지냈다. 말을 타고 곤연에 이르니, 말이 큰 바위 앞에서 눈물을 흘리므로 괴이 여겨, 그 돌을 굴리게 하니 어린아이가 있는데 금색의 개구리 형상이었다. 왕이 기뻐 이르길 : ‘이것은 하늘이 후사를 이으라고 내려준 것이다.’ 이에 이 아이를 잘 길러 ‘금와’라 이름하고, 성장하니 태자로 삼았다. 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를 이어 받았다. 다음으로 태자 대소가 위를 이었다.“<夫婁老無子, 一日祭山川求嗣. 所乘馬至鯤淵, 見大石, 相對俠{淚}流, 王怪之, 使人轉其石, 有小兒, 金色蛙形, 王喜曰: "此乃天賚我令胤乎." 乃收而養之, 名曰金蛙, 及其長, 爲太子, 夫婁薨, 金蛙嗣位爲王. 次傳位于太子帶素>하여, 금와 일가의 세대전승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유화의 등장이다. 이로 인하여 해모수 이후 역사가 미궁에 빠지고 일연의 <삼국유사>가 철저한 고증 없는 자체 기록모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다음의 기록을 보면,

<삼국유사> 권1 고구려편에, “금와가 왕위에 올랐다. 태백산 우발수에서 한 여자를 얻었다. 그(녀)에게 물으니 ‘나는 하백의 딸로서 이름은 유화이다. 동생들과 나가 노는데, 한 남자가 자칭 하나님의 아들 해모수라 하며 나를 유인하여 웅신산 아래 압**변(압록강변) 집으로 데려가 사통하고 가버린 후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했다.’ [일연의 의견 ; <단군기>에 이르길 : ”단군은 하백의 딸과 가까이 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이 부루이다.“ 이제 이 기록으로 생각해 보건데, 즉 해모수가 하백의 딸과 사통하여 이후에 주몽을 낳았다 했다. <단군기>에 ”태어난 아들이 부루“ 라 했으니, 부루와 주몽은 어미가 다른 형제(이복형제)일 것이다.] 하였다.

金蛙嗣位. 于時得一女子於*太伯山南優渤水, 問之, 云: "我是河伯之女, 名柳花, 與諸弟出遊, 時有一男子, 自言天帝子解慕漱, 誘我於熊神山下鴨**邊室中知私之, 而往不返[壇君記云: "君與西河伯之女要親, 有産子, 名曰夫婁. 今按此記, 則解慕漱, 私河伯之女, 而後産朱蒙. 壇君記云: "産子名曰夫婁, 夫婁與朱蒙, 異母兄弟也.],


이제 역사 기록상 오류와 드라마의 왜곡을 짚어 보기로 한다.


첫째, 해모수의 정체이다. 해모수는 漢나라의 분열책동에 의해 무너진 위만조선의 유민을 거두어 한나라에 대항하여 일어난 의병장 정도의 인물이 아니고, 단군(고)조선의 국체가 무너져 가던 혼란기에 북부여를 건국한 인물이다. 그리고 해모수의 후대가 해부루이다. 해모수란 명칭이 각각 세 사람이 등장하는데, 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 해모수를 밀어내고 졸본부여를 세운 자칭 해모수인 동명, 서하 하백녀와 사통하여 주몽을 낳게 한 자칭 해모수가 그것이다.

해모수라는 명칭은 최초로 북부여를 개국한 인물에 한정해서는 실존했던 인물의 고유명사이었으나, 그 후에 세력을 규합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힘 있는 자를 지칭하는 범칭으로 그 시대에는 받아드려졌다고 볼 수 있다.

해모수와 해부루는 부자관계 또는 둘 사이에 1대 내지는 2대 이상의 세대 차이를 가진 혈족관계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해모수는 북부여의 건국자이고 해부루는 북부여의 마지막 왕 또는 자칭 해모수에 밀려 동부여의 초대 왕이 되는데, 부자관계라면 북부여는 건립되자마자 아들 대에 망하는데 이를 두고 마지막 왕이라는 표현에 모순이 발생한다. 마지막 왕이라면 그 앞 대에 최소한 2명 이상이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천제의 명령에 따라 천제의 후손(해모수의 자손)에게 자리를 내 주었는데 즉 아버지 해모수의 또 다른 자손이 들어서는 북부여의 땅에 자신의 아버지 이름을 사칭하는 자를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자’라고 표현 된 점을 볼 때, 해모수와 해부루가 부자관계라 하면 새로운 세력은 분명히 배다른 어미의 자식인 이복형제이거나 더 내려가 조카 정도의 인물일 것인데 서로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부자관계로 묘사된 해모수와 해부루의 사이에는 최소한 1세대 이상의 후손이 퍼져나간 전승관계가 있어 각 자손이 서로 모를 수 있다고 최대한 허용해서 해석해 줄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졸본부여를 세운 자칭해모수인 동명은 해부루와는 전혀 계통을 달리하는 세력이었다 할 수 있다.

둘째, 해모수는 주몽의 아버지인가.

해모수의 후손 해부루가 동부여를 건국하고, 해부루가 늙도록 아들이 없다가 금와를 얻어 양자를 삼았고, 금와가 성장하여 왕이 된 후 임신한 유화를 거두어 들여 같이 살게 되었으니, 해모수 - (1대 이상 ?) - 해부루 - 금와 - 대소로 이어지는 3대 내지는 4대를 뛰어 넘는 시간대가 있어 동부여 왕자 ‘대소’와 동시대에 성장하는 주몽이 해모수의 친자식이면 어떻게 되겠는가?

금와는 자신의 할아버지 또는 증조할아버지의 임신한 부인을 취한 것이 되고 , 유화 입장에서 본다면 본부인의 손자 또는 증손자에게 자신을 의탁한 것이 된다.

어찌 인간으로서 민망한 일이 아니겠는가? 또한 세대전승 가능한 최소의 기간을 가정하여 대략적인 기간을 산출해본다면, 해모수의 나이 20살에 해부루를 낳았고, 해부루가 15세에 왕위에 오르고 금와를 얻은 늙은 나이를 50살이라 하고, 금와가 15살에 왕위에 오르고 20세에 임신한 유화를 만났다 가정하고 해모수의 나이를 계산하면 20살 + 15세(해부루 왕위) + 35년(금와 얻음) + 20세(유화 만남) = 90세이다.

서하 하백이라 하면 물을 관장하는(요즘으로 치면 해양수산부 정도) 작위의 세력가이고 그 딸이면 귀족층의 자녀인데 상대가 해모수라 칭한다고 하여도 제 아무리 권력에 눈이 멀었기로서니 20세 전후의 젊은 여자가 90살에 가까운 노인의 유혹에 넘어가 사통할 수 있겠는가? 비현실적이다.

‘당시 북부여의 마지막 왕자가 長子로서 동부여 시조가 된 해부루로 이어진 것을 본다면, 주몽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인물은 장자 계통이 아닌 북부여 왕자 내지 왕손의 신분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또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는 그 북부여 계통의 왕자 또는 왕손과 야합한 후 임신한 상태에서 그 아비인 하백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떠돌다가 동부여의 건국자인 해부루의 아들 금와의 부인이 되었고, 주몽은 태어난 후 금와의 아들인 대소와 경쟁관계가 되어 늘 위헙을 느껴 오던 차에 어머니의 권유로 동부여에서 달아나 졸본에 이르렀다.'<오순제, 전게논문 67p> 고 봐야한다.

물론 일연이 언급한 <단군기>에 나오는 ‘단군 왕검이 재위에 오른 뒤 하백의 딸과 결혼하여 부루를 낳은 것’은 사실이다.

그 부루의 활동상을 우리 고대사서인 <규원사화>에서 기록하기를 ‘단군은 중토의 요임금 9년간의 홍수대란에 시달리는 사태를 목도하고 태자 부루를 ’도산‘에 파견하여 당시 치수 관리관인 우(후대의 우임금)에게 치수법을 전해주어 치수에 성공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고,

중토의 사서인 <오월춘추>에는 ‘우가 꿈에서 현이(玄夷) 창수사자(蒼水使者)로부터 계시를 받고, 금간옥첩의 신서를 얻어 오행통수(五行通水)의 이치를 알아 홍수를 다스려 성공하고, 이에 주신(州愼)의 덕을 잊지 못하여 정전을 제정하고 율도량형(律度量衡)의 제도를 세웠다’고 은유적으로 묘사된 것을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자세히 고증하고 있다.

玄夷, 州愼이 동이족 고조선을 상징함은 재론할 여지가 없는 말이다. 단군의 태자 부루가 활동하던 소위 요순시대(기원전 2300년 전후)와 해모수의 후손 해부루가 활동하던 시대(서기전 100년 전후)는 전혀 등치시킬 수 없는 시대적 격차가 난다.

많이 양보하여 일연이 신화로 처리한 내용을 채용하여 살펴보면, 단군이 1908년을 살았다<단군 왕조인 고조선국가의 총 역년이란 이론은 논외로 함>고 했으니 사망연대가 기원전 425년(2333년-1908년)에 해당하고, 그렇다면 기원전 400년 전후에 단군의 태자 부루가 활동한 시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고, 고주몽이 기원전 37년에 나라를 건국했다고 <삼국사기>에 나오니 해부루와의 세대 차이를 2세대 약 60년으로 보아 해부루의 활동연대는 기원전 97년 전후로 계산되어 약 307년의 격차를 보여 두명의 부루가 도저히 한 인물로 묘사될 수가 없다 하겠다.

그런데, 일연의 논리는 단군이 하백의 딸과 결혼하여 부루를 낳았고, 해모수도 하백의 딸과 결혼하여 주몽을 낳았으며 당초의 아들이 (해)부루이니, 아들 이름이 부루로서 동일한 그 아버지의 이름인 단군은 즉 해모수라는 논리이고, 그렇기 때문에 단군의 부루와 해모수의 부루는 동일 인물이며, 동일인물 해모수(즉 단군)의 아들인 부루와 또 다른 자칭 해모수의 아들 주몽은 이복형제라는 것이다. 이런 논리가 한국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며, 당대 고승이요 현학자였던 일연의 논리라는 것이 좀 당황스럽다. 단군-부루계통과 해모수-주몽계통 사이의 母體로서 동일인물이 하백의 딸이다. 단순한 논리로 부루와 주몽은 하백녀라는 동일한 모친의 자식으로 동복형제이다. 아비가 같은 인물인지 여부는 차치하고 말이다. 어찌하여 이복형제라 했을까? 이복형제란 아버지가 같고 어머니가 다른 사이를 말함이다. 이런 모순이 있을 수 있는가? 단군과 해모수의 상관성 내지는 동일성에 대한 뚜렷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서, 스스로 귀중한 <고기>를 인용하여 단군의 사적을 기록한 자신의 이론을 뒤엎고 수천년에 걸처 진행된 역사를 단 몇 십년으로 스스로 축소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동복형제라는 용어를 이복형제라고 까지 표현하면서 말이다.

고조선 국조 단군은 후대 북부여의 해모수가 될 수 없고, 고조선 단군의 장자 부루는 해모수의 장자 해부루 또한 될 수 없다. 주몽이 북부여 국조 해모수의 아들이 될 수 없음을 또한 밝혔기 때문에 해부루와 주몽이 동복이든 이복이든 형제가 될 수도 없음은 물론이다.


고주몽은 나이 20이 되도록 덜떨어진 인물이었나?

고주몽은 성년이 되도록 변변치 않은 행동이나 보이며, 기껏해야 동부여 궁인이나 희롱하고, 궁 밖에선 소서노에게 무시나 당하는(소서노와 동부여에서 만나는지 여부는 차후에 논한다) 무인의 기질이라고는 볼 수 없는 한심한 인물로 드라마 초반은 그를 묘사하고 있다. 그럴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해줄 수 있다. 대기만성이라니까.

그러나 비록 신화로 포장되었지만 역사서에 기록된 명백한 고주몽의 유소년기와 청년기를 폄훼함으로서 900년 고구려 역사의 초석을 놓은 한 위대한 인물을 퇴색시키는 실수를 드라마는 범하고 있다. 드라마 상에서 해모수의 위상을 부각 시키려는 의도에 의해서 한 영웅의 신화적 행적이 왜곡되고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 권13 고구려편에, “그 어머니(유화)가 그것을 감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왔다. 그의 골격과 외모가 뛰어났다. 그의 나이 7세에 보통 사람과 크게 달라서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 속담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였기 때문에 이로써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금와에게는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들은 항상 주몽과 함께 놀았는데, 그들의 재주가 모두 주몽을 따르지 못하였다. 그의 맏아들 대소가 왕에게 말했다. “주몽은 사람이 낳지 않았으며, 그 사람됨이 용맹하므로, 만일 일찍 처치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려우니, 청컨대 그를 없애버리소서.” 그러나 왕이 이를 듣지 않고,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은 여러 말 중에서 빨리 달리는 말을 알아내어, 그 말에게는 먹이를 적게 주어 여위게 하고, 아둔한 말은 잘 길러 살찌게 하였다. 왕은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여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훗날 들에서 사냥을 하는데, 주몽은 활을 잘 쏜다 하여 화살을 적게 주었다. 그러나 주몽이 잡은 짐승이 훨씬 많았다. 왕자와 여러 신하들은 주몽을 죽이려 하였다. 주몽의 어머니가 그들의 책략을 몰래 알아 내고 주몽에게 말했다. “사람들이 장차 너를 죽이려 한다. 너의 재능과 지략이라면 어디간들 살지 못하겠는가?“

<其母以物?之, 置於暖處, 有一男兒, 破殼而出, 骨表英奇. 年甫七歲, ?然異常, 自作弓矢, 射之, 百發百中. <扶餘>俗語, 善射爲<朱蒙>, 故以名云. <金蛙>有七子, 常與<朱蒙>遊戱, 其伎能皆不及<朱蒙>. 其長子<帶素>言於王曰: “<朱蒙>非人所生, 其爲人也勇, 若不早圖, 恐有後患, 請除之.” 王不聽, 使之養馬. <朱蒙>知其駿者, 而減食令瘦, 駑者, 善養令肥. 王以肥者自乘, 瘦者給<朱蒙>. 後, 獵于野, 以<朱蒙>善射, 與其矢小而<朱蒙>?獸甚多. 王子及諸臣又謀殺之. <朱蒙>母陰知之, 告曰: “國人將害汝. 以汝才略, 何往而不可?> 라 하여 유년시절 이후 주몽의 강건함, 지략, 재능, 특출성을 말하고 있다. 또한 <삼국유사>도 삼국사기의 기록을 받아 같은 표현을 하고 있다.

물론 통일왕조 한나라를 세운 한고조 유방의 출세 전의 삶을 보면, 시정잡배와 난봉군의 시절을 보냈고, 소위 세력자의 두 다리 사이로 기어가는 수모도 겪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주몽의 고사에는 이런 네가티브 에피소드가 언급이 되고 있지 않다. 기록에도 없는 비굴한 주몽의 모습을 기록이 부족하니 부분적으로 픽션으로 처리한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삼국사기>가 보여 준 몇 가지 사례만으로도 충분히 인물됨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인간관계를 표현하는데 무리가 없다. 그 범주내에서 국가창업의 가능성을 가진 영웅으로 묘사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드라마는 한 개인적으로 있을 수도 있는 부정적 사례로써 인물됨을 표현한다. 역사왜곡의 단면이라 볼 수 있다.


초기 동부여가 현도군의 위세에 눌리는 약체국가 이었나?

우선 드라마가 설정하고 있는 현도군의 위치를 보면, 현 주류 역사학계에서 주장하는 남만주 압록강 북부 집안 인근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소위 한사군이란 존재는 크게 왜곡되어있고, 그 실상을 기존에 논의한 <역사책은 한사군의 위치를 어디로 규정하고 있는가?>에서 위만조선과 한나라와의 투쟁과정, 한사군이 설치됐다는 지역, 역사적 실상을 밝히는 과정에서 한사군 위치에 대한 학설의 변천 등을 소개하며 상세히 기술하였다. 한사군을 최대한 동쪽으로 확장한다 해도 현재의 요령성 요하를 넘어서 동쪽으로 갈 수 없음이 드러나고 있다.

 

동부여 금와왕 당시에도 북부여를 계승한 동명의 졸본부여가 북부여라는 이름으로 인식되어 건재하고 있었고, 졸본부여가 해모수의 전통을 이어받아 對 한족(한사군) 투쟁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어서, 현도군이 동부여까지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 녹녹치는 않았을 것이다.

후대의 일이지만, 주몽의 고구려가 세워지고 그 왕통이 유리왕에게 전해진 고구려 창업 초기에 고구려의 국세는 동부여의 대소왕에게 큰 힘을 못 쓰는 정도이었고, 반면에 동부여는 당시로서는 대규모인 5만명의 군사를 동원할 만큼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다음의 <삼국사기> 고구려 유리왕조가 이를 보여주고 있다.
“(유리)왕 14년 봄 정월, 부여왕 대소가 사신을 보내와 방문하고, 인질의 교환을 요청하였다. 왕은 부여의 강대함을 두려워하여, 태자 도절을 인질로 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도절이 두려워하여 가지 않자 대소가 분개하였다. 겨울 11월, 대소가 군사 5만을 거느리고 와서 침범하였으나, 큰 눈이 내려 동사자가 많이 생기자 곧 돌아갔다.”<十四年, 春正月, <扶餘>王<帶素>遣使來聘, 請交質子, 王憚<扶餘>强大, 欲以太子<都切>爲質, <都切>恐不行, <帶素>恚之. 冬十一月, <帶素>以兵五萬來侵, 大雪人多凍死, 乃去.>

한나라 일개 군이 철갑기병으로 중무장하고 동부여에 대하여 간섭을 가한다는 내용에 대하여 몇몇 학자들의 반론이 이러하다. 역사학자 이덕일은 “역사기록에 따르면 한나라가 고조선과 2년간 싸운 것으로 돼있는데, 고조선의 무기가 한나라에 비해 크게 뒤떨어졌다면 이처럼 전쟁을 오래 끌지 못했을 것이며, 고조선에도 강력한 철기문화가 있었다고 봐야 하고, 고조선이 멸망한 것은 내부분열 때문이며, 청동기는 고조선의 것이 중국제보다 훨씬 뛰어났고, 이런 앞선 문화가 철기로 넘어오면서 순식간에 중국에 뒤졌다고는 볼 수 없다”고 말했다 하고,

<대쥬신을 찾아서>의 작가 김운회는 “설령 한나라에 철기병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유목민에게는 그렇게 강한 상대는 아니었을 것이고, 유럽 기사단을 격파해 나간 몽골의 유목민 기병을 생각하면 기동력이 강한 유목민에게 중무장 철기병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고 오히려 유목민의 전력이 더 강했다. 드라마에서는 외부 침입자에게 유린당하는 정착 농업국가의 성격이 강하게 그려졌다”고 비판했다 한다.

사실 금와 당시에 한나라 군현과 뚜렸한 상호관계가 있었다는 역사 기록은 없다. 후대에 동부여가 한나라와 가까이 하여 연합작전으로 고구려를 치는 기록은 몇몇(태조왕대 등) 존재한다. 그러나 당시 동부여가 한나라에 간섭당하는 상황과 그 당시 한나라에 철갑기병이 활동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의 왜곡에 해당된다. 철갑기병의 역사 흔적은 3세기 고구려 벽화에 등장한다.


고주몽의 고구려 창립 과정과 소서노의 존재!

고주몽은 동부여의 열약한 왕자의 신분으로 위태로운 지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계루군장 이라는 정체불명의 직위를 가진 연타(취)발의 딸 소서노와 동부여 땅 현지에서 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드라마는 전개되고 있다. 이 또한 역사 기록과 모순되는 왜곡이 존재한다.

이제 고주몽의 도피와 고구려의 성립과정, 그리고 소서노의 등장과 백제의 초석을 쌓는 비류?온조와의 그 역사적인 만남을 통하여 역사의 실체를 따라가 보기로 한다.

동부여 태자 대소 등 기득권 유지세력들의 살해 위협에 직면한 고주몽은 결국 망명의 길을 택하게 되는데, 우리에겐 너무나 잘 알려진 주몽의 남천설화가 그것이다.

<삼국사기> 권13 고구려편에, “이에 주몽은 오이?마리?협보 등의 세 사람과 벗이 되어, 엄호수[개사수라고도 하는데, 현재의 압록강 동북방에 있다.]에 이르렀다.

거기에서 강을 건너고자 하였으나 다리가 없었다. 그들은 추격해오는 군사들에게 붙잡힐까 걱정이 되었다. 주몽이 강을 향하여 말했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을 하는 길인데, 뒤쫓는 자들이 다가오니 어찌해야 하는가?’ 이 때, 물고기와 자라가 물위로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주몽은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그러나 물고기와 자라는 곧 흩어졌으므로 뒤쫓던 기병들은 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졸본천[?위서?에는 ‘흘승골성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에 이르렀다. 그들은 그곳의 토지가 비옥하고 산하가 준험한 것을 보고, 마침내 그곳을 도읍으로 정하려 하였다. 그러나 미쳐 궁실을 짓지 못하여, 비류수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이에 따라 고를 성씨로 삼았다.

<朱蒙乃與烏伊摩離陜父等三人爲友, 行至淹?水[一名盖斯水, 在今鴨綠東北]. 欲渡無梁, 恐爲追兵所迫. 告水曰 : “我是天帝子,河伯外孫甥. 今日逃走, 追者垂及如何?” 於是, 魚鼈浮出成橋, 朱蒙得渡, 魚鼈乃解, 追騎不得渡. 至卒本川[『魏書』云: “至紇升骨城.”]. 觀其土壤肥美, 山河險固, 遂欲都焉. 而未遑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 居之. 國號高句麗, 因以高爲氏.>

주몽이 비류수 가에 도착해서 곧 고구려를 창립한 것은 아니다. 국가 창립과정의 수 년 동안의 행적이 함축적으로 표현되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다음의 기록들이 그것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도 국가창립의 역사를 확정 못하고 여러 학설을 기술하고 있다. 이 모두를 일단 나열해 보면....

제1설, 졸본지역 단독창업설이다. 즉 위에서 인용한 졸본천(혹 흘승골성)에 고구려를 창립한 내용이다.

제2설, 졸본부여 계승설이다. <삼국사기> 권13 고구려편에, “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렀을 때, 그 곳 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이 비상한 사람임을 알아보고, 그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왕이 별세하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는 설도 있다.” <一云 : 朱蒙至卒本扶餘, 王無子, 見朱蒙知非常人, 以其女妻之, 王薨, 朱蒙嗣位.>이설은 주석으로 처리하였다.

제3설, 졸본부여 계승 및 비류 온조의 친부설(親父說)이다.

<삼국사기> 권23 백제편에,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아버지가 추모이다. 혹은 주몽이라고도 한다. 주몽은 북부여로부터 난을 피하여 졸본 부여에 이르렀다. 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세 명의 딸만 있었는데, 주몽을 본 후, 그가 비상한 사람임을 알고는 그에게 둘째 딸을 시집보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졸본)부여왕이 죽고 주몽이 뒤를 이었다. 주몽은 두 명의 아들을 낳았다. 맏아들은 비류, 둘째 아들은 온조라고 한다. 혹은 ‘주몽이 졸본에서 월군 여자를 취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百濟始祖溫祚王, 其父, 鄒牟, 或云朱蒙. 自北扶餘逃難, 至卒本扶餘. 扶餘王無子, 只有三女子, 見朱蒙, 知非常人, 以第二女妻之. 未幾, 扶餘王薨, 朱蒙嗣位. 生二子, 長曰沸流, 次曰溫祚 [或云: “朱蒙, 到卒本, 娶越郡女, 生二子.]>

제4설, 졸본지역 단독창업 및 비류 온조의 의부설(擬父設)이다.

계속해서 백제편에는, “시조 비류왕의 아버지는 우태이니,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었다. 어머니는 소서노이니 졸본 사람 연타취발의 딸이다. 그녀가 처음 우태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낳았다. 첫째는 비류, 둘째는 온조였다. 어머니는 우태가 죽은 뒤 졸본에서 혼자 살았다. 그 후 주몽이 부여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전한 건소 2년 봄 2월,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도착하여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으며, 소서노에게 장가들어 그녀를 왕비로 삼았다. 주몽이 나라의 기초를 개척하며 왕업을 창시함에 있어서 소서노의 내조가 매우 컸으므로, 주몽은 소서노를 극진히 사랑했고, 비류 등을 자기 소생과 같이 대우하였다.“

<一云: 始祖沸流王, 其父優台, 北扶餘王解扶婁庶孫. 母召西奴, 卒本人延??勃之女, 始歸于優台, 生子二人, 長曰沸流, 次曰溫祚. 優台死, 寡居于卒本. 後朱蒙不容於扶餘, 以前漢建昭二年, 春二月, 南奔至卒本, 立都號高句麗, 娶召西奴爲妃. 其於開基創業, 頗有內助, 故朱蒙寵接之特厚, 待沸流等如己子.>

이 설 또한 주석으로 처리하였다. 이 대목에서 연타(취)발의 딸로 소서노의 실명이 등장한다.

덧 붙여 주몽의 건국설과는 관련이 없지만 제4설의 우태와 연관된 구태 백제건국설이 있다. <삼국사기> 백제편에, “?북사?와 ?수서?에는 모두 ‘동명의 후손 중에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이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웠는데, 한 나라 요동 태수 공손도가 자기의 딸을 구태에게 시집보냈고, 그들은 마침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北史』及『隋書』皆云: “東明之後有仇台, 篤於仁信. 初立國于帶方故地, 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遂爲東夷强國.”>. 이 설 또한 주석으로 처리하였다.

그리고 상반된 건국설의 말미에 저자 김부식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의견을 붙이고 있다. “어느 주장이 옳은지 알 수 없다.”<未知孰是.>

일연은 <삼국유사> 권2 南扶餘/前百濟편에서 고구려 및 백제 건국을 <삼국사기>의 제3설「졸본부여 계승 및 비류?온조의 친부설」을 채택하여 기록하고 있다.


김부식이 “어느 주장이 옳은지 알 수 없다”고 말한 복잡한 건국설을 도표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고주몽의 고구려 창립에 관한 전승은 <삼국사기>,<삼국유사>에 5개의 설을 기록하고 있다. 계승창업이 고구려편과 백제편에 있고, 단독창업이 또한 고구려편과 백제편에 있다. 여기에 <삼국유사>는 제3설을 받아들여 졸본부여 계승창업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사실, 주몽이 도피 이주 했다는 졸본지역은 이미 해부루 시대에 동명의 세력이 북부여를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그의 뿌리를 내리고 국가체계를 유지하던 ‘졸본부여’가 있었다. 이런 지역에 동부여 세력에 의해 쫓기듯 이주해 온 주몽이 동부여를 몰아냈던 막강한 기존 국가를 무시하고 몇몇의 측근 정도로 단독창업 한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일이다.

또한 전술한 <삼국유사> 북부여편에, “동명제가 북부여를 계승하여 일어나, 도읍을 졸본주에서 세워 졸본부여라 했으니, 곧 고구려의 시조이다.”라는 기록과

<삼국유사> 고구려편 첫줄에, “고구려는 즉 졸본부여이다.”<高句麗, 卽卒本扶餘也.> 함으로써 동명의 졸본부여를 고구려의 원류로 확인해주고 있다.

따라서 제3설인 졸본부여 왕의 사위가 되고 이를 계승하여 고구려를 창업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고구려가 스스로 표방한 북부여 계승성과 시조를 동명에게 두는 전후 관계가 성립한다.


다음의 문제는 소서노의 존재이다. 드라마는 시청률을 끌어올리고 사극에 멜로를 가미하여 시청자의 관심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동부여에서 활동하고 있을 당시 주몽이 소서노 일가와 관계를 맺고 동부여의 어려운 처지(한 군현과의 갈등관계와 군사적 대립)를 무역문제의 해결을 통하여 타개해 나간다고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기록된 역사를 크게 왜곡하고 있고, 시기와 장소를 달리하여 전개되는 인과관계가 무시되어 역사 시간을 압축시키고 있는 것이다. 즉 동부여에서는 소서노 일가와의 관계가 맺어질 수 없는 것이다.

소서노가 사서에 등장하는 유일한 경우는 상기 제4설로써,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와 혼인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고 과부가 되어 친정 졸본에 머물러 살던, 연타취발의 딸인 소서노로서, 그녀가 후에 이주해 온 고주몽과 맺어지며 고주몽의 국가 창업에 재정적 지원과 토착세력의 이해 협력을 유도하여 창업의 공신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서사시적 복잡다기한 전개와 남녀의 애정관계를 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하여 소서노를 등장시키는 것은 역사적 확증이 없는 상태에서 소서노가 등장하는 제4설이 극적 재미는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렇다면 졸본 계루군장이라는 모호한 직함의 연타취발의 활동지역이 동부여의 세력권에 포함되고 동명의 졸본부여에 밀린 세력이 2세대 만에 졸본을 압도하는 역사적 모순을 낳고 있으며, 또한 후대 백제를 창업하는 소서노의 前夫 소생인 비류와 온조의 존재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즉, 연타발-소서노 관계는 제4설에서 따왔으나 소서노는 혼인이력이 없는 처녀이고, 자녀관계는 제3설(주몽의 친자)로 예비하는 등으로 일관성도 없이 작가 혼자 제 입맛에 맞게 소설을 쓰고 있다고 봐야한다. 역사는 제가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단절 없는 정통성의 계승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면 최상으로 평가될 수 있다. 국가 창립의 다양한 說 중에서 졸본부여의 왕녀와 결혼하여 그 국통을 이었다는 경우가 <삼국유사>를 포함하여 3개의 전승설화이고, 제1설은 차후의 혼인관계가 생략되어 있고, 상인의 딸과 인연을 맺어 국가 창업을 했다는 것이 또한 1개설에 불과하다. 이런 다양한 경우의 수 중에서 유독 정통성 측면이나 합리성 측면에서 가장 취약한 소서노설을 취하고 그것도 제3설과 적당히 섞어 역사를 오도하는 불합리를 보여주고 있다.

사학자 오순제는 그의 논문「百濟의 東明과 高句麗의 朱蒙」에서 해부루로부터 고주몽과 비류온조로 이어지는 한국 고대사 속의 북부여, 졸본부여, 동부여, 고구려, 백제의 전승관계를 다음과 같이 도표화하였다.

상당한 설득력 있는 추정이기에 게재한다.

이 계통도는 소서노를 동명의 후손 즉 졸본부여왕의 딸로 설정하고, 우태에게 시집가서 온조와 비류를 낳았다는 <삼국사기> 제4설 또는 주몽과 결혼하여 온조를 낳은 제3설의 두 경우를 설정했다.

이 계통도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 비교적 충실하였으며, 세대간 모순된 기록을 수정하여 표시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렇다면 해모수 방계로 표시된 고주몽의 친부는 누구일까? 기존의 정사의 기록으로 채우기에는 한계가 있다.


<한단고기>가 전하는 고조선, 부여, 고구려의 역사

이제, 강단학계에서는 아직은 정사로 충분히 인정하고 있지 않은 <한단고기>의 기록을 하나의 가설로 받아들여 불분명한 고대역사의 계통을 살펴보아 기존사서의 부족한 내용을 보완해 본다.
우선 고기의 내용을 인용한다.

<한단고기> 단군세기

47대 단군 고열가 재위 58년(BC296 - 239)

병진 원년(BC 295). 기묘 14년 단군왕검의 묘를 백악산에 세우고 유사에게 명을 내려 사철 이에 제사 지내게 하고 단제께서는 1년에 한번 친히 제사를 지냈다. ... 임술 57년(BC239) 해모수가 웅심산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켰는데 그의 선조는 고리국사람이었다.

계해 58년 단제께서는 어질고 순하기만 하고 결단력이 없었으니, 명령을 내려도 시행되지 않는 일이 많았고 여러 장수들은 용맹만 믿고 쉽사리 난리를 피웠기 때문에 나라의 살림은 시행되지 않고 백성의 사기는 날로 떨어졌다.

3월 하늘에 제사지내던 날 저녁에 마침내 오가들과 의논하여 가로대 '옛 우리 선조 열성들께서는 나라를 여시고 대통을 이어가실 때에는 그 덕이 넓고 멀리까지 미쳤으며, 오랜 세월동안 잘 다스려졌거늘 이제 왕도는 쇠미하고 여러 왕들이 힘을 다투고 있도다. 짐은 덕 없고 겁 많아 능히 다스리지 못하니 어진이를 불러서 무마시킬 방책도 없고 백성들도 흩어지니, 생각컨대 그대는 어질고 좋은 사람을 찾아 추대하도록 하라.' 고 하고 ... 이튼날 마침내 왕위를 버리시고 입산수도 하시어 신선이 되시니, 이에 오가가 나라 일을 함께 다스리기를 6년이나 계속하였다.

이 보다 앞서 종실의 대해모수는 몰래 수유와 약속하고 옛 서울 백악산을 습격하여 점령하고는 천왕랑이라 칭했다. 수유후 기비를 권하여 번조선 왕으로 삼고, 나아가 상하의 운장을 지키게 하였다. 대저 북부여의 일어남이 이에서 시작되니 고구려는 곧 해모수의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에 역시 고구려라 칭하는 바라.

북부여기 상편

시조 단군 해모수 재위 45년(BC239 - 195)

임술원년(BC239) 단제께서는 자태가 용맹하게 빛나시니, 신과 같은 눈빛은 사람을 꿰 뚫어 그를 바라보면 과연 천왕랑이라 할 만하였다. 나이 23세에 하늘에서 내려 오시니, 이는 47세 단군고열가 57년으로 임술 4월 8일이라. 웅심산에 의지하여 궁실을 난변에 쌓았다. 까마귀 깃털로 만든 모자를 쓰시고 용광의 칼을 차시며 오룡의 수레를 타셨다.

따르는 종자 500인과 함께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저녁엔 하늘로 오르시더니 이에 이르러 즉위하였다. 계해 2년 이해 3월 16일 하늘에 제사하고 연호의 법을 제정하더니 오가의 병력을 나누어 배치하여 밭 갈아 자급자족함으로써 뜻밖의 일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기사 8년(BC232) 단제께서 무리를 이끌고 가서 옛 도읍의 오가들을 회유 하시니 마침내 공화의 정치를 철폐하게 되었다. 이에 만백성들이 추대하여 단군이 되었다.

연나라는 장수 진개를 파견하여 우리의 서쪽 변두리 땅을 침략하더니 만번한에 이르러 국경으로 삼게 되었다.

병오 45년(BC195)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니 그의 무리인 위만은 우리에게 망명을 요구했으나 단제께서는 이를 허락치 않으셨다. 단제께서는 병으로 인해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번조선 왕 기준이 크게 실수하여 마침내 위만을 박사로 모시고 상 하 운장을 떼어서 위만에게 봉해주었다.

이 해 겨울 단제께선 붕어하시고 웅심산 동쪽 기슭에 장사지내니 태자인 모수리가 즉위하였다.

2세 단군 모수리 재위 25년(BC194 - 170)

무신 2년 단제께서 상장 연타발을 파견하여 평양에 성책을 설치하고 도적떼(한나라)와 위만의 무리에 대비케 했다. 이에 위만도 역시 싫증을 느꼈던지 다시는 침범치 않았다.

기유 3년(BC192) 해성을 평양도에 속하게 하고는 황제의 동생 고진을 시켜 이를 수비케 하니, 중부여 일대가 모두 복종하매 그들에게 양곡을 풀어 주어 구제하였다.

겨울 10월 경향분수의 법을 세웠으니 서울도성은 곧 천왕이 직접 수비를 총괄하며 지방은 네 갈래로 나누어 군대를 주둔하도록 하니 마치 윷놀이에서 용도의 싸움을 보고 그 변화를 아는 것과 같았다. 신미 25년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고해사가 즉위하다.

3세 단군 고해사 재위 49년(BC169 - 121)

임신 원년(BC169) 정월 낙랑왕 최숭이 곡식 300섬을 해성에 바쳤다.

이보다 앞서 최숭은 낙랑으로부터 보물을 산처람 가득히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의 서울 왕검성에 이르니, 이때가 단군 해모수 병오년(BC195)의 겨울이었다. 계축 42년(BC128) 단제께서 몸소 보병과 기병 만명을 이끌고 위만의 도둑떼를 남여성에서 쳐부수고 관리를 두었다.

경신 49년(BC121) 일군국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헌상하였다.
이해 9월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고우루가 즉위했다.

4세 단군 고우루(혹은 해우루) 재위 34년(BC120 - 87)

고진을 발탁하여 서압록을 수비하도록 하니 병력을 늘리고 많은 성책을 설치하여 능히 우거를 대비하는 데 공이 있었으므로 승진시켜 고구려후로 삼았다.

계해 3년(BC118) 우거의 도적들이 대거 침략하니 우리의 군대가 크게 패하여 해성 이북 50리의 땅이 모조리 우거의 땅이 되었다.

갑자 4년 단제께서 장군을 보내 성을 공격하였으나 석달 걸려도 이기지 못하였다.
병인 6년 단제가 몸소 정예군 5000을 이끌고 습격하여 해성을 격파하고 추격하여 살수에 다다르니 구려하의 동쪽은 모두가 항복해 왔다. 정묘 7년 목책을 좌원에 설치하고 군대를 남여에 두어 이로써 뜻하지 않은 사태에 대비케 하였다.

계유 13년(BC108) 한의 유철이 평나를 노략질하여 우거를 멸망시키더니 4군을 두고자 하여 사방으로 병력을 침략시켰다. 이에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한나라 침략군을 연파하였다.

이에 그 지방의 백성들 모두가 사방에서 일어나 호응함으로써 싸우는 군사를 도와서 크게 떨쳐 보답하였다.

갑오 34년(BC87) 10월 동명왕 고두막한은 사람을 시켜서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장차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자 하니, 왕은 이 땅에서 옮겨가시오.' 라고 하니 단제(고우루 또는 해우루)는 매우 곤란해졌다.

마침내 단제는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어하셨다. 동생인 해부루가 이에 즉위하였는데 동명왕은 여전히 군대를 앞세워 이를 위협하기를 끊이지 않으매 군신이 매우 이를 어렵게 여겼다.

이때 국상인 아란불이, '통하의 물가 가섭의 벌판에 땅이 있는데 땅은 기름지고 오곡은 썩 잘됩니다. 서울을 둘만한 곳입니다.' 라고 하며 마침내 왕에게 권하여 도성을 옮겼다. 이를 가섭원부여라 하며 또는 동부여라고도 한다.


북부여기 하편

5세 단군 고두막(혹은 두막루)재위 22년(BC108 - 87), 재위 26년(BC86 - 60)

일찌기 북부여가 쇠약해지고 한나라 도둑들이 왕성해짐을 보고 분연히 세상을 구할 뜻을 세워 졸본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동명이라 하였는데 어떤 이들은 고열가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을해 3년(BC106) 제가 스스로 장수가 되어 격문을 전하니 이르는 곳마다 무적이었다. 열흘이 못되어 5000명이 모여 한나라 도둑들과 싸울 때 마다 먼 곳에서 그 모습만 보고도 무너져 흩어져 버리므로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구려하를 건너 요동의 서안평에 이르니 바로 옛 고리국의 땅이었다.

갑오 22년(BC87) 단군 고우루 34년에 제가 장수를 보내어 배천의 한나라 도둑들을 쳐부수고 유민과 힘을 합하여 향하는 곳마다 한나라 도둑떼를 연파하더니 그 수비 장수까지 사로잡았으며 방비를 잘 갖추어 적에 대비했다.

을미 23년(BC86) 북부여가 성읍을 들어 항복하였는데, 여러 차례 보전하고자 애원하므로 단제(동명)가 이를 듣고 해부루를 낮추어 제후로 삼아 분릉으로 옮기게 하고는 북을 치며 나팔을 부는 이들을 앞세우고 수만 군중을 이끌고 도성에 들어와 북부여라 칭하였다.

가을 8월에 서압록하의 상류에서 한구(한나라 도적)와 여러 차례 싸워서 크게 이겼다.
임인 30년(BC79) 5월 5일에 고주몽이 분릉에서 태어났다. 신유 49년(BC60) 제가 붕어하고 유명에 따라 졸본천에 장사지냈다. 태자 고무서 등극하다.

6세 단군 고무서 재위 2년(BC59 - 58)

임술 원년(BC59) 제가 졸본천에서 즉위하고는 백악산에서 장로들고 함께 모여 사례에 따라 널리 하늘에 제사할 것을 약속하니 모두가 크게 기뻐하였다.

제는 나면서부터 신과 같은 덕이 있어 능히 주술로써 바람과 비를 불러 잘 구제하므로 민심을 크게 얻어 소해모수라고 불렀다. 이때에 한나라의 오랑캐들이 요하의 왼쪽에서 널리 소란을 피웠으니 여러 차례 싸워서 크게 이겼다. 계해 2년 제가 영고탑을 순시하다 흰 노루를 얻었다.

겨울 10월 제가 붕어하고 고주몽이 유언에 따라 대통을 이었다.
이보다 앞서 단제는 아들이 없었는데, 고주몽을 보고 사람이 범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딸로서 아내를 삼게 하였었는데 이에 이르러 즉위하니 이해 나이가 23세 였다. 이 때에 부여 인이 그를 죽이려 하였는데 오이 마리 협보 등 세 사람과는 덕으로써 사귄 친구였던지라 어머니의 말씀을 따라서 함께 길을 떠나 분릉수에 이르렀다.

그러나 건너려고 하여도 다리가 없으므로 뒤 쫓아 오는 군사들에게 몰릴까 두려워하여 물에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인데 오늘 도주함에 있어 추격병은 다가오고 있는데 어찌하란 말인가?' 하니, 이때 물고기와 자라 따위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므로 주몽이 건너가자 물고기와 자라는 다시 흩어졌다.


가섭원부여기

시조 해부루 재위 39년(BC86 - 48)

을미 원년(BC86) 왕은 북부여 때문에 제약을 받아 가섭원 혹은 분릉 이라고도 하는 곳으로 옮겨서 살았다. 오곡이 다 잘 되었는데 특히 보리가 많았고 또 범 표범 곰 이리 따위가 많아서 사냥하기 편했다. 정유년 국상 아란불에게 명하여 널리 베풀어 주변의 유민들을 불러 모으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잘 먹여주고 따뜻하게 살 곳을 주며 또 밭을 주어 경작하게 하니 몇 해 안되어 나라는 풍부해지고 백성들은 풍족해 졌다. 때에 필요할 때마다 비가 내려 분릉을 기름지게 하는지라, 백성들이 왕에게 정춘의 노래를 지어 불렀다. 임인 8년(BC79) 앞서 하백녀 유화부인이 나들이를 나갔는데 부여의 황손 고모수가 유혹하더니, 강제로 압록강변의 어떤 집에서 자기 멋대로 하여 버리고는 고모수는 승천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유화의 부모는 유화가 무모하게 고모수를 따라갔음을 책망하여 마침내 구석 방에 딸을 가두어 버렸다. 고모수는 본명이 불리지 이며 혹은 고진의 손자라고도 한다. 왕께서는 유화를 이상히 여겨 수레를 같이 타고 궁으로 돌아와 깊숙한 곳에 가두어 버렸다.

그해 5월 5일 유화부인은 큰 알 하나를 낳으니 한 사내 아이가 그 껍질을 깨고 나왔다. 이름을 고주몽이라 불렀는데 생김새가 뛰어났으며 나이 7세에 저 혼자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에선 활 잘 쏘는 것을 일컬어 주몽이라 하였으므로 이로써 이름으로 불렀다.

갑진 10년(BC77) 왕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어느 날 산천에 제사지내고 아들 있기를 빌었더니 타고 있던 말이 곤연에 다다르자 큰 돌을 마주보고 서서 눈물을 흘렸다. 왕은 이를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 그 큰 돌을 굴리게 하였더니 어린애가 있었는데 금색의 개구리 모양이더라.

왕은 몹시 기뻐하며 '이 아이야 말로 하늘이 나에게 내리신 아기로다'라고 하시며 곧 거두어 기르니, 이름을 금와라 하고 그가 장성하매 태자로 책봉하였다.

임술 28년(BC59) 나라 백성들이 고주몽을 가리켜 나라에 이로움이 없는 인물이라 하여 그를 죽이려고 했다. 고주몽은 어머니 유화부인의 명을 받들어 동남쪽으로 도망하여 엄리대수를 건너 졸본천에 이르러, 이듬해 새 나라를 세우니 이것이 고구려의 시조가 된다. 계유 39년(BC48) 왕이 죽고 태자 금와가 즉위하다.

2세 금와 재위 41년(BC47 - 7)

갑신(갑술?) 원년(BC47) 왕이 사신을 보내 고구려에 특산물을 바쳤다.

정유 24년(BC24) 유화 부인이 돌아가셨다. 고구려는 호위병 수만으로 졸본으로 모셔와 장사지냈는데 황태후의 예로써 억지로 산 같은 능을 만들고는 곁에 묘사를 짓게 하였다. 갑인 41년(BC7) 왕이 돌아가시니 태자 대소가 즉위하였다.

3세 대소 재위 28년(BC6 - AD22)

을묘 원년 봄 정월에 왕은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 국교를 성하고 왕자를 인질로 삼자고 하였다.

고구려의 열제(유류왕)가 태자 도절로써 인질을 삼으려 하였으나 도절이 가지 않으매 왕이 그를 꾸짖었다. 겨울 10월 병력 5만을 이끌고 가서 졸본성을 침략하였으나 큰 눈이 와서 많은 동사자만 내고는 퇴각하였다.

계유 19년(서기13년) 왕께서는 고구려를 침략하였는데 학반령 밑에 다다르자 복병을 만나 크게 패하였다. 임오 28년(서기22년) 2월 고구려가 나라의 힘을 다모아서 침범해오니 왕은 몸소 무리를 이끌고 출전하였는데, 진흙탕을 만나 왕의 말이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에 고구려의 장군 괴유가 바로 앞에 있다가 살해하였다.

그래도 부여군은 굴하지 않고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는데 큰 안개가 7일 동안이나 계속되니 고구려 열제(대무신왕)는 몰래 병사를 이끌고 밤에 탈출하여 사잇 길을 따라 도망쳐 달아나 버렸다.

여름 4월 (부여)왕의 동생은 따르는 무리 수백인을 데리고 길을 떠났는데 압록곡에 이르러, 해두왕이 사냥 나온 것을 보고는 그를 죽이고 그 백성들을 취하였고, 그 길로 갈사수의 변두리를 차지하고는 나라를 세워 왕이라 칭하니 이를 갈사라 한다.

갈사는 태조 무열제의 융무 16년 8월에 이르렀을 때, 도두왕이 고구려가 날로 강해짐을 보고 마침내 나라를 들어 항복하니, 대저 3세 47년만에 나라가 망했다.

고구려는 도두를 우대하여 부르도록 하고 저택을 하사하더니, 훈춘을 식읍으로 삼게 하여 동부여후에 봉하였다. 가을 7월 (부여)왕의 친척 동생이 여러 사람들에게, '선왕께서는 시해 당하시고 나라는 망하여 백성들은 의지할 곳 없다. 갈사는 두루 안락하기는 하지만 스스로 나라를 이루기 어렵고, 나 또한 재능과 지혜가 부족하여 나라를 새롭게 일으킬 수가 없으니 차라리 항복함으로써 살기를 도모하리라' 하고 옛 도읍의 백성 만여명을 데리고 고구려에 투항하니, 고구려는 그를 봉하여 왕으로 삼고 연나부에 안치하였다.

그의 등에 띠와 같은 무늬가 있었던 까닭에 낙씨의 성을 하사하였는데 뒤에 차츰 자립하여 개원 서북으로부터 옮겨가 백랑곡에 이르니 바로 연나라의 땅에 가까운 곳이었다. 문자열제의 명치 갑술(AD 494)에 나라를 들어 고구려의 연나부에 편입하니, 낙씨는 마침내 제사조차 끊겼다.

[주; 여기서 대소왕이후 동부여는 망하여 둘로 갈린다.

대소왕의 동생이 갈사로 옮겼다가 고구려의 동부여후가 되었고, 동부여의 옛도읍에서는 대소왕의 친척 동생이 고구려에 항복하여 낙씨성을 받아서 고구려의 연나부가 되었다가 자립하여 개원서북으로 옮겼으나 결국 다시 연나부에 편입하였다.

갈사는 혼춘이었을 것으로 보이나, 분릉 즉 동부여의 옛도읍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졸본과 멀지 않을 것으로 생각될 뿐이며, 주몽이 분릉에서 도망칠때 동남쪽으로 길을 떠났다는 말로 미루어 분릉의 동남쪽에 졸본이 있었지 않을까 짐작할 수 있지만, 문장상으로 그렇다는 말은 없다.]


고구려국 본기 제6

고리군의 왕 고진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며 옥저후 불리지는 고진의 손자이다.
모두 도적 위만을 토벌한 공을 세워 봉함을 받은 바라. 불리지는 일찍이 서쪽 압록강변을 지나다가 하백녀 유화를 만나 그녀를 맞아 들여 고주몽을 낳게 하였다. 때는 곧 임인(BC 79) 5월 5일이라. 곧 한나라왕 불능의 원봉2년이다. 불리지가 죽으니 유화는 아들 주몽을 데리고 웅심산으로 돌아왔으니 지금의 서란이다.

주몽이 성장하여 사방을 주유하다가 가섭원을 택하여 거기서 살다가 관가에 뽑혀 말지기로 임명되었다. 얼마 안되어 관가의 미움을 사서 오이와 마리와 협보와 함께 도망하여 졸본으로 왔다. 때마침 부여왕은 후사가 없었다. 주몽이 마침내 사위가 되어서 대통을 이으니 이를 고구려의 시조라 한다.

연타발은 졸본 사람이다.
남북의 갈사를 오가면서 재물을 모아 부를 이루어 거만금에 이르렀다.
은밀하게 주몽을 도와 창업입도의 공을 세웠다.

뒤에 무리를 이끌고 구려하로 옮겨 고기잡이와 소금장사를 하게 되더니 고주몽 성제가 북옥저를 칠 때에 양곡 5,000석을 바쳤다. 서울을 눌현으로 옮길 때는 앞질러 자납을 원하여 유망민을 초무하고 왕사를 권하여 공을 세웠으니 좌원에 봉작을 받았다. 나이 80에 죽으니 바로 다물 34년 병인 3월이다.

고주몽은 재위할 때 일찍이 말하기를 '만약 적자인 유리가 오거든 마땅히 봉하여 태자로 삼을 것이다.'라고 했다. 소서노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였는데 기묘년(BC42) 3월에 패대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사람들에게서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 번의 사이에 이르렀다.

바다에 가까운 외진 곳으로 여기에 살기 10년 만에 밭을 사고 장원을 두고 부를 쌓아 몇 만금이러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협력하는 자가 많았다. 북쪽은 대수에 이르고 서쪽은 큰 바다에 임했다. 반천리의 땅이 모두 그의 것이었다. 사람을 보내 편지를 주몽제에게 올리며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니 주몽제는 몹시 기뻐하시며 이를 장려하여 소서노를 어하라라고 책봉(BC31)했다.

13년(BC19) 임인에 주몽제가 돌아가셨다. 태자 비류가 즉위(BC19)하였는데 모두가 그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마려 등은 온조에게 말하기를 '신등이 듣기는 마한의 쇠퇴는 이미 들어난 일이요 가서 도읍을 세워야 할 때입니다'라고 했다. 온조가 '좋다'고 승락하니 곧 배를 짜서 바다를 건너 처음 마한의 미추골에 이르렀다. 앞으로 나아가 사방을 살펴보았지만 텅 비어서 사람 사는 곳이 없었다.

한참 만에 한산에 이르러서 부아악에 올라 살만한 땅을 살펴보고는 마려 오간 등 열명의 신하들이 말했다. '생각컨대 이 하남의 땅은 북쪽이 한수를 끼고 동쪽은 크고 높은 산이요 남쪽은 기름진 평야가 열려 있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으니 이곳은 천험의 지리를 갖추고 있어 얻기 어려운 지세이옵니다. 마땅히 도읍을 정할 만한 곳입니다.

여기보다 나은 곳을 찾지 마시옵소서.' 온조는 열 신하들의 의견을 따라 하남의 위지성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라고 칭하니 백제라는 이름은 백사람이 건너 왔다는 뜻의 이름이다. 뒤에 비류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그의 땅을 가지고 귀순해 왔다.


위의 <한단고기>가 전하는 세대전승을 종합하여 홈 지기가 다음과 같이 그 계통도를 그려 보았다.

 

 

 

 

<한단고기>의 위 기록도 몇몇 의문점 있기는 하다.

즉 유화가 동부여 1대 해부루와 동시대로 묘사된 점, 연타발이 북부여 2대 모수리 시대의 상장군으로 또한 주몽의 창업을 돕는 거상으로 출연한 점, 소서노가 6대 고무서의 딸인지 또는 우태의 미망인인지 아니면 전혀 별개의 여인인지 불분명한 점, 소서노의 두 아들이 누구의 자식인지 하는 점, 블리지와 해부루는 6촌간인데 유화가 그 사이의 여인이 될 수 있는지 하는 점 등이 그것이다.

필자는 강단의 사학연구자가 아니다. 또한 재야도 아니다.

따라서 기존 이론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며, 또한 현존하는 고대 사서의 도입에 유연할 수 있다.
고대 사학분야는 절대적인 사료의 부족에 시달린다.
그러기 때문에 논리적 타당성과 합리성을 갖추고 있다면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역사적 사실여부를 검토하고 전후의 인과관계를 따져 역사복원에 일조하여야 한다. 물론 조심스러운 측면은 분명히 있다.

한단고기의 열국시대 초기 건국자들의 혈통 기록은 상당부분 인정된다.
이 흐름도를 놓고 보면 <삼국사기>,<삼국유사>와 기타 25사의 기록 중 상호 모순과 의문투성이였던 상당한 내용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정통 삼국역사책과 중토 사서들이 자체 내에서 너무나 많은 자기모순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이 기록은 더욱 의미가 있다.

우리는 이제까지 드라마 고주몽과 관련하여 역사왜곡 가능성이 심각한 몇몇 주제을 들어 실제 역사기록을 토대로 일단의 규명작업을 수행해 보았다. 최근 유행하는 말로 역사드라마에 팩션이 유행한다고 한다. 즉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의 합성어로 사실과 허구의 적절한 조합 정도의 뜻인데,

중요한 것은 픽션(허구) 구성은 사실적 역사기록이 없을 때 필요한 최소한의 보충적 수단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사실을 무시한 허구적 역사의 재구성은 역사를 오도할 뿐만 아니라 동북아 3국(중국, 일본, 한국)이 심각한 역사 갈등과 역사주권 전쟁을 지금 현재진행형으로 진행하고 있는 마당에 저들이 우리의 대중역사 논리를 역 이용하여 역사왜곡을 위한 타당한 근거로 확정 시키는데 일조하는 심대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이적행위인 것이다. 다시 말해 민족역사의 간첩 질을 서슴없이 한다고 단정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정사에서 찾지 못하여 허구를 구성할 바에는 그 대안으로써 민족사서를 권하고 싶다. 적어도 역사를 단축 왜곡시키고, 조상을 고사시키며, 이민족에게 제민족을 속박시키는 자기모순은 만들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물론 과대한 민족주의나 국수주의적 극단성은 배제하는 균형을 유지하는 선에서 이런 고려는 진행되어야 하겠다.

 

출처: www.coo2.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