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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진(蘇秦: ? ~ BC 284 ?)

by 바로요거 2008. 9. 22.

소진


소진(蘇秦: ? ~ BC 284 ?)은 전국시대 중후기 낙양(洛陽) 출신으로 생년은 미상이다. 자는 계자(季子)이고, 연횡(連橫)을 주장하여 명성을 날린 장의(張儀)보다 약 30년 뒤의 인물이다.

진(秦) 효공(孝公)이 위(魏)나라 출신 상앙(商鞅)을 등용하여 변법을 시행한 이후 진나라는 일약 제후국의 강대국으로 발돋움하였다. 기존의 강대국 제나라와 신흥 강대국 진나라를 사이에 두고 주변 제후국들이 각자 살아남기 위한 전략으로 내놓은 것이 이른 바 "연횡"과 "합종(合縱)"이다. "연횡"을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이 장의라고 한다면 "합종"을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소진이다.

전국시대 중후기 중국은 이들 "종횡가(縱橫家)"들의 생존을 위한 치열한 외교전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사기(史記)≫에서는 소진에 대해서 장의보다 약간 앞선 시대에 "합종"의 주역으로 활동하면서 당시의 국제 정세를 좌지우지한 인물로 기록하고 있지만, 이것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1973년 장사(長沙)의 마왕퇴삼호한묘(馬王堆三號漢墓)에서 발굴된 ≪백서 전국책(帛書戰國策)≫에는 소진이 제나라의 민왕(재위 BC 300~284)과 연나라의 소왕(昭王, 재위 BC 311~279)에게 보낸 서신과 헌책 등이 실려있는데, 이로써 소진의 활동 연대가 장의보다 약 30년 뒤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소진의 행적을 다시 더듬어 보면, 소진은 연나라 소왕의 밀명을 띠고 제나라와 기타 제후국들에 파견된 책사였으며, 그 목적은 주로 제나라의 공격 목표를 연나라 이외의 다른 나라로 돌리게 함과 동시에 제나라의 국력을 약화시키는데 있었다. 그는 BC 300~296년과 BC 288년에 제나라를, BC 287~286년에 위(魏)나라와 조(趙)나라를 방문하여 그러한 목적 달성을 위한 본격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에 연나라가 왕위계승 문제로 내분에 휩싸인 틈을 타서 제나라가 연나라를 공격하여 단 50여일만에 연나라 전역을 점령하였다. 이에 조나라 무령왕(武靈王)이 연나라 공자 직(職)을 호송하여 돌아가 그를 연나라 소왕(昭王)으로 옹립하였다. 연 소왕은 널리 인재를 구하여 제나라에 대한 대규모 보복 전쟁을 준비하였다. 소진은 이때 연나라로 들어갔다. 소왕은 그를 제나라로 파견하여 제나라에 점령된 연나라 땅의 반환에 대한 교섭을 벌이도록 하였다. 소진은 제나라 선왕(宣王)을 만나 그를 설득하였다.

"연 소왕은 진(秦) 목공(穆公)의 사위로 강한 진나라를 등에 업고 있습니다. 제나라가 연나라 지역을 점령하고 있으니 연나라와 진나라가 모두 제나라에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대왕께서 점령하고 계신 연나라의 10개 성을 연나라에 돌려주신다면, 연나라와 진나라는 오히려 대왕의 은덕에 감격해 할 것입니다. 그러면 대왕께서는 연과 진의 지지를 얻어 천하를 호령하실 수 있고 천하도 이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제나라는 마침내 그 패업을 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제 선왕은 크게 기뻐하며 연나라의 옛영토를 모두 돌려주었다. 소진은 임무를 마치고 연나라로 돌아와서 연 소왕에게 중용되었다. 소진은 제나라를 공격하려는 소왕의 의도를 간파하고 소왕에게 계책을 올렸다.

"우리는 비록 제나라에 점령된 땅을 모두 회수하였지만, 당시의 망국의 한은 갚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제나라의 국력을 서쪽의 송(宋)과 남쪽의 초(楚)나라에 소모하게 하였다가 그때를 이용하여 우리가 제나라를 공격한다면 일거에 제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제나라로 가서 선왕에게 송나라를 공격하도록 설득하겠습니다."

 

연 소왕은 소진을 상경(上卿)에 임명하고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제왕은 소진의 설득으로 조나라와 연합하여 공동으로 진나라에 대항하기로 함으로써 제·진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소진은 이때에 제왕에게 송나라를 공격하도록 설득했다.

"송나라 왕은 황음무도하여 천하가 모두 분개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군대를 이끌고 송나라를 친다면, 이는 하늘의 뜻을 받들어 죄를 토벌하는 장거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대왕께서는 반드시 제후들에게 명성을 떨치게 되어 실리를 얻고 동방에 웅거한 제나라를 중원 제후의 패자가 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제나라는 송나라를 공격하였다. 연나라는 제나라의 신뢰를 얻기 위하여 군대를 파병하여 제나라를 도왔다. 연·제 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송나라는 어쩔 수 없이 회북(淮北) 지역을 내어놓고 화의를 청하였지만, 이로써 제나라의 국력도 크게 소모되었다.

소진은 제나라에 있으면서 계속하여 제나라를 약화시킬 궁리를 하였다. 그는 제왕에게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키게 하고 향락에 빠지도록 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많은 전쟁을 일으켜 제나라를 주변국들의 원수가 되도록 유도하였다. 제나라와 진나라의 관계가 악화된데다 제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함으로써 진나라 왕은 대단히 진노하였다. 소진은 제나라의 국력을 더욱 소모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제왕에게 먼저 군사적 행동을 취하여 진의 세력 확장을 견제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제왕은 연나라에 대하여 다소 우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소진은 연나라를 위하여 그것을 변호하였다.

"연나라는 나라가 작고 힘이 미약하여 줄곧 강한 제나라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나라가 천하를 호령할 수 있게 된 것은 연나라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호관계는 연나라 사람들이 진심으로 바라던 것인데 어찌 제나라를 배반할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이에 제왕은 연나라에 대한 의심을 풀고 "합종(合縱)"을 취하여 진나라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소진은 한(韓)·조(趙)·위(魏)·연(燕) 4개국 왕을 설득하여 각자 진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조나라 재상 봉양군(奉陽君)을 "합종"의 장으로 추대하였지만 "합종"의 실질적인 지휘자는 제나라였다. 제나라는 합종하여 진나라를 공격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진나라를 묶어두고 다시 송나라를 공격하였다. 소진은 진나라를 공격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지만 제나라가 힘을 다하지 않자 한·위·연도 서로 미루면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리하여 연합군과 진나라 사이에는 대규모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제나라 군대는 원정에 시달려 많은 국력을 소모하였다.

제왕은 진을 공격한 동시에 송에 대한 2차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것은 실제로 다른 4개국 연합군을 진퇴양난의 국면에 빠뜨리는 것이었다. 4개국 연합군은 합심하여 진나라를 공격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곧바로 군대를 철수시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이에 4개국 연합군은 제나라에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본래 소진은 이때 남쪽으로 내려가 4개국 연합군이 합종하여 진나라를 공격한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암암리에 연나라를 위한 반제(反齊) 동맹군을 결성하였다. 소진은 각국의 의중을 살피면서 위나라의 맹상군(孟嘗君)을 만났다.

"지난날 당신이 제나라에 있을 때 제나라를 위하여 엄청난 공을 세워주었지만, 제왕이 무능하여 당신을 중용하지 않아 당신은 세상을 떠돌다가 위나라에 귀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나라는 다시 신의를 버리고 연합군을 우롱하고 있습니다. 연나라 군대는 제나라를 공격할 의사가 있고, 조나라도 제나라에 원한을 품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함께 연합하여 동으로 제나라를 친다면 중원의 세력이 커져서 위나라와 당신은 천하에 이름을 떨칠 수 있을 것입니다."

 

맹상군은 소진의 말을 듣고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소진은 다시 제왕에게 진나라에 화의를 맺을 것을 권하였다.

"위나라와 조나라는 진나라와 가깝고 제나라는 진나라와 먼 거리에 있습니다. 만약 우리 5개국이 합종하여 진나라를 격파할 수 없다면 위나라와 조나라는 자신의 나라를 보존하기 위하여 진나라에 화의를 청하고자 할 것입니다. 진나라가 일단 다른 나라와 연합한다면 반드시 제나라를 먼저 공격할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일찍 준비를 하셔서 먼저 진나라와 화의를 맺어 능동적으로 대처하시길 바랍니다."

 

제왕은 소진의 말에 매우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진나라에 우호적인 뜻을 전달하는 의미에서 친진(親秦) 세력인 한섭(韓聂)을 재상에 임명하고자 하였다.

조나라 봉양군(奉陽君)은 제왕이 아무런 상의 없이 먼저 진나라와 화의를 맺자 크게 분노하여 위·연과 연합하여 송나라를 침공하고 있는 제나라를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제왕은 급히 송나라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고 봉양군에게 땅을 보내주었다. 이에 봉양군도 제나라 공격을 위한 군사적 행동을 중단하였다.

봉양군은 제왕이 준 땅은 받아들이고 제나라와의 관계를 다시 호전시켰다. 그러나 소진이 암암리에 진행하고 있던 연·조 관계에 대한 이간 활동이 봉양군에게 발각되었다. 이에 봉양군은 소진을 조나라에 억류하고 그의 행동을 규제하였다. 소진은 연왕에게 구원을 청하고 이간 활동을 계속 진행하고자 하였다. 연왕이 조나라 봉양군에게 강하게 항의하자 봉양군은 소진을 석방하였다. 그러나 소진은 다시는 조나라에서 활동할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소진은 어쩔 수 없이 조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들어갔다.

소진이 제나라에 들어간 이후 연왕은 그에게 의심을 품기 시작하였다. 소진이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연왕의 제나라 공격 계획을 여러 차례 만류했기 때문이다. 이에 소왕은 다른 사람을 보내어 소진의 임무를 대신하도록 하고 소진을 연나라로 소환시키려고 했다. 소진은 곧바로 연왕에게 사실을 해명하기 위한 편지를 썼다. 연 소왕은 그의 편지를 읽고 소환 계획을 취소하였다.

소진은 제·조의 국교관계를 악화시키고 제나라를 다른 나라들의 원수로 만들기 위하여 다시 제왕에게 송나라를 공격할 것을 권하였다. BC 286년 제나라는 송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제나라의 국력도 점점 약화되었다. 이와 동시에 봉양군이 제나라에 봉읍을 요구하여 제·조 관계는 다시 균열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소진의 활동이 마침내 제왕과 제나라 대부들에게 발각되었다. 제왕은 소진을 거열(車裂: 죄인의 신체를 두 대의 수레 중간에 놓고 양쪽으로 결박하여 좌우로 끌어서 찢어 죽이는 혹형)의 형에 처하였다. 이때 소진은 대략 50여세 가량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소진이 죽은 후에 연·조·위·진·한 5개국 연합은 연나라 장수 악의(樂毅)의 지휘 아래 제나라를 공격하여 70여개의성을 점령하였으며, 제나라 왕은 도망가다 피살되었다. 제나라는 뒤에 다시 국토를 탈환하기는 하였지만 국력이 크게 쇠진하였다. 연·조·위·진 4개국이 이 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소진이 생전에 활동하였던 외교력이 그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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