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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잔 쉼터/東西문화,역사인물

장의(?~BC 310)

by 바로요거 2008. 9. 22.

 

장의


전국시대 중후기에 "상앙(商鞅)의 변법"으로 국력이 나날이 강성해진 서쪽 변방의 진(秦)나라는 드디어 동쪽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칼날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때 위(魏)나라를 밀어내고 중원의 패주(覇主)를 차지한 제(齊)나라도 그 세력을 중원으로 넓혀갈 준비를 마침으로써, 중원지역은 다시 한번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에 제와 진 두 강대국 사이에 끼어있던 한(韓)·조(趙)·위(魏) 3국은 살아남기 위한 전략으로 동맹을 결성하여, 북으로는 연(燕)나라와, 남으로는 초(楚)나라와 손잡고, 동쪽의 제나라와 서쪽의 진나라에 대항하였다. 이것이 바로 약소국들끼리 연합하여 강대국에 대항한다는 "합종(合縱)"이다. 이와 반대로 약소국이 제나라나 진나라와 연합하여 다른 약소국을 공격한다면 그것이 바로 "연횡(連橫)"이다. 그러나 전국 말기에 이르러 제나라의 세력이 약화되고 진나라가 6국의 절대 우위를 차지하면서 "합종"과 "연횡"은 다소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즉 진나라를 제외한 나머지 6개국이 연합하여 진에 대항하는 것을 "합종"이라 하고, 진나라가 다른 한 나라와 연합하여 나머지 5개국과 맞서는 것을 "연횡"이라 하였다. "합종"과 "연횡"은 전국시대 중후기에 각 제후국들 사이에 외교전략의 핵심으로 부상하면서 많은 종횡가(縱橫家)들을 출현시켰으며, 그들 중에서 초기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장의(張儀)이다.  

 

장의(?~BC 310)는 위(魏)나라 사람으로 생년은 미상이다. ≪전국책(戰國策)≫에는 장의와 소진(蘇秦)이 각각 "연횡"과 "합종"을 주장하여 서로 논쟁을 펼쳤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것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말이다.

이후 사마천(司馬遷)도 그 영향을 받아 ≪사기(史記)≫「장의열전(張儀列傳)」에서 장의와 소진을 같은 시대 인물에 나열하고, 소진이 출세한 후에 장의에게 진나라로 들어가도록 권하였다거나, 장의가 소진 보다 뒤에 죽었다고도 하였는데, 이러한 것들 역시 모두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이야기들이다. 고증된 바에 의하면, 시대적으로 장의가 소진보다 앞서고, 장의와 같은 시기의 인물로는 공손연(公孫衍)·혜시(惠施)·진진(陳珍) 등이 있다.

종횡가들 중에서 장의는 소진의 선배이며, 소진은 장의가 죽은 후에야 정치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사기≫는 장의의 연대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정확하게 기록하였지만, 소진에 대해서는 30여년이나 앞당겼던 것이다.

장의는 처음에 초나라 재상의 식객이 되어 등용의 기회를 엿보았지만 재상의 자랑인 구슬을 분실한데서 그 혐의를 입어 가까스로 도망쳐서 위나라로 귀국했다. "이젠 유세 같은 것은 그만 두시오."하고 말리는 아내의 말에, "내 혀가 아직도 있는지 없는지 보시오. 이 혀가 있는 동안 나는 유세를 그만두지 않을 것이오."라고 대답한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진(秦) 혜왕(惠王)이 즉위한 후에도 효공(孝公)시대의 "인재 등용" 방침을 계속 견지함으로써 타국 출신의 인재들이 대거 진나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위나라 출신 장의도 BC 329년에 진나라에 들어가 혜왕의 객경(客卿)이 되어 국정에 참여하였다. 이때 공손연이 진나라의 대량조(大良造)를 맡고 있었다.

BC 328년 장의는 공자화(公子華)와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위나라를 공격하여 위나라의 포양성(蒲陽城)을 탈취하였다. 장의는 이때를 틈타서 혜왕에게 자신의 연횡책을 설명하면서, 포양성을 위나라에 돌려주고 공자 요(繇)를 위나라에 인질로 보낼 것을 건의하였다. 그는 공자 요를 호송하여 위나라로 들어간 후 위나라 왕을 만나는 자리에서 위나라 왕에게 진나라에 의지할 것을 유세하였다.

"진나라는 위나라를 정말 진심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성을 얻고서도 오히려 인질을 위나라로 보냈으니, 위나라가 진나라에 예를 잃지 않으려면 보답할 방법을 강구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위나라 왕이 물었다.

"어떻게 보답하면 좋겠소?"

 

장의가 대답했다.

"진나라는 단지 좋은 땅을 좋아합니다. 만약 위나라에서 어느 한 지역을 진나라에 주신다면 진나라는 반드시 위나라를 형제의 나라로 볼 것입니다. 진나라와 위나라가 연맹을 맺어 다른 제후국들을 정벌한다면, 위나라가 다른 나라들로부터 획득한 땅이 진나라에 준 것보다 몇배나 많게 될 것입니다."

 

위나라 왕은 장의의 말에 설득되어 상군(上郡) 15개의 현과 하서(河西)의 요지 소량진(少梁鎭)을 진나라에 주고 진나라와 화의를 맺었다. 장의의 연횡책으로 진나라와 위나라는 첫 전투를 승리로 장식하였으며, 이로부터 황하(黃河) 이서 지역이 전부 진나라의 영토로 귀속되었다.

장의는 진나라로 돌아간 후 즉시 재상에 발탁되어 공손연의 대량조(大良造) 직위를 물려받았다. 공손연은 진나라에서 더 이상 중용될 수 없게 되자 위나라로 건너갔다.

 

장의가 진나라에서 약 3년간 재상을 역임하는 동안 진나라는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다. 그 이듬해에 혜왕은 장의를 대장에 임명하고 위나라의 섬(陝)을 점령하였다. 이 사건으로 큰 공포를 느낀 위나라는 그 해와 그 다음해(BC 323) 2년에 걸쳐 제나라 위왕(威王)과 연속 회동을 가지고 제나라의 힘을 빌어 진나라에 대항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장의가 중간에서 이간질을 하고 제나라와 초나라를 농간으로 끌어들여, 제나라는 위나라를 도우기는커녕 오히려 초나라와 연합하여 위나라를 공격하였다.

진나라에서 위나라로 귀순한 공손연은 이때를 틈타서 한(韓)·조(趙)·연(燕)·중산(中山)과 "5개국 연맹"을 맺고 위나라의 국력 신장을 도모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초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양릉(襄陵)에서 위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8개 성을 점령하였다. 제와 초의 계속된 침략으로 위나라의 "5개국 연맹"은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이로써 위나라 혜왕(惠王)은 제와 초에 더욱 큰 원한을 품게 되었다. 장의는 진나라를 대표하여 더욱 교활한 수단을 취했다. BC 323년 장의는 제·초·위 3개국 대신을 한자리에 불러모아 놓고 위나라를 위한 중재에 나서 위나라의 환심을 샀다. 이 일이 있은 후에 위왕은 공손연의 합종책을 포기하고 진·한이 연합하여 제·초를 친다는 장의의 연횡책을 받아들였다. 그 이듬해에 위나라 태자와 한나라 태자가 진나라로 들어와 진왕을 알현하고, 장의는 위왕에 의해 위나라의 재상에 임명되었다.

BC 322년 장의는 위나라를 진나라의 확실한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 진의 재상을 사직하고 위나라로 갔다. 위왕은 그의 명성을 듣고 있던 터이라 그를 즉시 재상에 임명하였다. 장의는 위나라의 재상이 된 이후에 진나라를 위해서 위왕을 더욱 농락했다. 결국 장의의 설득으로 위왕은 태자를 진나라에 보내어 귀순의 의사를 전달함으로써 위나라는 진나라에 완전히 복속되었다.

장의는 위나라에서 4년간 재상을 역임하고 BC 318년에 진나라로 돌아갔으며, 진 혜왕은 그를 계속 재상에 임명했다. BC 316년 장의는 사마착(司馬錯)과 함께 촉(蜀)을 공격하여 멸망시킨 다음 의국(宜國)과 파국(巴國)을 차례로 멸망시켰다.

제나라도 수어(修魚)의 전투에서 조나라와 위나라를 대파하고 초나라와 연맹을 맺었다. 제나라는 동방의 강대국이고 초나라는 남방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나라였다. 따라서 제초연맹(齊楚聯盟)은 진나라에 상당히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으므로, 진나라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제초연맹을 분열시켜 그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관건이었다.

BC 313년 장의는 다시 진나라의 재상직을 사임하고 남쪽으로 내려가 초나라 왕을 알현하였다. 초나라에 들어간 이후 그는 먼저 초 회왕(懷王)의 측근 근상(靳尙)을 매수하여 제초연맹의 분열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회왕을 설득하기 시작하였다.

"저희 진나라 왕께서 가장 존중하는 분은 대왕밖에 없으며, 제가 신하가 되기를 원하는 분도 바로 대왕이십니다. 저희 진나라 왕께서 가장 증오하는 사람은 제나라 왕보다 더한 사람이 없으며, 저도 제나라 왕을 가장 증오합니다. 제나라는 비록 진나라와 일찍이 사돈을 맺었던 나라이지만, 제나라가 진나라에 잘못한 점이 너무 많습니다. 지금 저희 진나라는 제나라를 토벌하고자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희 진나라 왕께서 대왕을 섬길 수도 없고, 저도 대왕의 신하가 될 방법이 없습니다. 만약 대왕께서 제나라와 관계를 끊으신다면 신은 진나라 왕에게 청하여 상어(商於) 600리를 초나라에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제나라는 반드시 약화될 것이고, 대왕께서는 그러한 제나라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북으로는 제나라를 약화시키고 서로는 진나라에 은혜를 베풀면서, 초나라는 상어의 땅을 가질 수 있는 지극히 실리적인 일입니다."

 

초왕은 장의의 계책을 매우 흔쾌히 받아들이고 대신들도 모두 그것을 기뻐하였다. 장의가 비록 초 회왕을 설득하는데는 성공하였지만, 초나라에도 뜻있는 충신들이 많이 있었다. 원래 진나라에서 일한 적이 있었던 진진(陳珍)은 장의가 초나라에 온 의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회왕에게 장의의 계책에 말려들지 말 것을 충고하였지만, 회왕은 장의의 감언이설에 현혹되고 눈앞의 이익에 정신이 팔려 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초 회왕은 제나라와 단교를 선포하고 장의에게 사신을 딸려보내 진나라의 영토를 접수하도록 했다.

장의는 진나라에 돌아간 후에 병을 핑계로 석달동안 조회에 나가지 않았다. 초 회왕은 땅을 얻지 못하자 진나라가 제초의 단교를 의심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특별히 제나라에 사람을 파견하여 제왕을 모독하도록 했다. 크게 노한 제왕은 초나라와의 관계를 확실히 청산하고, 진나라에 사람을 보내어 공동으로 초나라를 정벌할 것을 제의했다. 목적이 달성되자 장의는 초나라 사자를 만나서 그에게 "어디에서 어디까지 6리에 이르는 땅"을 초왕에게 주겠다고 하였다. 초나라 사자가 돌아가서 회왕에게 그것을 보고하자 회왕은 노기충천하여 펄쩍 뛰면서 즉시 진나라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고자 했다. 이때에도 진진은 회왕에게 진나라와 연합하여 제나라에 대항할 것을 건의하였지만, 회왕은 장의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 진진의 건의를 묵살하고 진나라를 공격했다.

BC 312년 초나라는 진제 연합군과 단양(丹陽)에서 마주쳤으나 초나라 군대는 크게 패하였다. 패전 소식을 전해들은 초 회왕은 더욱 노하여 초나라 전군을 동원하여 진나라를 공격하였으나 남전(藍田)에서 다시 패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또 한·위 양국이 기회를 틈타 남진하여 초나라를 공격하여 등읍(鄧邑)을 점령하였다. 진퇴양난에 빠진 초나라는 황급히 군대를 철수시킨 다음 진나라에 두 개의 성을 내주고 화의를 청했다.

진나라가 초나라를 대파한 후에 그와 대적할 수 있는 나라는 제나라 뿐이었다. 장의는 다시 초나라로 가서 회왕을 설득하여 초나라와 화친을 맺고, 한나라로 가서 한왕을 설득하여 한나라와도 화친을 맺었다. 진 혜왕은 장의의 탁월한 공로를 인정하여 그를 "무신군(武信君)"에 봉하고 5개의 성을 하사하였다. 얼마 후 혜왕이 죽고 그의 아들 탕(蕩)이 왕위를 계승하여 무왕(武王)이 되었다. 그런데 무왕은 어릴 때부터 장의를 좋아하지 않았다. 평소 장의를 시기하던 신하들은 이때를 틈타서 무왕에게 장의를 모함하였다. 위험을 느낀 장의는 즉시 재상을 사직하고 위나라로 떠났다.

BC 310년 장의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BC 328년부터 장의는 종횡술(縱橫術)을 운용하여 위·초·한 등의 나라를 다니면서 유세를 하였다. 각 제후국들 사이의 미묘한 갈등 관계를 이용하여 그들을 진나라에 복속시키기도 하고, 그들의 연맹을 분열시켜 그 세력을 약화시키기도 하였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그는 진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한 일들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진 혜왕 시기에 그는 성공적인 외교정책으로 진나라의 영토 확장과 국력 신장에 큰 공훈을 세웠으며, 나아가서는 진의 통일을 위한 기초를 공고히 다지는데도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장의는 신의를 중시하지 않고 외교전에서 속임수를 운용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았지만, 외교사절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 그는 언제나 그의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였다고 할 수 있다. 종횡가의 비조로서 그 자신의 영역을 개척하였으며, 후세의 외교가들에게도 하나의 모델을 제시해주었다.

≪사기≫에서는 장의가 무신군에 봉해진 후에도 진 혜왕의 명으로 제·조·연 등의 나라에서 유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내용이다. ≪맹자(孟子)≫「등문공하(滕文公下)」에서는 장의를 평하여, "공손연과 장의 어찌 대장부가 아니겠는가! 한번 노하면 제후들이 두려워하고 가만히 있으면 천하가 편안하도다."라고 하였으니, 당시 국제 정세를 뒤흔들어 놓은 그의 활약상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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