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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잔 쉼터/東西문화,역사인물

이사(李斯 ?~BC 208)

by 바로요거 2008. 9. 22.


이사 

이사(?~BC 208)는 초(楚) 상채(上蔡, 지금의 하남성 상채) 출신으로, 후에 진(秦)나라의 명재상이 되어 진시황을 도와 육국(六國)을 통일하였다.

이사는 젊은 시절에 일찍이지방 향리에서 문서를 담당하는 하급 관리였다. 어느날 그는 관청 화장실에서 쥐가 인분을 먹고 있는 것을 보았다. 무심히 보고 있는데, 화장실의 쥐는 인간이나 개의 낌새에 신경을곤두세우면서 언제나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런데 한 번은 곳간에 들어갔더니 그곳에 있던 쥐는 곡식을 먹고 있었다. 게다가 훌륭한 건물 속에서 인간이나 개가 와도 아무런 걱정없이 유유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 두 가지 상황을 본 이사는 사람도 때를 잘못 만나면 환경의 영향을 받아 화장실 앞의 쥐처럼 될 것이라 한탄하였다.

그 길로 이사는 관직을버리고 당시 최고의 유학자순자(荀子, 즉 荀卿)를 사사하여 제왕(帝王)의 도를 배웠다. 후에 법가이론을 집대성한 한비자(韓非子)도 이때 이사와 함께 순자의 문하에 있었다. 장기간의 학습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순자의 인의설(仁義說)에 회의를 품고 순자에게, "진나라는 4대에 걸쳐 끊임없이 승리를 거두고 군대가 천하에서 강해져 제후들에게 그 위엄을 행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결코 인의에 의지한 것이 아니라 형세에 따라 취한 책략 때문입니다."라고 물었다. 이에 순자는 그에게 너는 그것을 "근본에서 구하지 않고 말엽적인 것에서 구하는구나"라고 대답하였다. 이러한 순자의 비판에도 그는 여전히 진나라를 동경하여 그곳에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고 싶었다. 그는 순자 밑에서 학업을 끝낸 후 순자에게 하직인사를 하러 갔다

"지금 진나라 왕은 천하를 모두 삼키고 제왕이 되고자 하는데, 이때가 바로 선비가 유세하기에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슬픈 것은 낮은 신분에 있으면서 변화를 꾀할 길을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서쪽으로 가서 진왕을 설득해 보려고 합니다."


진 장양왕(莊襄王) 3년(BC 247), 이사가 진나라에 도착했을 때 바로 장양왕은 죽고 13세의 어린 왕 정(政, 즉 후세의 진시황)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국가의 대권은 모두 승상인 여불위(呂不韋)의 수중에 있었다. 이사는 먼저 여불위의 식객으로 들어가 때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이사는 점점 여불위의 신임을 얻으면서 그의 측근이 되었으며, 그러한 이사의 재능을 미리 간파한 여불위는 이사를 진왕 정의 시종(侍從)인 낭관(郞官)으로 천거하였다. 수년 후 청년이 된 진왕 정은 여불위의 손에서 벗어나친정을 펴면서 천하를 평정할 야심을 품고 있었다. 이때를 기다리고 있던 이사는 기회를 잡아 진왕 정에게 이렇게 제후들의 힘이 미약하고진나라가 강성할 때에 신속히 제후들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할 것을 권하였다. 이에 진왕 정은 이사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를 장리(長吏)에 임명하였다.

이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육국을 붕괴시키기 위한 모략을 짜내었다. 즉 각 나라로 모사(謀士)를 파견하여 그 나라의 중신들 중에서 돈으로 매수할 수 있는 자에게는 뇌물을 쓰고, 협조를 거부하는 자는 몰래 처치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고 그들 군신간의 관계를 이간질 시킨다는 것이었다. 그 실례를 들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후승(后勝)이 제나라의 재상이 되었는데, 그는 진나라로부터 비밀리에 많은 뇌물을 받았다. 그는 진나라를 탐지해 오라고 많은 첩자들을 보냈다. 기다리고 있던 진나라는 그들에게 더 많은 금품을 주어 그들을 모두 이중 첩자로 만들어 제나라로 돌려보냈다. 그들은 제나라 왕에게 합종(合縱)으로부터의 탈퇴, 전쟁 준비의 중지, 5개국 원조의 정지를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진나라는 5개국을 멸망시킬 수 있었다. 5개국이 멸망하여 진나라 군대가 제나라의 수도 임치(臨淄)를 공격했을 때 제나라의 백성들은 단 한 사람도 침입자에게 대항하는 자가없었다. 이런 교란전술은 법가정치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수법으로 진나라는 이 방법으로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제국의 위업을 달성했던 것이다. 진나라가 겨우 9년만에 다른 6개국을 멸망시킬 수 있었던 것은 막강한 군사력의 우위 외에도 상대국의 체제를 내부로부터 붕괴시켜 버린이러한 첩보 활동의 성공을들지 않을 수 없다. 이사는 이 공적에 의하여 얼마 후에는 객경(客卿, 타국 출신의 대신)으로 승진되었다.


☞ "축객령"과 한비자

진왕 정 10년(BC 237), 이웃의 한(韓)나라 출신으로 진나라에 벼슬하고 있던 정국(鄭國)이라는 기술자가 진왕 정에게 관개수로를 만들기를 권했는데, 진왕 정은 그 의견을 전적으로 받아들여 진나라 경내를 관통하고 있던 경수(涇水)와 위수(渭水)에 대대적인 관개 공사를 하도록 지시했다. 훗날 이 공사는 진나라의 국력을 소비시키려는 한나라의 모략임이었음이 밝혀졌다. 그러자 진나라의 왕족과 대신들은 전부터 타국인들이 중용되는 것에 불만이 많았던터라, 이 사건을 계기로 그들의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출하게 되었다. 진왕 정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인지라 급기야 진나라에서 봉록을 받고 있는 타국인들을 모두 추방해야 한다는 "축객령(逐客令)"을 반포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이사도 당연히추방의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그는 이 축객령에 반발하여 진왕 정에게 상소를 올렸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이사의 명문 <간축객서(諫逐客書: 타국 출신의 축출에 대한 간언)>이다.

"옛날 목공(穆公)은 융(戎)의 유여(由余), 완(宛)의 백리해(百里奚), 송(宋)의 건숙(蹇叔), 진(晋)의 비표(丕豹)와 공손지(公孫支)를 맞아들여 서융의 패자가 되었고, 효공은 상앙을 중용하여 지금 진나라의 영토가 천리인 강대국으로 번영했으며, 혜왕은 장의(張儀)의 연횡책(連橫策)을 써서 6국의 합종(合縱)을 해체시켜 진나라에 복종하게 했습니다. 또 소양왕(昭襄王)은 범휴를 중용해 원교근공책(遠交近攻策)으로 진나라의 제업(帝業)을 이룩했습니다. 만약 이 네 사람을 다른 나라 사람이라 하여 중용하지 않았다면 오늘과 같이 강대한 진나라는 없었을 것입니다.

태산은 한 줌의 흙이라도 양보하지 않았기에 그만큼 클 수 있고, 바다는 작은 물줄기도 들어오는 것을 거절하지 않았기에 깊을 수 있으며, 임금은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물리치지 않아야 그 덕을 밝힐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들어온 인재를 물리치고 외객을 추방하려는 것은 원수에게 군사를 빌려주고 도둑에게 식량을 공급해주면서, 진나라는 안으로는 인재 부족을 감수해야 하고, 밖으로는 각 나라의 원한을 사게 되는 것이니, 어떻게 나라가 편하기를 바라며, 천하의 패자가 되고자 하는 위업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이사의 이 상소로 그의 존재를 새롭게인식하게 된 진왕 정은 축객령을 철회하고 그를 정위(廷尉)로 임명했다. 이것은 승상, 어사, 대부와 동렬의 지위에 이르는 것이다. 이때 이사에게는 또다른 위기가 닥쳐왔다. 그것은 일찍이 순자 밑에서 동문수학한 한비자가 진나라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진나라가 한나라를 쉴새없이 공격하자 한나라에서는 화의를 청하기 위해 한비자를 사신으로 파견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자기보다 한비자의 학문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있던 이사는 만약 한비자가 진왕 정에 의해 발탁된다면 자신의 입지가 위태롭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그의 동료인 요가(姚賈)라는 자와 함께 담합하여 진왕 정에게 이렇게 고했다.

"한비는 뭐니뭐니해도 한나라의 공자입니다. 진나라가 제후를 병탄하려고 하는 지금 그 친구는 한나라를 생각하여 진나라를 위해서는 진력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랜 세월을 진나라에 두었다가 그대로 돌려보낸다면 장래의 화근이 될 것입니다. 이 기회에 법에 의하여 엄벌에 처해야 할 것입니다."


진왕 정은 이 말에 동요가 되어 한비자를 옥에 가두자 이사는시간을 주지 않고 옥중에 독약을 보내 자살을 강요했다. 한비자는 진왕을 만나 변명하려고 했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그 직후 진왕은 마음이 변하여 한비자를 사면하려고 옥중에 사람을 보냈으나 때는이미 늦어 한비자의 목숨이 끊긴 후였다. 때는 BC 233년(진왕 정 14년)의 일이었다. 여기에서 자신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잔인하게 동료까지 죽인 이사의 각박하고 비정한 인간됨을 엿볼 수 있다.


☞ 통일제국의 통치

BC 221년, 진왕 정을 보좌하여 천하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이사는 통일제국에 각종 새로운 정책을 시행하여 모든 권력을 시황제 한 사람의 손으로 집중시켰다.

또한 군현제를 실시하고, 법령을 새로 개정하였으며, 도량형과 문자를 통일하고, 상앙의 시서예악을 없애야 한다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분서갱유(焚書坑儒)"를 통해 사상의 통일을 꾀했다.

먼저 본격적으로 군현제(郡縣制)를 시행하기에 앞서 대부분의 대신들은 봉건제를 시행할 것을 건의하였지만, 이사는 시황제에게 주나라의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할 것을 강력하게건의하였다.

"주나라의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은 많은 왕자나 동족을 왕으로 봉했습니다만 대를 거듭하고 혈연이 멀어짐에 따라 서로 적대시하여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제후간의 항쟁에 이르러서는 손을 쓸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리하여 주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제야 천하는 폐하의 위덕으로 통일되어 군현으로 편성되었습니다. 그러니 여러 왕자나 군신들에게는 국고의 수입을 떼어서 충분한 포상을 하사하는 것이 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의 통제를 유지하면서 인심의 이반을 방지함이야 말로 치안유지의 요체인 것입니다. 지금 새삼스럽게 제후를 세운다는 것은 백해무익한 처사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시황제는 그러한 이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전격적으로 군현제를 시행하게 되었는데, 군현제란 전국의 행정단위를 군과 현으로 나누어 통치하는 제도를 말한다. 따라서 전국을 36개의 군으로 나누고 그 아래에 현을 두었는데, 군에는 군수, 군위(郡尉), 군감(郡監)을 두고, 현에는 현령, 현위, 현승(縣丞)을 두어 민정, 군사, 감찰의 3권을 분담하게 하였다. 이들 지방 장관들은 모두 중앙정부의 통치자인 황제에 의하여 임면되었다. 이러한 군현제의 시행으로 황제의 명령은 중국 전역에 신속하게 하달될 수 있었다. 군현제를 통한 중앙집권 체제의 확립은 중국의 정치제도상에서 획기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진나라 이후의 모든 중국 왕조는 그 운영이나 명칭상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진나라의 이 군현제를 규범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BC년(시황제 34년) 함양궁(咸陽宮)에서 시황제를 둘러싼 주연이 열렸는데, 제나라 출신의 순우월(淳于越)이라는 학자가 느닷없이 봉건제의 장점을 역설하면서 그것의 복원을 진언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시황제는 승상 이사에게 검토를 맡겼고, 이사는 그것에 대한 답변을 서면으로 올렸다. 주요 내용은 순우월과 같은 무리들을그대로 방치해 두면 이러한 황당무계한 주장으로 현실을 혼란시켜 위정자를 비난하는 무리들이 끊이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에 결국 그들의 사상적 근원이 되는 학술, 시서, 백가의 저서를 모조리 불태워 없애고 그에 대한 논의를 금지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시황제는이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대로 시행하게 하니 그것이 바로 유명한 분서(焚書) 사건이다. ≪사기≫ 「시황본기(始皇本紀)」에는 이러한 분서의 내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사관이 기록한 것으로는 진나라에 관한 것 외에는 모조리 태워 없앤다. 시서, 백가의 저서를 소지하고 있는 자가 있다면 군수에게 제출시켜 태워 없앤다. 다만 박사가 직무상 소지하고 있는 것은 예외에 둔다. 감히 시서에 대하여 논의하는 자가 있으면 사형에 처한다. 옛날의 예를 들어 현대를 비판하는 자는 일족을 몰살하는 형에 처한다. 위반자를 알면서도 방치하는 관리는 같은 죄로 처리한다."


일찍이 상앙이 진나라에서 취했던 일을 이번에는 이사가 전국적인 규모로 시행했던 것이다. 이러하여 분서는 이사가 헌책하여 시황제의 승인을 얻어 이사가 다시 그것을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만년의 시황제는 불로장생에 몰두하여 방사(方士)들을 가까이 했다. 방사란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영약이나 점복을 생업으로 삼는 무리들이다. 그들은 갖은 감언이설로써 시황제의 비위를 맞추다가 일이 잘 안되면 죽음을 면하기 위하여도망을 갔다. 즉 시황제를 위해 불로장생의 영약을 지어주겠다는 명목으로 엄청한 금품을 하사받고는 나중에 후환이 두려워 도망쳐 버렸던 것이다. BC 212년, 마침 시황제가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있던 노생(盧生)과 후생(侯生)이라는 두 방사도 갑자기 모습을 감추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시황제는 크게 노하여 전국의 학자 460여명을 체포하여 함양에서 생매장을 하였으니, 그것이 유명한 "갱유(坑儒)" 사건이다. 이 부분에서 이사가 직접 개입한 부분은 기록에 보이지 않지만 당시 승상의 지위에 있던 이사가 그 일의 집행을 맡았을 것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 비참한 말로

BC 210(시황제 37년), 시황제는 아들 호해(胡亥), 이사, 조고 등과 함께 다섯 번째 순행을 하다 병을 얻어 사구(沙丘, 지금의 하북성 平鄕 동북)에서 죽었다.(향년 50세) 시황제는 죽기전에 환관 조고를 불러 장자 부소(扶蘇) 앞으로 편지를 쓰게 했다. "군(軍)은 몽염(蒙염, 염=心+舌)에게 맡기고 함양에 돌아와 내 유해를 맞이하고 장례를 치루어라"는 내용이었다. 부소는 2년 전의 갱유 사건 때에 시황제에게 그것의 부당함을 간하다가 노여움을 사서북방군 사령관인 몽염의 감독관이라는 명목으로 북쪽 변방으로 추방되어 있었다. 시황제는 자신의 장자 부소에게 후사를 맡기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은 시황제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시황제가 죽자 환관 조고는 자기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먼저 호해를 설득하여 제위를 계승하게 한 다음 다시 이사를 포섭하였다. 일단 그들은 시황제의 죽음을 숨기고 순행을 계속하여 수도 함양에 돌아온 뒤에야 비로소 시황제의 죽음을 공포하였다. 그리고는 부소(扶蘇)에게 "함양으로 돌아와서 장례를 치루어라"는 시황제의 유서를 "부소는 불효하니 자살하라"는 내용으로 고쳤다. 이것을 진짜로 믿은 부소가 자살하고, 둘째 호해가 제위에올라 진이세(秦二歲)가 되었다. 조고는 낭중관(비서실장)의 요직에 취임했고 이세황제의 신임을 일신에 모아 국정을 맡아보게 되었다.

조고는 이세황제를 농락하여 점차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이세황제가 즉위한지 채 1년도 되기 전에 가렴주구를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각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잇따른 반란으로 정세의 급변을우려한 이사는 이세황제를 알현하길 원했지만 그것은 조고의 저지로 이루어질 수 없었으며, 누차 상소를 올려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사는 최후로 조고에 대한 탄핵 상소를 올리게 되었지만, 이세황제는 조고를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있었던터라 이사의 말을 믿지 않고 오히려 그를 의심하게 되었다. 결국 이사는 모반의 혐의로 체포되어 일족이 모두 함께 투옥되었다.

그리하여 BC 208년7월(이세황제 2년) 진나라 최대의 공신이었던 이사는 함양의 거리에서 자신이 제정한 법령에 의해 허리를 잘리는 형벌을 받고 죽었다. 이사가 죽은지 1년 후에 진나라도 망했다.


사마천은 ≪사기≫ 「이사열전(李斯列傳)」에서 이사를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이사는 미천한 출신이지만 제후를 찾아 진나라를 섬겼다. 열국의 약점에 편승하여 시황제의 제업(帝業)을 보좌하고 자신도 승상에 중용되었다. 그는 '제왕술'을 배웠지만 국정에 임해서는 시황제의 결점을 보완하려고 하지 않았다.높은 작록(爵祿)을 받아 먹으면서 시황제의 뜻을 거슬리지 않고 아첨과 영합을 일삼았다. 법령을 엄하게 진행하였으며, 더욱이 조고(趙高)의 사설(邪說)에 부화(附和)하고 적장자인 부소(扶蘇)를 폐하고 서자인 호해(湖亥)를 옹립했다. 제후들이 진나라에 반기를 들고서부터 당황하여 2세 황제를 간하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세상사람들은 이사를 일러 충성을 다했는데도 다섯 가지 대죄로 문책되어 주살되었다는 동정을 보내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지금 든 결점이 없었다면 그의 공적은 주공단(周公旦)이나 소공석(召公奭)과 비견할 만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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