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의 위기] 도전받는 `팍스 달러리엄`
매일경제 | 기사입력 2008.03.15 08:55
지난해 11월 중순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열린 석유수출국기구(OPEC) 정상회의. 산유국 관심사는 석유 생산량 협의보다 달러 약세에 따른 환차손에 더 쏠렸다. 1973년부터 결제대금으로 달러를 채택했지만 요즘처럼 달러 가치가 빠르게 하락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란과 베네수엘라 등에서는 결제수단으로 달러를 버리자고 했고, 단일통화 대신 바스켓통화 체제로 바꾸는 문제도 회원국 간에 깊이 있게 논의됐다.
# 장면2 이란 석유 달러결제 중단 선언
지난해 12월 8일 이란 석유장관은 국제 석유거래에서 달러 결제를 완전히 중단했다고 공식 선언했다.
골람 호세인 노자리 석유장관은 "달러화 가치 하락에 따른 석유수출국 손실을 감안할 때 달러화는 신뢰할 수 없는 통화"라고 폄하했다.
이란 국영 석유회사는 지난해 말부터 석유거래 대금 중 57%를 유로화로 받았으며 일부는 위안화로 거래했던 것으로 최근 밝혀졌다.
# 장면3 버냉키의 자신감
지난달 28일 미국 하원 주택ㆍ금융위원회 청문회.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OPEC 회원국 일부가 석유 결제수단으로 유로를 채택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묻는 질문에 "그런 계획에 대해 들은 바 없다"며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미국 경제에 이렇다 할 변화를 주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잘라 말했다.
버냉키 의장 발언은 달러 입지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최근 달러 가치가 유로당 1.56달러까지 추락하며 기축통화로서 달러 입지가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 엔화에 대해서도 달러당 100엔이 12년 만에 처음으로 깨졌다. 1985년 플라자 합의 후 엔고 시대가 다시 오는 것 아니냐는 염려감도 팽배하다.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위기는 사실 처음은 아니다.
1971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금본위제를 폐지하면서 전 세계 경제는 '닉슨 쇼크'를 경험한 바 있다. 당시 베트남전 패배에 따른 막대한 전쟁비용 후유증으로 미국 금 보유액이 바닥나자 프랑스 등 다른 국가가 금을 달라며 아우성쳤다. 금본위제를 유지하려면 고금리 정책이 필수였지만 닉슨은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정치적 판단을 내렸다. 금 태환을 거부한 것이다.
존 코놀리 당시 미국 재무장관은 상대국에 "달러는 우리 통화지만 여러분의 문제 아니냐"며 비웃었다. 그 정도로 달러 위상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을 엿볼 수 있었다.
▶기축통화 위상 시험대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중국과 인도 경제 부상, 러시아 패권 강화, 유로존 경기 회복 등 정치ㆍ경제적으로 미국이 상당히 위축된 상황에서 달러 위기가 터졌다. 그것도 월가가 만든 최첨단 금융기법에서 문제가 발생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확산되며 전 세계 금융시스템을 불안에 떨게 만들고 있다. 미국 경제와 달러에 대한 신인도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장기적 관점에서 달러 패권 약화가 서서히 가시화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제프리 가텐 예일대 경영학 교수는 "우리가 외환시장에서 목도하는 것은 전 세계 정치ㆍ경제 파워의 리밸런싱"이라며 "저울추가 꽤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1999년 유로화 출범, 2005년 위안화 변동환율제 도입, 런던 금융패권 부활, 국부펀드 영향력 강화 등 달러에 대한 환경이 녹록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 지난해 5월 쿠웨이트가 달러 페그제를 폐지한 뒤 걸프 산유국이 뒤따를 태세다. 이라크 역시 달러 중심이었던 외환보유액 다변화 정책을 밝혔다. 적어도 달러의 일극 체제는 위기를 맞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싱가포르에 소재한 블랙호스애셋매니지먼트의 리처드 던컨 파트너 겸 '달러의 위기'(2005년) 저자는 "우리는 매우 불안정한 상황으로 빠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기축통화로서 기능하려면 적어도 통화 가치가 시간이 지나도 하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바탕이 돼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전 세계 각국 중앙은행이 외환보유액으로 해당 통화를 보유하고, 글로벌 기업이 결제수단으로 선호하게 된다.
최근 기축통화로서 달러 위상에 대한 동요는 달러 약세 현상과 중첩되면서 가속되는 측면도 크다.
은성수 세계은행 선임연구원은 "국제 금융시장에서 달러 외면 현상은 기축통화에 대한 위상 변화라기보다 달러 보유로 빚어지는 환차손을 염려해 이를 피해 보자는 움직임에 불과하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외환보유액 포트폴리오 다변화나 결제통화 변경 등의 조치는 달러 약세를 더 가속시켜 달러 과다 보유국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2조달러 외환을 보유한 중국이나 1조달러를 넘어선 일본이 달러 위상 동요와 그에 따른 약세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된다는 점에서 스스로 발목을 잡고 있는 셈이다. 역설적이지만 달러 보유 규모가 큰 나라일수록 달러 가치 하락과 기축통화로서 위상 변화에 대해 내심 더 부정적인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기축통화로서 대접을 받으려면 국제 금융시장에서 안전자산으로서 신뢰를 얻는 것이 핵심이다. 이를 위해서는 통화 발행국 경제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달러가 기축통화로서 위상을 다진 것도 사실 미국 경제 패권이 강화된 후였다. 1ㆍ2차 세계대전 승전 후 미국은 전 세계 모든 금을 싹쓸이했고 온스당 35달러라는 느슨한 금본위제(브레튼우즈, 1944년)를 출범할 수 있었다.
통화 발행국이 정책의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단일 주권 국가가 유리하다는 점도 지적된다. 유로화가 달러를 대체할 대안으로 떠올랐지만 이 점에서 한계를 갖는다. 복수 국가로 이뤄진 유럽연합(EU) 단일 통화인 유로 위기관리 체계나 정책에 대한 권위, 정치적 이해관계 측면에서 달러에 비해 약하다는 평이다.
▶힘세지는 중국 위안화
이런 측면에서 중국 위안화가 오히려 여건을 갖췄다는 분석이다. 중국 경제 규모는 이미 미국과 일본, 독일에 이어 세계 4위권으로 부상했다.
골드만삭스는 2030년 이후 중국 경제 규모가 미국을 추월할 수 있다고 전망하고 있다. 현행 고정환율제를 벗어나 환율을 단계적으로 절상시키면서 경상수지 흑자를 적정한 선에서 관리한다면 위안화는 기축통화로서 매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전 세계에 퍼져 있는 화교 상권과 중국의 막대한 무역 규모가 위안화 거래 동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당장 이뤄지기 힘들다는 점이 한계다. 취약한 금융시장의 구조적 문제점, 정부 통제 아래 움직이는 환율, 불투명한 각종 지표와 후진적인 규제 등은 엄청난 장벽이다.
앤디 시에 홍콩 이코노미스트는 "아시아에서는 거래 통화로서 달러화의 대안이 없다"며 "중국 위안화가 결국 러화 바통을 이어받겠지만 그러려면 적어도 30~40년은 걸릴 것"으로 내다봤다.
▶ 金등 원자재 시대가 온다
달러 약세가 이어지면서 기축통화로서 대체 통화가 아닌 금과 같은 원자재 시대가 온다는 견해도 있다. 최근 달러 약세 헤지 수요가 몰려들면서 온스당 1000달러를 돌파한 금값 폭등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현상이다.
CBS 마켓워치는 "지구촌의 새로운 기축통화로 달러가 아닌 원자재가 부상하고 있다"며 "달러 패권은 저물고 원자재 강국을 대접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달러 위상이 약화될 수 있지만 달러 위기가 당장 현실화할 것이라고 전망하는 전문가들은 거의 없다. 60여 년 동안 이어져온 달러 위상이 관성처럼 이어질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한국은행은 "달러화 급락에도 세계 경제 불균형이 지속되는 이유는 개별 국가가 외환거래와 자산운용 때 다른 나라들이 많이 사용하고 있는 통화로 운용하려는 관성이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달러를 위협할 만큼 힘이 세진 경쟁 통화를 찾기도 쉽지 않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달러 교체는 쉽지 않다"며 "달러를 다른 통화로 대체한다는 것은 글로벌 금융시스템을 다시 짜야 하는 엄청난 작업"이라고 규정했다.
▶그래도 달러는 건재할것
월스트리트저널의 진단은 '달러 위상이 비록 추락하고 있지만 세계 기축통화로서 달러 지위는 건재하다'는 내용이다. 국제 금융시장에서 달러 위상은 다양한 측면에서 굳건하다. △외환거래 규모 △각국 외환보유액에서 차지하는 비중 △채권시장에서 거래되는 비중 △무역거래 대금 비중 등이다.
우선 외환거래 규모부터 보자.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지난해 말 현재 국제 외환시장에서 하루 평균 달러화 거래 규모는 3조2000억달러를 기록했다. 전체 중 86.3%를 차지한다. 2001년 90%에서 다소 줄었지만 지배적인 위상에는 변함이 없다. 유로화는 37.0%였다. 2001년 37.6%에 비해 거의 비슷한 비중이다. 엔화는 2001년 22.7%에서 2007년 말 16.5%로 크게 줄었다. 엔화 거래 감소 물량이 중국 위안화 등 새로 부상하는 경제권 통화로 옮겨갔을 것으로 관측된다. 외환시장에서 거래 비중은 쌍방 통화를 대상으로 계산하는 만큼 합계 200%를 기준으로 한다.
둘째, 각국 외환보유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세계 주요 국가 외환보유액에서 달러화 표시 자산 비중은 지난해 9월 말 현재 64%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 통계에는 중국과 산유국인 걸프만 국가들이 제외돼 있어 실제 비중은 더 클 것으로 보인다. 각국이 최근 유로화, 엔화 등으로 외환보유액 운용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하고 있지만 큰 추세는 변하지 않고 있다. 유로화 비중은 25%에 머물고 있다. 1999년 출범 당시 18%에서 점진적으로 늘고 있을 뿐이다.
셋째, 국제 채권시장에서 차지하는 통화별 비중이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국제 채권시장에서 달러는 44.1%에 달했다. 유로화는 31.4%로 크게 성장했지만 아직 달러표시 채권에 뒤져 있다. 엔화 채권은 5.3%로 집계됐다. 외환보유액 포트폴리오 다변화를 위해 안간힘을 써보지만 실제 시장에서 달러 표시 자산만큼 다양한 상품을 가진 대체 통화 표시 자산을 찾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 운용자들의 공통된 얘기다.
넷째, 국가 간 교역 현장에서도 달러 우위 현상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결제 통화로서 달러에 대한 선호 현상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OPEC 회원국 가운데 이란과 베네수엘라가 달러 이외 다른 통화를 결제수단으로 채택하려는 노력은 사우디아라비아 UAE 등에 의해 제동이 걸리고 있다. 알제리 등 소규모 석유수출국 거래대금은 100% 달러로 결제된다.
[워싱턴 = 윤경호 특파원 / 서울 = 이향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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