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달러, 악몽의 2007년
위클리조선 | 기사입력 2008.01.02 09:06
브라질 출신의 수퍼모델 지젤 번천은 지난 8월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프록터앤갬블(P & G), 팬틴 등과 광고계약을 맺을 때 모델료를 유로화로 지급해 달라고 요구했다고 밝혔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모델료를 받는 번천의 발언은 추락하는 달러화의 위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팝스타 비욘세의 연인으로 유명한 미국의 힙합가수 제이 지도 '아메리칸 갱스터'란 뮤직비디오에서 뉴욕 뒷골목에서 500유로짜리 돈다발을 흔드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인도 문화부는 타지마할 등 관광명소에 대한 외국인 입장료를 자국 화폐인 루피화로만 받기로 했다. 조지 소로스와 함께 퀀텀펀드를 만든 헤지펀드계의 큰손 짐 로저스 비랜드 인터레스트 회장은 심지어 "달러 자산을 팔아 치우라"는 말까지 했다. 세계 경제 대통령이란 말을 듣던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도 CBS 방송 시사프로그램 '60분'과 가진 회견(2007년 9월 16일자)에서 "달러로 출연료나 강연료를 받더라도 상관없다"며 "받은 달러를 곧 다른 통화로 바꿔 버리면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올해 국제사회의 최대 화두는 달러화 추락이다. 세계의 기축통화인 달러화가 올해처럼 '굴욕'을 당한 때는 아마 없을 것이다. 달러화 추락은 미국의 세계 경제 헤게모니가 붕괴되기 시작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올해는 바로 이 같은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원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달러화 추락은 새로운 강자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다. 무엇보다 유로화의 강세가 돋보인다. 유로화는 1999년 세계 무대에 등장한 이후 처음으로 1유로당 1.4달러를 돌파하는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달러화는 1999년 전 세계 외환보유액의 71%를 차지했으나 2007년에는 64%로 줄어들었고 대신 유로화가 25.62%로 늘어났다. 유로화가 달러화를 대체할 수준은 아니지만 기축통화의 보완제로서 기능하는 수준이 됐다.
일본의 엔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저금리 기조 속에서 수년간 약세에 허덕이던 엔화의 가치가 올해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다. 중국의 위안화도 갈수록 강세를 보이고 있다. 국제 외환시장에서 자유롭게 거래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안화는 앞으로 제 4의 기축통화로서 서서히 자리잡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주요 국가들의 통화 간 역학구도가 급변하면서 국제 외환시장에서 각국의 통화 가치도 요동쳤다. 이 중에서도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국가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들이다. 달러화는 그 동안 국제 최대 무역상품인 원유의 유일한 결제화폐로서 독점적 교환권을 누려왔다. 하지만 달러화의 가치 하락으로 OPEC 회원국들이 고유가에도 불구하고 원유 수출로 벌어들이는 실제 이득이 줄어들자 강력하게 불만을 표시했다. 특히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등 OPEC 주요 산유국은 자국 화폐와 달러를 페그제(Pegged exchange rate·달러화 등 기축통화에 대해 자국 화폐의 교환비율을 고정시킨 제도)로 묶어 놓았기 때문에 더욱 손해를 본 셈이다. 이 때문에 지난 11월 17, 18일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7년 만에 열린 OPEC 정상회담에서 달러를 원유 결제통화로 계속 유지할 것이냐를 놓고 회원국들이 격론을 벌였다. 원유결제 통화를 달러 대신 다른 통화로 바꾸자는 이란과 베네수엘라 등의 요구에 밀려 OPEC이 결국 결제화폐 변경 문제를 공식연구키로 결정한 것도 이런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산유국들의 달러화 기피 현상은 이미 부분적으로 가시화되고 있다. 세계 4위 산유국 이란은 최근 "원유 결제통화를 달러화로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아랍에미리트연합은 "외환보유액 중 유로화 비중을 5%에서 10%로 높이겠다"고 밝혔다. 쿠웨이트는 지난 5월 인플레이션을 견디지 못하고 달러 페그제를 통화바스켓 제도로 변경한 바 있다. 홍콩 등 페그제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들도 환율제도를 바꾸는 방안을 심각하게 검토하고 있다.
세계 최대 외환보유고(1조4600억달러)를 자랑하고 있는 중국도 투자 자산을 달러화 외에도 유로화 등으로 다변화하겠다고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원자바오 중국 총리가 "달러화 약세에 따른 자산가치 하락을 더 이상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다"고 밝힌 것도 이런 맥락이다. 심지어 청시웨이 전인대 부의장은 "달러가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있다"고 강경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러시아를 비롯해 달러화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 각국도 같은 입장이다.
그렇다면 달러화 추락의 원인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무엇보다 근본적인 까닭은 2000년대 이후 누적되고 있는 미국의 쌍둥이 적자(재정과 무역수지)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의 재임 중 현재까지 미국의 쌍둥이 적자는 연 1조달러가 넘는다. 이는 달러의 위상을 실추시키고 미국 주도의 세계 금융질서에 대한 의구심을 낳았다. 특히 2006년 미국 경상수지 적자는 GDP 대비 6.5%라는 기록적 수치를 보였다. 미국의 쌍둥이 적자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 때문에 지출된 비용이 예상과 달리 급증하면서 더욱 심화됐다. 또 하나 중요한 이유는 미국 경제의 체질 약화이다. 세계 경제가 최근 3% 수준의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반면 미국 경제성장률은 올해 2% 수준에 머물 것으로 보이며 내년에는 더욱 하락할 것으로 전망된다.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 사태가 터지고 말았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이 미국 주택시장은 물론 금융시장 전반의 금융경색을 초래하자 FRB는 지난 9월 18일 4년 3개월 만에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인하했고,12월 11일 현재 기준금리를 4.25%까지 낮추면서 미국 달러 약세를 가속시키고 있다. 문제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이 끝이 아니라는 데 있다. 케네스 프루트 하버드대학 경영대학원 교수는 "내년에도 이 문제가 더욱 크게 악화될 것"이라면서 "미국 달러화의 가치 하락은 오래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런 비관적 견해가 지배적인 가운데 '팍스 달러리움(Pax Dollarium·달러 주도 세계경제)' 체제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세계 경제 및 금융의 헤게모니를 잡아온 미국은 1944년 브레턴 우즈(Bretton Woods) 체제를 통해 달러화를 세계의 기축통화로 만들었다. 미국은 달러화를 일정량의 금에 고정(금 1온스당 35달러)시키고 항시 금과 교환이 가능한 금·달러본위제를 채택했다. 각국은 달러화에 대해 자국 통화의 환율을 고정시켰다.
하지만 미국은 1960년대 베트남전에 따른 국가채무 급증으로 위기를 맞았다. 막대한 전쟁비용으로 미국 경제는 파산 상태로 치닫고 달러를 떠받치던 금 보유액은 고갈됐다.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이 1971년 8월 15일 달러화의 금 태환을 정지시킴으로써 브레튼 우즈 체제는 붕괴됐다. 달러화의 지위가 통째로 흔들리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오일쇼크가 달러를 기사회생시켰다. 1973년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OPEC이 급등하는 원유를 달러로만 수출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달러화는 이때부터 확고부동한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를 차지하면서 '팍스 달러리움'이라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었다. 달러화는 1985년 또 다시 위기에 직면했다. 1980년대 미국의 쌍둥이 적자가 심각해지자 1985년 9월 선진국 재무장관들이 뉴욕 플라자호텔에 모여 엔화와 마르크화를 대폭 절상하는 데 합의한다. 이른바 '플라자 합의(Plaza Agreement)'다. 미국은 플라자 합의로 위기를 모면한 후 1990년대 '신(新)경제현상'으로 불리는 고성장을 지속했다. 21세기를 맞아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했고, 다시 쌍둥이 적자가 누적된 데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사태까지 겪으면서 위기에 빠져들고 있다.
달러화 추락은 국제 정치적으로 상당한 함의가 있다. 미국의 힘은 군사력과 이를 뒷받침하는 경제력, 다시 말해 달러화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미국은 다른 국가들이 기축통화로서 달러화를 사용함에 따라 이들과의 관계에서 상대적 우위를 점해왔다. 미국은 이를 통해 외교·안보정책에서 다른 국가들에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미국의 중요한 패권 전략 중 하나는 달러화를 관리하고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팍스 달러리움 체제의 붕괴는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 시대의 종언을 뜻한다.
각국의 도전은 이미 시작됐다. 무엇보다 먼저 팍스 달러리움의 근간이랄 수 있는 '페트로(석유)-달러 체제'를 OPEC 회원국인 이란과 베네수엘라가 거부하고 있다. 이란과 베네수엘라는 중동과 남미에서 반미의 기수로 자처하면서 새로운 지역 맹주로 부상했다. 특히 미국은 핵 개발 의혹이 있는 이란에 대해 과거와는 달리 강력하게 밀어붙이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라크를 점령함으로써 중동 지역의 지배권을 강화하려던 계획도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다. 미국이 이라크전이라는 늪에 빠져 있는 동안 레바논의 헤즈볼라,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등 과격 이슬람주의 세력은 오히려 세를 확장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이유 중 하나는 이라크가 원유결제대금으로 달러화 대신 유로화를 사용했기 때문이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상황은 역전된 셈이다.
다른 OPEC 회원국들도 미국에 위협이 되고 있다. 미국 에너지정보국(EIA)의 보고서(2007년 11월 9일자)에 따르면 OPEC 회원국들이 올해 벌어들일 오일머니는 658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됐다. 이는 지난해보다 530억달러가 늘어난 규모로 사상 최대이다. OPEC의 석유 수입은 내년에는 7620억달러로, 올해보다 16%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오일머니가 쌓이다 보니 OPEC 회원국 중 UAE와 쿠웨이트 등은 엄청난 규모의 국부펀드를 만들어 주로 미국의 국채 및 금, 주식 등에 투자하고 있다. 각국 국부펀드의 총 자산은 3조달러 정도로 전 세계 헤지펀드 자산보다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펀드는 2015년 12조달러까지 늘어날 것이라고 본다. 특히 일부 국부펀드는 미국의 에너지와 통신 및 금융 등 주요 기업을 인수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오일머니와 일부 국부펀드가 국제 질서라는 측면에서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을 증대시킬 것도 확실하다. 리처드 하스 미국 외교관계협의회(CFR) 회장은 "중동에서의 미국 패권은 종말을 고했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과 러시아도 이젠 미국에 버거운 상대가 됐다. 중국과 러시아는 서로 전략적 동맹 관계를 강화하고 있으며, 반미국가들의 든든한 뒷배가 되고 있다. 양국이 미국에 도전할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은 바로 경제대국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5년 연속 두 자릿수 성장률을 기록했으며 올해 국내총생산(GDP)은 13년 만에 최고인 11.5%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 국영 석유·가스업체인 페트로차이나는 시가총액 기준으로 미국의 엑손모빌을 제치고 세계 최대 기업으로 부상했다. 시가총액으로 세계 10대 기업에 중국은 페트로차이나 외에도 차이나 라이프, 차이나 모바일, 공상은행, 차이나 페트롤리엄 등 5개사를 포진시킨 반면 미국은 엑손모빌과 제너럴일렉트릭, 마이크로소프트 등 3개사만 포함됐다. 중국은 지난 9월 말 자본규모 2000억달러의 국부펀드인 중국투자유한책임공사(China Investment Corp·CIC)를 출범시키면서 적극적으로 해외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중국은 이와 함께 군사력을 대폭 강화하고 있다. 달 탐사 위성을 발사하고 항공모함의 건조도 착수했다. 중국은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예산을 국방비에 투입하고 있다.
러시아도 마찬가지이다. 러시아는 지난 7년간 연평균 6.5%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으며, 외환보유고는 4500억달러로 세계 3위를 차지했다. 러시아는 이런 경제적 성과를 바탕으로 미국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있다. 이란 핵 문제, 코소보, 동유럽 미사일 방어(MD) 체제문제를 놓고 미국과 대립했으며 유럽재래식무기감축협정(CFE)의 이행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1998년 모라토리엄(대외채무지불유예)까지 선언하면서 미국의 달러화를 차입한 러시아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다. 러시아는 미국 MD 체제를 뚫을 수 있는 새로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시험발사하는가 하면, 전략 폭격기와 최신예 핵 잠수함 등을 새롭게 개발하는 등 마치 냉전시대처럼 군사력을 확충하고 있다. 러시아 해군은 최근 항공모함 등을 동원, 지중해까지 진출하는 대규모 해상훈련에 돌입했다. 러시아 해군의 지중해 진출 훈련은 소련 붕괴 이후 처음이다. 러시아는 지난 6년간 국방예산을 약 4배 증액하는 등 군비 증강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이 같은 도전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달러화 헤게모니를 쉽게 내주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달러화 추락으로 국제질서에서 힘의 이동은 시작됐다. 중국, 러시아, 인도 등 신흥 경제대국이 미국을 바짝 추격하면서 국제질서는 일극 체제에서 서서히 다극 체제로 바뀌고 있다. 2007년은 바로 달러화 추락에 따른 미국의 단일 패권이 약화되기 시작하는 원년으로 기록될 듯하다.
/ 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truth21c@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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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엔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저금리 기조 속에서 수년간 약세에 허덕이던 엔화의 가치가 올해 가파른 상승세를 보였다. 중국의 위안화도 갈수록 강세를 보이고 있다. 국제 외환시장에서 자유롭게 거래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안화는 앞으로 제 4의 기축통화로서 서서히 자리잡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주요 국가들의 통화 간 역학구도가 급변하면서 국제 외환시장에서 각국의 통화 가치도 요동쳤다. 이 중에서도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국가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들이다. 달러화는 그 동안 국제 최대 무역상품인 원유의 유일한 결제화폐로서 독점적 교환권을 누려왔다. 하지만 달러화의 가치 하락으로 OPEC 회원국들이 고유가에도 불구하고 원유 수출로 벌어들이는 실제 이득이 줄어들자 강력하게 불만을 표시했다. 특히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등 OPEC 주요 산유국은 자국 화폐와 달러를 페그제(Pegged exchange rate·달러화 등 기축통화에 대해 자국 화폐의 교환비율을 고정시킨 제도)로 묶어 놓았기 때문에 더욱 손해를 본 셈이다. 이 때문에 지난 11월 17, 18일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7년 만에 열린 OPEC 정상회담에서 달러를 원유 결제통화로 계속 유지할 것이냐를 놓고 회원국들이 격론을 벌였다. 원유결제 통화를 달러 대신 다른 통화로 바꾸자는 이란과 베네수엘라 등의 요구에 밀려 OPEC이 결국 결제화폐 변경 문제를 공식연구키로 결정한 것도 이런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산유국들의 달러화 기피 현상은 이미 부분적으로 가시화되고 있다. 세계 4위 산유국 이란은 최근 "원유 결제통화를 달러화로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아랍에미리트연합은 "외환보유액 중 유로화 비중을 5%에서 10%로 높이겠다"고 밝혔다. 쿠웨이트는 지난 5월 인플레이션을 견디지 못하고 달러 페그제를 통화바스켓 제도로 변경한 바 있다. 홍콩 등 페그제를 채택하고 있는 국가들도 환율제도를 바꾸는 방안을 심각하게 검토하고 있다.
세계 최대 외환보유고(1조4600억달러)를 자랑하고 있는 중국도 투자 자산을 달러화 외에도 유로화 등으로 다변화하겠다고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원자바오 중국 총리가 "달러화 약세에 따른 자산가치 하락을 더 이상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다"고 밝힌 것도 이런 맥락이다. 심지어 청시웨이 전인대 부의장은 "달러가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있다"고 강경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러시아를 비롯해 달러화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 각국도 같은 입장이다.
그렇다면 달러화 추락의 원인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무엇보다 근본적인 까닭은 2000년대 이후 누적되고 있는 미국의 쌍둥이 적자(재정과 무역수지)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의 재임 중 현재까지 미국의 쌍둥이 적자는 연 1조달러가 넘는다. 이는 달러의 위상을 실추시키고 미국 주도의 세계 금융질서에 대한 의구심을 낳았다. 특히 2006년 미국 경상수지 적자는 GDP 대비 6.5%라는 기록적 수치를 보였다. 미국의 쌍둥이 적자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 때문에 지출된 비용이 예상과 달리 급증하면서 더욱 심화됐다. 또 하나 중요한 이유는 미국 경제의 체질 약화이다. 세계 경제가 최근 3% 수준의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반면 미국 경제성장률은 올해 2% 수준에 머물 것으로 보이며 내년에는 더욱 하락할 것으로 전망된다.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 사태가 터지고 말았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이 미국 주택시장은 물론 금융시장 전반의 금융경색을 초래하자 FRB는 지난 9월 18일 4년 3개월 만에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인하했고,12월 11일 현재 기준금리를 4.25%까지 낮추면서 미국 달러 약세를 가속시키고 있다. 문제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이 끝이 아니라는 데 있다. 케네스 프루트 하버드대학 경영대학원 교수는 "내년에도 이 문제가 더욱 크게 악화될 것"이라면서 "미국 달러화의 가치 하락은 오래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런 비관적 견해가 지배적인 가운데 '팍스 달러리움(Pax Dollarium·달러 주도 세계경제)' 체제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세계 경제 및 금융의 헤게모니를 잡아온 미국은 1944년 브레턴 우즈(Bretton Woods) 체제를 통해 달러화를 세계의 기축통화로 만들었다. 미국은 달러화를 일정량의 금에 고정(금 1온스당 35달러)시키고 항시 금과 교환이 가능한 금·달러본위제를 채택했다. 각국은 달러화에 대해 자국 통화의 환율을 고정시켰다.
하지만 미국은 1960년대 베트남전에 따른 국가채무 급증으로 위기를 맞았다. 막대한 전쟁비용으로 미국 경제는 파산 상태로 치닫고 달러를 떠받치던 금 보유액은 고갈됐다. 리처드 닉슨 당시 미국 대통령이 1971년 8월 15일 달러화의 금 태환을 정지시킴으로써 브레튼 우즈 체제는 붕괴됐다. 달러화의 지위가 통째로 흔들리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오일쇼크가 달러를 기사회생시켰다. 1973년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OPEC이 급등하는 원유를 달러로만 수출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달러화는 이때부터 확고부동한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를 차지하면서 '팍스 달러리움'이라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었다. 달러화는 1985년 또 다시 위기에 직면했다. 1980년대 미국의 쌍둥이 적자가 심각해지자 1985년 9월 선진국 재무장관들이 뉴욕 플라자호텔에 모여 엔화와 마르크화를 대폭 절상하는 데 합의한다. 이른바 '플라자 합의(Plaza Agreement)'다. 미국은 플라자 합의로 위기를 모면한 후 1990년대 '신(新)경제현상'으로 불리는 고성장을 지속했다. 21세기를 맞아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했고, 다시 쌍둥이 적자가 누적된 데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사태까지 겪으면서 위기에 빠져들고 있다.
달러화 추락은 국제 정치적으로 상당한 함의가 있다. 미국의 힘은 군사력과 이를 뒷받침하는 경제력, 다시 말해 달러화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미국은 다른 국가들이 기축통화로서 달러화를 사용함에 따라 이들과의 관계에서 상대적 우위를 점해왔다. 미국은 이를 통해 외교·안보정책에서 다른 국가들에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미국의 중요한 패권 전략 중 하나는 달러화를 관리하고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팍스 달러리움 체제의 붕괴는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 시대의 종언을 뜻한다.
각국의 도전은 이미 시작됐다. 무엇보다 먼저 팍스 달러리움의 근간이랄 수 있는 '페트로(석유)-달러 체제'를 OPEC 회원국인 이란과 베네수엘라가 거부하고 있다. 이란과 베네수엘라는 중동과 남미에서 반미의 기수로 자처하면서 새로운 지역 맹주로 부상했다. 특히 미국은 핵 개발 의혹이 있는 이란에 대해 과거와는 달리 강력하게 밀어붙이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이라크를 점령함으로써 중동 지역의 지배권을 강화하려던 계획도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다. 미국이 이라크전이라는 늪에 빠져 있는 동안 레바논의 헤즈볼라,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등 과격 이슬람주의 세력은 오히려 세를 확장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이유 중 하나는 이라크가 원유결제대금으로 달러화 대신 유로화를 사용했기 때문이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상황은 역전된 셈이다.
다른 OPEC 회원국들도 미국에 위협이 되고 있다. 미국 에너지정보국(EIA)의 보고서(2007년 11월 9일자)에 따르면 OPEC 회원국들이 올해 벌어들일 오일머니는 658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됐다. 이는 지난해보다 530억달러가 늘어난 규모로 사상 최대이다. OPEC의 석유 수입은 내년에는 7620억달러로, 올해보다 16%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오일머니가 쌓이다 보니 OPEC 회원국 중 UAE와 쿠웨이트 등은 엄청난 규모의 국부펀드를 만들어 주로 미국의 국채 및 금, 주식 등에 투자하고 있다. 각국 국부펀드의 총 자산은 3조달러 정도로 전 세계 헤지펀드 자산보다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펀드는 2015년 12조달러까지 늘어날 것이라고 본다. 특히 일부 국부펀드는 미국의 에너지와 통신 및 금융 등 주요 기업을 인수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오일머니와 일부 국부펀드가 국제 질서라는 측면에서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을 증대시킬 것도 확실하다. 리처드 하스 미국 외교관계협의회(CFR) 회장은 "중동에서의 미국 패권은 종말을 고했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과 러시아도 이젠 미국에 버거운 상대가 됐다. 중국과 러시아는 서로 전략적 동맹 관계를 강화하고 있으며, 반미국가들의 든든한 뒷배가 되고 있다. 양국이 미국에 도전할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은 바로 경제대국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5년 연속 두 자릿수 성장률을 기록했으며 올해 국내총생산(GDP)은 13년 만에 최고인 11.5%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 국영 석유·가스업체인 페트로차이나는 시가총액 기준으로 미국의 엑손모빌을 제치고 세계 최대 기업으로 부상했다. 시가총액으로 세계 10대 기업에 중국은 페트로차이나 외에도 차이나 라이프, 차이나 모바일, 공상은행, 차이나 페트롤리엄 등 5개사를 포진시킨 반면 미국은 엑손모빌과 제너럴일렉트릭, 마이크로소프트 등 3개사만 포함됐다. 중국은 지난 9월 말 자본규모 2000억달러의 국부펀드인 중국투자유한책임공사(China Investment Corp·CIC)를 출범시키면서 적극적으로 해외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중국은 이와 함께 군사력을 대폭 강화하고 있다. 달 탐사 위성을 발사하고 항공모함의 건조도 착수했다. 중국은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예산을 국방비에 투입하고 있다.
러시아도 마찬가지이다. 러시아는 지난 7년간 연평균 6.5%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으며, 외환보유고는 4500억달러로 세계 3위를 차지했다. 러시아는 이런 경제적 성과를 바탕으로 미국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있다. 이란 핵 문제, 코소보, 동유럽 미사일 방어(MD) 체제문제를 놓고 미국과 대립했으며 유럽재래식무기감축협정(CFE)의 이행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1998년 모라토리엄(대외채무지불유예)까지 선언하면서 미국의 달러화를 차입한 러시아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다. 러시아는 미국 MD 체제를 뚫을 수 있는 새로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시험발사하는가 하면, 전략 폭격기와 최신예 핵 잠수함 등을 새롭게 개발하는 등 마치 냉전시대처럼 군사력을 확충하고 있다. 러시아 해군은 최근 항공모함 등을 동원, 지중해까지 진출하는 대규모 해상훈련에 돌입했다. 러시아 해군의 지중해 진출 훈련은 소련 붕괴 이후 처음이다. 러시아는 지난 6년간 국방예산을 약 4배 증액하는 등 군비 증강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이 같은 도전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달러화 헤게모니를 쉽게 내주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달러화 추락으로 국제질서에서 힘의 이동은 시작됐다. 중국, 러시아, 인도 등 신흥 경제대국이 미국을 바짝 추격하면서 국제질서는 일극 체제에서 서서히 다극 체제로 바뀌고 있다. 2007년은 바로 달러화 추락에 따른 미국의 단일 패권이 약화되기 시작하는 원년으로 기록될 듯하다.
/ 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truth21c@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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