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차일드 가문
로스차일드 가문은 유대인에게 신화와 같은 가문입니다.
독일 프랑크프르트 유대인 게토 지역에서 자손 대대로 살아 온 가문이 로스 차일드 가문입니다.
집 앞에 붉은 방패를 걸어 놓고 살았습니다. 붉은 방패의 영어 발음이 로스 차이들입니다. 독일어 발음은 로트실트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름이 생겼습니다.
로스 차일드는 어려서부터 두뇌가 명석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차일드를 랍비 학교에 보내서 유명한 랍비로 기르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는 유대인 신학교에 입학하여 랍비 수업을 받았습니다. 탈무드를 전공하였습니다.
그러나 12 살에 부모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더 이상 공부할 수 없어서 그는 유대인이 경영하는 오펜하임 은행에 견습공으로 취직하였습니다. 그는 이 곳에서 은행과 탈무드를 종합하였습니다.
300년 번영을 자랑하였던 로스 차일드 가문이 금융을 탈무드로 장악하는 시작점이 바로 이 곳입니다. 그는 옛 날 돈을 모으기 시작하였습니다. 흥미를 느꼈습니다. 20살에 은행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화폐 수집상으로 직업을 바꾸었습니다. 그의 본 이름은 마이어였습니다.
로스 차일드는 후에 방패 때문에 생긴 별명으로 그 가문의 대명사가 된 것입니다. 마이어는 옛날 돈 목록을 만들어 흥미있는 이들에게 안내서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흥미없는 이들에게 옛날 돈을 사들였습니다. 공짜나 다름없이 사서 비싸게 팔았습니다. 부요한 귀족들에게 이 돈을 팔러 다녔습니다. 그러던 중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대왕의 아들인 명문 귀족 빌헤름 공과 직접 거래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 박해가 극도로 달하는 시기에 프랑크프르트에서 한낱 장사꾼이 독일 영주와 귀족들과 친하게 지낸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빌헤름 공도 특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군대를 양성하였습니다. 그래서 영국에 용병으로 군대를 팔았습니다. 돈을 엄청나게 벌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요한 나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화폐 수집상을 하던 마이어는 빌헤름 공의 취미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영국에서 돈이 오는 데 영국돈이었습니다. 그래서 환전상을 맡게 되었습니다. 차액도 어마어마 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이어는 유대인으로서 빌헤름 공의 재정까지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엄청난 돈을 모으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이어에게는 5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모두 외국으로 파송시켜 금융을 장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큰 아들 암셀은 독일 프랑크프르트의 후계자로, 차남 잘로몬은 오스트리아 빈으로, 삼남 네이선은 영국 런던으로, 사남 카를은 이탈리아 나포리로, 오남 야코프는 프랑스 파리로 보내서 금융을 장악하게 하였습니다. 유럽의 네트워크를 만들었습니다.
5아들은 아버지와 사투에 가까운 노력을 하였습니다. 죽을 둥 살 둥 일하였습니다. 마이어 가정, 로스 차이들 가문의 성공의 비결이 있습니다.
1. 견고한 결속력입니다. 초대 마이어가 남긴 유언은 이것입니다.
<아들만 사업을 계승하여 나가라. 딸과 사위는 경영에 참가하지 말아라> 그리고 그는 죽는 자리에서 5 아들을 불러 앉혀 놓고 스키타이 왕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하였습니다. 기원전 6세기 흑해 북안을 건설한 유목민 왕입니다. <스키타이 왕이 죽을 때 아들들을 불러 놓고 묶어 놓은 화살을 꺽어 보라고 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꺽을 수 없었다. 그러자 왕은 하나 하나 분리시켜 꺽어 보라고 하였다. 모두 꺽어 버렸다. 그렇다. 너희들은 화살 다발처럼 하나로 뭉치면 누구도 꺽을 수 없다. 결속이 무너지면 다 망한다. 번영도 사라진다. 하나가 되거라> 그리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아버지의 유언을 따라 아들들이 똘똘 뭉쳐 하나가 되어 일하였습니다. 오늘 날도 런던시 로스차일드 집안이 운영하는 은행에는 일가의 결속을 나타내는 5개 화살이 그려진 방패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2. 강한 정보력입니다. 국경을 넘어드는 정보를 장악하였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를 넘어드는 국경에 자가용 범선을 여러 대 가지고 정보를 수집하였습니다. 독자적인 정보망을 구축하였습니다. 정보가 돈이라고 여겼습니다.
3. 뛰어난 정보 분석력이었습니다. 정보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정보를 어떻게 분석하여 정확하게 대처하느냐는 대단히 중요한 행동 방침입니다. 로스 차일드는 그렇게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봅니다. 1815년 6월20일 프랑스와의 워털루 전투 결과를 기다리던 런던 증권거래소는 긴장하였습니다. 누가 이기느냐 결과에 따라 시장은 `천국과 지옥` 사이를 오갈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영국이 이기면 영국 주식은 폭등, 프랑스 주식은 폭락할 것입니다. 반대로 프랑스가 이기면 반대 현상이 일어날 것입니다. 모두들 초조하던 순간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영국 공채를 팔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를 보고 영국이 패한 것으로 판단한 투자자들은 일제히 매도 주문을 냈습니다. 공채는 즉각 폭락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때 차이드는 영국 주식을 매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닥 값에서 엄청난 양을 사들였습니다. 거의 동시에 `영국군 대승 소식이 날라 들었습니다. 차이드는 영국과 프랑스 워터루 전쟁터 근처에 자기 범선을 대기시키고 정보를 단독으로 수집하고 있었습니다.
4. 강한 믿음입니다. 마이어는 유대교의 대표적인 사업가입니다.
그는 유대교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결코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박해를 받아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전 세계에 이름난 유대인 재벌입니다. 세계 최대 재벌입니다. 창업한 지 300년이 지나도 건재하고 있습니다. 은행, 다이아몬드, 석유, 홍차등은 모든 경제권을 쥐고 있습니다. 그 후 술, 호텔, 백화점 경영까지 손을 뻗혔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국가 창설 자금을 댔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 전쟁, 러시아-프랑스 혁명, 2차대전 등 세계적인 사건을 배후조종하거나 직접 개입하였습니다. 도움을 주면서 천문학적인 돈을 벌었습니다. 그리고 지구촌의 정치, 경제를 주름잡는 절대 강자로 성장하였습니다. 후에 역사학자들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5가지 성공비결은 정보, 인맥, 기회활용, 단결, 아이디어라고 말했습니다.
로스차일드 '붉은 방패’
역경을 떨치고 일어서는 힘! 다섯 화살 붉은 방패, 세계를 도전하라!
로스차일드 가문은 조상 대대로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지역 게토에서 고물상을 하면서, '붉은 방패(독일어로 로트칠트)'를 집 앞에 내걸었다.그것이 영어식 발음 '로스차일드'의 어원이며, 마이어가 훗날 이것을 성으로 사용한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부터 두뇌가 명석한 마이어를 랍비로 키우기 위해 유대 신학교에 보내 탈무드를 공부하게 했다. 하지만 마이어는 12세 때 부모가 사망하는 바람에 학업을 중단하고 유대인이 경영하던 오펜하임 은행에 견습생으로 들어갔다. 300년의 번영을 자랑하는 로스차일드 집안을 탄생시켰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탈무드'와 '은행'은 자못 유대인다운 배합이었다. 마이어는 유대 신학교에서 탈무드를 공부하여 중동과 유럽의 역사와 어학에 상당한 지식이 있었다. 그러던 중 옛날돈에 흥미를 느껴 수집하기 시작했다. 마이어는 20세가 되자 오펜하임 은행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화폐수집상이 되었는데 그것이 세계 최대의 금융왕국을 건설하는 첫걸음이었다. 마이어는 옛날돈의 유래를 설명한 안내서를 만들어 고객이 될 만한 지배층 사람들에게 우송했다. 그리고 흥미가 없는 사람한테는 옛날돈을 공짜나 다름없이 사들여서, 부유한 귀족들에게 팔러 다니다가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대왕의 아들인 명문귀족 빌헬름 공과 직접 거래하게 되었다. 그즈음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심했던 프랑크푸르트에서 한낱 상인에 지나지 않은 유대인 청년이 영주와 귀족을 직접 만나 거래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획기적인 일이었다. 빌헬름 공은 군대를 양성하여 영국 등에 용병으로 빌려주는 장사를 하여 수많은 왕족들이 빚에 허덕이는 가운데서도 유럽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어 있었다. 화폐수집상뿐만 아니라 환전상도 겸했던 마이어는 빌헬름 공의 재정담당에게 줄을 넣기 위해 애쓴 끝에, 런던에서 보내오는 환어음을 현금화하는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가재정에까지 관여하게 된 것이다. 더욱 운이 좋았던 것은 1785년 빌헬름 공이 아버지 프리드리히 대왕의 뒤를 이어 빌헬름 9세로 즉위하여 그의 자산이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이때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섬유의 대량생산이 시작되었고, 프랑스혁명으로 독일에서도 면제품 가격이 급등하고 있었다. 이에 주목한 로스차일드 상회는 빌헬름 9세가 영국에서 용병대금으로 받은 수표를 단순히 현금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수표를 바로 영국에서 구입한 면제품의 지불에 충당했다. 또한 다시 주식과 채권에도 투자하여 막대한 이익을 거두기 시작했다. 유럽 최대의 갑부인 빌헬름 9세의 제1금고지기가 된 마이어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보다 더 가문을 위한 일로서 국경을 초월한 금융네트워크를 구상했다. 마이어에게는 암셸, 잘로몬, 나탄, 카를, 야콥(나중에 개명하여 제임스) 등 다섯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는 이 다섯 아들들을 엄격한 유대 교육하에 상인으로 단련시켜, 장남 암셸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본가의 후계자로, 차남 잘로몬은 오스트리아 빈, 삼남 나탄은 영국 런던, 사남 카를은 이탈리아 나폴리, 오남 야콥은 프랑스 파리로 보냈다. 로스차일드는 유럽 주요 도시에 포진한 다섯 아들들의 견고한 협력체제하에서 19세기 유럽 최강의 금융기관으로 성장해갔다. 마이어와 다섯 아들들의 눈부신 활약과 사투는 장대한 드라마이며, 그 자체만으로도 격동의 유럽 역사가 될 정도다. 나오는 등장인물만 나열해도 나폴레옹, 웰링턴 장군,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 합스부르크 집안, 히틀러 등 역사의 한획을 그은 인물들이다. 로스차일드 집안의 성공비결을 몇 가지 들어보면, 첫째는 로스차일드 일가의 견고한 결속력을 들 수 있다. 초대 마이어가 유서로 남긴 가훈은 로스차일드 집안의 가문은 아들만이 계승하며, 딸과 사위는 경영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 로스차일드 집안의 자손은 마이어의 유언을 지키며 서로 도와야 한다고도 했다. 이 마이어의 유지를 거스르는 자는 사업을 계승할 권리를 잃는다. 이리하여 유럽 각지에 흩어져 있는 자녀들은 초대 마이어가 사망한 뒤에도 한 혈통이라는 강점을 최대한 살려서 결속을 유지했다.
정보가 돈이다!
두 번째로 국경을 넘나드는 빠른 정보력이다. 남보다 빠른 정보는 막대한 투기이익으로 연결된다. 당시 로스차일드 집안은 영국과 프랑스를 가로막는 도버 해협에 자가용 쾌속선을 여러 척 대기시켰는데, 이 로스차일드 집안 전용 파발마는 어느 파발마보다 빨리 달리면서 전 유럽을 누비고 다니는 독자적인 정보망을 구축했다. 마이어는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정보를 전달하는 편지에도 이디시어와 암호를 조합한 것을 사용했다. 300년 전부터 이미 로스차일드 집안은 정보가 돈을 낳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세 번째는 뛰어난 정보분석력이다. 로스차일드 집안이 융자를 제공할 때는 사전에 당시 유럽의 정치정세를 분석한 정보를 토대로 엄밀하게 독자적으로 치밀하게 조사하여 변제능력을 철저하게 검증했다. 특히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격동의 유럽에서는 정치정세의 분석이 생존의 관건이었다. 다른 은행들이 격변하는 시대의 물결 속으로 사라져가는 가운데, 로스차일드 집안은 다섯 아들들이 서로 정보망을 치고 분석하는 로스차일드 시스템을 탄생시켰다. 유대 상인을 대표하는 로스차일드 집안의 역사는 유럽에서 유대인 박해의 역사와 그대로 겹치고 있지만, 어떤 박해 속에서도 로스차일드 집안은 유대교를 끝까지 지키며 유대인의 자긍심을 버리지 않았다. 박해를 받아도 몇 번이고 다시 일어서는, 유대인 특유의 알 수 없는 힘이 일가의 강인한 결속을 지탱했다고 할 수 있다. 로스차일드 집안의 창시자인 마이어는, 임종의 자리에서 자녀들에게 스키타이(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 흑해 북안에 건설되었던 강대한 유목국가) 왕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스키타이 왕이 죽음을 맞이했을 때, 자녀들을 불러 눈앞에 묶어 놓은 화살다발을 내밀며 자녀들에게 그 다발을 꺾어보라고 명령했지만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러자 왕은 함께 묶여 있던 화살을 하나하나 풀어서 하나씩 꺾어보였다. 그런 다음 자녀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이 화살다발처럼 하나로 뭉치면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나 만약 결속이 무너지면 그 힘을 잃고 번영도 사라질 것이다." 21세기의 오늘날에도, 런던시티에 있는 로스차일드 집안의 은행에는 일가의 결속을 나타내는 '다섯 개의 화살'이 그려진 방패가 장식되어 그 일가의 번성을 나타내고 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전세계에 이름을 떨치며, 세상에 크나큰 영향을 끼친 세계 최대재벌이 되었다. 그 가문은 창업한 지 약 3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번영이 계속되고 있다. 지금의 로스차일드 집안은 로스차일드 은행을 비롯하여, 다이아몬드의 드 비어스, 석유의 로열 더치 셸, 홍차의 립톤 등의 재정에 관여하고 있으며 와인, 호텔, 백화점 경영에도 진출하여 그 명성과 세력은 견고하기 이를 데 없다.
로스차일드 주식투자의 비결
마이어의 셋째 아들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영국으로 건너가 솜털실담배설탕 등의 상품 거래에 손을 대어 잠깐 동안에 큰 부를 쌓았다. 이 전설적인 사나이는 겨우 몇 시간의 주식 매매로 그때 돈으로 수백만 파운드라는 천문학적 벌이를 했다. 그리고 여느때처럼 거기에는 큰 비밀이 있었다. 1815년 6월 20일, 런던 증권거래소에는 아침부터 긴장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사람들은 몇 번이고 '로스차일드의 기둥'을 보았다. 일약 명사가 된 네이선 로스차일드가 주식을 팔고 살 때 늘 기대어 있는 기둥을 사람들은 '로스차일드의 기둥'이라고 불렀다. 전날인 6월 19일, 대영제국과 프랑스 사이에서는 두 나라의 명운을 건 워털루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영국이 이 싸움에서 이기면 영국 공채는 폭등하고, 만일 나폴레옹이 이기면 영국 공채는 폭락한다. 증권거래소에서는 모두 숨을 죽이고 승패의 뉴스를 기다렸다. 남보다 한 순간이라도 빨리 결과를 알게 되면 확실하게 돈을 벌 수 있다. 이때는 무선도 철도도 없었고, 겨우 일부에서 증기선이 쓰이고 있었다. 벨기에 수도 브뤼셀 남쪽에서 벌어진 워털루싸움의 뉴스도 말을 사용한 파발꾼으로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워털루싸움에 앞서서 벌어진 전투에서는 영국군이 패했고 이번에도 형세는 매우 나쁘다는 소식이었다. 그런데 네이선은 로스차일드의 기둥에 기대어 천천히 영국 공채를 팔기 시작했다. "제1작전! 네이선(로스차일드)이 팔았다!" 뉴스가 거래소 안에 일제히 퍼졌다. 주는 매도세다! 영국군이 패했다! 추종자들이 뒤따랐다. 영국 공채는 대뜸 크게 폭락했다. 네이선은 더욱 투매를 계속했다. 네이선의 둥그마한 얼굴은 여느때처럼 무표정했다. 그의 손가락이 팔라는 신호를 보낼 때마다 주가는 뚝뚝 폭락했다. 그리하여 값이 극한까지 폭락하여 마지막 한계선까지 내린 순간, 네이선의 손가락은 별안간 바뀌어 대량 매입 신호를 되풀이했다. 한순간, 거래소는 숨을 죽였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시세차 따먹기인가 추종자들이 조심조심 뒤따랐다. 네이선은 사고 또 샀다. 대폭락한 공채를 바닥값으로 마구 사들였다. 아무래도 단순한 시세차 따먹기는 아닌 모양 같았다. 사람들이 눈치를 챈 것과 거의 동시에 정부 소식통에서 '워털루전투 영국군 대승리'라는 뉴스가 거래소에 들어왔다. 공채는 대뜸 폭등이 계속되었다. 네이선은 이 모양을 로스차일드의 기둥에 기댄 채 태연히 구경하고 있었다. 그는 묵묵히 기둥에 기대고만 있었다. 큰 도박을 한 뒤의 승리감을 맛보고 있으면 되었다. 젖은 손바닥을 통해 큰 돈이 연거푸 호주머니 속으로 굴러들었다. 만일 영국이 워털루싸움에서 패했더라면 네이선은 한푼 없는 빈털터리가 되었으리라. 분명히 네이선은 큰 도박을 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큰 도박이라기보다는 로스차일드 일족 특유의 어마어마한 계산의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네이선에게는 큰 도박이라기보다는 냉정한 계산에 의한 승리였다. 워털루싸움에서 이기면 공채는 폭등하고 패하면 폭락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영국 정부측의 정보를 한시라도 빨리 손에 넣으려고 다투었다. 다만 네이선 혼자만 달랐다. 그는 정부를 앞지를 생각이었다. 이것이 네이선의 비범한 점이다. 그는 영국 정부보다 빨리 전황을 알기 위해 정보 네트워크를 자기 스스로 만들어 놓았다. 마이어의 다섯 아들들이 유럽 각국으로 흩어진 시기부터 로스차일드 가문은 빈번히 정보를 교환했다. 장사에 관한 일부터 세상 일반의 관심사까지 로스차일드들은 서로 정보를 교환했다. 그것이 변혁과 동란의 시대에 유대 출신 일족의 안전과 번영을 지키기 위한 명줄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에도 정보는 명줄이었다. 정보는 곧 돈이었다. 정보 교환이 빈번해짐에 따라 파발꾼에만 의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 일족은 유럽 전역에 걸쳐서 빠르고, 안전하고, 믿을 수 있는 자기들만의 정보 네트워크를 만들어 놓았다. 로스차일드 집안의 마차는 큰길을 전속력으로 달렸고, 어떤 악천후에도 그들의 전용 범선(帆船)은 출범했다. 로스차일드 정보 시스템은 해마다 정비되고 충실해졌다. 이 정보 시스템은 지금까지의 역전(驛傳)우편을 훨씬 능가하는 기동성을 갖고 있었고 영국 정부의 정보망조차도 능가했다. 로스차일드의 파발꾼은 현금증권류편지 그 밖의 뉴스를 휴대하고 유럽 각지를 달렸다.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네이선은 로스차일드의 정보 시스템에 다소의 손질을 해서 영국 정부보다 몇 시간 앞서 워털루싸움의 승리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6월 19일 밤, 네이선 정보기관의 한 사람이 영국군의 승리를 전한 네덜란드의 신문 속보판을 입수했다. 그는 네덜란드의 항구에서 특별히 세낸 쾌속선을 타고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의 포크스턴 항구에 닿아 기다리고 있는 네이선에게 그 신문을 넘겼다. 영국군의 승리를 전하는 톱 뉴스 몇 줄을 본 네이선은 곧 런던으로 전력을 다해 마차를 몰았다. 네이선은 곧 증권거래소에 갔으나 거기서도 그는 특이한 상업적 재주를 발휘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곧 영국 공채를 사러 달려갔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한 재산을 벌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아무도 영국군의 승리를 모른다는 것을 눈치챈 네이선은 함정을 팠다. 먼저 공채를 팔자고 내놓은 것이다. 팔고 팔아 마구 판 뒤, 서서히 영국군이 승리한 정보가 들어오기 직전에 사들이기 시작했다. 값을 폭락시키고 바닥값에서 샀다. 대폭락시키는 함정을 파 놓음으로써 네이선은 처음부터 사는 경우의 몇 배나 되는 돈을 번 것이다. 네이선은 큰 도박을 건 게 아니었다. 냉엄하게 계산한 결과였다. 큰 연극을 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동업자의 누구 한 사람도 정부를 능가해서 전황 뉴스를 입수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또한 이를 경쟁할 사람도 없었다. 단지 네이선만이 할 수 있었다.
반유대주의를 물리친 '부드러운 교섭'
철혈 재상 메테르니히의 오스트리아는 완고하고 강력하게 반유대주의를 취하고 있었다. 유대인은 토지 소유는 물론 금지되었고, 정부법원의 직원이 될 수 없었고 변호사가 되는 것도 금지되었다. 결혼할 때도 특별한 허가를 얻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세기 초가 되어서도 오스트리아는 최악의 반유대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재정난에 처한 오스트리아는 점차 로스차일드 집안에게 공채 발행이나 군사비 조달을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때가 되었다고 본 로스차일드는 둘째아들 잘로몬을 오스트리아에 보냈다. 반유대 풍조가 심한 오스트리아에는 상냥하고 부드러우며 자세가 겸손한 잘로몬이 적격이었다. 셋째아들 네이선을 보내는 것은 너무 앞뒤를 생각지 않은 일 같았다. 다섯째아들 제임스는 너무 멋쟁이어서 도리어 위험했다. 그런 점에서 잘로몬은 틀림이 없었다. 그는 유연한 교섭자였다. 딱딱한 교섭 자리도 그와 대화를 나누면 대뜸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는 하찮은 교섭 테크닉보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기술 쪽이 훨씬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잘로몬을 만나면 누구나 자존심을 버리고 금방 그의 팬이 되어버렸다. 오스트리아 이주(移住)에 있어서도 잘로몬은 과연 교묘한 작전을 세웠다. 그는 언제나 부드러운 방법을 앞세웠다. 처음부터 중앙 돌파를 하는 무리한 수단 따위는 결코 취하지 않았다. 그러한 수단은 오히려 반유대 풍조의 불에 기름을 부을 뿐이며 곧 자기에게 공격으로 돌아온다.
"우물에 침을 뱉는 사람은 언젠가는 그 물을 마시지 않으면 안 된다." 로스차일드 유훈
잘로몬은 부드럽게 움직였다. 로스차일드 집안을 일으킨 프랑크푸르트 게토에서 다른 고장으로 옮길 예정임을 오스트리아 고관에게 귀띔했다. 극비 뉴스는 금방 오스트리아 정부를 움직였고, 로스차일드 가문에 대해 특별히 관대한 이주 허가가 나왔다. 오스트리아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이주에 수반되는 막대한 세금과 파급 효과에 굴복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정부의 기대에 반하여, 빈에 옮겨온 사람은 잘로몬 단 한 사람뿐이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속임수에 넘어간 셈이었다. 한편 잘로몬은 그 사태를 봉합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국채 공모를 청부받았다. 게다가 이 국채는 단순한 국채가 아니었다. 잘로몬은 복권부라는 독창적인 국채를 고안해 냈다. 반유대 감정이 뿌리 깊은 오스트리아 민중은 높은 이율이나 복권형식의 국채에 격노하고 판매금지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잘로몬은 이번에도 부드럽게 움직여 이 반대를 진정시켰다. 신문을 통하여 절약을 권장하고 투자를 장려했다. 모든 것은 잘로몬의 생각대로였다. 복권부라는 대중의 사행심을 부채질한 방법과 로스차일드의 이름이 부합되어 국채는 폭등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만족하고 국채를 구입한 대중도 이익을 얻었지만, 누구보다도 큰 벌이를 한 사람은 수수료 이외에 국채값 폭등에 의한 엄청난 프리미엄을 얻은 잘로몬이었다.
"돈으로 열리지 않는 문은 없다." 로스차일드 유훈 이리하여 아주 부드럽게 반유대 감정이 뿌리 깊은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기반을 쌓았고, 이윽고 그는 빈의 명예시민이 된다. 잘로몬은 그 교묘한 프로젝트 수행 능력, 사회 교섭술을 더욱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사건과 만나게 되었다. 그것은 악마의 강철기계 사건이다. 스티븐슨이 증기기관을 발명하자 영국에서는 철도의 장래성이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무렵 철도사업이란 미친 짓이며 네이선 같은 사람도 마차보다 나은 수송 수단은 없다고 믿고 있었다. 네이선의 예상과는 반대로 영국에서는 철도가 순조롭게 발전해서 그 장래성이 확실해졌다. 그러나 벌써 그때는 네이선이 영국 철도에 손내밀 기회를 잃은 상태였다. 네이선에게 정보를 얻은 잘로몬은 즉시 이 아이디어를 검토했다. 그러나 무슨 일에 대해서도 보수적인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말 없는 탈것' 이야기는 엉터리 정보라 보고 있었다. 철도 소문을 들은 일이 있는 지식층도 철도는 악마의 강철기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철도사업을 추진하려면 세상의 몰매를 맞을 것은 뻔한 일이었다. 더욱이 유대인이 하려 하다니. 잘로몬은 조용히 진행시켰다. 영국에 조사단을 파견하고 철도사업을 기술면금융면에서 검토시켰다. 운수사업에 침투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여러곳의 역마차 사업을 매수했다. 운송 노선 예정지들을 도보로 조사시켰다. 한편 신문에 철도에 관한 계몽기사를 계속 연재했다. 이와 같이 5년 동안의 신중한 준비 기간을 거쳐 잘로몬은 오스트리아 황제 페르디난트 1세에게 빈에서 보호냐까지 100킬로미터에 걸친 유럽 대륙 최고의 대규모 철도건설 사업을 신청했다. 이미 메테르니히 재상에게는 충분히 사전 교섭을 했으므로 잘로몬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황제로부터 면허를 획득했다. 그러나 계획이 발표되자 잘로몬에게 심각한 비난이 쏟아졌다. 빈의 신문들은 잘로몬의 반대편에 섰다. 이것은 이제까지의 신중한 준비를 파산으로 전락시킬 것 같았다. 빈의 신문들에는 의사와 전문가들의 투고가 계속되었다. "인간의 육체는 시속 24 이상에는 견딜 수 없다. 악마의 강철기계가 오스트리아를 달리게 되면 승객의 코와 눈, 입, 귀에서 피가 터져나올 것이다. 터널에서는 승객들이 질식할 것이다. 철도는 흉폭한 영구차로 변할 것이다." 의사들은 주장했다. 정신병의 권위자들도 경고했다. "지금처럼 스트레스가 많은 사회에서 인간은 이미 정신적으로 과로상태이다. 더구나 철도에 승차하여 긴장하면 인간은 완전히 발광하고 말 것이다." 악마의 기계로 신성한 제국을 오염시키지 말라! 유대인의 음모를 분쇄하자! 잘로몬은 그야말로 사면초가였다. 잘로몬은 평소부터 신문기자들과의 교우관계에 노력해 왔으나 여론의 거센 반대에는 돌파구를 찾기 어려웠다. 더 큰 문제는 오스트리아 금융업자들이 외국인의 철도투자는 위험하다고 강조하면서 잘로몬을 적대시하는 일이었다. 잘로몬은 메테르니히 재상은 물론 오스트리아 정부의 고위층과도 친밀한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한번에 중앙돌파하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또 5남인 제임스가 프랑스에서 성공한 것처럼 반대세력을 매수하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프랑스에서 철도사업을 시작했을 때, 제임스는 반대파의 주요인물 ―― 신문기자, 의사, 각료, 지방의 반대파 유력자들 ―― 들을 철저하게 매수했다. 인색한 매수가 아니었다. 로스차일드 가문과 권위에 알맞는 대규모적인 매수 공작이었다. 업계의 3류 신문들은 돌연 경제력이 풍부해지는 사태까지 속출할 정도였다. 제임스가 프랑스에서 시도한 바와 같은 매수공작과 건설 강행으로 중앙 돌파를 성공시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잘로몬의 방법은 달랐다. 딱딱한 전술을 취하면 반드시 딱딱한 반응이 되돌아온다. 그것은 비경제적이다. 잘로몬은 항상 부드러운 전술을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반드시 부드러운 방법으로 타개하는 길이 있다. 유대인이 살아나온 것은 돈의 권력때문이 아니라 위기를 참고 견디는 지혜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혜를 활용하면 반드시 길은 열리게 마련이다. 잘로몬은 먼저 부드러운 방법으로 여론의 반대에 대처하였다. 주식의 인기를 부추기는 일이다. 그는 철도건설 자금을 충당하기 위하여 주식을 1만 2000주 발행하여, 8000주를 로스차일드 집안이 보유하고, 나머지 4000주를 선착순으로 모집하였다. 잘로몬의 계산대로 철도에 반대하던 자들도 막상 로스차일드 집안이 나섰다고 하니까 서로 앞다투어 신청하였다. 잘로몬의 철도건설에 반대하던 금융업자들도 몰려들어 응모하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4000주의 공모에 8배 가까운 신청이 쇄도하였다.
"금화가 소리를 내면 욕설은 조용해진다." 로스차일드 유훈 이 대성공의 그늘에는 은밀히 잘로몬의 눈에 보이지 않은 황금의 손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꼭두각시를 써서 응모하게 함으로써, 주식의 인기를 최대한으로 부추겨 올렸다. 물론 세상은 이같은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 성공으로 반대운동은 약간 수그러들었지만 그 힘은 아직 가볍게 보기 어려웠다. 교섭의 천재 잘로몬은 절묘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오스트리아 황제를 받들어모시기로 한 것이다. 그 방법은 황제의 허영심을 부추기면서 세상에 대한 정서적 설득 효과도 만점이었다. 그는 황제에게 빈―보호냐철도의 정식명칭을 '페르디난트 황제 북방철도'로 하는 허가를 얻었다. 이것이 역전의 아이디어가 되었다. 유럽 최초, 최대 철도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면 자신의 이름은 영원한 것이 된다. 지도, 역, 차량마다 모두 페르디난트 황제의 명칭이 붙는 것이다. 황제 이하 모두 잘로몬에게 감복했다. 잘로몬은 정성을 다했다. 추밀원의장과 재상에게는 이 국가적 사업의 후계자가 될 것을 의뢰하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 철도 표지판과 서류에는 항상 두 사람의 이름을 올려놓을 것을 제안했다. 또한 메테르니히에 대해서는 철도의 명예보호관에 취임하도록 의뢰하였다. 마술 같은 효과를 가져왔다. '페르디난트 황제 북방철도'라는 명칭은 마치 로스차일드 집안의 철도에서 오스트리아제국의 철도가 된 듯한 인상을 주었다. 아무도 이 황제의 명칭을 받드는 철도건설에 반대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잘로몬은 부드러운 접근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4년 뒤 철도 일부가 개통되고, 오스트리아는 당당하게 유럽 다른 어떤 제국보다 앞선 명예를 누릴 수 있었다.
돈으로 나라까지 세웠다!
가난한 아빠 로스차일드가 기적을 일으킨 최초의 장소는 비참한 거지굴 같은 게토. 부자아들 암셸, 잘로몬, 네이선, 카를, 제임스 다섯이 기적을 일으킨 장소는 유럽! 아빠는 가난했으나 아들은 부자가 되었다. 이들은 세계의 경제사 속에 지금까지 살아있다. 거지굴 같은 게토 고물가게에서 환전상을 일으켜 기적의 금융역사를 창조한 사나이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 그의 다섯 아들은 다섯 개의 화살이 되어 프랑크푸르트, 런던, 파리, 빈, 나폴리에서 막대한 부를 쌓아가며 세계를 움켜쥔다. 그리고 마침내 로스차일드는 돈으로 2천년의 한(恨)을 풀어 유대민족의 꿈인 이스라엘 건국의 주춧돌을 놓는다. 그 비결은 무엇인가. 이 책은 성공하기 위한 단순한 이론서가 아니다. 250년의 경험과 독특한 생활철학이 만든 본격적인 경제 생활서라 할 수 있다. 고통과 영광의 신화를 생생하게 재현한「가난한 아빠 부자 아들」은 한 편의 다큐드라마이며 실사에 가까운 고증, 유대 그리고 유럽의 리얼한 역사가 장편소설처럼 재미있게 펼쳐진다. 나라도 없이 처참한 난민 생활로 떠돌던 유대인에게 자신들을 살릴 무기는 오로지 ‘돈’이었다. 자본의 힘은 멸시와 천대를 받던 로스차일드 가족들을 귀족 상류 사회, 엘리트 집단과의 교류를 가능하게 하였고, 머리 좋은 그들은 그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게토에서 시작한 가난한 아빠 로스차일드의 환전상은 다섯 아들의 활동을 통해 금융왕국의 꿈을 실현하게 된 것이다. 이 유대 가족은 250년이 지난 오늘날 석유·다이아몬드·금·우라늄·와인·레저·백화점·국제금융 등 세계곳곳에서 다국적 거대사업을 무섭게 펼쳐 그 괴력은 세계경제는 물론 정치·문화에까지 엄청난 힘을 떨치고 있다. 한때 부와 권력을 거머쥐었던 사람들은 그 시대와 함께 전쟁·혁명·공황의 골짜기로 사라져 갔지만 로스차일드만은 격력한 사회변동위기를 역전의 발상으로 이겨내며 살아남아 한국 IMF까지 손을 뻗고 있다. 이 기적같은 놀라운 장대한 다큐드라마에서 우리는 인간을 배우고 돈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로스차일드가 극복해온 ‘시련과 역전의 역사’는 21세기 새 밀리니엄을 맞아 급변의 시대를 헤쳐나갈 한국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출처:http://blog.naver.com/cjseong123/60041206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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