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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대세 흐름 읽기/수수께끼*미스테리

네오콘[Neocon]

by 바로요거 2008. 6. 19.
 
네오콘[Neocon] : 미국 공화당을 중심으로 한 신(新)보수주의자.
 
신보수주의자를 뜻하는 '네오콘서버티브(neoconservative)'의 줄임말이다. 대부분 미국 동부의 명문 대학교를 나온 엘리트 유대인들이다. 지연과 혈연, 학연 등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이들은 미국의 국무부와 국방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대통령비서실 등 권력의 중심부와 학계 및 언론계까지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이들은 대부분 1960년대 좌파 민주당원으로 활동하다가 베트남 전쟁과 중동의 6일전쟁(1967. 6. 5~10)을 계기로 공화당으로 전향했다. 도덕적 우월주의를 바탕으로 미국 제일주의를 내세우는 이들은 정치철학자 레오 스트라우스에 사상적 뿌리를 둔다. '서방 민주주의 국가들이 냉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막강한 군사력뿐'이라고 주장한 스트라우스의 말에 따라 잠재적 적이나 경쟁국에 대해서는 필요에 따라 선제공격도 불사한다. 따라서 이들을 일컬어 '매파 중의 매파'라고도 한다.
이들은 클린턴 행정부로부터 배척당하였으나, 부시 행정부에서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특히 9·11 미국 테러 사건 이후로는 실질적으로 부시 행정부의 외교정책과 군사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제2차 페르시아 만 전쟁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신보수주의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신보수주의(新保守主義,영어: Neo-Conservatism) 70년대에 생겨나서 8-90년대를 거쳐 현재까지 미국의 정계에서 많은 이들의 지지를 얻고 있는 정치조류이다. 속칭 네오콘((영어: Neocon)이라고도 한다. 대체로 힘의 논리를 중시하고 신자유주의를 지지한다. 대표적인 신보수주의자로는 로널드 레이건, 조지 W. 부시, 도널드 럼스펠드 등이 있다. 현재 미국에서의 네오콘이라고 불리는 세력은 중산층 마거릿 대처의 신보수주의와 말은 같지만 의미가 다른 경우가 있다. 그들은 제1기 레이건정권에서 대두되어 주로 외교나 군사분야에서 강한 영향력을 갖었다. 레이건대통령은 네오콘의 진 커크패트릭을 외교고문으로 지명하였다.

Neo-conservatism을 직역해서 신보수주의라는 말을 쓰고있지만 이 말은 형용모순이다. 또한 미국에서는 미디어나 민주당 등이 멸칭하는 의미로 Neocon(네오콘)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네오콘은 자유주의,민주주의를 세계에 널리 퍼뜨리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군사정책 및 외교정책에 있어서 신현실주의노선을 취한다. 또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인류보편의 가치관이라고 생각하여 계몽에 힘쓰고 있다. 그리고 핵전략에 대해서 앨버트 월스테터(Albert Wohlstetter)에게 많은 영향을 받고있다.

 

매파 [The hawks]
대외 정책에서 자신들의 이념이자 주장을 고수하며 타협하지 않는 대외 강경론자 또는 주전파(主戰派).
특히 외교정책 등에서 무력 사용도 불사하겠다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1810년대 미국의 정치 상황에서 상대방과 타협하지 않고 강경히 사태에 대처하려는 팽창주의자들을 매의 공격성에 빗대어 부른 데서 유래했다. 그 무렵 미국은 나폴레옹 전쟁 중에 영국이 취한 해상 봉쇄 조처로 자국의 무역이 방해 받고 있는 것에 대해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헨리 클레이와 존 C. 컬훈, 윌리엄 H. 해리슨, 앤드루 잭슨, 윈필드 스콧 등 남부와 서부 출신들로 구성된 매파가 영국과의 전쟁을 선동했다. 여기에는 영국과의 전쟁을 통해 그 무렵 영국의 동맹국으로서 플로리다를 점령하고 있었던 스페인을 몰아내려는 속셈도 포함되어 있었다. 매파는 미국연방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회의 대세를 장악함으로써 1812년 제임스 매디슨 대통령으로 하여금 영국과의 전쟁을 선포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매파라는 용어는 베트남 전쟁이 장기화되다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면서 온건파인 비둘기파에 대응하여 다시 퍼지기 시작했다. 매파인 미국 공화당은 베트남 전쟁의 확대·강화를 주장하였으며, 비둘기파인 미국 민주당은 전쟁의 조속한 종결을 주장하여 대립했다. 이후 매파는 보수강경파를 지칭하는 용어로 일반화되었다. 2003년 제2차 페르시아 만 전쟁을 일으킨 미국의 부시 행정부를 네오콘(Neoconservative:신보수주의자)이라고 부르며 '매파 중의 매파'로 규정하기도 한다.
 

레오 스트라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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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스트라우스(Leo Strauss 1899년 9월 20일~1973년 10월 18일)는 미국에 크게 영향을 끼친 독일 태생의 유대계 미국 정치 철학자이다. 미국 신보수주의의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편집] 생애

레오 스트라우스는 독일 헤센 주마르부르크 부근의 키르크하인이라는 소도시에서 태어났다. 1912년, 김나지움에 입학하여 아르투르 쇼펜하우어프리드리히 니체의 책을 접하였고, 유대인으로서 정치적 시오니즘에 경도된 적이 있었다. 1917년에 김나지움을 졸업한 그는 대학에 입학하여 철학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 발발으로 군에 징집되어, 종전때까지 군에 복무하게 된다. 종전 후 스트라우스는 함부르크 대학에 입학했으며 1921년에는 〈F. H 야코비의 철학적 독트린의 인식론〉이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 그의 지도교수는 에른스트 카시러였다. 그는 프라이부르크와 마르부르크 대학에서도 수업을 들었고, 거기서 그는 에드문트 후설과 그의 제자인 마르틴 하이데거에게서 철학을 배웠다.

1933년파리에서 이혼 경력이 있는 독일계 유대인 마리 베른존과 결혼한 후, 1934년에는 영국 런던으로 이주하여 대영박물관에서 홉스를 연구하였다. 1935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강사 자리를 얻는다. 1936년에는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컬럼비아 대학의 사학과에서 연구직을 맡게 되었다. 1938년부터 1948년까지 그는 사회학 연구를 위한 뉴 스쿨(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에서 정치학을 강의했다. 그러나 미국으로 이주한 스트라우스와는 달리, 당시 독일에 남아있던 친척들은 집단수용소에서 사망했다. 그는 1944년에 미국 시민권을 얻었으며 1949년부터 1968년까지는 시카고 대학에서 정치철학 교수로 재직했다. 시카고 대학교를 퇴직 후, 1973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편집] 철학

스트라우스는 그의 영역을 정치철학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규정은 철학은 선험적으로 정치적이라는 것을 믿으며 고전적인 철학적 이상을 따르는 스트라우스와 같은 이의 눈에는 사실상 동어반복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 같다. 이는 무엇보다도 모든 철학은 인간을 정치적인 것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바라본다는 점 때문이다.

철학의 이러한 본성 때문에 스트라우스는 실증주의 즉 좀 더 일반적으로는 가치와 사실, 과학과 도덕과 같은 것들을 구별하려는 시도가 틀렸을 뿐만 아니라 해롭다고 여기는 입장에 서게 된다. 간단히 말해 사실은 가치와 구별될 수 없다. 그것들 모두는 정치적 인간에게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철학의 역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모멘트들 가운데 하나가 그들이 가진 인간 본성(아리스토텔레스의 그 유명한 말, ‘인간의 정치적 동물이다’)에 대한 고려 없이 자연을 연구하지 못했던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이뤄진 논의라고 본다.

스트라우스의 학술적-철학적 작업은 고전 철학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는 철학적 연구의 근거를 확고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 돌아감은 탈근대주의자들의 급진적 이성 비판에 의해서 필요하게 된 것이었고, 스트라우스는 특히 하이데거를 그의 작업에서 염두에 둔 것 같다. 하이데거와 스트라우스는 흔들리지 않는 제1 원리 위에 체계를 세우는 것을 연구의 목표로 삼는 근대 철학의 경향이 매우 미숙한 것이었다는 점, 그리고 이것은 인간이 활용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인 인간 경험을 무시하는 경향을 가져왔다는 점에 대하여 논쟁했다. 스트라우스는 고전 철학으로의 회귀와 인간 경험에 기초를 둔 철학을 지향한 소크라테스가 추구했던 원리들을 추구했다; 반면 하이데거는 이성적 기획은 숙명이며 이것의 부패는 이 세계로의 새로운 신의 출현을 가져올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고대와 근대 정치철학의 근본적인 차이를 인식하는 것은 스트라우스의 작업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테마이다.


스트라우스 작업의 두 번째 테마는 이성과 비의(秘意, revelation)사이의 이분법과 양자 사이의 참을 선언하기 위한 경쟁이다. 스트라우스는 종교는 인민의 삶을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게 하기 위한 철학과 경쟁적인 원리의 체계이며 따라서 그것들은 정치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고전 정치철학의 연구를 되살리기 위한 그의 작업은 종교와 철학 사이의 논쟁과 연관되어있다. 그는 근대 정치철학과 이것의 인간 본성에 대한 환원주의는 종교에 대항하는 의미있는 대안을 제시하는데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근대 과학은 반면에 인류의 힘을 증가시켰고 물리적으로 편안하게 만들었지만 인류의 선을 증가시키는 것과는 직접적 연관은 없었다. 따라서 고전 정치철학으로의 회귀가 요구되고 있다고 스트라우스는 주장한다.

스트라우스에 의한 인간 본성의 재이해는 근대 정치학에 대한 매우 특징적인 비판에 대한 기여를 보여준다. 특히 다음과 같은 주제들에서 말이다. 상대주의, 역사주의, 인류평등주의, 자유주의, 근대 민주주의. 고전 정치철학은 이 물음에 대한 질문을 항상 추구하고 있었다고 스트라우스는 말한다: 무엇이 인간의 삶을 위하여 가장 좋은 방법인가? 그러나 근대 정치철학은 필수적인 하부구조 - 자족과 안락 - 위의 정치적 삶(답을 내는 것이 불가능한)의 건설을 전제하고 있다. 근대 자유주의는 개인적 자유를 그것의 가장 높은 목표로서 추구할 것을 강조하며, 반면에 가장 중요한 질문인 삶을 살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버린다. 자유가 정치적 삶의 가장 높은 지점이라는 점을 가정하는 것은 명백하게 상대주의적 가정 즉 인간의 훌륭한 삶은 모든 종류의 삶이라는 점을 가정하는 것이며, 이는 니힐리즘으로 인간을 이끌게 된다고 스트라우스는 논증한다. 따라서 그의 저작에서 그는 끝없이 자유와 훌륭함이 함께 존재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묻게 되는 것이다. 그에 대해 흔히 가해지는 비난처럼 그는 소크라테스의 이 질문에 대해 일방적인 결론을 내리려 드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이 도시와 인간을 위해 선한 것인가?”

[편집] 스트라우스 학파와 신보수주의

[편집] 스트라우스의 저작

  • 《스피노자의 종교비판》Spinoza’s Critique of Religion, 1965.
  • 《박해와 저술기법》Persecution and the Art of Writing, 1952.
  • 《자연권과 역사》Natural Right and History, 1953.
  • 《마키아벨리》Thoughts on Machiavelli, 1958.
  • 《정치철학이란 무엇인가》What is Political Philosophy?, 1959.
  • 《서양정치 철학사》History of Political Philosophy, 조셉 크랍시와 공저, 1987.
  •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파네스》Socrates and Aristophanes, 1966.
  • 《플라톤의 정치철학연구》Studies in Platonic Political Philosophy


딕 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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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 체니
딕 체니
미국 제46대 부통령
대통령 조지 W. 부시
재임 기간 2001년, 1월 20일 -
전임 부통령 앨버트 A. 고어
후임 부통령 -
태어난 곳 네브래스카 주 링컨
사망한 곳 -
소속 정당 공화당
서명 (싸인)
배우자 린 체니

리처드 브루스 체이니(Richard Bruce Cheney, 1941년 1월 30일~ )는 미국 공화당의 정치가이다. 딕 체이니, 딕 체니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현재 조지 W. 부시 대통령 아래의 부통령으로 있다.

그의 부인은 린 체니(Lynne Ann Vincent Cheney , 1941년 8월 14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