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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의 예언과 남대문 사건!
by 바로요거
2008. 5. 15.
정도전의 예언!
정도전의 예언과 남대문 사건!
'盧스트라다무스' 이어 이번에는 '정도전의 예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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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5월 05일 (월) 10:40:24 |
이정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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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정권에 대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예언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데 이어 이번에는 조선 건국의 기틀을 다졌던 삼봉 정도전(1342-1398)의 예언이 네티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숭례문이 전소되면 국운이 다한 것이니 한양 사람들은 도읍을 떠나 멀리 피난을 가야 하며 나라는 쇠망하고 그 이치는 만방으로 퍼질 것이다." 이것이 현재 인터넷을 통해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예언이다.
네티즌들은 1592년 임진왜란(숭례문 작은 화재), 1910년 한일합방(숭례문 현판 추락), 1950년 한국전쟁(숭례문 성곽 붕괴) 등 구체적 사례를 거론하며 2008년 숭례문 전소 이후 '광우병 파동', '독도문제', '인터넷종량제', '한반도대운하', '신공안정국' 등 민생을 도탄에 빠트릴 사건이 잇따르고 있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며 민심의 흉흉한 현주소를 말해주고 있다.
첫번째 사건: 선조 25년이었던 1592년 4월 한양 도성의 남문이었던 숭례문에서 작은 화재가 발생하였다. 비록 작은 화재였지만 조정과 한양백성들은 모두 흉조라며 근심걱정을 했다. 화재가 발생한 뒤 정확히 보름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일본의 20만 대군이 쳐들어왔다.
두번째 사건: 1910년 어느날 조선개국 이래 한번도 떨어진 적이 없었던 숭례문의 현판이 갑자기 바닥으로 떨어졌고, 흉조가 닥칠까 사람들은 전전긍긍해 했다. 이로부터 며칠뒤 대한제국은 일본에 의해 강제 합병되었고 우리 민족은 37년간의 일제라는 암흑의 구렁텅이로 떨어졌다.
세번째 사건: 1950년 따사로왔던 초여름 1392년 건설한 이래 한번도 붕괴가 없었던 숭례문 옆 성곽 일부가 붕괴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람들은 별 생각없이 성곽을 수리했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 갔지만 그로부터 몇일 뒤 십만의 사상자와 수백만의 이산가족을 만든 비참한 6.25 전쟁이 시작되었다.
네번째 사건: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 전후, 방화로 인한 화재가 발생하여 화재 5시간 만인 오전 1시 55분쯤 석축을 제외한 건물이 모두 붕괴되었다. 500여년을 버텨온 숭례문이 전소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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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예언'정도전은 누구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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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숙 기자 (csnews@csnews.co.kr) 2008-05-05 19:35: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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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의 예언으로 인터넷을 강타하고 있는 정도전은 과연 누구일까?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의 본관은 봉화(奉化)다. 봉화(奉化) 정씨(鄭氏)는 본래 향리 가문이었으나 정도전의 아버지인 정운경(鄭云敬·1305∼66) 대에 와서 과거에 급제해 양반 가문으로 발돋움했다. 운경은 형부상서까지 지낸 청렴결백한 관료였다. 정도전은 후일 역적으로 몰려 죽었기 때문에 기록이 부실해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1396년(태조 5) 명나라가 정도전을 압송해 보내라고 했을 때 나이가 55세가 되어 갈 수 없다고 한 것을 보아 1342년(충혜왕 복위 3)에 태어난 것으로 추산된다. 그의 출생지도 개경의 삼각산(三角山)과 단양(丹陽)의 삼봉이라는 설이 있을 뿐 정확한 장소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정도전은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독서를 좋아했다고 한다. 아버지인 운경이 경학의 대가인 이 곡(李穀)과 친했기 때문에 이 곡의 아들 이 색(李穡) 문하에서 공부할 수 있었고,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등 훌륭한 학자들과도 사귈 수 있었다.
정도전은 1360년(공민왕 9) 과거시험에 합격해 벼슬길에 나섰다. 그러나 그의 벼슬살이는 순탄하지 않았다. 공민왕이 신돈(辛旽)을 기용하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삼각산 옛집에 은거했으며 이듬해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잇따라 숨을 거둬 영주(榮州)에서 3년간 여묘(廬墓:상제가 무덤 근처에 여막을 짓고 살면서 무덤을 지키는 일) 생활을 하며 제자를 양성했다.
신돈이 제거된 후 성균박사에 기용됐으나 1374년(공민왕 24) 공민왕이 살해되면서 다시 정치적 파란을 겪는다. 그 때 정국은 친원파(親元派)와 친명파(親明派)가 대결하고 있었다. 정도전은 친명파에 속했다. 1375년(우왕 1) 원나라의 사신이 왔을 때 이인임(李仁任)은 정도전을 영접사로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정도전은 “내가 사신의 목을 베어 오거나 체포해 명나라로 보내겠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정도전은 나주 회진현(會津縣) 거평부곡(居平部曲)으로 9년간 귀양가게 되었다. 정도전이 정치적 회생의 기회를 잡은 것은 1383년(우왕 9) 함주(咸州)에 있던 이성계를 찾아가면서부터다. 혁명을 하기 위해 이성계의 군사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성계는 개혁을 주장하는 정도전에게 협력하기로 하고 지원을 약속했다.
이것이 조선 왕조 탄생의 전주곡이었다. 이후 정도전은 이성계의 후원을 받아 혁명을 위한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388년(우왕 14)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이후 작업에 더욱 가속이 붙었다.
이성계는 우왕과 창왕을 몰아내고 공양왕을 옹립했다. 그리고 토지개혁을 실시해 구귀족의 생활 기반을 빼앗아 신귀족에게 주었으며, 1392년(공양왕 4) 7월에는 고려 왕조를 멸망시키고 조선 왕조를 건국했다.
조선 왕조가 개창되자 정도전은 왕명을 받아 새 왕조의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17조의 ‘편민사목’을 만들어 발표했고 목은 이 색 등 반대파를 제거했다. 이후 이성계의 뜻에 따라 강비(康妃)의 아들인 방석(芳碩)을 세자로 삼았다. 이른바 조선 왕조의 설계자였던 셈이다.
정도전은 한양 천도에도 많은 역할을 했다. 경복궁 자리도 정도전이 잡은 것이다. 정도전은 풍수(風水)를 잘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무학(無學) 대사는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궁궐을 세워야 한다고 했으나 정도전은 반대했다. 그는 무학대사가 추천한 위치는 동향이며 터가 너무 좁아 왕도로 적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결국 정도전의 뜻대로 경복궁이 현재의 자리에 세워지게 되었다.
정도전은 1398년(태조 7) 8월26일 방원(芳遠)이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에 희생되어 숨을 거뒀다.
정도전의 죄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방석을 세자로 추대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세자를 보호하기 위해 이복형들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정도전은 역적으로 몰려 죽었기 때문에 조선 왕조 내내 신원되지 못했다. 그러다 고종 때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고 그 설계자인 정도전의 공을 인정해 1865년(고종 2) 그의 관직을 회복시켜 주었다.
정도전의 묘는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족보에는 경기도 광주(廣州) 사리현(士里峴)에 있다고 했으나 김정호의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 과천현조에는 과천 동쪽 18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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