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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꼭 알아야 할 유용하고 세상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차원 높은 정보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본 블로그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잘 간파하셔서 끊임없이
실시간 지구촌 개벽소식/5선위기의 한반도

이땅에 병란의 화는 또다시 닥쳐오는가?

by 바로요거 2008. 3. 19.
 
 휴전 협정 50년 만에 닥쳐온 한반도의 대전쟁 위기
 한민족사의 마지막 전쟁은 53년 전인 1950년에 발발했던 동족간의 처절한 싸움 6·25이다. 1백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며 만 3년을 끌었던 이 전쟁은 결국 승부를 결정짓지 못한 채 긴 휴전에 들어갔다. 그리고 강산이 변한다는 10년 세월을 다섯 번이나 보내고 드디어 2003년 7월 27일로 휴전협정 50주년을 맞이한다(증산 상제님께서는 한국전쟁 6·25를 상투를 맨 주인끼리의 씨름이라 하여 상씨름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아주 심상치 않은 국면으로 접어들며, 장차 이 땅에 또다시 병란(兵亂)의 화가 닥칠지도 모른다는 경고들이 나라 안팎에서 강도(强度)높게 들려오고 있다. 9·11테러 이후 조성된 지구촌의 전쟁 분위기, 부시의 3대 악의 축 발언, 그리고 작년 10월 돌연 국제사회에 터져나온 북한의 핵개발 선포 등이 한반도 위기설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후세인 다음 차례로 지목받는 북한의 김정일
 2001년 예상치 않은 9·11 테러의 수모를 당한 초대강국 미국은 자국의 안보에 위해가 되는 국가들은 반드시 손보기로 결심하고 이를 행동으로 옮기고 있다. 이미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독재정권이 미국과의 전쟁을 통해 사라졌다. 이제 부시행정부는 이라크 다음 타깃으로 북한 김정일 정권을 지목하고 있으며, 때마침 오랜 세월동안 혈맹 관계를 유지해왔던 한·미간의 거리는 가장 멀어져 있다.
 
 과연 후세인을 제거한 부시가 그보다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김정일을 그냥 놔둘 것인가? 후세인은 핵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김정일은 핵무기를 개발해왔다고 스스로 천명했다. 부시가 그런 김정일 정권을 상대로 평화적인 방법으로만 한반도 북핵사태를 해결한다고 보는 것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생각이 아닐까?
 
 이라크 전쟁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2003년 6월 들어 부시는 국제사회를 움직여 북한을 경제적으로 고사(枯死)시키는 작전에 들어갔다. 이를 김정일 제거작업을 위한 제1차적인 행보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아직도 평화가 지속되리라는 환상 속에 빠진 남쪽
 대전쟁의 위기가 긴박하게 닥쳐오고 있건만 정작 한반도 남쪽에 사는 사람들은 이를 피부적으로 느끼지 못하고 있다. 물론 전쟁의 위기를 소리 높여 외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아직도 50년이란 긴 세월동안 유지되어온 평화가 지속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리하여 오늘의 이러한 시대 상황을 두고 4백년 전 임진왜란이 터지지 직전의 국론분열 상황과 비슷하게 보는 목소리가 대두되고 있다.
 
 
 당시 당파 싸움에 휘말린 조선정부는 국방을 소홀히 했다
 16세기 말, 한반도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았다. 일본 전국을 통일한 풍신수길(豊臣秀吉)은 야심만만하게 조선에 사신을 보내 외교관계를 청한다. 그러나 외교문서 중에 오만 무례한 구절이 있다는 이유로 사신파견을 거절하자, 다시 교섭을 청하며 이에 응하지 않으면 침략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이에 조선 조정은 1590년 3월 황윤길(黃允吉,1536∼?)을 정사(正使), 김성일(金誠一,1538∼1593)을 부사(副使), 허성(許筬,1548∼1612)을 종사관(從事官)으로 하는 통신사를 보내 일본의 실정과 침략의 저의를 파악하여 오도록 한다.
 
 이들이 돌아온 것은 1년 뒤인 1591년 3월이었다. 당시 서인이었던 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을 준비하고 있어 반드시 병란의 화가 있을 것이며, 풍신수길은 안광이 빛나고 담략이 있어 보인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동인이었던 부사 김성일은 침략할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으며, 풍신수길은 사람됨이 서목(鼠目, 쥐눈)이라 가히 두려워 할 것 없다고 보고하였다.
 이들의 상반된 보고를 접한 조정 대신들은 의견이 분분하였다. 당시 동인과 서인의 정쟁(政爭)이 격화되어 있을 때라 사실 여하보다는 자기 당파의 사신을 비호하는 분위기가 팽배하였다. 마침 조정은 동인 세력이 득세하고 있을 때라 부사 김성일의 의견을 좇게 된다. 이에 조선이 왜의 침략에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는 동안, 일본의 침략계획은 점점 무르익어만 갔다.
 
 
 1592년 4월 13일, 드디어 왜적이 쳐들어오다
 일본은 오랜 내전 경험을 통래 병법과 무예를 익히고, 축성술과 해운술을 정비하였으며, 특히 서양에서 전래된 신무기인 조총(鳥銃)을 대량생산하면서 전쟁준비를 착착 진행시켜 나갔다. 그리고 드디어 1592년 임진壬辰년 4월, 20만 명의 대병을 배에 태워 조선 침략을 감행한다.
 
 왜장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이끄는 선봉대 제1진 1만 8천 700명이 쓰시마를 출발하여 부산 앞 바다에 도착한 것은 4월 13일 저녁 무렵이었다. 당시 부산진성에는 부산진첨절제사(釜山鎭僉節制使) 정발(鄭撥, 1553∼1592) 장군이 성(城)을 지키고 있었다.
 
 부산 앞바다에 도착한 13일 당일 왜군은 절영도 전방에서 가박(假泊)하며 공격을 개시하지 않았다. 다만 소서행장의 막료인 대마도주 종의지(宗義智)가 약간의 군사를 거느리고 상륙하여 부산진성의 경비상황을 정탐해 갔고, 뒤이어 휘하장수인 평조신(平調信)를 시켜 군의 내침 사유를 말하고는 길을 빌리는 가도(假道)를 요구하는 글을 목판에 써서 성밖에 세웠다. 하지만 정발 장군은 이에 응하지 않고, 일전을 불사한다는 굳은 결의를 하고 전투태세를 공고히 하였다.
 
 
 침략 둘째날 4월 14일, 부산진성이 함락되다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 14일 아침, 예측대로 적은 대대적으로 성을 공격하였다. 절대다수의 병력으로 첩첩으로 포위하고 신무기인 조총을 마구 발사하며 성을 넘어오려 하였다. 이에 아군은 이를 제지하기 위해 사면에서 혈전을 벌였다. 관군(官軍)과 성민(城民)은 적을 물리치지 않으면 모두 죽게 된다는 마음으로 분전하였고 정발 장군도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다가 무인답게 죽을 각오를 하고 병사를 격려하며 싸움을 이끌었다.
 
 하지만 노도같이 밀어닥치는 적군에 밀려 북쪽의 성이 뚫리자 순식간에 성은 혼란에 빠진다. 이에 피아(彼我) 쌍방(雙方) 간에 육박전이 전개되고 적의 무차별 살육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정발 장군은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고 소수 군민의 필사적인 저항으로는 어찌할 수 없어 성은 왜적에게 함락되고 만다. 이것이 이후 장장 7년을 끌었던 임진왜란의 첫 전투인 부산성 싸움이었다.
 
 부산성을 함락한 왜군은 전투가 끝나자 일부 병력을 동래성과 다대진으로 보낸다. 마침 동래성은 부산진성과 가까운 거리였고 부산진성의 행정관할은 동래부에 있었기 때문에 적군의 동태는 곧 동래에 알려졌다. 동래성에는 동래부사 천곡(泉谷) 송상현(宋象賢, 1551∼1592)이 지키고 있었다.
 
 
 침략 셋째날 4월 15일, 동래성과 다대진성이 함락되다
 
 송상현은 임진왜란이 터지기 1년 전에 동래로 부임해 왔다. 그는 백성을 다스리고 집무를 수행함에 있어 오직 성의와 신의로써 했고, 이에 관리와 백성들이 그를 따르기를 마치 부모와 같이 하였다고 한다.
 
 왜군의 침략과 부산진성의 함락 소식을 들은 그는 군비를 정비하며, 임전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경상좌병사 이각이 울산병영에서 동래부에 왔다가 적의 대군이 밀어닥친 것을 알고 도망치고, 경상좌도 좌수영의 수사인 박홍도 이미 부산포에 적이 닥치자 성을 버리고 달아난다. 다만 양산군수 조영구만이 동래성에 함께 해 있었다.
 
 14일 저녁 무렵 왜적은 농주산(弄珠山, 현 동래 경찰서) 취병장(聚兵場) 남문 밖에 ‘싸우고 싶거든 싸우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길을 빌려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我道)’라고 쓴 목패를 내걸고 투항을 유도했다. 그러자 송상현은 ‘싸워서 죽는 것은 쉬워도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라는 목패를 써서 결사항전의 뜻을 알렸다. 죽음을 초월하여 성(城)과 운명을 같이 할 결심을 굳게 한 것이다.
 
 15일 아침 마침내 왜적은 동, 서, 남 세 방향에서 성을 포위하여 조총을 난사하며 파죽지세로 공격해 왔다. 이에 동래부사 송상현의 지휘아래 민(民), 관(官), 군(軍)은 죽을힘을 다하여 항전했다. 그러나 중과부적(衆寡不敵), 막강한 적의 무차별 살육이 감행되며 성민들의 시체는 산을 이루고 피는 내를 이루는 가운데 결국 성은 함락되고 만다.
 
 한편 왜군은 군사를 나누어 14일 오후 다대진을 공격하니 다대첨사(多大僉使) 윤흥신(尹興信, ?∼1592)은 성문을 굳게 닫고 지켰다. 그러나 다음날 15일 적군이 또다시 공격해 오니 윤첨사와 성민(城民)들은 결사 항전하였으나 끝내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적장마저 감탄한 동래부사 송상현의 의로운 죽음
 
 동래성이 함락되던 그 날, 천곡 송상현의 의로운 죽음이 역사에 빛났다. 만일 그가 정발 장군같이 무관출신이었다면 최후의 일순까지 적과 싸우다 장렬한 전사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문관 출신인 그는 죽음마저 문관답게 맞이했다.
 
 성이 이미 함락되고 쓰러진 성민들의 시체를 밟고 피에 굶주리듯 왜적들이 밀려오자, 송상현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사람을 시켜 조복(朝服)을 가져오게 한다. 그리고 갑옷 위에 이를 입고, 투구를 벗고 사모를 쓴 뒤 두 손을 모으고 호상(胡床)위에 의연한 자세로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얼마 뒤 왜적이 들이 닥쳤는데 그 가운데 평조익(平調益)이란 자가 있었다. 그는 일찍이 통신사 평조신(平調信)을 따라 왕래할 때 송상현을 만난 일이 있고 후히 대접받은 일이 있었다. 그는 그 후의에 보답하고자 천곡에게 성 옆 빈터로 피하라고 권하였다.
 
 하지만 천곡은 한마디로 거절하고는 일어나서 전패(殿牌)를 모신 객사를 향하여 북향(北向) 사배(四拜)를 하였다. 그런 다음 부채 위에 “외로운 성은 달무리처럼 적에게 포위되었는데 다른 진영에서는 도와줄 기척이 없구나. 임금과 신하의 의리는 무겁고 부모와 자식의 정은 가벼우리.”라는 시를 써서 아버지께 보내게 하였다. 그리고 호상 위에 앉아 광분한 왜졸이 내리치는 칼을 맞아 죽임을 당하였다. 천곡이 죽자 그 뒤를 따라서 충직한 부하였던 신여로(申汝櫓)와 천곡의 첩 김섬(金蟾)도 자결하였다.
 
 이에 왜장 다이라는 천곡과 김섬의 굽히지 않는 절개에 감동하여 그를 죽인 왜졸을 찾아 죽여 버리고, 두 사람의 시신을 거두어 정중히 동문 밖에 장사를 지내 주었다.
 
 왜군이 송상현의 장사를 치러주고 난 후에 밤마다 붉은 기운이 하늘에 뻗쳐올라 수년동안 사라지지 않고 빛났다고 한다. 후일 조정에서는 송상현에게 이조판서의 관직을 추증(追贈)하고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왜장마저 감동시킨 송상현의 충의에 가득 찬 죽음은 이후 온 나라안으로 퍼져 나가게 된다. 그리하여 대전란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겠다는 위국충절의 기풍을 불러일으켜 초야에 묻힌 민초들의 의병봉기를 일으키는 기폭제가 된다.
 
 왜적이 부산포에 도착한 것은 4월 13일, 첫 관문인 부산진성을 함락하고(14일), 다대포진과 동래성마저 함락(15일)하여 조선 침략의 발판을 다지기까지 만 사흘이 걸렸다. 이후 한반도는 임진왜란이라는 7년 전쟁의 말로 다할 수 없는 긴 고통의 암흑 터널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된다.
 
 
 임진왜란 후의 동북아 정세
 임진왜란 이후 동북아의 정세는 크게 변하게 된다.
 
 임진왜란이 우리민족에 안긴 상흔은 너무도 깊은 것이었다. 조선 천지는 황폐화되고 경제적 파탄을 가져왔으며 백성은 도탄에 빠졌다. 전란에 따른 인명의 손상은 말할 것도 없고,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한편 조선에 원군을 보냈던 명나라는 전쟁 종료 후 국력의 소진을 가져와, 만주에 있던 여진족의 세력이 팽창하는 결과로 이어져 마침내 중원 대륙에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도요토미의 죽음이후 도꾸가와[德川]의 막부 정권이 들어서게 되는데, 조선 침략의 결과로 조선으로부터 금속활자에 의한 인쇄술을 처음으로 도입하게 되었고, 포로로 잡아간 도자기 기술자에 의해 획기적으로 요업(窯業)을 일으키게 된다. 또한 약탈해간 학자들과 퇴계집, 동의보감 등의 서적은 일본 문화발전에 큰 도움을 주게 되었다.
 
 
 4백년 전 임진왜란 전의 국제 정세가 오늘에 던지는 교훈
 왜 조선은 처참한 7년간의 임진왜란을 당하게 되었던가?
 
 첫째, 너무도 오랫동안 지속된 평화에 길들여져 백성들의 국방에 대한 인식이 해이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4백년전의 상황은 6·25 전쟁 휴전이후 50년 넘게 지속되어온 평화무드 속에 빠져 있는 오늘의 한반도 정세와도 통한다고 보여진다. 오늘날 한반도 밖에서는 대전쟁의 위험을 경고하는 얘기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으나, 정작 한반도 안에 사는 대부분의 백성들은 전쟁을 남의 나라 얘기하듯 인식하고 있다.
 
 둘째, 국가의 운명과 백성의 안위를 걸머진 지도층이 오로지 당파싸움에만 몰두하여 국방에 소홀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율곡 같은 대학자는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의 선견지명은 당파싸움에 휘말린 선비들에 의해 무시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러한 당파싸움이 4백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셋째, 당시 조선 정부가 일본을 얕잡아 보았던 것도 또 하나의 원인이었다. 이러한 당시 상황을 오늘과 비교해 보면 수도 서울에서 불과 한시간 거리에 대포 등 온갖 재래식 무기를 배치해 놓고 있는 북한의 위협을 소소하게 판단하고 있는 형국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지금 한반도는 미일중러 4대강국의 틈바구니에 끼어 위기가 점점 고조되고 있다. 한코한코 조여오는 이 위기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한민족의 활로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그 해답은 100여년 전에 역사전개의 틀을 짜놓으신 증산 상제님의 천지공사 말씀 속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