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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의 역사문화

[스크랩] 고구려 유적 및 백두산 답사[2]-개벽실제상황

by 바로요거 2006. 11. 17.
「개벽 실제상황」고구려유적 및 백두산 답사(2)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통화시를 출발, 집안시로 향했다. 집안(集安)은 고구려의 세 번째 수도가 있던 곳으로 424년간(3∼427) 정치·문화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4세기가 넘도록 고구려는 이 소도시(현 인구 20만 명)에서 중국의 침략을 저지하면서 대제국을 건설했는데, 국내성을 비롯한 성곽과 수많은 고분, 고분벽화들이 남아있는 군사도시이자 문화의 집산지이다.

┃광개토태왕비·태왕릉
가장 먼저 우리 역사의 자존심, 광개토태왕비를 찾았다. 멀리서부터 태왕비를 둘러싼 눈에 익은 전각이 보였고, 가까이 가자 일대가 공원으로 조성된 것을 알 수 있었다. 공원내는 잔디가 아닌 토끼풀이 넓은 면적을 덮고 있었는데, 세계문화유산으로 급하게 등록을 추진하느라 잔디를 조성할 시간조차 없었다는 현지 가이드의 설명이다. 전각 주위로는 군견 두 마리와 여러 대의 감시카메라가 태왕비를 둘러싸고 있었으며, 전각 내부에까지 동행하는 중국 공안들은 관광객들 사이에서 감시의 눈초리를 놓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태왕비 아래에 던져진 지폐, 동전에 눈독들이는 아이들에게 주의를 주면서 말이다.

광개토태왕릉은 광개토태왕비에서 도보로 10여분이 걸리는 가까운 거리에 자리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기단식 적석총으로 지금은 많이 내려앉아 거대한 돌무지와 흡사한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원래는 기단의 한변이 66m를 넘고 높이가 14.8m 가량 되는 장수왕릉보다도 훨씬 큰 규모의 능이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최근 몇 년 전 왕릉 앞에서 새로이 발견된 제단(祭壇)이었다. 왕릉 전면에 집 여러채를 덮을 만큼 넓은 면적에 걸쳐 있었는데, 그 동안은 수풀에 가려져 있어 몰랐다는 것이다. 고구려 계승 의지를 표방했던 대진국(발해)도 이 능에 제를 지내며 고구려 태왕릉 보존에 힘썼던 것으로 여겨진다. 광개토태왕의 능에서 대진국시대의 기와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장수태왕릉
이어서 찾은 장수태왕릉은 고구려 고분 중 건축술의 완성도에서 단연 으뜸가는 유적으로, 학계에서는 ‘동방의 금자탑’, ‘동방의 피라밋’이라는 격찬을 받는 고구려의 대표 유적이다. 주위에는 세계문화유산을 의미하는 마크가 거대한 수목 조형물로 구현돼 있었고, 목조 구조물로 묘실안까지 관람할 수 있도록 난간과 층계가 만들어져 있었다. 왕릉 앞 표지석에는 장군총이라는 이름이 선명히 새겨져 있었는데, 이에 대한 역사 가이드의 추가 설명이 이어진다.

“국내성에서 동북쪽으로 4.5km 떨어진 이 왕릉은 일반적으로 장군총으로 불리고 있는데, 이는 약 100여년 전 현지 촌부들이 중국 변방의 한 장군의 무덤이라 여기고 불러오기 시작한 데서 유래합니다. 하지만 이 묘는 위치와 규모 등의 면에서 볼 때 장수왕의 능으로 확실시 되는데, 그렇다면 장수태왕릉으로 불러야 마땅합니다. 묘나 총, 능이 모두 무덤을 일컫는 말이자만 제왕의 무덤만을 능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국내성·환도산성
이어서 집안시 인근에 있는 환도산성과 국내성 성터를 찾아갔다. 고구려의 세번째 수도였던 국내성은 사각형의 총 길이가 2700m에 달하는 평지성이며, 수도 방어의 요지 환도성은 국내성 서북쪽에 자리잡은 산성이다. 평지성에는 국왕만 살고 나머지 주민들은 궁성 주변의 넓은 지역에 살고 있다가, 외적이 쳐들어오면 왕궁을 비우고 산성으로 들어가 싸웠다고 한다.
환도산성(丸都山城) 아래에는 수십기의 대형 고분들이 모여 있는 유명한 산성하 고분군도 만나볼 수 있었다.

┃오회분 5호묘
이어서 찾아간 곳은 고구려 고분벽화가 그려져 있는 오회분 5호묘. 벽화고분으로는  유일하게 개방된 곳으로 한번에 약 10명 정도의 일행만이 들어가 관람할 수 있도록 제한하고 있었는데, 이미 무분별한 개방으로 심하게 습기가 차고 벽화도 많이 바랜 모습이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천장의 벽화를 돌벽 위에 그대로 그린 사신도가 가장 먼저 들어왔다. 동벽에는 청룡이, 서벽에는 백호를 중심으로 화염문과 연꽃무늬가 연결되어 있으며, 사이사이에는 여인상과 귀인상이 있다. 북면에는 거북과 뱀이 엉킨 현무도가 있으며, 남면에는 큰 날개를 쳐든 주작이 그려져 있다. 5호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천장벽화는 일월신(日月神)·신농신(神農神)·제륜신(製輪神)·수신(燧神) 등이 사방 천장벽화를 장식하고 있었다.

4일차의 마지막 일정으로 집안 박물관을 들렀다. 실로 다양하고 우수한 고구려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정교한 무기들과 장신구 등, 어떤 것들은 현대의 공예품이라 해도 손상이 없을만큼 정교한 솜씨였다. 그럼에도 마음 한켠이 불편했던 것은 박물관 설명글 곳곳에 고구려 문화를 중국 변방민족의 문화로 표현한 내용들 때문이었다.


┃오녀산성
“시조 추모왕(鄒牟王,주몽)께서 처음으로 기틀을 세우시고…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에서 산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우셨다.”
광개토태왕비문중에 나오는 내용인데, 여기에 등장하는 산 위의 성이 바로 5일차에 답사한 오녀산성이다. 광개토태왕비문의 기록과 또한 산 정상에서 발견된 궁궐터를 근거로 이 산성을 홀본성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산성을 오르는 길은 돌계단으로 잘 닦여져 있었는데, 안개비가 적당히 내려 운치를 더해주고 있었다. 해발 820미터의 오녀산 산꼭대기에 길이 1,000m, 너비 300~500m에 달하는 넓은 평지에 자리한 천혜의 요새 오녀산성. 그곳엔 소천지(小天池)라 부르는 마르지 않는 작은 못이 있었고, 궁궐터와 병사들이 거주했던 병영터 여러 개가 지금까지 남아있었다. 바닥에는 온돌을 설치했던 흔적까지 남아있어 놀라움을 더했다. 산성의 점장대 위에서 압록강의 지류인 혼강(渾江)이 태극모양으로 휘돌아가는 모습을 내려다보는 경관은 무엇보다 장관이었다.

오녀산성을 내려와 마지막 6일차의 목적지인 단동을 향해 버스로만 4시간여를 달렸다. 낮은 구릉지대로 드넓게 펼쳐진 만주벌판을 보며 이곳을 말달리며 호령했을 고구려인들 기상이 그려지는 듯 했다.


┃호산장성(박작성)
일정의 마지막 날, 호산장성을 향해 가는 길에 차창밖으로는 단동의 명소인 압록강 철교가 보이고, 또 멀리 위화도가 보이고 있었다.
잠시 뒤 도착한 호산장성(虎山長城). 분명 고구려의 유적으로 알고 왔는데 와 보니 최근에 복원한 흔적이 역력한 중국 명나라풍의 장성이 앞을 막고 서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격앙된 역사 가이드의 설명이 이어졌다.

“몇 년 전 일본 방송국에서 제작한  <만리장성>이란 프로에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을 잠깐 보여준 것이 바로 이 호산장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호산장성은 만리장성이 아닌 고구려의 박작성입니다. 역사기록을 보면 보장왕 7년(648) 당나라가 쳐들어 왔을 때 ‘박작성은 산을 이용하여 요새를 세웠고, 압록강으로 튼튼하게 막혀 있었기 때문에 함락시키지 못하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지금까지 압록강 입구에서 발견된 고구려 성은 애하첨고성과 이 호산산성 뿐인데 애하첨고성은 평지에 쌓은 성이기 때문에, 유일한 산성인 호산산성이 바로 박작성인 것입니다.”
너무도 엉뚱하게 왜곡·날조된 고구려의 박작성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둘러보고, 중국역사 일색으로 도배된 박물관을 견학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몇 미터밖에 안되는 강폭을 사이에 두고 북한땅 방산마을과 마주하고 있는 일보과(一步跨). 어딘가에서 불쑥 나와 악수를 청할것만 같은 북녘땅 동포들과의 불가능한 대면을 한번쯤 상상해보며, 길고도 짧았던 답사여행의 일정은 그렇게 막을 내리고 있었다. 

『개벽 실제상황』을 펴낸 대원출판은 앞으로도 일본 및 러시아로 떠나는 한민족 역사유적기행 등의 독자 이벤트를 꾸준히 이어갈 예정이라고 한다.

-월간개벽 2006년 11월호 www.greatopen.net

   
 
출처 : 한민족 미스테리
글쓴이 : 뾰족한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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