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꼭 알아야 할 유용하고 세상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차원 높은 정보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본 블로그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잘 간파하셔서 끊임없이
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의 역사문화

[스크랩] 고구려 유적 및 백두산 답사[1]-개벽실제상황

by 바로요거 2006. 11. 17.
개벽 실제상황」고구려유적 및 백두산 답사(1)

한중일(韓中日) 역사의 진실과, 미래의 대변혁 소식을 대도의 가르침으로 전하는 『개벽 실제상황』! 이 책을 발간한 대원출판은 얼마전 독자들을 위한 특별한 이벤트를 마련했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침탈로 한·중·일 삼국의 역사전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이 때에, 우리 선조들의 기상이 서린 옛 고구려땅으로 독자들을 초대하는 뜻깊은 행사를 준비한 것이다.



지난 8월 한달간 전국 서점과 인터넷에서는 ‘고구려 문화유적 및 백두산 답사’ 독자 응모 이벤트가 펼쳐졌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음에도 많은 독자들이 참여해 뜨거운 관심과 열기를 느끼게 했다. 드디어 추첨일인 9월 3일. 인터넷으로 추첨현장이 생방송되는 가운데, 행운의 열쇠를 손에 쥔 20명의 주인공이 탄생했다. 그리고 대학가 등에서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을 이끌어 온 증산도 대학생·청년연합회 회원들이 함께 답사에 동참하게 되어, 최종 130여명에 달하는 대규모 답사단이 구성되기 이르렀다.

이번 답사의 주무대는 우리나라와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중국 만주 일대. 흔히 동북3성(요녕성·길림성·흑룡강성)이라 불리는 이 지역은 고대국가 형성기부터 우리 조상들의 활동 무대였고, 고구려의 영토였던 곳이다. 현재에도 이 지역에는 우리 민족의 피가 면면히 이어져오고 있으며, 소중한 민족의 문화유산이 적지않게 남아 있어 역사적인 가치가 매우 큰 곳이기도 하다. 또한 고구려 유적지 외에도, 민족의 성산 백두산 천지와 일제시대 항일운동 유적지 등을 답사하는 코스가 더해져 이벤트의 의미는 더욱 배가되었다.




낮 12시경 인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1시간 30여분 뒤 중국 심양에 도착했다. 심양(瀋陽)은 중국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이자, 요녕성(遼寧省)의 정치·교육·문화의 핵을 담당하는 제1의 도시. 과거에도 요동지역 교통의 요지였으며 한민족의 흥망과 수난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본래 배달·조선·북부여·고구려·대진국(발해)에 이르기까지 이 일대는 우리의 영토였으나 대진국이 망하고 요동∼만주의 땅을 상실한 후 거란(요), 여진(금), 몽골족(원)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답사단은 4대의 버스에 나눠 타고, 첫 번째 목적지 심양 고궁을 향해 출발했다.

┃심양고궁·북릉공원
심양 고궁(古宮)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다음으로 큰 중국의 대표적인 궁전건물로 손꼽힌다. 후금(청)을 세운 누루하치가 1625년에 짓기 시작해 130년이 걸려 완성된 만주족 황제의 건축물로, 고궁의 동로(東路)로 접어들면 고궁을 대표하는 대정전(大政殿)을 만나게 된다. 그 좌우로는 황제를 보좌했던 두 왕의 거처인 좌익왕정(左翼王亭) 우익왕정(右翼王亭)이 자리하고 있고, 아래로는 차례로 팔기군 수장들이 거했던 여덟 개의 정자가 늘어서 있다. 대정전 앞에서 역사 가이드는 한민족의 역사와도 관련이 깊은 청나라와 만주족에 얽힌 역사 한토막을 들려주었다.

“누루하치가 세운 후금은 옛 금(金)나라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지어진 국호입니다. 그런데 《금사(金史)》에 의하면 금 태조 아구타의 선조가 함보(函普)라는 인물로 그가 신라인 마의태자였다는 것이 거의 정설화되어 있습니다. 누루하치가 애신각라(愛新覺羅, 신라를 사랑하고 잊지 말자)라는 성(姓)을 썼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 만주족은 우리와 같은 피가 흐르던 한민족의 한갈래였던 것입니다.”

가이드는 이어 좌우익왕과 팔수령 제도 등이 단군조선시대부터 있었으며 우리 한민족 고유의 삼신오제사상과 음양팔괘에서 유래한 것임을 설명하고, 대정전 계단난간에 새겨진 삼태극 무늬 등에서는 신교의 삼신사상의 자취가 남아있음을 일깨워 주었다.
고궁을 돌아본 뒤 다음 코스인 북릉공원으로 향했다. 북릉(北陵)공원은 누르하치의 넷째 아들이자 청조 2대 황제인 황태극과 황후의 능묘가 있는 곳. 청대 황가의 왕릉과 현대적 공원이 합쳐진 관광 명승지로 하늘을 덮고 있는 고송림 사이로 우뚝선 위엄있는 건축물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이어서 연길로 가기 위해 다시 심양공항으로 발길을 돌렸다.



┃일송정·해란강
연길에서부터 2일차 일정이 시작되었다.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남양땅과 마주한 곳 도문(圖們)을 거쳐  다음 행선지인 용정으로 향했다.

용정(龍井)은 겨레의 희망과 한이 서린 항일독립운동의 요람지로, 3·13만세운동이 일어난 용정중앙소학교를 비롯해 시인 윤동주의 시비와 선구자에 나오는 일송정, 해란강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이다. 용정으로 가는 길목에 차창밖으로 멀리 일송정(一松亭)이 보였다.
잠시 뒤엔 용 조각상이 일품인 용문교가 나타났다. 다리 아래로는 두만강의 지류인 해란강(海蘭江)이 흐르고 있었는데, 해란강은 지금도 조선족의 상징과도 같은 강으로 여겨지고 있다. 해란강 평강벌은 100년 전까지만 해도 황무지였으나 구한말부터 조선족들이 이곳에 이주하여 황무지를 개간, 오늘의 옥토로 만들었다고 한다.

┃용정중학교
버스가 멈춘 곳은 일제시대에 건립되었던 민족학교 용정중학교. 1921년에 대성중학교로 처음 설립된 이 학교는 당시 약  300여명의 학생이 재학하며 항일 민족 해방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일본의 끈질긴 탄압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곡과 조선 역사·지리를 줄기차게 가르쳐 온 항일운동의 요람과도 같은 곳이었다. 학교 건물 일부는 전시관으로 개조되어 있었는데, 전문교육을 받은 조선족 안내인의 설명으로 김좌진, 윤동주 등 민족열사들의 삶과 독립항쟁사를 들을 수 있었다.
용정중학교를 떠나와 내일의 백두산 답사일정을 위해 버스는 백두산 아래 첫 동네인 이도백하로 향했다.


┃백두산 천지
3일차 일정의 목적지는 모두가 고대하던 민족의 성산 백두산. 증산 상제님께서 김형렬, 김호연 성도를 데리고 백두산 천지의 봉우리에서 공사를 보셨던 곳이기도 해서 증산도 신도들에게는 더욱 각별한 곳이기도 하다[道典 4:43 참조].

백두산 산문(山門)에서 천지 아래까지는 별도 운행하는 전용버스를 타고 30여분을 더 올라가야 했는데, 꼬불길을 올라가면서 차즘 백두의 정상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조금씩 탄성이 터져나왔다. 정말 말 그대로 흰머리산이었다. 정상부가 흰색을 띄는 것은 알고 보니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천지 주변 반경 70㎞내에는 백색의 부석(浮石)이 뒤덮혀 있어서 마치 눈이 내린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다시 천지가 위치한 곳까지 30여분 이상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해발 2,744m 백두산 정상에 위치한 천지(天池). 산정에 가까워질수록 구름과 강수일수가 높아 일기를 예측하기 힘들며, 천지 주위가 맑은 날씨는 연중 40일 정도라고 한다. 답사단 일행이 천지에 오른 그날, 날씨는 너무도 청명했다. 천지물을 바라보는 눈이 시릴 정도다. 옆에서 근 오십번 가까이 천지를 올랐다는 현지 가이드가 이렇게 청명한 날은 지금껏 본적이 없다고 감탄할만큼 그렇게 좋은 날씨였다. 답사단 일행은 천지를 청수삼아 사배심고를 올리고 태을주를 낭랑히 읽었다.

버스를 타고 백두산 중턱을 내려오는 길에 잠시 들른 곳은 금강대협곡. 천지의 용암분출이 만들어낸 동양의 절경이다. 깊이가 100m에 달하는 그 협곡을 보면서 자연의 손길에 경이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백두산을 내려와 다음날 일정이 예정된 통화시로 향하는 길. 내려온 지 몇 시간이 채 안되어 벌써 주위에는 짙은 안개가 끼며 날씨가 흐려지고 있었다.

   
 
출처 : 한민족 미스테리
글쓴이 : 뾰족한수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