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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환단고기*韓의뿌리

[환단고기] 13세 흘달단군~23세 아홀단군

by 바로요거 2017. 6. 29.

 

[환단고기] 13세 흘달단군~23세 아홀단군

 

13세 단군 흘달(재위 BCE 1782~BCE 1722).

우가 흘달이 즉위. 대음달. 하 정벌. 무술 50(B.C.1763), 소도를 많이 설치하고 천지화를 심었다. 미혼의 자재로 하여금 글 읽고 활쏘는 것을 익히게 하며 이들을 국자랑이라 부르게 하였다.

국자랑들은 돌아다닐 때 머리에 천지화를 꽃았으므로 사람들은 이들을 천지화랑이라 하였다.

소도蘇塗 제천행사를 크게 부흥시킴.

 

 

흘달 단군의 군대 지원을, 중국 사서인 후한서 동이열전에서는 "모든 동이가 침법해 오니 湯이 혁명하여 걸왕을 쳐서 평정하였다."고 기록.

 

*한민족의 낭가문화

배달: 삼랑→조선: 국자랑(천지화랑)→북부여: 천왕랑→고구려: 조의선인(신라: 화랑, 백제: 무절)

 

14세 단군 고불古弗- BCE 1721년 우가인 고불이 즉위, 재위 60.

신유 42(B.C.1680) 9월 말라죽었던 나무에 새싹이 나고 오색의 큰 닭이 성의 동쪽, 자촌의 집에서 태어나니 이를 본 사람들이 알아보고는 봉황이라 하였다.

을해 56(B.C.1666), 관리를 사방에 보내 호구를 조사, 계산하니 총계 18천만인 이였다.

 

15세 단군 대음(재위 BCE 1661~BCE 1611).

후음달.경진 원년(B.C.1661) 은나라 왕 소갑이 사신을 보내 화침을 구했다.

이해에 80분의 1의 세법을 정하였다.

 

80분의 1 세법으로 세제 개혁.

 

대음단군 40(BCE 1622) - “아우 대심代心을 남선비국의 대인으로 봉하셨다.” 북방 선비족 문화의 근원.

 

16세 단군 위나尉那 BCE 1610년 우가인 위나가 즉위, 재위 58년.

환인천제, 환웅천황, 치우천황(자오지), 단군왕검, 이 네 분 성조聖祖를 모시는 제사문화 전통을 세우심.

 

17세 단군 여을余乙- BCE 1552년 즉위, 재위 68.

병신 20(B.C.1456), 지백특 사람이 와서 특산물을 바쳤다.

 

18세 단군 동엄冬奄- BCE 1484년 즉위, 재위 49.

 

19세 단군 구모소- BCE 1435년 즉위, 재위 55.

기미 54년 지리숙이 주천력과 <팔괘상중론> 을 지었다.

 

20세 단군 고홀固忽- BCE 1380년 우가인 고홀이 즉위, 재위 43.

경자 40년 공공인 공흘이 구한의 지도를 제작하여 바쳤다.

 

단군조선과 중국 하, , 주와의 교류 기록

-환단고기 단군세기-

 

11세 도해단군: 선비 20명 파견.하나라.

15세 대음단군: 사신파견, 화친 요청(소갑왕) - 은나라.

21세 소태단군: 사신파견, 조공 바침(소을왕) - 은나라.

화친요청, 조공 바침(무정왕) - 은나라.

29세 마휴단군: 공물 바침. - 주나라.

30세 내휴단군: 주나라와 수교. 주나라.

 

21세 단군 소태(재위 BCE 1337~BCE 1285).

21세 단군 소태蘇台 BCE 1337년 즉위, 재위 52.

경인 47(B.C.1291), 은나라 왕 무정이 귀방을 쳐 이기더니 또 대군을 이끌고 색도영지 등의 나라를 침공하였으나, 우리에게 대패하여 화해를 청하며 조공을 바쳤다.

우현왕은 주변 여러 사람들과 사냥족 수천을 이끌고 마침내 부여의 신궁에서 즉위 하였다.

단군도 어쩔 수 없이 옥책, 국보를 전하고 사우여는 폐하여 일반인이 되게 하였고, 단군께서는 아사달에 은퇴하여 마침내 붕어 하셨다. 이 해에 백이와 숙제도 역시 고죽군(중국 서울 북평의 옛이름)의 자손들로써 나라를 버리고 동해(발해만이나 요동만)의 해변가에 와서 살며 밭 갈기에 힘쓰며 혼자 살았다.

은나라 21세 왕 소을小乙이 사신을 보내 조공함.

 

은나라 제 22세 무정왕이 전쟁을 일으켜 이미 귀방鬼方을 물리치고... (무정왕이) 우리 군사에게 대패하여 화친을 청하고 조공을 바쳤다.”

- 환단고기 단군세기 소태 47(BCE 1291) -

 

22세 단군 색불루索弗婁(재위 BCE 1285~BCE 1238).

재위 48년. 우현왕 고등의 손자 색불루 무력으로 제위에 오름.

은나라 서울을 격파하고 곧 화친하였으나 또 다시 크게 싸워 이를 쳐부쉈다.

을묘 20년 이 때에 남국이 매우 강성하여 고죽군과 더불어 엄독골에 머물렀으니 은나라 땅에 매우 가까웠다. 이에 여파달로 하여금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 기에 웅거하여 나라를 세워 여라 칭하고 서융과 함께 은나라 제후들 사이를 차지하고 있도록 하였으니, 남씨의 위세가 매우 성하여 황제의 교화는 멀리 항산(恒山)의 이남의 땅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신미 36년 변방의 장수 신독이 병력을 믿고 난을 일으켰다.

 

단군조선의 <8조 금법> 중 3개 조항을 기록한 중국 『한서』 「지리지」.

 

단군조선의 <8조 금법> 전체를 전하는 『환단고기』.

색불루 단군 때(BCE 1282년) 국가 경영의 법체계가 정립됨.

 

23세 단군 아홀阿忽(재위 BCE 1237~BCE 1162).

재위 76년, 갑신 원년(BC 1237) 단군의 숙부인 고불가에게 명하여 낙랑골을 통치하도록하고, 웅갈손을 보내 남국의 왕과 함께 남쪽을 정벌한 군대가 은나라 땅에 여섯읍을 설치함.

가을 7월 신독을 주살하고 수도로 돌아온 뒤 포로들을 석방하도록 하였다.

을유 2년 남국의 임금 금달이 청구의 임금, 구려의 임금과 주개에서 회합하고 몽고리의 병력을 합쳐 회대의 땅을 평정하더니 포고씨를 엄으로, 영고씨를 서땅에 방고씨를 회땅에 각각 임명하니, 은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위세를 우러러보며 두려워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아우 고불가固弗加에게 낙랑홀樂浪忽을 다스리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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