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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사 바로알기

한민족 고유사서의 소실과 환단고기 전수 과정

by 바로요거 2016. 11. 14.

한민족 고유사서 소실과 환단고기 전수 과정


한민족 고유사서들의 소실 과정



“예로부터 전해오던 한민족의 고유사서들 대부분은 지금 그 자취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 전란이 빈번하여 사서들이 소실된 경우가 많았고 외적에게 탈취되어 사라진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궁궐과 많은 절, 건물들이 불에 타면서 그곳에 있던 서적들도 소실되었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유학에 물든 조선 조정은 우리 고유 사서를 민간으로부터 수거하여 궁궐에 비장하였다가 전란이나 화재로 사라진 경우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조선시대판 국정교과서 사건 ?


명나라의 비위를 거스릴 수 있는 사서들을 수거하라

유학,유교와는 다른 사서들을 수거라라


유학자들은 역사교육이 다양한 관점으로 시행될 경우에는 자신들이 사회 권력을 장악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내용만을 담은 획일적 역사교육이 시행되어야만 자신들이 사회를 통제하기 쉬울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조선 정부를 압박했고 유교주의 역사교육을 획일적으로 시행할 것을 촉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정부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이 점은 세조 3년 5월 26일자(양력 1457년 6월 17일자) <세조실록>과 예종 1년 9월 18일자(1469년 10월 22일자) <예종실록> 등에서 확인됩니다.


이에 따르면, 조선 정부는 <고조선비사><삼성기><삼성밀기>를 포함한 다수의 서적을 금서로 지정하고 이 책들을 몰수했습니다. <예종실록>에 따르면, 금서를 숨긴 자는 참수형에까지 처했습니다. 금서를 불태우고 지식인들을 구덩이에 매장한 진시황의 분서갱유와 유사한 일이 조선에서도 있었던 것입니다.


금서가 된 책들은 거의 다 고조선과 고조선 이전의 역사를 바룬 사서들과 신선교(도교,선교,신교)에 관한 책들이었습니다.  


『신지비사神誌秘詞』, 『진역유기震域留記』, 『삼성밀기三聖密記』, 『조대기朝代記』, 『고기古記』, 『밀기密記』, 『대변경大辯經』, 『삼한비기三韓秘記』,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 『고려팔관 잡기高麗八觀雜記』 등 현재 전해지지 않는 고유 사서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럼 어떻게 이런 책들이 사라지게 된 것일까요?


 

좀전에 수서령을 말씀드렸습니다. 세조부터 성종까지 우리민족의 뿌리 역사를 알 수 있는 사서들을 모두 거두어들입니다. 숨기는 자는 참형에 처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책들이 왕실 도서관에 모여있었겟지요.


그런데 이 책들이 모인 곳을 볼 수 있었던 위치에 있었던 분이 있습니다. 일십당 이맥이라는 분입니다. 이분이 이 책을 보고서 한권의 책으로 모으게  됩니다. 요즘 말로 데이타베이스화한 것입니다. 그책이 바로 태백일사라는 책이고 .. 이 태백일사는 1911년에 발간된 환단고기라는 책의 60퍼센트를 차지하게 됩니다.


 

일제 관변사학자 이마니시류(금서룡今西龍)도 자신의 저서인 <朝鮮古史の硏究>의 <단군고檀君考>에서

<이조李朝 태종太宗 왕조실록王朝實錄 12년 條에 열기列記된 *신비집 神秘集*고조선비사 古朝鮮秘詞*대변설 大辯說*조대기 朝代記*주남일사기 周南逸士記*지공기 誌公記*표훈천사 表訓天詞*삼성밀기 三聖密記*안함로 원동중 삼성기 安含老 元董仲 三聖記*도증기 道證記*지이성모 智異聖母*하사량훈 河沙良訓*문태산 왕거인 설업 등 삼인기록 文泰山 王居仁 薛業 등 三人記錄*수찬기소 일백여권 修撰企所 一百餘卷*동천록 動天錄*마슬록 磨虱錄*통천록 通天錄*호중록 壺中錄*지화록 地華錄*도선한도참기 道詵漢都讖記 등의 서적들이 왕씨고려시대王氏高麗時代에 서운관書雲觀을 중심으로 하여 많이 존재하였다.  이러한 서적들이 고려시대로부터 이조李朝 初까지 구전되어 내려오는 단군고기檀君古記에 연유하여 도가(道家-선가仙家)에 의하여 저술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스스로 피력하고 있다(동서同書 53p) 


이 책들에 관해서는 이마니시류도 알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었다는 것은 이 책들을 어떻게 조치를 했다는 겁니다. 일본왕실도서관으로 실어날랐을 가능성이 높고 어느정도는 불태웠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렇게 일본이 조선사편수회를 통해서 <일본인을 위한 조선사>를 만들어서 조선을 영원히 통치하려 했는데 일본보다 오래된 한민족의 뿌리역사를 드러내는 사서들을 가만둘 리가 없습니다.


 이때 살아남은 책이 바로 환단고기입니다. 일제강점기가 된 바로 다음에 1911년 운초 계연수 선생이 다섯권의 책을 모아서 한권의 책 환단고기로 30권을 발간합니다.


환단고기를 편찬한 운초 계연수 선생


운초 계연수 선생은 1864년에 평안도 선천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찍 부모를 여의었는데,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한 번 보면 곧바로 외울만큼 기억력이 뛰어났습니다.  동방 한민족의 옛 역사와 민족정신에 관심이 지대했던 그는 27세(1890)때까지 약초를 캐어서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여러 양반가와 사찰에서 비장하던 서책과 금석문, 암각문 등 각종 사료를 수집하였습니다.



 한민족의 역사를 밝히고자 한 계연수가 뜻을 이룰 수 있게 된 결정적 계기는 해학 이기와의 만남이었습니다. 1897년 (34세)에 이기의 문하에 들어간 계연수는 스승의 가르침 아래, 두 해 동안에 이암의 『태백진훈』과 『단군세기』 그리고 『참전계경』, 『태백일사』,『천부경요해』등을 간행하였습니다. 이 중 『단군세기』와 『참전계경』,『태백일사』는 1911년에 간행한 『환단고기』에 다시 수록되었습니다.


 1909년 대영절(3월 16일)에 이기, 나철 등이 단학회를 창립하고 그해 5월 5일에 강화도 참성단에서 천제를 올려 삼심상제님께 이를 고할 때, 계연수도 그 자리에 참여하였습니다. 두 달 후에 이기 선생이 돌아가시자, 계연수 선생이 그 뒤를 이어 단학회 2대 회장을 맡았습니다.


 

 2년 후인 1911년(48세), 계연수는 스승은  이기 선생이 생전에 세세히 감수해 준 『환단고기』

에 범례凡例를 지어 붙인 후 드디어 세상에 내놓습니다.  서문(凡例)에 나와 있듯이, 묘향산 단굴암에서 책을 옮겨 편진한 후, 자신의 벗이자 독립운동 동지인 홍범도(1868~1943)와 오동진(1865~1930) 두 사람의 자금 지원으로 만주 관전현 에서 『환단고기』30부를 간행 하였습니다.


환단고기 저자와 전수과정(2분) →  https://youtu.be/Osv4qvdBifA 



1911년 환단고기의 간행
“『환단고기』가 편찬, 간행된 것은 조선이 일본에 망한 후 1년이 지난 1911년입니다.   범례에 ‘기궐剞劂’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목판에 새긴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환단고기』가 이유립이라는 인물에 의해 우리에게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이유립 선생은 1907년생으로서 해학 이기의 제자이자 계연수 선생의 제자였습니다.

그는 13세 때 삭주 지역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배달의숙이라는 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했는데 이 학교에서는 계연수를 위시하여 최시흥, 오동진 등이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유립 선생은 조선독립소년단에 참가하여 활동하는 등 소년시절부터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는데 특히 교육운동에 뜻이 있어 33세 때에는 신풍학원도 세워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해방이 되자 신탁통치에 반대했던 그는 1948년 남한으로 월남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직 남북한 간의 경계가 완전히 닫히지는 않아 북한을 두어 차례 더 왕래하였습니다.


그는 북한에서 내려올 때 『환단고기』를 가져왔습니다. 이유립 선생은 1963년 대전 은행동에 정착해서 후학들에게 우리 역사를 가르쳤는데 그 때 사용했던 교재가 『환단고기』였던 것입니다.

이는 그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양종현梁宗鉉 씨가 필자에게 직접 증언해준 사실입니다. 

양씨는 1966년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이유립 선생에게 사사했던 분입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유립 선생이 갖고 있던 『환단고기』 초간본은 1976년경에 분실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이유립은 월간 『자유』지를 운영하고 있던 박창암 장군(1923-2003)의 도움을 받아 의정부에 살고 있었는데 백내장 수술차 5일간 집을 비운 사집주인이 야반도주한 걸로 착각하고 집세 대신에 이유립 선생의 책들을 모조리 팔아버린 겁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환단고기』 원본이 사라지는 바람에 『환단고기』 위서론이 나오게 된 것이죠.”


물론 원본이 사라진 때문만은 아닙니다. 위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지금 학계는 해방이전의 조선총독부 사관을 고수하고 있기때문에 ....그와는 완전히 다른 역사서가 나오게 되니 위서로 몰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환단고기를 공부해보면 환단고기가 진서이고 사료가치가 대단히 높은  역사서임을 단번에 알수있습니다. 


환단고기 원본의 분실과 보존

 

환단고기』가 분실되기 전 이유립 선생의 제자 가운데 오형기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형기는 이유립 선생보다 10년 정도 연배가 젊은 사람이었는데 이유립 선생이 오형기의 형과 친한 터라 그를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이는 양종현 씨가 증언해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오형기가 이유립 선생이 소장하고 있던 『환단고기』를 빌려가 필사를 하게 됩니다.

오형기 말로는 이유립 선생이 자신에게 『환단고기』 정서를 요청했다고 하는데 양종현 씨 증언으로는 오형기가 그 책을 필사하기를 원하자 이유립 선생이 허락하여 필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오형기도 그 책이 대단한 책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도 한권 소장하고 싶었던 것이었겠지요.

 오형기 이분 덕에 『환단고기』가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어요.

1979년에 광오이해사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환단고기』는 바로 오형기가 소장하고 있던 필사본을 간행한 것입니다. 출판을 했던 사람은 이유립 선생의 문하에 있던 조병윤으로 스승의 허락도 없이 간행한 터라 이유립 선생이 크게 화를 냈다고 합니다.

이유립 선생은 오형기가 필사본에 쓴 발문도 못마땅하게 생각했는데 이 발문을 삭제하고 오자를 바로잡아 1983년에 배달의숙을 발행인으로 한 『환단고기』를 다시 간행했습니다.

배달의숙본이 나오기 바로 전해에는 가지마 노보루(鹿島昇)라는 일본인 변호사가 광오이해사본을 입수하여 일본어로 번역하여 출판하였는데 이 일본어본이 역으로 국내에 수입되어 한국사학계에 상당한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조병윤이 간행한 광오이해사본과 이유립 선생이 간행한 배달의숙본 모두 한문 원문만 실려 있는데 이후 여러 출판사들에 의해 『환단고기』 번역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환단고기가 출간되게 된 과정은 아주 명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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