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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태백일사와 용재총화에 나오는 북경 연녀 이야기

by 바로요거 2016. 11. 17.

환단고기 태백일사와 용재총화에 나오는 북경 연녀 이야기


[용재총화] 충선왕과 북경 연녀 이야기 : 충선왕과 이제현

고려 충선왕(忠宣王)은 왕이 되기전 오랫동안 원 나라에 머물고 있어서 정든 사람이 있었더니, 귀국하게 되자 정인(情人)이 쫓아오므로 임금이 연꽃 한 송이를 꺾어주고 이별의 정표로 하였다. 밤낮으로 임금이 그리움을 견디지 못하여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호)를 시켜 다시 가서 보게 하였다. 이익재가 가보니 여자는 다락 속에 있었는데, 며칠 동안 먹지를 않아 말도 잘 하지 못하였으나 억지로 붓을 들어 절구 한 수를 쓰는데,

보내주신 연꽃 한 송이 / 贈送蓮花片
처음엔 분명하게도 붉더니 / 初來的的紅
가지 떠난 지 이제 며칠 / 辭枝今幾日
사람과 함께 시들었네 / 憔悴與人同 하였다.

익재가 돌아와서, “여자는 술집으로 들어가 젊은 사람들과 술을 마신다는데 찾아도 없습니다.”고 아뢰니, 임금이 크게 뉘우치며 땅에 침을 뱉었다. 다음해의 경수절(慶壽節 왕의 생일)에 이익재가 술잔을 올리고는 뜰아래로 물러나와 엎드리며,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 연유를 물으므로 이익재는 그 시를 올리고 그때 일을 말했다. 임금은 눈물을 흘리며, “만약 그 날 이 시를 보았더라면 죽을힘을 다해서라도 돌아갔을 것인데, 경이 나를 사랑하여 일부러 다른 말을 하였으니, 참으로 충성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태백일사 고려국본기] <충렬왕과 북경 연녀이야기>

임금께서 연경(지금의 북경)에 있을 때 연녀에게 매혹당하셨다.이별할 때 연녀가 손수 연꽂 한송이를 바치며 이렇게 말했다

“ 임금께서 돌아가시는 길에 만약 이꽃이 시든 것을 보시면 이 목숨이 장차 다할 것이옵니다”

며칠 뒤에 꽃을 보니 초췌해지고 있었다. 임금은 연녀가 죽을까 두려워 다시 연경으로 돌아가려 하셨다. 존비가 가서 살펴보고 오겠다고 자청하여 연녀를 찾아갔다. 연녀가 울며 시를 바치니 이러하였다.

" 연꽃 향기를 서로 주고 받으니 처음에는 붉은 빛 아리따웠네 꽃을 드린 지 며칠 지나니 시든 모습 님과 같사옵니다."

존비는 임금이 시를 보시면 연녀를 더욱 그리워할 것을 우려하여 연녀 대신 시를 지어 올렸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이 어리석은 사람아! / 수레를 멈추지 마오 수레를 멈추지마오 /이몸은 연잎에 맺힌 이슬같나니 / 저쪽 이쪽 둥글게 굴러다닌다오"

임금이 시를 보고 크게 노하여 마침내 환국하였다.
뒤에 임금이 연녀에 대한 원망을 그치지 않으시므로 존비가 아뢰었다.

“ 신이 그때 모시고 돌아오기를 급히 서두르려고 부득이 거짓으로 시를 지어 올렸으니 바라옵건대 임금을 속인 죄에벌을 내려주시기를 업드려 비옵니다 ”

임금이 노하여 관직을 빼앗고 문의에 귀양을 보내셨다. 태자(충선왕)와 조정 대신들이 풀어주기를 여러 번 주청하였다. 임금 역시 후회하여 다시 복직시켜 소환하셧으나 사자가 이르기 전에 존비가 이미 숨을 거두었다. 임금은 부음을 전해듣고 몹시 슬퍼하여 조회를 폐하셨다.

태자가 장례를 임하여 말하였다. “ 이존비는 정직한 나라의 직신인데 어찌 이같이 요절한단 말인가?”이에 왕례로 장사지낼 것을 명하였다. 마침내 형강 가에 있는 산 4리를 둘러서 봉하니 지금까지 동을 왕묘동이라 부르고 마을을 산사리라 부른다.


태백일사와 용재총화에 실린 이야기는 주인공이 다릅니다. 이제현과 충선왕 VS 이존비와 충렬왕, 어느 책의 내용이 맞을까요?

[용재총화]에 실린 이제현이 충선왕과 중국에 갔다 연나라 여인을 만나 연나라 여인을 잊지 못해 귀국을 꺼려하는 충선왕에게 거짓 보고를 해서 같이 귀국하는 일화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같은 이야기인데 태백일사에는 주인공이 바뀌었죠. 이제현은 이존비로 충선왕은 충렬왕으로 되어 있습니다.

[용재총화]의 이야기는 역사적 연대와 사건으로 볼때 고려해야할게 있는데요. 이제현이 충선왕의 부름을 받아 중국으로 들어가는 것이 1314년인데 충선왕은 그 후 고려에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물론 이존비의 경우 정확하게 규정지을 수 있는 사료는 없습니다. 다만 이존비가 1289년에 사망하는데 충렬왕은 1284년에 원나라에 갔다 돌아오는 것이 기록되어 있어 일단의 가능성은 용재총화의 기록보다는 신빙성이 더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용재총화 내용 검토

충선왕은 1308년 원나라로부터 심양왕(瀋陽王)에 봉해졌습니다. 이해 7월, 충렬왕이 죽자 귀국하여 다시 왕위에 올랐고 오랫동안 원나라 생활에 젖어 있던 관계로 복위한 지 두 달 만인 11월에 제안대군 숙(齊安大君淑)에게 왕권대행을 시키고 원나라로 가버리고 맙니다.. 그 뒤 재위기간에는 한 번도 귀국하지 않고 연경(燕京)에서 전지(傳旨)를 통해 국정을 수행하였습니다. 충선왕은 본국의 이제현을 불러 원나라 유학자들과 어울리게 하였습니다.이제현이 연경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1314년. 충숙왕 원년 정월로 이때 나이는 29세입니다. 그리고 이미 왕은 충숙왕이었습니다.

- 충선왕은 1308년 11월 원나라로 간 이후 한번도 귀국하지 않았다.
- 이제현 선생은 1314년 충선왕에게 불려 연경에 처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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