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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의 진서론과 위서론

by 바로요거 2016. 11. 14.

환단고기의 진서론과 위서론


『환단고기』는 기존의 사서와는 다른 파격적인 내용과 상세한 기술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기존에 알려진 역사적 내용들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기존의 학설을 뒤엎는 내용이 많았습니다.


고조선의 성립 기원에 대한 상세한 기술이라든가 47대에 이른 단군의 명칭과 재위년도 등은 고조선을 지금으로부터 겨우 2,700년 전에 건국된 청동기 시대 부족국가로 보는 식민사학의 논리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아마도 역사학계에서 볼 때 『환단고기』는 눈에 가시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 책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그 가치를 폄하하고, 『환단고기』의 허점을 아전인수적으로 해석하고 침소봉대하여 『환단고기』 전체를 근세에 지어낸 책이거나 조작된 책으로 낙인찍으려 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위서로 판명났다는 등으로 치부하려고 갖은 애를 쓰고 있습니다.



환단고기 위서론의 주장들


강단사학자들이 주장하는 '『환단고기』 위서론' 이라고 하면 무언가 학술적인 이론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논리적 관점이나 학술적 논증이 담겨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 30여 년 동안 해 온 『환단고기』 역주본 작업을 마무리 지으면서 지금까지 학계에서 발표한『환단고기』 진위 논쟁에 대한 세미나 자료와 논문, 서책을 하나도 빠짐없이, 체계적으로 점검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위서라는 주장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환단고기』의 소중한 가치가 정말 부당하게 흠집이 날 수 있다는 염려 때문입니다. 주류 강단사학계가 『환단고기』의 독보적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부정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위서론자들은 책 제목인 『환단고기』의 뜻조차 모르고 있으며, 『환단고기』를 단 한 번도 깊이 있게 제대로 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유불선 경전을 비롯한 동북아의 고전과 인류의 시원 종교인 신교의 우주론에 대한 이해가 천박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위서론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환단고기』는 조작된 책이라는 주장입니다. 위서론자들은 ‘1911년에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의 원본이 없다는 것을 핑계로 『환단고기』는 이유립이 조작한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환단고기』 범례에서도 나오듯이 이 책은 운초 계연수가 1911년에 만주 관전현에서 독립운동 동지인 홍범도, 오동진 두 사람의 자금 지원을 받아, 스승 해학 이기의 문중에서 전해 오던 『태백일사』(8권으로 구성)와 다른 4권의 정통 사서를 한 권으로 묶어 간행한 책입니다.

『환단고기』를 이유립이 조작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오형기가 필사한 『환단고기』 발문을 보면 명백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유립의 제자 양종현은 원본 책을 직접 본 사람인데, 책의 제목이 ‘『환단고기』’라고 분명히 증언하였습니다. 상식적으로 봐도 그 방대한 역사적 내용들을 시기적으로 정합할 수 있도록 창작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둘째, 『환단고기』에 나오는 지명과 인명의 실제 사용연대가 저술 연대보다 훨씬 후대이므로 그 내용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영고탑이라는 지명과 잠청배라는 용어를 들어 단군세기나 북부여기가 청나라 이후에나 저술될 수밖에 없는 책이므로 고려시대에 저술된 책이 아니라 청나라 이후에 조작된 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위서론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무지하고 억지스러운지를 반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고탑은 그들의 주장처럼 청나라 이후에 생긴 것이 아니라 이미 명대明代의 기록에 영고탑이라는 명칭이 나오고 있으므로 위서론자들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환단고기』에 근대 술어가 사용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위서론자들은 국가·문화·평등·자유·헌법·인류·세계만방·산업 같은 근대용어가 쓰였다는 이유로 『환단고기』는 최근세에 쓰인 책이라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고서에 현대에서만 사용하는 용어가 있다면 당연히 그 저술 연대를 의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근대술어라는 것이 고대에도 사용된 전거들이 무수히 발견됩니다.

 ‘문화’나 ‘인류’는 최소한 1,600년 전부터 고전에서 사용되었으며, 구마라습鳩摩羅什의『금강경』에는 ‘평등’이란 용어가 사용되었고, 『주역』에서는 ‘국가’, 전국시대 역사서인 『국어』에서는 ‘헌법’이란 용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정말 근대어가 가필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환단고기』 자체가 완전 조작된 위서임을 증명하지는 못합니다. 인류사의 여러 경전을 돌이켜보면 수백, 수천 년의 세월 속에서 끊임없는 가필과 재편집을 통한 보정 작업 끝에 오늘날의 경전이 되었습니다. 백번 양보하여 『환단고기』의 일부 술어와 연대 표시가 사실과 다르거나 다른 사서와 다소 어긋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류의 시원 역사, 한민족의 국통 맥, 태곳적 한韓문화의 다양한 모습을 밝혀 주는 『환단고기』의 독보적인 가치를 결코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계연수가 처음 펴낸 후 70년이 지나 이유립이 스승의 뜻을 받들어 『환단고기』를 다시 펴낼 때 가필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의도적인 조작과 첨삭이 아니라 누구의 손에 의해서든 꼭 이뤄져야 할 보정 작업이라 할 것입니다. 더구나 그 보정도 원전을 훼손하지 않는 아주 미미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넷째, 후대의 다른 사서의 영향을 받았거나 그 사서들을 표절했다는 주장입니다. 예를 들면 『환단고기』에 나오는 ‘삼조선’이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환단고기』는 『조선상고사』를 베낀 책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환단고기』에는 『조선상고사』에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삼조선의 배경이 되는 삼한과 삼신관이 동방의 원형 문화로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고, 독창적인 우리 한민족의 역사관이 밝혀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먼저 존재했는지는 자명한 것입니다.
또한 광개토태왕비 비문에 나오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환지還至 17세손世孫’에 대한 해석만 보아도 『환단고기』와 『조선상고사』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상세한 정보를 담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환단고기』가 『조선상고사』의 영향을 받아서 조작되었다는 위서론은 터무니없는 낭설일 뿐이다. 특히 각종 사서史書에 나타나는 ‘고구려 900년 설’의 진실은 오직 『환단고기』와 대조, 분석해 봄으로써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다섯째, 『환단고기』를 구성하는 각 역사서의 저자를 문제 삼는 것입니다. 그들은 ‘안함로와 원동중의 『삼성기』’라는 『세조실록』의 기록은 보지 않고 그보다 70여 년 후에 쓰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안함安咸·원로元老·동중董仲’ 세 사람이 황해도 해주 수양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삼성기』의 저자를 안함로, 원동중 두 사람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 주장합니다. 얼핏 일리 있는 말로 들리지만 이 주장에는 커다란 모순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책을 인용할 때 앞서 나온 책을 인용하는 것이 상식인데 이 경우는 『세조실록』을 기록하는 사람이 70여 년 후에 쓰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인용하였다는 상식 밖의 주장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몇 가지만 지적하더라도 위서론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허구적이고 비양심적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환단고기』에 대한 태도부터가 잘못되었습니다. 일단 부정하고 보자는 생각으로 꼬투리를 잡다보니 ‘잠청배’를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 땅에서 청나라를 몰아낸 일본이 ‘청과 몰래 내통한 무리’를 가리켜 한 말”이라고 잘못 해석하는 웃지 못 할 일들이 벌어진 것입니다.

잠청배는 원래 이암이 『단군세기』 서문에서 처음으로 쓴 말인데 원나라 간섭기 때 고려 인물로 정치적 문제를 일으켰던 오잠과 류청신의 이름을 빗대어 ‘오잠과 류청신 같은 무리’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위서론자들은 이렇게 잠청배를 잘못 해석하여 『단군세기』 서문은 이암이 아닌 구한말 이후의 사람이 쓴 것이라는 억지 주장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학자가 역사 지식의 부족을 스스로 드러낸 주장입니다. 정말 통탄할 노릇입니다.”

환단고기 진서론


『환단고기』는 그 전체 내용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민족의 정통 역사서임이 분명합니다. 『환단고기』가 진서임을 굳이 증명하라고 한다면 중국, 일본, 중동 등지의 고대사 역사 현장을 가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곳을 답사해 보면 『환단고기』는 진실이 가득 찬 역사서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게 됩니다. 나아가 『환단고기』야말로 한민족과 인류의 잃어버린 태고 역사를 되찾아 줄 유일한 역사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특히 최근 중국 정부에서도 인정한, 인류 역사상 최고最古의 문명이자 동북아 창세시대의 문명인 홍산문화(일명 ‘발해연안문명’) 유적지에 가본다면 『환단고기』의 내용이 유물과 유적으로 증명됨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위서론자들이 그곳에 가봤는지 물어보고 싶네요.

물론 위서론이 하도 판을 치니까 여러 학자들이 그에 맞서 『환단고기』의 내용을 검토하여 진서임을 입증하기도 했습니다. 굳이 말한다면 이를 진서론으로 부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몇 가지 주장들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먼저 『환단고기』에 기록된 단군조선시대 천문현상을 지금의 과학을 통해 증명한 것입니다. 천문학자인 박창범, 나대일 두 교수는 천문현상기록을 근거로 『환단고기』가 진서임을 입증했습니다.

『환단고기』에는 단군시대에 일어난 천문현상에 관련된 기록만도 12회나 수록되어 있는데 이들 기록의 진위를 밝히기 위해 BCE 2333년까지 역추적하여 실제 일어난 자연현상과 사서에 나타난 기록을 과학적으로 비교해 본 결과 사서의 기록이 진실임이 증명되었습니다.

그 한 예가 BCE 1733년 흘달屹達단제 50년 “오성취루五星聚婁”라는 기록입니다. 오성은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 육안으로 관측 가능한 5개 행성들이고, 루는 24수 중의 하나로 그 주성主星은 양자리의 베타별(β Aries)입니다. 그 두 과학자들이 검증한 결과 BCE 1734년 7월 13일 초저녁에 태양으로부터 금성, 목성, 토성, 수성, 화성 그리고 추가로 초승달 등이 일렬지어 하늘에 나타나 장관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었고, 또 한 번은 1953년 2월 25일 새벽에 한 번 있었다고 합니다.

행성결집현상은 천문학적으로 매우 드문 현상인데 이를 감안해 볼 때 단군조선 때의 기록은 1년 차이지만 주목할 만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외 29세 단군 마휴 9년(BCE 935)에 “남해의 조수가 석자나 물러났다[南海潮水退三尺].”이라는 기록이나 일식기록에 대한 기록도 과학적으로 신뢰할 만한 것으로 입증되었습니다. 이러한 과학적 검토는 『환단고기』가 최근에 저술된 위서라는 주장에 대한 명백한 반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환단고기』의 기록을 검토해 볼 때 그 내용이 유물로 입증된 사례도 있습니다.
 
『환단고기』에는 장수왕의 연호와 관련된 내용이 실려 있는데 이 내용이 1915년에 발견된 불상에 새겨진 기록에 의해서 입증된 것입니다. 『환단고기』 『태백일사』에는 장수왕이 즉위하자, ‘건흥建興’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기록이 있는데 건흥 연호가 1915년 충북 충주 노온면에서 출토된 불상의 광배명光背名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역사기록의 진실여부는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입증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사례를 과학적 용어로 검증이라고 합니다. 시기적으로 볼 때 기록이 먼저 있고 그 기록의 사실여부를 밝혀주는 유물이 발견되면 그 기록의 진실성이 검증됩니다.

천남생묘지 비문도 그러한 예가 될 것입니다. 천남생은 고구려의 재상이자 영웅인 연개소문의 큰 아들입니다. 그의 묘비명이 1923년에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남생의 아버지 개금, 할아버지 태조, 증조부 자유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태백일사』가 『조대기』를 인용하여 밝힌 기록과 일치합니다. 이 책은 여기에 남생의 고조부, 즉 연개소문의 증조부 이름을 광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은 다른 곳에서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또 광개토태왕 비문에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환지 17세손’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는 ‘광개토태왕은 추모鄒牟왕의 13세손’이라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다릅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요? 『환단고기』를 보면 그 이유가 밝혀지게 됩니다.

『환단고기』에는 고구려 제왕의 계보가 제1세 해모수(BCE 194년에 단군조선을 계승하여 북부여 건국)로부터 →제2세 고리국의 제후 고진(해모수의 둘째 아들)→제3세 고진의 아들→제4세 옥저후 불리지(고진의 손자)→제5세 고추모(고주몽, 고진의 증손자) … 제17세 광개토태왕(주몽의 13세손)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주몽의 선조는 해모수이며 그로부터 치면 광개토대왕은 17세가 되는 것입니다. 『삼국사기』도 광개토대왕비도 모두 정확한 사실을 담고 있었던 것인데 그것을 『환단고기』가 해명해준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환단고기』가 후대의 창작이 아닌 진서임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환단고기』가 진서임을 알려주는 여러 증거들이 『환단고기』 자체 내에 많이 들어있습니다. 문제는 그 증거들을 일일이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환단고기』를 대하는 자세입니다. 왜 자세히 연구하고 검토하지 않고 굳이 위서라고 낙인찍는가 하는 것입니다. 『환단고기』 연구는 완전히 새로 출발해야 합니다. 민족사학자이건, 역사학계의 주류 사학자이건 누구라도 『환단고기』를 연구하는 사람은 우선 『환단고기』에 담긴 한민족과 인류의 시원 문화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는 열린 태도와 긍정적인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어디서 왔고, 누구였으며, 무엇이었는지, 지금의 우리를 잊지 않기 위해서 이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 알렉스 헤일리, <뿌리>



“고향산천을 어찌 잊어요. 자기 어머니, 아버지를 어찌 잊어요. 내가 고향산천에 할말은 없지만 나는 내가 하는 일에 자존심이 있어요.” - 극진가라데 명인 최배달 ( 이름을 배달민족의 배달로 바꾼 최영의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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