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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사 바로알기

일제 식민사관과 조작된 한국역사

by 바로요거 2016. 11. 14.

일제 식민사관과 조작된 한국역사


식민지 유산 Colonial Legacy

식민지 정부는 전통적 사회 정치 제도를 파괴하고 그들의 제도를 강요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와 정신도 또한 파괴했다. 고대사와 관련된 이상주의를 연구할 때는 식민지 유산을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중국과 일본은 역사 문서를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중요 역사가들도 한국의 중국 지배와 아시아 역사에 관해 역사적 사실과 내용을 왜곡하였다.

20세기 식민지 시절에 한국사의 파괴와 왜곡은 중국과 일본 정부 및 학자들에 의해 각각의 국가적 영광과 국익을 위해 자행되었다. 일본 민족주의자들은 한국 역사가 중국과 일본 역사보다 오래되었음을 알려지기를 원치 않았다. 이런 식으로 일본과 중국은 계속 실제 역사를 왜곡하였다.

출처 : 아시아 이상주의 (이홍범 저)



이홍범 오바마 정부  명예장관 (키친캐비넷) ,아시아이상주의 저자


▶Dr Hong beom Rhee speak about Korea history (10분) → https://youtu.be/6u8-trfOyrM



식민지 유산 무엇이 있을까요?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적  배웠던 동요들이 있습니다.


1) 일본 동요와 일본식 동요

'학교종이 땡땡땡/어서 모이자’
'숨바꼭질 할 사람/여기 붙어라’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잠잔다/잠꾸러기’
'쎄쎄쎄 아침 바람 찬 바람에/울고 가는 저 기러기~’
'또옥똑, 누구십니까’
'두껍아 두껍아 헌집줄께 새집다오"
'퐁당퐁당 돌을 던지자’,
'똑똑 누구십니까?’,
'동동 동대문을 열어라’
 



이중에 아는 노래들 많으시죠? 일본 음계 혹은 일본 노래 개사곡임을 모르고 부르는 동요들입니다. 지금도 배우고 있는 노래들도 있다고 하네요


[특강] 한국인의 음악감성과 전통세계 노동은(중앙대 국악대학 교수)

https://youtu.be/Cbw7bpXbkZM 17분 ~ 5분 정도 보시면 <요나누키 음계> 나옵니다.


2) 남대문은 왜 국보 1호가 되었나?


숭례문을 조선 보물 1호로 지정한 것은 일제 강점기였던 1934년 조선총독부였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  [加藤淸正] 가 숭례문을 통해 한양에 출입했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였다고 합니다. 이 주장은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조선 성곽 정책을 연구, 석사학위를 받은 오타 히데하루(일본 도호쿠대 특별연구원) 가 서울대 국사학과 기관지 《한국사론》 49집에 발표한 논문에서 제기됐습니다.


오타 히데하루의 논문 〈근대 한일 양국의 성곽 인식과 일본의 조선 식민 지배 정책〉에 의하면, 1904년 9월 이후 1908년 12월까지 조선군 사령관으로 근무한 하세가와 요시미치 [長谷川好道, 1850~1924]가 교통 장애를 이유로 숭례문을 헐어 버리려 했던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요미우리신문 주필을 거쳐 당시 한성신보 사장 겸 일본인 거류민 단장이었던 나카이 기타로(1864~1924)는 “숭례문은 가토 기요마사가 출입한 문입니다. 조선 출병(임진왜란) 당시 건축물은 남대문 외에 두세 개밖에 없는데, 파괴하는 것은 아깝지 않은가”라며 설득했고, 하세가와 사령관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보존된 것이라고 합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은 일제 강점기 지정 번호를 그대로 답습하여 숭례문을 ‘국보 1호’로 다시 지정했습니다.

국보의 번호가 의미가 없다고 하지만 1호의 의미는 남다른거 아닐까요? 우리가 얼마나 일제의 잔재를 청산했을까요?


▶남대문과 동대문은 일제의 전승기념문 https://youtu.be/X76kuygQo_A

 

식민지 유산을 극복하지 못한 우리 역사


이런 것이 바로 청산해야할 식민지 유산입니다. 역사는 어떨까요? 정말 안타깝게도 해방은 되었으나 우리 역사는 광복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일제는 1910년부터 한국 고대사를 말살하기 위해 수십만권의 사료를 수거해 폐기해버리고, 38년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35책 2만4천쪽에 이르는 <조선사>를 새로 발간했습니다.


▶일왕의 조선사 편수회 조직 (1분) https://www.youtube.com/watch?v=GSv0gyHZmqI


‘조선사’ 의 발간 목적은 고조선부터 역사책에서 지우려는 것이었습니다. 일본보다 앞서는 한국사를 없애버린 것입니다.



쓰다 소키치, 이마니시 류, 이나바 이와키치, 스에마쓰 야스카즈 등 일본 사학계 주류를 형성한 식민사관 창도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이론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학문적·인격적 스승으로 떠받들었고 있는 우리 학자들이 있습니다.


△ <조선사편수회 사업개요>에 등재된 이병도. 왼쪽은 수사관보 시절의 이병도, 오른쪽은 촉탁 시절의 이병도



식민사관 창도자들과 연줄을 통해 도제관계로 엮인 한국사학계의 태두인 서울대 인맥의 이병도와 고려대 인맥의 신석호, 동국대 인맥의 이기동, 서강대 인맥의 이기백 등 주류 사학계의 내로라하는 '사단'은 여전히 스승들에 대한 의리를 굳건히 지키며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식민사학자 이마니시류(今西龍)밑에서 편수관 보좌를 하여 식민사학자가 된 이병도(李丙燾)는 광복 후 서울대학 교수가 되어, 조선사 35권을 중심으로 국사대관(國史大觀)을 편찬하여 대한민국 국민을 가르쳤습니다.


또 한명이 있습니다. 조선사편수회에서 편수관으로 한국사 말살에 참여했던 신석호가 광복 후 1946~1949년까지 3년간 국사관의 초대 관장을 맡았고 1949~1965년까지는 문교부 장관 겸직으로 관장에 재직했습니다. 일본 총독부 조선사편수회 편수관 출신이 거의 20년 동안 대한민국 국사관의 초대 관장을 맡아 한국사 연구의 초석을 놓았으니 한국사가 식민사관의 연장선상이 되었을 것은 당연합니다.


 광복 70년이 되었는데도 한국사 교과서가 일제 식민사관의 관점을 벗어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현재 국사편찬위원장으로 국정교과서 편찬을 주도하고 있는 김정배는 신석호 제자입니다.  노태돈은 이병도의 제자입니다.  조선사편수회 출신 신석호와 이병도의 인맥이 현재 국사편찬위의 위원으로 포진해 있습니다. 과연 국정교과서에도 지금과 같은 인적구성이면 바뀔 수 있을까요? 지난 70년 동안 이병도, 신석호 계열의 조선사편수회 학파가 국사편찬위의 주도권을 장악해왔습니다. 그러니 바꿀려고 해도 바꿀수가 없는 겁니다.


 

▶국민세금 50억 꿀꺽... 본색 들킨 식민사학 (2015.4.17 국회) 

https://youtu.be/n5jKjRw3t8k


또한 그 사람들이 동북공정에 대항하는 동북아역사재단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으니 동북아역사재단도 내놓은 결과물이 모두 동북공정에 기여하고 일본 극우 침략사관에 기여하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참고영상]


1) 글로벌 한국사 복원(이덕일 강연 2015년 5월) : 조선총독부 사관의 극복 https://www.youtube.com/watch?v=86kSHll1N6Y


2)  길거리 역사 특강 이덕일 11월 1일 : 현재 교과서와 학계가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알수 있습니다.  https://youtu.be/XOUclZGepU8




그럼 한국사 교과서는 무엇이 문제인가?


조선총독부 사관의 프레임이 그대로 남아있는 우리 한국사 교과서


식민사관의 핵심 이론은 한국사의 시간과 공간을 축소하는 두 가지 관점으로 귀결됩니다. 일제는 한국사 시간을 축소하기 위해서 단군 조선을 부인하고, 고조선을 한반도 북부로 가둬 놓았습니다. 한사군이 요동에 있었음을 입증하는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허위로 몰아서 한국사를 1500여 년의 짧은 역사로 축소시켰습니다. 일제는 한반도 북부가 한사군이라는 중국의 식민지였고 한반도 남부는 임나일본부란 일본의 식민지였다고 강변함으로써 식민지는 너희 한국인의 운명이니 받아들여라는 메시지를 주입하여 독립의지를 말살시키려 했습니다.




몇가지 식민사관의 핵심 논리를 좀더 보도록 하겠습니다. 


단군신화


"단군조선은 학술용어가 아니니 재단은 단군조선 용어를 쓰지 말라“
 "동아시아 문화지도를 제시하여 고조선의 특별성을 약화시키자" (2011년 7월 '한국고대역사지리 7차 토론회 동북아역사재단 편찬위원)


2015년 현재에도 주류사학계 교수들은 단군조선을 없애려고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오늘 사퇴한 최몽룡 교수의 기사를 보시면 아시겟지만 이병도의 후예입니다. 그는 고조선은 나라가 아니라는 깜짝 발언을 JTBC 손석희 앵커와의 인터뷰에서 했습니다. 그의 최근 논문을보면 단군왕검이 아니라 위만조선부터가 실제 우리나라 첫나라라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지금 주류사학의 사관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다른 학자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역사를 빼앗아 가려고 하는데 우리는 왜 지키려 하지 않는가?


웅녀와 웅씨녀의 차이

초디 환웅천황이 동방 백두산으로 문명을 개창할 무렵, 백두산에서 송화강에 걸친 만주 일대에는 원주민인 웅족熊族과 호족虎族이 어렵 생활을 하며 굴속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범을 토템으로 하는 호족은 남권男權 중심의 부족으로 사나우면서 약탈에 능했고, 곰을 토템으로 하는 웅족은 여권女權중심의 부족으로 어리석고 고집이 세었습니다.


당시 환족이 발달된 문물을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던 웅족과 호족은 자신들도 밝은 백성[桓族]이 될 수 있기를 환웅께 간절히 청하였다. 이에 환웅은 신교의 가르침으로 두 부족을 포용하고자 그들에게 햇빛을 보지 말고 100일을 기원하면 인간답게 될 것이라는 가르침을 내려주었습니다.

환웅이 내려주신 신령한 쑥 한 심지와 달래 스무 개를 먹으며 웅호 두 족속은 수도생활에 들어갔는데, 호족은 참지 못하고 뛰쳐나갔고 웅족 여인은 굶주림과 추위를 참고 계율을 지킴으로써 '21일(三 · 七日)'만에 삼신의 광명의 도를 깨우쳐 마침내 참된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환웅이 동방문명 개척단과 웅 · 호족의 결합에 관한 고대역사가, 외래 종교에 찌들어 있던 고려의 승려 일연에 의해 곰과 호랑이의 '사람으로 태어나기 위한 기도 운동'이라는 유치한 신화로 윤색되어 버렸다. 그 뒤, 일제 식민사관에 의해 더욱 근본이 부정되고 엉뚱하게 해석되어 '한민족의 뿌리사'가 지금까지 왜곡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단군신화는 일제시대 일본이 만든 용어입니다.

단군신화라는 말로써 단군은 신화속 인물이 되고 고조선은 상상의 나라가 되어버립니다.




상고사를 없애버린 조선사 편수회 발간 조선사의 비중.현재 교과서에서 고조선이 2쪽도 되지 않는 것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다.


2000년이 넘는 기간동안 존속했던 나라가 고조선인데 얼마나 강력했던 나라겟습니까? 어떻게 통치를 하길래 이천년을 가겟습니까? 그걸 못믿겠다고 고조선은 멸망하기 직전에 국가체계를 갖추었다고 하는데 지금 학계의 얘기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은 유물유적이 나오고 있음에도 말입니다.


위만조선의 문제


위만은 연나라 사람입니다. 전국시대에 연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는 고조선(정확히는 번조선)의 준왕에게 투항하였다가 1년뒤에 세력을 키워 준왕을 친 ...어떻게 보면 배은망덕한 자입니다. 중국 사람인데 준왕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상투를 틀고 조선옷을 입고 투항합니다. 이 위만이 철기를 들고와서 우리나라 철기가 발전했다는 논리가 우리 교과서에 있습니다.





위만 조선이 철기를 본격적으로 수용하고, 중앙 정치조직을 갖춘 나라로 성장했다는 역사적 기록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기록을 교과서는 기술하고 있을까요?


위만정권에 대한 평가
- [사기]에서도 분명히 위만을 연나라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 안정복(1712~ 1791) 동사강목에서 '위만은 나라를 찬탈한 도적이다'
-  임시정부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용(1858~1932)은  '한명의 강도에 불과하다'
- 단재 신채호 선생 '(위만조선은) 우리의 변강 침략사로 다루어야


종래 우리 국사학계에서는 고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이 동일한 지역(한반도 북부)에서 차례로 교체된것으로 가르쳐왔으나 위만조선은 한낱 '변방침략'에 지나지 않습니다.
 

위만이 있어야 한사군이 있습니다.
위만조선이 존재해야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는 역사기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위만을 꼭 넣는겁니다. 위만과 위만의 수도였던 왕험성은 평양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한사군 한반도설이 성립할 수 있으니까요




원래 위만정권의 위치입니다.


한사군은 한반도에 있었을까?
우리 교과서는 한사군 한반도설을 한번도 놓친적이 없습니다.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했는데 한반도 북부에 설치했다는 겁니다. 그중 핵심인 낙랑군은 평양땅에 대동강유역에 설치했다는 겁니다. 이걸 확고히 하기 위해서 낙랑유물발굴단을 일제가 만듭니다. 그리고 가까 유물을 넣었다가 파내기를 반복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점제현 신사비입니다. 낙랑군에는 25개 현이 있습니다. 이걸 입증하면 되거든요 그래서 낙랑군 점제현이라고 적힌 신사비를 조작합니다.


  

갈석산아래에서 비석을 떼어다가 배에 싣고 와서 대동강유역에 비석을 세우고 지나가는 아이를 불러다가 사진을 찍습니다. 그리고선 거기가 점제현이라고 널리 알리는 겁니다. 70년대까지 국사교과서에 점제현 신사비가 실렸습니다. 낙랑군이 거기에 있었음을 알리는 지표가 되었습니다. 그럼 지금은  어떨까요? 그게 사기라는 것이 북한학계를 통해서 밝혀지고 우리나라 연세대 손보기 교수도 우리나라에서 나는 재료가 아닌 비석에 의문을 품고 거짓임을 밝혀냅니다.




그러나 우리 학계는 위조 여부를 조사하거나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냥 묻어가느 겁니다. 침묵하면서 점제현신사비를 아직도 쓰고 있습니다.


2015년 4월 17일 국회 질의



 

** 신사비에 대해서 그 진위여부가 현재 연구가 진행되지는 않고 있다는 동북아역사지도 편찬위원의 답변. 학계는 위조 여부를 조사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냥 쓰는 겁니다.


 

이병도 저 국사 교과서 (일조각 1970년대)

낙랑이 420년간 이땅에 존속하였다는 글의 느낌을 보십시오. 식민지가 되어서 우리가 계몽되니 좋다는 느낌을갖게 하는 글입니다. 점제현 신사비를 통해서 낙랑의 위치를 알게 되었다고 사진까지 실었습니다.


또한 나왔던 유물들의 조작가능성을  발표한 방송이 있습니다.



◆2011년 SBS 스페셜 '역사전쟁-금지된 장난, 일제 낙랑군 유물조작'

https://www.youtube.com/watch?v=1L1QYO1g27Y

** 다시 올린 주소네요. 어디선가 SBS채널의 내용을 블라인드 쳐버렸네요.


낙랑군의 25개현이 있는데 그 지명은 단 하나의 지명도 한반도에 위치하게 나타난 문헌이 없습니다. 오히려 중국 요동지방 요서지방 낙하 북경 등으로 나타나는 지명이 수두룩 합니다.


*『漢書』「薛宣 열전」‘師古曰:「樂浪屬幽州」
(『한서』「설선 열전」, 사고가 말하기를 “낙랑은 유주에 속해있다.)
*『後漢書』「崔駰 열전」, 長岑,縣,屬樂浪郡,其地在遼東 .
(『후한서』「최인 열전」, 장잠현은 낙랑군에 속해 있는데 그 땅은 요동에 있다)
*『後漢書』 「光武帝 本紀」 ‘樂浪郡,故朝鮮國也,在遼東’
(『후한서』「광무제본기」낙랑군은 옛 조선국이다. 요동에 있다.)
☆『史記』 「夏 本紀 太康地理志」,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사기』「하 본기 태강지리지」낙랑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으며, (만리)장성의 기점이다)
*『晉書』「地理志」樂浪郡조-遂城:秦築長城之所起
*『明史』 「地理志」 永平府 : 昌黎-西北有碣石山.東南有溟海)(『명사』 「지리지」 영평부 조, 창려 서북에는 갈석산이 있고 동남에는 어두운 바다가 있다)


◆낙랑 한반도에 있었다 쓴 중국사서 하나도 없어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57232.html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고 한다면 위와 같은 지도가 성립합니다. 현재 한나라(han dynasty)를 검색하면 이런 지도들이 수두룩 나옵니다. 이 지도로 동북공정은 성공한 것입니다. 이런 중요한 것을 우리가 도와주고 있는 것입니다.


임나일본부와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

8개의 검인정 교과서가 있지만 대부분 비슷한 기술을 하고 있습니다.  고구려는 태조왕(재위 53∼146년), 백제는 고이왕(〃 234∼286년), 신라는 내물왕(〃 356∼402년) 때 고대국가가 형성된 것을 내용으로 하는 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든 교과서가 거의 비슷합니다. 국정교과서일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왜  국조는 나오지 않고 100년에서 300년이 지난후의 왕들을 기록하고 있을까요?


 “고구려는 1세기쯤 태조왕 때 이르러 한 단계 높은 국가 발전을 이루었다”,
“3세기 (백제의) 고이왕은…지배 체제를 정비하여 중앙 집권적 고대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4세기 후반 (신라의) 내물왕은 밖으로 활발한 정복활동을 벌이고 … 김씨의 왕위 세습권을 확립하였다”


 삼국에 대한 설명은 건국의 시기(고구려, 백제, 신라 각 기원전 37년, 18년, 57년)와 시조만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 고대국가의 본격적인 발전 시점을 늦춰 잡음으로써 고구려는 건국 후 약 90년, 백제는 약 250년, 신라는 약 400년 정도가 ‘암흑기’처럼 보이게 하는 기술입니다.


여기에는 학계의 정설처럼 되어 있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의 영향에 따른 것이다. 불신론은 쓰다 소키치 등 일본의 학자들이 일제강점기에 정립한 이론입니다.  한마디로 삼국사기에 기록된 초기 삼국의 기록은 허구이며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이 불신론은 4세기 중·후반 한반도 남부를 고대 일본이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기 위한 일제학자들의 ‘창작물’입니다. 백제, 신라, 가야 등 한반도 남부의 고대국가들이 건국 초기에는 강력한 체제를 갖추지 못한 상태라고 우겨야 임나일본부의 존재가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해방이후라 임나일본부설을 우리 교과서에 넣지는 못하지만 임나일본부설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장치인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믿을 수 없다는 불신론은 여전히 우리 교과서 속에 남아 있습니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그리고 낙랑국을 물리친 대무신왕도 배워야 합니다. 얼마나 무시무시한 정복군주였으면 무신왕도 아니고 대무신왕이라고 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왕들은 태조왕 (6대)이전이기 때문에 다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를  다시한번  정리해보겟습니다.


- 고조선 역사는 인정못한다.
- 단군은 신화다.
- 위만조선이 정통성을 이었다. 한나라에 멸망당했다. 
- 한사군 한반도설 : 한나라 식민지 한사군을 한반도내에 설치했다.
- 임나일본부 : 4세기에서 6세기 2백년간 한반도 남부는 왜가 점령했다.

->일본역사보다 한국사가 짧다. 고대로부터 한국은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의 연속이었다.



최근 몇년새에  발간된 식민사관 관련 책들입니다. 얼마나 식민사관이 청산이 안되었으면 이런 책들이 나와야 하는  것일까요?


 이 중에 먼저 책을 읽어보려고 한다면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이덕일) - 엉터리사학자 가짜고대사(김상태) - 식민사관의 감춰진 맨얼굴(황순종) 정도를 읽어보시면 좋을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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