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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다피 사망 속보] 카다피도 사망 직전에는 목숨 구걸...

by 바로요거 2011. 10. 21.

[카다피 사망 속보] 카다피도 사망 직전에는 목숨 구걸...

[포토] 얼굴 피투성이된 카다피의 최후

 

[42년 독재자의 최후] '왕중왕' 자처했던 독재자, 마지막엔 목숨을 구걸했다

카다피 집권서 최후까지
27세때 쿠데타로 정권 잡고 反서구 선봉 역할 자처하며 팬암기 폭파 등 테러 자행, 서방선 "중동의 미친개" 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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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 이한수 기자 | 입력 2011.10.21 03:30 | 수정 2011.10.21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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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장 철권통치를 휘두르다 지난 2월 시작된 리비아 국민의 저항에 부딪혀 수도 트리폴리를 내주고 잠적했던 무아마르 카다피(69) 전 국가원수가 고향 시르테에서 최후를 맞았다. 리비아 국가과도위원회(NTC)는 카다피가 시르테 근처에서 생포됐으며 체포 당시 입은 부상이 악화돼 사망했다고 20일 밝혔다.

42년 독재자 고향에서 최후

↑ [조선일보]청년 카다피 - 카다피는 27세 청년이던 1969년 쿠테타로 정권을 잡았다.

42년 카다피 시대는 지난 2월 15일 동부 벵가지에서 반정부 시위가 시작된 지 8개월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42년 6월 7일 리비아 중부 지중해 연안 도시 시르테에서 태어난 카다피는 벵가지 대학에서 지리학을 공부하다 군에 투신했다.

그는 아랍 민족주의자였던 가말 압델 나세르 전 이집트 대통령을 본보기로 삼아 자유장교단을 결성하고 27세 육군 대위 때인 1969년 9월 1일 벵가지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리비아 아랍공화국'을 세웠다. 그는 당시 국왕 이드리스 1세가 치료차 터키를 방문한 사이 군대를 동원해 권력을 잡았다. 쿠데타 직후 장군으로 진급하라는 권유에 그는 "리비아군은 국민의 지휘만을 받는다"면서 '대령'에서 진급을 멈췄다.

카다피는 정권을 잡은 후 쿠데타 동지들을 차례로 숙청하고 1인 체제를 구축했다. 자기 부족인 카다파족을 중심으로 정권 기반을 구축하고 저항하는 세력은 철저히 응징했다. 400억 배럴이 매장된 석유 자원은 지지 세력을 규합하는 힘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그는 엄청난 국부(國富)를 통해 가족과 자신은 치부했지만 국민의 요구에는 귀를 닫았다. 당초 민주화 요구로 시작됐던 리비아 시위가 금세 내전 양상으로 확산된 것은 '42년간 피를 부른 철권통치'라는 배경 때문이었다.

反서구 선봉 "중동의 미친개"

카다피는 집권 이후 반(反)서구의 선봉을 자처했다. 그는 1972년 미국·영국 등 서방에 맞서 이집트·시리아 등과 함께 전 세계 아랍 민족이 단결하는 단일 아랍국가 건설을 추구했으나 주변국의 호응이 약해 실패했다. 1975년에는 인민이 직접 통치에 참여해 권력을 행사한다는 정치 이론을 담은 '그린북'을 통해 자기 정치 이론을 설파하고 1977년 '자마히리야(인민권력)' 체제를 선포했다.

1980년대에는 서구에 대한 테러리즘을 호소했다. 1986년 서베를린 미군 나이트클럽 폭탄 테러 사건, 1988년 270명이 사망한 팬암 항공기 폭파 사건 등 서방 세계에 대해 잇따른 테러를 벌여 당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그를 '중동의 미친개'라고 불렀다. 2003년 이후에는 팬암기 사건 유족들에게 보상을 약속하고 대량살상무기 포기를 선언하며 서방과 유연한 관계를 갖기도 했으나 그는 국제사회에서 불편한 존재였다.

2009년 처음 참석한 유엔 총회장에서 그는 당초 예정 시간 15분을 넘겨 90분간 연설하면서 서구는 식민주의의 대가로 아프리카에 72조7700억달러를 보상하라고 요구했다. 안전보장이사회를 '테러 이사회'라고 부르면서 유엔헌장을 찢기도 했다. 2009년 카타르에서 개최된 아랍 정상회의에서는 스스로를 '아프리카의 왕중왕'이라고 불러 빈축을 샀다.

집권 기간 중 최소 5차례 암살 위협을 받으며 일정한 곳에서 잠을 자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카다피는 지난 8월 21일 트리폴리 함락 때도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그의 은신처로 고향 시르테와 사막 도시 사브하 등이 거론됐지만 두 달 가까이 그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왕중왕'을 자처했던 카다피는 나토의 무인기 공습과 NTC 시민군의 지속적인 공격에 더 이상 숨거나 항전하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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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수 독재자 카다피, 마지막 순간은>

연합뉴스|이성한|입력 2011.10.21 01:24|수정 2011.10.21 01:33

 

(런던=연합뉴스) 이성한 특파원 = 리비아를 42년간 철권 통치했던 무아마르 카다피가 20일 결국 반군의 마지막 공세에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카다피의 사망 당시 상황은 아직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BBC 등 외신들은 반군 사이에 돌고 있는 말들을 인용해 카다피 최후의 순간을 전하고 있다.

지난 8월 트리폴리가 함락된 이후 카다피의 고향인 시르테는 카다피 세력의 마지막 집결지였다.

 

 

 


지난 2주간 국가과도위원회(NTC)는 시르테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고 카다피 세력을 해안 쪽으로 밀어내는데 성공했다.

살아남은 친 카다피군은 19일 시르테의 북서 지역에 있는 2구역에 남아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며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사방으로 죄어오는 불안감을 느꼈기 때문인지 20일 이른 아침 카다피군 일부가 반군의 저지선을 뚫으려 시도했다.

카다피의 핵심 측근과 그의 아들 무타심 카다피를 태운 것으로 알려진 무장 차량은 NTC 저지선을 돌파하려 했다.

이 무장 차량에 카다피가 타고 있었는지, 아니면 카다피를 도망하도록 주의를 돌리기 위한 차원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 때 나토군의 폭격기가 이 무장 차량을 공격했다고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전했다.

카다피가 두 다리에 심한 상처를 입고 생포됐다는 초기 보도가 있었지만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AFP는 카다피가 숨어 있었던 곳으로 알려진 콘크리트로 된 하수구의 사진을 공개했다.

이 콘크리트 하수구 주변에는 파란색 글씨로 아랍어로 `이곳이 카다피, 쥐가 있던 곳이다...신은 위대하다'라고 적혀있다.

반군의 한 젊은 군인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카다피가 숨어있던 구멍을 발견했는데 카다피가 총을 쏘지 말라고 호소했다"고 자랑했다.

이 젊은 군인은 카다피에게 빼앗은 금으로 된 권총을 자랑스럽게 흔들어대기도 했다.

NTC 군인들은 이날 카다피의 시신이라는 선명하지 않은 영상을 보면서 공포를 쏘고 차량의 경적을 울리는 등 축제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알 자지라 방송은 땅바닥에 끌려가는 카다피로 보이는 사진을 보도했다.

NTC 공보 장관은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카다피의 시신은 미스라타로 옮겨졌다고 말했다.

ofcourse@yna.co.kr(끝)<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종합]리비아 과도정부, 카다피 사망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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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 정진탄 | 입력 2011.10.21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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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폴리·워싱턴=AP 로이터 신화/뉴시스】정진탄 기자 = 42년 동안 리비아를 철권통치했던 무아마르 카다피(69) 전 국가원수가 20일 자신의 고향 시르테에서 사망했다.

카다피는 중동을 휩쓴 민주화 시위 '아랍의 봄'으로 사망한 첫 번째 지도자다.

마무드 지브릴 리비아 과도정부 총리는 이날 카다피 전 국가원수가 시르테에서 사망했다고 공식 확인했다.

지브릴 총리는 수도 트리폴리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우리는 이 순간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카다피는 사망했다"고 밝혔다.

 

 


카다피는 시르테에 있는 건물 내에서 자신의 지지세력에 둘러싸여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애초 카다피는 리비아 남부사막 깊숙이 은신해 새 정부에 맞서 저항할 것으로 예상됐었다.

이날 알자지라 TV는 카다피 시신이 NTC군들에 의해 거리에서 끌려가는 모습을 전했다.

알자지라 TV는 셔츠가 벗겨진 반나체의 카다피 시신을 보여줬다. 카다피의 얼굴은 피로 얼룩지고 머리 옆 부분에 총상을 입었다.

알 아라비야 TV는 카다피의 시신이 시르테 인근 도시 미스라타에 도착했다고 보도했다.

카다피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수도 트리폴리와 시르테, 바니 왈리드 등에서는 '신은 위대하다'는 외침 함께 축포가 쏘아 올려졌다.

또 차량들은 경적을 울리고 리비아인들은 거리에서 서로 껴안았다. 리비아 지도자들은 시르테 함락 이후 '해방'을 선언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리비아 과도정부는 카다피가 사망했음을 미국에 통보했다고 미 정부 관리가 밝혔다.

이 관리는 NTC 측에서 리비아 주재 미 관리들에게 카다피 사망 소식을 전했다고 말했다.

한편, 카다피 사망 과정에서 리비아 전 국방장관인 아부 바크르 유니스도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또 카다피의 아들 무타심도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

NTC의 모헤메드 부라스 알리 알 마크니 사령관은 카다피가 시르테 전투에서 부상으로 사망한 지 수 시간이 지난 뒤 무타심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알 마크니 사령관은 NTC군이 카다피의 다른 아들 사이프 알 이슬람이 은신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르테 소재 한 곳을 포위했다고 말했다

chchtan7982@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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