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두(두창,마마) 역사에 관한 이야기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127) 천연두
조선일보 | 주경철 서울대 교수·서양근대사 null
입력 2011.09.09 23:07 | 수정 2011.09.16 23:12
수개월에 걸친 포위와 전투 끝에 마침내 수도가 함락되었을 때 아스텍 황제 몬테수마와 그의 계승자를 비롯하여 주민의 절반이 죽었다. 운하는 시체들로 가득찼다.
시내로 진격해 들어간 코르테스는 "시체를 밟지 않고는 발을 디딜 수도 없다"고 썼다.
사실 이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침략자들의 군사 공격이 아니라 천연두였다.
유럽인들이 아스텍 제국에 근접했을 때 이들보다 먼저 병원균이 시내로 들어가서 심각한 전염병이 창궐했던 것이다.
콜럼버스의 항해 이후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에 들여온 각종 병균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구대륙과 신대륙은 만 년 이상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세균의 종류도 다를 수밖에 없고, 당연히 사람들의 면역 체계도 다르게 진화해 왔다.
천연두는 여러 차례 유럽 대륙에서 크게 유행했지만 16세기에는 안정 단계에 들어가서 일종의 풍토병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렇지만 신대륙 주민들에게 천연두균은 전혀 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낯선 병균이었다.
당시 병의 양태도 극심하여, 이 병에 걸린 사람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고름집이 잡혀 움직일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나갔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곰보자국이 나거나 맹인이 되었다.
특히 발병할 때까지 잠복기가 10~14일이나 되는 이 병의 특징 때문에, 실제 감염되어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건강해 보이는 환자가 스스로 멀리 피난가면서 병을 퍼뜨렸다.
이로 인해 남북 아메리카 대륙 전체로 이 병이 급속히 퍼진 것이다.
의학사가(醫學史家)들의 추정으로는 당시 멕시코에서 천연두로 사망한 사람이 1800만명에 달한다. 전 세계적으로 보면 16세기 중 천연두 사망자가 8000만명에서 1억명 사이라고 한다.
당시 세계 인구가 약 5억명으로 추산되므로 거칠게 표현하면 세계 인구의 5분의 1이 이 병으로 사망한 셈이다. 분명 천연두는 세계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 병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세계보건기구(WHO)는 천연두를 완전히 박멸된 병으로 선언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더 위험한 상황이 닥칠 수도 있다.
사람들이 이 병균에 대한 면역체계를 잃어가는 상태에서 만일 특정 국가 혹은 테러 집단이 천연두균을 생물학전 무기로 사용한다면 정말로 가공할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만반의 대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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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두 바이러스와 인권 ‘깊은 관계’
한겨레 | 입력 2011.06.17 20:50
지난달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보건기구(WHO) 총회의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실망을 금치 못하고 있다. 이들 중에는 필자와 같이 인권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도 포함되어 있다. 바리올라, 즉 천연두 바이러스의 균주를 없앨 것인가에 관한 결정이 또 몇 년 뒤로 미뤄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연두 바이러스와 인권 사이에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나? 바리올라의 미래와 지구상 모든 인간의 미래가 불길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너선 터커가 쓴 < 천벌: 과거와 미래의 천연두 위협 > 의 첫 장 "처형을 기다리는 괴물"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흉포한 죄수가 애틀랜타의 중범죄 교도소에 독방 구금된 채 처형을 앞두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을 고문하고 죽였던 이 집단학살자는 전세계적으로 펼쳐진 장기간의 추적 끝에 체포되었다. 이 죄수가 사형선고를 받았음에도 수감당국은 사형을 집행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놓고 설왕설래를 거듭하고 있다…."
천연두만큼 역사에서 오래되고 공포의 대상이었던 역병도 없을 것이다. 일단 감염되면 치사율이 30%에 달하고, 설령 죽지 않더라도 얼굴에 얽은 흉터가 평생 따라다니는 무서운 돌림병이 아니던가. 중세의 흑사병과 제1,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사망자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사망자를 발생시킨 질병, 일반 서민으로부터 강희제, 루이 15세, 조지 워싱턴까지 모든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던 병이었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에 퍼뜨린 재앙이기도 했고 그 때문에 역사상 최초의 제노사이드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을 정도다. 오죽했으면 "호환, 마마(천연두), 전쟁보다 더 무섭다" 운운하면서 불법 비디오 단속을 했을까.
필자는 개인적으로 사람들이 속한 세대를 가르는 몇 가지 기준으로 사회를 바라보곤 한다. 그중 하나가 어깨에 천연두 예방접종 자국이 있는지 여부다. 필자 세대만 해도 어릴 때 거의 대부분 접종시술을 받았지만 공식적으로 1979년부터 이 제도가 없어졌다. 그러니 우리나라에서 갓 서른을 넘긴 사람들은 진짜 포스트 근대에 속한 새로운 경험집단,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일종의 분수령이 되는 세대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한다. 하지만 이들에겐 천연두에 대한 면역이 거의 없다. 전세계적으로도 마찬가지다. 바로 이 지점에 천연두의 '사형집행'을 둘러싼 논란의 핵심이 존재한다. 만에 하나 천연두가 다시 창궐한다면 그 즉시 대재앙으로 번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세계보건기구는 1950년대 말 천연두를 퇴치하기로 결정한 후 가열차게 국제캠페인을 벌였다. 아마 이 일만큼 전세계가 합심하여 노력했던 사업도 없을 것이다. 1977년 10월26일 소말리아의 메르카에서 마지막으로 더는 발병이 보고되지 않자 세계보건기구는 1980년에 그 유명한 결의안 'WHA 33.3'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전세계 온 인민들이 천연두로부터 해방되었음을 엄숙히 선언하는 바이다…." 인류 역사상 인간이 어떤 중요 질병을 인위적으로 완전히 근절시킨 최초의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세계 각국이 연구용 바이러스 균주를 보유하고 있던 것이 문제가 되었다. 당시 약 60여개 국가가 보관중이었다고 한다. 세계보건기구의 설득으로 많은 나라에서 이 균주를 없애기 시작했다. 그러다 영국에서 큰일이 터졌다. 버밍엄의대에서 보관하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의료사진기사가 사망하고 그 일로 연구 주임교수가 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 후 우여곡절 끝에 미국 애틀랜타의 질병통제센터(CDC)와 시베리아에 소재한 콜트소보의 국가 바이러스·생명기술연구센터(일명 벡토르), 이 두 곳이 천연두 바이러스의 공식 보유기관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미국에 451개, 러시아에 120개 샘플이 삼엄한 경계 아래 보관되어 있다.
세계보건기구의 원래 계획대로라면 1993년 말에 이들 바이러스가 모두 파괴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미국으로 망명한 러시아의 한 고위 인사가 구소련에서 천연두를 생물무기로 개발했었다고 증언하는 바람에 바이러스를 연구용으로 계속 보관해야 한다는 견해가 강하게 대두되었다. 그때부터 이른바 '폐기론'과 '보유론' 진영 간의 일대 논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 후 1999년 6월30일을 영구폐기일로 결정했지만 이것조차 또 연기되었다. 그러다 2001년 9·11 사태가 터지면서 이 논쟁은 질적으로 전혀 다른, 폭발력이 강한 감정적 격론으로 변해버렸다. 보유론자들은 이미 천연두 바이러스가 잠재적 테러분자들의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미래를 위한 예방조처로 연구용 균주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란이 벡토르연구소 직원들을 채용하려 했던 사례를 꼽기도 한다. 폐기론자들은 어차피 바이러스의 유전자 지도가 다 알려져 있으므로 균주를 보관하지 않더라도 연구가 가능하다고 본다. 예상치 못한 사고로 바이러스가 유출될 가능성도 걱정한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바이러스를 없애면 국제적으로 생물무기 사용을 확실히 금지할 명분이 생기고 생물무기의 반인도적 범죄성을 부각시킬 수 있다는 논리도 편다.
바리올라는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생물테러 병원체'로 지정되어 있다. 윌리엄 맥닐과 쌍벽을 이루었던 국제역사가 L. S. 스타브리아노스는 1999년에 출간된 < 전세계 통사 > 의 제7판 서문에서 천연두 바이러스가 곧 폐기될 사건을 인류 발전의 의미심장한 이정표로 기렸다. 결국 그는 바리올라의 완전한 폐기를 목격하지 못하고 타계했고, 논쟁은 이 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확실한 것은 이제 과학, 기술, 생명 문제를 빼고 인권을 논하는 게 불가능해졌다는 사실이다. 근대문명이 낳은 역설인 불확실한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가 짊어져야 할 운명이 아닌가 한다.
조효제/성공회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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