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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사 바로알기

동북공정보다 더 무서운 시조(始祖)공정

by 바로요거 2010. 1. 20.

동북공정보다 더 무서운 시조(始祖)공정
기자는 천년 후 후손에 의해 추존된 왕일 뿐, 기자조선은 허구
 
성훈 컬럼리스트
본 글은 아래와 같은 신년특집 기획시리즈의 제(2부)입니다.
(1부) 우리민족의 백두산과 천지는 원래 어디인가?
(2부) 동북공정보다 더 무서운 시조(始祖)공정


<한단고기>의 기록에 따르면, B.C 2333년 조선을 건방(建邦)한 단군왕검 이전에 오천년의 역사가 더 있었다 한다. 그것은 7분의 한인(桓因)에 의해 3,301년(또는 63,182년) 동안 통치된 한국(桓國)과 18분의 한웅(桓雄)에 의해 1,565년간 다스려진 배달국(倍達國)이 그것이다. 

B.C 3898년 한웅(桓雄)께서 태백산 신단수에 내려와 나라 이름을 배달(倍達)이라 하고 도읍을 신시(神市)라 했고 하늘에 처음으로 제사지냈다. 이것이 개천(開天)으로 그 뜻은 ‘세상을 다스리도록 내려 보내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개천(開天)은 단군왕검이 아닌 한웅과 관계되는 용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단군왕검과 관계되는 용어는 건방(建邦)으로, 단군왕검께서 조선이란 나라를 세움을 건국(建國)이라 하지 않고 건방(建邦)이라 함은, 조선은 하나의 작은 국가가 아닌 연방제에 의한 대제국이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양력 10월 3일 개천절(開天節)은 분명 재고되어야 한다. 음력 10월 3일 건방절(建邦節)로 해야 기록에 맞는 것이다.
 

 

 

▲   양력 10월 3일 개천절 국가행사를 하고 있는 장면. 너무도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다.

중국의 삼황오제는 모두 동이족 

우리는 중국의 조상인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삼황(三皇)이란 통상 태호복희(太皞伏犧), 염제신농(炎帝神農), 황제헌원(黃帝軒轅)을 일컫는 말이고, 오제(五帝)란 황제헌원의 후손인 소호금천(아들), 전욱고양(손자) 제곡고신(증손), 제요도당(고손:요임금) 그리고 제순유우(순임금)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중국의 조상이라는 이 삼황오제가 모두 동이족이라는 사실이다. 

1) 태호복희(太皞伏犧)
배달국에 5대 태웅의한웅(太虞儀桓雄)의 12번째 막내아들이 바로 태호복희(太皞伏犧)로 중국의 삼황오제에 첫 손가락에 꼽히는 인물이다. 즉 태호복희는 동이족인 것이다. <태백일사> 기록에 따르면, “복희는 신시에서 태어나 우사의 자리를 세습하고 뒤에 청구(靑邱)와 낙랑(樂浪)을 거쳐 마침내 진(陳)에 옮겼다.

후예는 갈리어 풍산(風山)에 살았으니 역시 풍(風)을 성씨로 가졌다. 뒤에 갈라져 패(佩), 관(觀), 임(任), 기(己), 포(庖), 이(理), 사(姒), 팽(彭)의 여덟 가지 성이 되었다. 지금 산서성의 제수(濟水)에 희족(犧族)의 옛 거처가 있다. 임(任) 숙(宿) 구(句) 수유(須臾)의 나라는 모두 여기에 모여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먼저 풍산(風山)이 어디인지 알아보기로 하겠다. 풍산은 황제헌원이 풍산을 지나 자부선생을 만나 삼황내문을 얻은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過風山見紫府先生得三皇內文). 풍산은 <수경(水經)>의 ‘하수(河水)’주에 보면 어디인지 잘 알 수 있다.

过河东北屈县西。河水南迳北屈县故城西。北十里有风山,上有穴如轮,风气萧瑟,习常不止。当其冲飘也,而略无生草,盖常不定,众风之门故也。风山西四十里,河水南出,孟门山与龙门山相对。(北屈縣 : 春秋时晋屈邑,汉置北屈县,后魏省,故治在今山西吉县东北二十一里, 《左传庄公二十八年》晋外嬖梁五与东关嬖五言于献公曰,蒲与二屈,君之疆也,《杜注》二屈,今平阳北屈县,或云二当为北。)

(중요부분만 번역) 하수(황하)가 남쪽으로 흐르는데 산서 북굴현 서쪽을 지난다. 북쪽 십리에 풍산이 있는데, 꼭대기에 굴이 있어 바람이 세게 불며 그치지 않는다. (북굴현 : 현 산서성 길현 동북 21리) 즉 풍산은 산서성 임분시 서쪽 황하변에 있는 산인 것이다.
 

 

 

▲  산서성은 하북성 서쪽으로 황하변에 있다. 

 

 

▲   황제가 자부선생에게 삼황내문을 얻을 때 지나간 풍산은 산서성 황하변 길현 북쪽에 있는 산이다.  상당(장치시)는 산서성 임분시 바로 동쪽에 있는 지역이다.  

 낙랑(樂浪)은 어디인가?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중요한 기록 중의 하나가 바로 복희가 거쳐온 낙랑(樂浪)이라는 지역이다. 낙랑은 한사군의 핵심인 낙랑군이 있던 곳이다. 이곳이 바로 번조선의 도읍인 창려(昌黎: 왕검성의 하나)이며, 바로 고구려의 관문인 요동성이 세워지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태강지리지>에 의하면 낙랑 수성현은 장성이 시작되는 곳(長城起所)이라 했으니 낙랑이 어디인지를 밝힘은 참으로 중요하다 하겠다.

낙랑은 유주의 일개 군으로 <한서지리지>에 그 설명이 나와 있는데 위치가 어디인지 추적할 수 있는 자료는 패수현(浿水縣)과 대방현(帶方縣)이 있다. 참고로 <한서지리지>에 기록된 유주는 요동군, 요서군, 우북평군, 상곡군, 어양군, 낙랑군, 현토군 등 7개 군이 속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고대 유주는 현 산서성 남부이며 그 근거의 열쇄가 바로 요서군에 기록되어 있는 고죽성인 것이다.

(乐浪郡) 武帝元封三年开。莽曰乐鲜。属幽州。户六万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万六千七百四十八。有云鄣。县二十五:朝鲜,讑邯,浿水(패수)水西至增地入海。莽曰乐鲜亭。含资,带水西至带方入海。黏蝉,遂成(수성),增地,莽曰增土。带方(대방)驷望,海冥,莽曰海桓,列口,长岑,屯有(둔유),昭明,高部都尉治。镂方,提奚,浑弥,吞列,分黎山,列水所出。西至黏蝉入海,行八百二十里。东暆,不而,东部都尉治。蚕台,华丽,邪头昧,前莫,夫租。

(辽西郡) 秦置。有小水四十八,并行三千四十六里。属幽州。户七万二千六百五十四,口三十五万二千三百二十五。县十四:且虑,有高庙。莽曰鉏虑。海阳,龙鲜水东入封大水。封大水,缓虚水皆南入海。有盐官。新安平。夷水东入塞外。柳城,马首山在西南。参柳水北入海。西部都尉治。令支,有孤竹城(고죽성)莽曰令氏亭。肥如(비여),玄水东入濡水。濡水(유수)南入海阳。又有卢水,南入玄。莽曰肥而。宾从,莽曰勉武。交黎,渝水首受塞外,南入海。东部都尉治。莽曰禽虏。阳乐,狐苏,唐就水至徒河入海。徒河,莽曰河福。文成,莽曰言虏。临渝,渝水首受白狼,东入塞外,又有侯水,北入渝。莽曰冯德。CB63。下官水南入海。又有揭石水、宾水,皆南入官。莽曰选武。 

 

 

▲    <한서지리지>에 나와있는 유주의 7개 군을 지도에 표시하면 위와 같다. 요서군을 밝혀주는 자료가 바로 백이.숙제의 고죽성이다.

 

 

▲   이곳이 요서군임을 밝혀주고 있는 백이.숙제의 묘는 산서성 최남단 황하 굴곡지점에 있다.

기자조선의 허구와 수유(須臾)는 어디인가? 

그리고 산서성 제수(濟水)에 희족(犧族)즉 복희족의 옛 거처가 있다 했고 그곳에 수유(須臾) 등의 나라가 있었다는 기록인데, 수유라는 이름은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번조선의 왕이었던 6명의 기씨(箕氏)와 아주 관련이 많은 지역이다. 수유가 나오는 기록을 찾아보기로 하겠다.

“<단군세기> 36세 매륵단군 : BC 653년 단제께서 수유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정벌케 하였다. 이에 연나라 사람이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제나라 사람들이 크게 일어나 고죽(孤竹)에 쳐들어왔는데 우리의 복병에 걸려 이기지 못하고 화해를 구걸하고는 물러갔다.”이 기록에서 수유는 고죽(孤竹)과 가깝게 있고 연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단군조선을 쿠데타로 무너뜨린 북부여의 해모수는 조력자인 수유후 기비(須臾候 箕丕)를 번조선의 왕으로 삼는다. 해모수는 기비가 죽자 아들인 기준(箕準)을 번조선 왕으로 봉하는데, 이곳을 나중에 도적떼인 위만이 차지한다. 기준은 도적 위만에게 쫓겨 번조선을 잃고 해(海)로 들어가고 나중에 한왕(韓王)이 된다.

이천년이 넘는 위대한 조선의 역사를 반토막내고 등장한 허구의 기자조선의 실체는 다름아닌 기자의 먼 후손 중 6명이 번조선에서 말대 6왕(箕氏: 기후-->기욱-->기석-->기윤-->기비-->기준)을 한 것 뿐이다. 기자는 현인(賢人)일 뿐으로, 정치가나 군인이 아니기 때문에 나라를 세운 적이 없는 인물이다.

 

 

▲   평양에 있는 기자의 묘. 이것이야말로 망국의 반도사관의 극치이다.

 
기자가 왕이 된 이유는 주 무왕이 조선으로 망명한 기자를 조선왕으로 봉한다는 기록 때문이고, 또 하나는 기준이 위만에게 패해 해(海)를 거쳐 韓 땅에 가서 한왕(韓王)이 되면서 성을 기(箕)씨에서 한(韓)씨로 바꾸고 기자(箕子)를 문성대왕(文成大王)으로 추존(追尊)하면서 한씨의 시조로 삼는 것이다. 한국의 청주 한씨는 기자와 후손인 기준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 지역이 바로 청주(靑州) 지역으로 상당(上堂: 산서성 長治시)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실제 왕이 된 적도 없이 그렇게 추존된 기자를 단군조선의 뒤를 이어 천 년간이나 존재한 기자조선을 세운 왕으로 보는 것은 명백한 역사왜곡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  

 

 

▲   수유의 대략적인 위치는 황하 북부 제원시 일대와 산서성 남부 낙랑군 일대로 보인다.
그리고 제수는 제원시와 온현을 지나서는 심수가 가로막고 있어 산동성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갈 수 없는 강이다.



산서성 제수는 어디인가? 

산서성 제수(濟水)란 현 하남성 제원(濟源)시를 지나 황하로 들어가는 강인데 중국 백과사전의 설명을 먼저 보기로 한다. 濟水: 济水发源于河南省济源市王屋山上的太乙池。源水以地下河向东潜流七十余里,到济渎和龙潭地面涌出,形成珠(济渎)、龙(龙潭)两条河流向东,不出济源市境就交汇成一条河,叫水,至温县西北始名济水。济水流经河南、山东两省入海。

제수는 하남성 제원시 왕옥산 위의 태을지에서 발원한다. 원래 물은 지하수로 동쪽으로 70여리를 흘러가다 두 물줄기가 제원시 외곽에서 합쳐져 하나로 되어 온현 서북까지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참고로 제수는 하남, 산동을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으나 제원시와 온현을 흐르는 강은 심수가 가로막기 때문에 그렇게 흐를 수가 없다.) 

즉 제수(濟水)는 연나라 장수 위만이 번조선으로 망명하기 위해 건넜다는 추수(溴水)이며, 그 강은 단군조선과 연나라의 경계이면서 고구려의 남계인 패수(浿水)인 것이다. 즉 제수(濟水) = 추수(溴水) = 패수(浿水)인 것이다. (그 근거에 대해서는 3부에서 다루기로 한다)

제수(濟水)의 제자는 백제의 제자에서 유래되었다 하니 백제의 하남 위례성이나 한성은 아마 이 제원시 근방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낙랑군에는 고구려와 관계되는 패수현이 있고, 또 백제와 관련되는 대방현이 있으니 더욱 그렇다. 대방은 백제의 옛 땅(故地)가 아니겠는가? 


(3부)에서 이어집니다.

기사입력: 2010/01/02 [20:59]  최종편집: ⓒ 뉴스웨이브

출처: http://www.newswave.kr/sub_read.html?uid=79370§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