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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의 역사문화

고조선과 연나라의 경계, 패수는 어디인가?

by 바로요거 2010. 1. 12.

고조선과 연나라의 경계, 패수는 어디인가?

조선과 燕의 경계인 패수(浿水)는 어디인가?

(2부) 위만이 건넌 추수 = 패수는 황하북부 하남성 제원시 일대

성훈 컬럼리스트

본 글은 아래와 같은 시리즈의 제(2부)입니다.
(1부) 동북공정보다 무서운 시조(始祖)공정
(2부) 조선과 연의 경계인 패수는 어디인가?

지난 (1부)에서는 태호복희의 발자취를 따라 낙랑과 수유라는 곳이 어디인가에 대해 알아 보았고, 천년 후 후손에 의해 추증된 기자(箕子)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번 (2부)에서는 복희의 후손들이 사는 제수(濟水)는 무슨 강이었는지, 또 그 강이 우리 역사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기자는 은나라 사람으로 백이.숙제와 같은 현인(賢人)이었다. 주무왕이 군사를 일으켜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주나라를 세우자, 중국은 사람 살 곳이 못된다고 하면서 조선으로 망명한 사람이다. 주무왕이 관직을 주겠다는 러브콜을 보냈으나 기자가 응하지 않자, 주무왕은 기자를 조선왕으로 봉한다는 교지를 내린다.

그로부터 약 800년 후인 BC 323년 기자(箕子)의 먼 후손인 기후(箕詡)가 병력을 이끌고 입궁하여(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번조선의 왕임을 자칭하자 단제는 이를 허락한다. 이후 번조선의 왕통은 기욱-->기석-->기윤-->기비-->기준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기준(箕準)이 번조선의 왕으로 있을 때 연나라 장수 위만(衛滿)이 정치망명을 해오게 된다. 

 

 

▲   평양에 있는 기자묘는 역사왜곡을 위한 가짜다.  산서성 남부나 하남성에 살던 기자가 어떻게 대동강 평양에 와서 묻힐 수 있단 말인가? 대동강 평양이 기자와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식민사학의 극치를 보여주는 가짜 유적이다.



위만이 건넌 강은 어디인가?
 
<북부여기> 기록에 따르면, “B.C 209년 진승이 군대를 일으키니 진(秦)나라 사람들이 크게 어지러웠다. 연.제.조(燕.齊.趙)나라의 백성들이 도망해서 번조선에 귀순하는 자가 수만 명이나 되었다. B.C 202년 연나라의 노관이 다시금 요동의 옛 성터를 수리하고 동쪽은 패수(浿水)로서 경계선을 삼으니 패수는 곧 오늘의 난하(灤河)이다. 

B.C 195년 연나라의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니 그의 무리인 위만은 우리에게 망명을 요구했으나 단제(북부여 해모수)께서 이를 허락치 않으셨다. 번조선 왕 기준이 크게 실수하여 마침내 위만을 박사로 모시고 상.하 운장을 떼어 위만에게 봉했다.

B.C 194년 번조선 왕(기준)은 오랫동안 수유(須臾)에 있으면서 항상 많은 복을 심어 백성들이 매우 풍부하였다. 뒤에 떠돌이 도적떼(위만)들에게 패하여 망한 뒤 바다로 들어가더니(走入海, 入于海) 돌아오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 기록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번조선이 연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데, 그 경계가 패수(浿水)라는 사실이다. 패수는 우리 역사에 숱하게 등장하는 아주 중요한 지명으로 조선(朝鮮)과 燕의 경계였고, 漢나라와의 한사군 전쟁지였고 또 고구려의 남쪽 국경(南界)으로 여러 기록에 남아있다. 이러한 패수가 과연 어디일까? 

 

 

▲   지금까지 식민사학계나 재야사학계나 모두 연나라를 북경 근처로 보고 역사해석을 했다.  식민사학은 기준의 행적이 한반도로 향하고, 재야사학은 산동성으로 향하는 것이 다르나 이 두 이론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연나라는 북경 근처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남성에 있어야 맞는 것이다.


 
우선 패수(浿水)가 기록되어 있는 사서를 찾아보면, 우선 <한서지리지>로 유주(幽州)에 속해 있는 7개 군 중 하나인 낙랑군(樂浪郡)에 패수(浿水)현이 있다. 유주는 산서성 남부와 하남성에 걸쳐있는 행정구역인 것이다. 그 결정적 근거로는 고죽국 백이.숙제의 묘가 있는 곳이 요서군이기 때문이다. 

(乐浪郡) 武帝元封三年开。莽曰乐鲜。属幽州。户六万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万六千七百四十八。有云鄣。县二十五:朝鲜,讑邯,浿水(패수)水西至增地入海。莽曰乐鲜亭。含资,带水西至带方入海。黏蝉,遂成(수성),增地,莽曰增土。带方(대방)驷望,海冥,莽曰海桓,列口,长岑,屯有(둔유),昭明,高部都尉治。镂方,提奚,浑弥,吞列,分黎山,列水所出。西至黏蝉入海,行八百二十里。东暆,不而,东部都尉治。蚕台,华丽,邪头昧,前莫,夫租。

또 패수의 위치를 알 수 있는 또 다른 사서로는 <금사(金史)지리지 권5>을 들 수 있다.
“縣四、鎮六: 河內倚。有太行陘、太行山、黃河、沁水、浿水。鎮四武德、柏鄉、萬善、清化。修武有濁鹿城。鎮一承恩。山陽興定四年以修武縣重泉村為山陽縣,隸輝州。武陟有太行山、天門山、黃河、沁水。鎮一宋郭。”

번역을 하면, “하내기(행정단위). 태행단층이 있고, 태행산, 황하, 심수, 패수가 있다. 무덕, 백향, 만선, 청화 등 4진을 두다. 수무현(황화북 하남)에 탁록성이 있다. 승은진이 있다. 흥정 4년 수무현 중천촌을 산양현으로 하여 휘주에 예속시키다. 무척현에 태행산이 있고 천문산, 황하, 심수, 송곽진이 있다.”

위 <금사지리지>에서 말하는 지역은 바로 황하 북부 하남성에 있는 지역들이다. 태행산, 심수, 수무, 무척, 천문산 등은 모두 황하 북쪽 하남성에 있는 지명들이다. 따라서 패수(浿水)도 당연히 황하북부 하남성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정확한 위치를 찾기 위해서는 아래 <위략>의 기록을 보기로 한다. 

 

 

▲     대청광여도로 본 황하 북부 하남성 지역의 지명들이 모두 금사지리지에 들어 있다. 패수(浿水)는 황하와 심수와 같이 있다 했으니 심수 근방에서 찾아야 한다.  과연 패수는 어디일까?



 
<삼국지 위지(魏志)- 위략>의 기록에 따르면, 위만이 번조선으로 망명할 때 건넌 강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漢以盧燕王 朝鮮與燕界於溴水 及反入匈奴 燕人衛滿亡命胡服東渡水
(한(漢)에서 노관을 연왕으로 삼았다. 조선과 연(燕)은 추수(溴水)를 경계로 삼았다. 노관이 배반하고 흉노로 갔다. 연나라 사람 위만이 호복(胡服)을 입고 동쪽으로 추수(溴水)를 건너 망명을 하였다.) 

이 <삼국지 위략>의 내용은 위 <북부여기>의 내용과 같은 것으로, <위략>에 언급된 추수(溴水)는 <북부여기>에 언급된 패수(浿水)와 같은 강을 말하는 것이다. 즉 같은 강을 놓고 연나라에서는 추수(溴水)라 불렀고, 조선에서는 패수(浿水)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추수=패수의 위치는 어디인지 알아보기로 하겠다.

<명일통지(明一統志)>의 기록에 따르면,
溴水在濟源縣 其源有三 一出琮山俗呼白澗水春秋公諸侯于梁此 一出縣西二十里曲陽城西南山 一出陽城南溪俱東南流與瀧水合又東南至溫縣入于黃河
(추수(溴水)는 제원현(하남)에 있다. 물의 근원이 세군데 있는데, 동남류해 롱수(瀧水)와 합해져 동남으로 흘러 온현에서 황하로 흘러 들어가는 강이다.) 

<중국고대지명대사전>의 기록에 의하면,
原山:在河南济源县西北三十里,今名琮山,溴水所出,相连者为莽山,泷水出焉。
(원산은 하남 제원현 서북 삼십리에 있다. 지금은 종산이라 부르는데 추수(溴水)가 나오는 곳이다. 상련자가 망산이라 한다. 롱수가 여기서 나온다.)

즉 패수 = 추수는 제수로 (1부) 제수의 내용과 같은 강이다. 현재는 망하(漭河)로 불리우는 강이며, 추수란 이름도 아직 남아있다.
 
즉 위만이 건넌 추수(溴水)는 바로 황하북부 하남성에 있는 제원현을 지나 온현에서 황하로 흘러 들어가는 강으로, 단군조선에서는 이 강을 패수(浿水)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강은 연나라와 단군조선과의 국경선이었던 것이다. 제수(濟水)라고도 불려 백제와도 관련이 있다. 
 

 

 

▲     중국군사지도에 추수와 롱수가 제원시에서 합쳐지는 것이 표기되어 있다.

 

 

▲   추수 = 패수 = 제수는 현대 지도에 망하로 표시되어 있다. 


위대한 단군조선의 강역은 어디인가?
 
즉 남쪽으로는 황하 북쪽 하남성까지 단군조선이 차지하고 있었단 말과 같은 뜻이다. 그리고 고대 중국의 조상들은 동쪽으로는 발해(대야택:산동성 서쪽)을 넘어오지 못했고, 남쪽으로는 유묘 등 남만이 있어 하남성을 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서쪽으로는 섬서성 서안근처도 제대로 지키지 못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현 서울을 비유로 들자면 고대 중국은 서울시 중구 일대의 땅인 섬서성이나 하남성에서만 살고 있었으며, 중구를 제외한 나머지 땅은 모두 배달의 후예인 단군조선의 땅이었던 것이다. 그 실증적인 자료가 바로 위만이 건넌 강 추수 = 패수가 황하 북쪽 하남성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시황의 만리장성도 거기서 멀지않은 곳에 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   중국북경대학교재의 하나라 형세도에도 하남성 일대만이 하나라로 그려져 있고 나머지 사방은 모두 이족들이다.  특히 서안에 견이가 있다고 그려져 있다.


 
또한 번조선의 도읍인 창려(왕검성)가 왕옥산(패수 발원지) 가까이 있다. 창려는 그 유명한 고구려의 요동성이 있던 곳으로 고구려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그리고 패수는 고구려의 남쪽 경계이다. 

원래 낙랑군 수성현인 창려는 지금의 산서성 원곡(垣曲)시로 이곳이 바로 한사군의 핵심인 낙랑군의 치소(治所)가 있었던 것이 확실시된다. 하북성 창려는 중국의 지명조작을 통한 명백한 역사왜곡이다. 중국은 하남성에 있었던 연나라를 하북성 북경 근처로 보내 만리장성 안쪽은 고대부터 중국의 땅이라는 이론을 내세우고 있으나, 이 얼마나 허황되고 잘못된 이론인지 이번에 추수=패수의 위치가 밝혀짐으로서 명백해졌다고 할 수 있다. 
 

 

 

▲  하남성에서 조그맣게 있던 노,  제, 연나라가 역사왜곡을 위해 옮겨졌다. 특히 연나라를 북경 근처로 옮겨 만리장성 이남은 고대 중국 땅이라는 논리인데, 진시황의 장성은 원래 산서성 남부에 있었다. 이런 식으로 지명이동된 것이다.


 
산서성과 하남성 경계에 있던 낙랑군을 한반도 대동강 평양에 가져다 놓음으로서 우리의 역사 강역을 코도 풀지 않고 중국에 몽땅 내준 식민사학계는 민족의 얼이며 정신인 역사를 말살한 죄가 너무도 크기 때문에 모두 자결해야 마땅할 것이나, 자결은 커녕 일제가 물러간 지 65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일제가 뿌려놓은 식민사학이 이 땅에 이토록 깊게 뿌리 박혀있으니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한국의 식민사학자들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이론과 다른 역사에 대해서는 어떠한 인정도 하지 않으려 한다. 아무리 확실한 역사적 근거를 내놓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번에 필자가 주장하는 추수 = 패수는 조선과 연의 경계로 황하 북부 하남성 제원시 일대에 있었다는 주장도 그들에게는 아무 감흥이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일제가 만들어주고 간 식민사학총서인 <조선사 35권>만이 바이블이기 때문이다.  정신적으로는 일본인인 그들에게 단군이 그들의 조상일 리가 없다. 그래서 지금까지 단군은 신화의 인물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신화의 인물이 세운 나라(조선)가 중국 대륙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었으니 이것은 무엇으로 설명하리요!!!
 
곧 (3부)가 이어집니다.

기사입력: 2010/01/09 [23:22]  최종편집: ⓒ 뉴스웨이브

출처: http://www.newswav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