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의 탄생배경과 태극기의 의미
태극기의 탄생 배경
1. 태극기의 효시
태극기에 대한 고찰 태극기의 효시는 우주시생(宇宙始生)의 근본체인 태극을 상징한 것으로서 이 태극 도형이 나라의 상징으로 여겨진 것은 서기 682년경 신라(新羅) 31대 신문왕 때 부터라고 볼 수 있다. 이는 경북 용담 부락에 있는 감은사에서 발견된 태극도형 조각과 그 좌우편으로 여덞개의 수직 일자홈이 일정한 간격을두고새겨져 있는 길다란 석재품으로 입증되는데 양편 여덞개의 수직선은 8괘(八卦)를 뜻하는 것으로서 서기 682년 경의 작품으로 미루어보아 당시의 사회상은 왕실 즉 정부에서나 시공할 수 있는 작업이었을 것이며, 나라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표시임에 틀림이 없고 그 다음으로 그려인종(高麗仁宗) 때 허재의 석관에서 발견된 도형은 서기 1144년에 새겨진 것으로서 이 태극 도형이 바로 국기적(國旗的) 상징으로 고려시대에도 널리 썼음을 입증한다.
그리고, 현재의 태극기 시조(始祖)라고 볼 수 있는 어기(御旗) 발견은 서울대학교 규장각(奎章閣) "보물도서"에서 나온 것으로 8괘가 문왕후천8괘도 위치 그대로 나타나 있는데 특색이 있고 이는 당시 조선왕조의 어기였다. 또한 통상장정에 들어있는 고려국기는 해군사관학교 도서실에서 발견된 8괘를 생략해서 태극 상징 원형에 4괘만 정사각 모서리에 넣었으며 이 고려국기 역시 서기 1874년 이전에 쓰여진 것이다. 이토록 우리나라 태극기는 그 역사가 매우 길었다.
2. 태극기의 유래
우리나라의 국기가 맨 처음 만들어졌던 조선왕조 시대 때에는 나라의 이름인 '조선'과 함께 '조선국기'라 불렀다. 태극기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을 하던 때부터였다. 18세기 말엽 조선왕조는 관리들의 당파 싸움과 부정부패로 말미암아 나라꼴이 허약해지기 시작하였다. 이런 기회를 노려오던 일본은 마침내 1910년 조선왕조를 송두리째 빼앗아갔다. 이에 격분한 애국자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독립운동으로 일본에 맞섰다. 1919년 3월 1일 정오에 맞춰 서울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 낭독과 함께 전국적으로 대한독립 만세 운동을 펼치기로 하였다. 이날 참여한 모든 국민들은 누구를 가리지 않고 손에 '기'를 들고 나오기로 하고, '기' 제작을 하였는데, 그때만 해도 '조선국기'로 부르던 국기 이름을 일본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태극기'로 부르자고 약속을 하면서부터 새롭게 퍼지기 시작했다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하기 위해 우리나라 애국지사들은 중국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만들고, 국기를 바라보며 독립 의지를 불태웠다. 해방되기 3년전인 1942년 3월 1일에는 한국 임시정부수립 23주년 3.1절 선언문을 발표하였는데, 거기에 국기 이름을 '태극기'로 정하고 그 존엄성을 명분화 하였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다.
「태극기가 국제적으로 사용된 것은 실로 1882년의 일이며, 그로부터 태극기는 한국의 독립주권을 표시하였다. 그러므로 3.1대혁명 발동에 있어서도 여전히 태극기를 썼으며, 그 깃발은 혁명군중의 선혈에 물든 채 적의 총검 위에 꽂혀졌다. 이처럼 태극기는 3.1대혁명의 발동을 위해서도 없을 수 없는 큰 힘이었으니, 한국 주권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는 역사의 빛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태극기에는 부숴질 수 없는 존엄과 인상이 아로새겨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인 살고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한 폭의 태극기를 걸어 놓고 자신이 조국을 잊지 않고 있으며, 나라를 되찾겠다는 민족적 신조를 간직하고 있다는 결심을 표시하여 왔다.」
우리나라에서 국기 문제가 처음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은 1876년에 있었던 병자수호조약을 맺을 때부터였다. 조약을 맺기 1년전에 일본은 우리에게 문호 개방과 통상을 요구하면서 강화도 초지진에 우리의 허락도 없이 군함 운요호를 정박시켰다. 강화도를 지키던 우리 수비병대가 즉각 대포를 쏘며 대항을 했다. 이런 과정에서 군함 운요호에 게양된 일본기가 불타 버렸다. 이 사건은 이듬해 강화도 회담에서 우리정부를 궁지에 몰아 넣었다. 즉, 군함을 허락없이 정박했다 하더라도 국가를 표시하는 일본기를 엄연히 게양하였는데도 불구하고 포격을 하게된 이유를 따지자, 우리 정부는 속시원하게 대답할 길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만해도 우리 정부에서는 국기라는 말조차도 없었으며, 도대체 무엇을 국기라고 하는지 조차도 몰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이때부터 국기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난처한 입장을 눈치 챈 중국은 황준헌이라는 사신을 통해 삼각형 바탕에 용을 그린 중국의 용기를 본받아 국기로 그려 사용할 것을 간섭하기도 하였다. 그후 우리나라와 중국은 아예 국기 만들기 연락 사신을 임명하여 수시로 접촉토록하였는데 우리나라측 사신은 이응준이었고, 중국측은 마건충이었다. 이때만해도 우리나라는 국기에 대하여 마땅한 식견을 가지고 있지 못한 터라 이미 대륙을 상징하는 용기를 가지고 있는 중국으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중국이 우리나라의 국기에 대하여 집요하게 간섭을 하게 된 까닭은 조선왕조의 땅 한반도를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우리나라에서 국기를 만들어야겠다고 나서게 된 것은 1875년에 있었던 일본 군함 운요호 사건 때문이었다. 일본은 일방적으로 우리의 문호를 요구하면서 허락도 없이 강화도에 그들의 군함 운요호를 무단 정박시켰다. 이에 격분한 강화도의 우리 수비병대는 즉각 대포를 쏘며 대응했다. 우리 수비병대와 일본군 사이에 몇 차례 불꽃튀는 교전이 벌어졌으나, 우리 수비병대는 신무기로 대항하는 일본의 군사력한테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우리 수비병대가 가지고 있는 대포의 사정거리는 멀리 나가봐야 칠백여 미터 정도였지만, 일본이 무장한 대포는 그 보다 몇배 멀리 나갈 뿐만 아니라 명중률이 매우 높았다. 그러니 피해는 당연한 우리 수비병대가 클 수밖에 없었다. 우리 수비병대는 35명이 죽었지만 일본군은 겨우 2명 정도밖에 죽지 않았다. 이런 피해를 당하고도 우리는 일본에 대하여 보상 요구 조차하지 못했다. 오히려 일본이 더 피해 요구를 많이 해왔다.
그 이유로는 일본 군함 운요호에 게양되었던 일본기가 우리 수비병대의 대포에 의해 불타 없었졌기 때문이다. 일본군의 트집은 이러했다. 나라를 표시하는 국기를 달고 바다를 운항하는 모든 배들은 전쟁이나 약탈의 의사가 없는 것으로 약속되어 있는데, 강화도 수비병대는 그것을 무시하고 포격을 했고, 더군다나 나라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일본기를 고의적으로 명중시켜 불태웠다는 주장이었다.
국기의 중요성을 모르던 우리로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일본은 수비병대 35명의 목숨을 잃은 보다 더 분노에 차 있었다. 일본기를 대포로 쏘아서 불태운데 대한 응분의 사과와 보상이 없으면 정식으로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행위로 간주하여 이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하겠다니 참으로 답답할 일이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우리 입장에서는 더 이상의 전쟁은 없어야겠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정당한 방어를 하다가 오히려 피해를 더 입은 우리측이 일본기 하나 잘 못 건드려 낭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우리나라는 일본이 요구하는 보상과 함께 문호를 개방하겠다는 수호조약을 맺게 되었고, 국기의 필요성을 수모와 함께 느끼게 되었다
3. 태극기의 도안
지금까지 전해진 바에 의하면 최초의 태극기는 박영효(朴泳孝)가 창안, 도안한 것으로 대부분을 알고 있으나, 시사신보(時事新報)가 발견됨으로써 최초의 태극기는 고종(高宗) 황제가 직접 창안하였음이 밝혀졌다.
최초의 태극기를 소개한 일본발행 1882년 10월 2일자 시사신보
그 기사의 내용을 보면 고종(高宗) 황제가 일본 수신사로 떠나는 박영효(朴泳孝)의 일기 사화기략(使和記略)에도 기록되어 있다. 즉, 4각형태의 흰색 바탕에 폭부분 5분지 2를 중심삼아 태극을 그려 청색과 홍색을 칠하고 네 귀퉁이에 4괘가 바라보도록 만든 새 국기를 임시숙소(고베의 니시무라야) 옥상에 휘날림으로써 국왕(고종)의 명령을 다 받들었노라는 내용이 곧 최초의 태극기를 창안하고 도안하였음을 잘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만들어진 당시의 태극기는 다만 태극을 한가운데 두고, 네 모퉁이에 건(乾), 곤(坤), 이(離), 감(坎)의 4괘를 배치한 것일 뿐, 확고한 규격과 도식을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태극의 음양이나 네 괘의 배치가 통일되지 않아, 어느 것이 올바른 것인지 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보게된 다음해에 정확한 국기를 만들어 쓰게 되었다.
1. 태극기에 담긴 뜻
흰색 바탕은 백의 민족의 순결성과 전통적으로 평화를 애호하는 민족성을 표상하고 태극도형과 4괘는 음(陰)과 양(陽)의 상호 작용에 의하여 우주만물이 생성,발전하는 대자연의 이치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태극기는 민족의 이상과 우주관이 담겨진 나라의 상징으로서 이는 우주와 더불어 길이 길이 발전하고자 하는 우리 겨레의 이상을 집약, 표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태극기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
한 가운데 태극 도형과 4괘(건,곤,감,이)로 이루어진 태극기는 간결하면서도 대자연의 진리를 그대로 나타내고있다.
◎창조 : 우주의 근본인 태극이 음과 양 두 가지의 힘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듯이, 우리 민족의 창조성을 나타내고 있다.
◎발전 : 우리 민족이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주적인 발전을 한다는 뜻이다.
◎자유 : 태극의 이론은 만물이 자연의 원칙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서로 방해하지 않는데 있다. 이는 자유를 사랑하는 우리의 국민성을 나타낸 것이다.
◎평등 : 태극과 4괘가 전체적으로 음과 양이 균등할 뿐만 아니라, 서로 마주보는 관계에 있는 것은 우리의 평등 사상을 말해주는 것이다.
◎발전: 태극 도형의 청, 홍의 음양 곡선은 끝없는 계속을 뜻하는 것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가 무궁하게 발전한다는 것을 뜻한다 .
3. 4괘의 설명
최초 태극기의 4괘는 현재처럼 건(乾),곤(坤),감(坎),리(離)가 아니고 선(選),양(良),진(震),리(離)였다.
태극기에 대한 고찰 태극기의 효시는 우주시생(宇宙始生)의 근본체인 태극을 상징한 것으로서 이 태극 도형이 나라의 상징으로 여겨진 것은 서기 682년경 신라(新羅) 31대 신문왕 때 부터라고 볼 수 있다. 이는 경북 용담 부락에 있는 감은사에서 발견된 태극도형 조각과 그 좌우편으로 여덞개의 수직 일자홈이 일정한 간격을두고새겨져 있는 길다란 석재품으로 입증되는데 양편 여덞개의 수직선은 8괘(八卦)를 뜻하는 것으로서 서기 682년 경의 작품으로 미루어보아 당시의 사회상은 왕실 즉 정부에서나 시공할 수 있는 작업이었을 것이며, 나라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표시임에 틀림이 없고 그 다음으로 그려인종(高麗仁宗) 때 허재의 석관에서 발견된 도형은 서기 1144년에 새겨진 것으로서 이 태극 도형이 바로 국기적(國旗的) 상징으로 고려시대에도 널리 썼음을 입증한다.
그리고, 현재의 태극기 시조(始祖)라고 볼 수 있는 어기(御旗) 발견은 서울대학교 규장각(奎章閣) "보물도서"에서 나온 것으로 8괘가 문왕후천8괘도 위치 그대로 나타나 있는데 특색이 있고 이는 당시 조선왕조의 어기였다. 또한 통상장정에 들어있는 고려국기는 해군사관학교 도서실에서 발견된 8괘를 생략해서 태극 상징 원형에 4괘만 정사각 모서리에 넣었으며 이 고려국기 역시 서기 1874년 이전에 쓰여진 것이다. 이토록 우리나라 태극기는 그 역사가 매우 길었다.
2. 태극기의 유래
우리나라의 국기가 맨 처음 만들어졌던 조선왕조 시대 때에는 나라의 이름인 '조선'과 함께 '조선국기'라 불렀다. 태극기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을 하던 때부터였다. 18세기 말엽 조선왕조는 관리들의 당파 싸움과 부정부패로 말미암아 나라꼴이 허약해지기 시작하였다. 이런 기회를 노려오던 일본은 마침내 1910년 조선왕조를 송두리째 빼앗아갔다. 이에 격분한 애국자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독립운동으로 일본에 맞섰다. 1919년 3월 1일 정오에 맞춰 서울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 낭독과 함께 전국적으로 대한독립 만세 운동을 펼치기로 하였다. 이날 참여한 모든 국민들은 누구를 가리지 않고 손에 '기'를 들고 나오기로 하고, '기' 제작을 하였는데, 그때만 해도 '조선국기'로 부르던 국기 이름을 일본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태극기'로 부르자고 약속을 하면서부터 새롭게 퍼지기 시작했다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하기 위해 우리나라 애국지사들은 중국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만들고, 국기를 바라보며 독립 의지를 불태웠다. 해방되기 3년전인 1942년 3월 1일에는 한국 임시정부수립 23주년 3.1절 선언문을 발표하였는데, 거기에 국기 이름을 '태극기'로 정하고 그 존엄성을 명분화 하였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다.
「태극기가 국제적으로 사용된 것은 실로 1882년의 일이며, 그로부터 태극기는 한국의 독립주권을 표시하였다. 그러므로 3.1대혁명 발동에 있어서도 여전히 태극기를 썼으며, 그 깃발은 혁명군중의 선혈에 물든 채 적의 총검 위에 꽂혀졌다. 이처럼 태극기는 3.1대혁명의 발동을 위해서도 없을 수 없는 큰 힘이었으니, 한국 주권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는 역사의 빛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태극기에는 부숴질 수 없는 존엄과 인상이 아로새겨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인 살고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한 폭의 태극기를 걸어 놓고 자신이 조국을 잊지 않고 있으며, 나라를 되찾겠다는 민족적 신조를 간직하고 있다는 결심을 표시하여 왔다.」
우리나라에서 국기 문제가 처음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은 1876년에 있었던 병자수호조약을 맺을 때부터였다. 조약을 맺기 1년전에 일본은 우리에게 문호 개방과 통상을 요구하면서 강화도 초지진에 우리의 허락도 없이 군함 운요호를 정박시켰다. 강화도를 지키던 우리 수비병대가 즉각 대포를 쏘며 대항을 했다. 이런 과정에서 군함 운요호에 게양된 일본기가 불타 버렸다. 이 사건은 이듬해 강화도 회담에서 우리정부를 궁지에 몰아 넣었다. 즉, 군함을 허락없이 정박했다 하더라도 국가를 표시하는 일본기를 엄연히 게양하였는데도 불구하고 포격을 하게된 이유를 따지자, 우리 정부는 속시원하게 대답할 길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만해도 우리 정부에서는 국기라는 말조차도 없었으며, 도대체 무엇을 국기라고 하는지 조차도 몰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이때부터 국기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난처한 입장을 눈치 챈 중국은 황준헌이라는 사신을 통해 삼각형 바탕에 용을 그린 중국의 용기를 본받아 국기로 그려 사용할 것을 간섭하기도 하였다. 그후 우리나라와 중국은 아예 국기 만들기 연락 사신을 임명하여 수시로 접촉토록하였는데 우리나라측 사신은 이응준이었고, 중국측은 마건충이었다. 이때만해도 우리나라는 국기에 대하여 마땅한 식견을 가지고 있지 못한 터라 이미 대륙을 상징하는 용기를 가지고 있는 중국으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중국이 우리나라의 국기에 대하여 집요하게 간섭을 하게 된 까닭은 조선왕조의 땅 한반도를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우리나라에서 국기를 만들어야겠다고 나서게 된 것은 1875년에 있었던 일본 군함 운요호 사건 때문이었다. 일본은 일방적으로 우리의 문호를 요구하면서 허락도 없이 강화도에 그들의 군함 운요호를 무단 정박시켰다. 이에 격분한 강화도의 우리 수비병대는 즉각 대포를 쏘며 대응했다. 우리 수비병대와 일본군 사이에 몇 차례 불꽃튀는 교전이 벌어졌으나, 우리 수비병대는 신무기로 대항하는 일본의 군사력한테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우리 수비병대가 가지고 있는 대포의 사정거리는 멀리 나가봐야 칠백여 미터 정도였지만, 일본이 무장한 대포는 그 보다 몇배 멀리 나갈 뿐만 아니라 명중률이 매우 높았다. 그러니 피해는 당연한 우리 수비병대가 클 수밖에 없었다. 우리 수비병대는 35명이 죽었지만 일본군은 겨우 2명 정도밖에 죽지 않았다. 이런 피해를 당하고도 우리는 일본에 대하여 보상 요구 조차하지 못했다. 오히려 일본이 더 피해 요구를 많이 해왔다.
그 이유로는 일본 군함 운요호에 게양되었던 일본기가 우리 수비병대의 대포에 의해 불타 없었졌기 때문이다. 일본군의 트집은 이러했다. 나라를 표시하는 국기를 달고 바다를 운항하는 모든 배들은 전쟁이나 약탈의 의사가 없는 것으로 약속되어 있는데, 강화도 수비병대는 그것을 무시하고 포격을 했고, 더군다나 나라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일본기를 고의적으로 명중시켜 불태웠다는 주장이었다.
국기의 중요성을 모르던 우리로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일본은 수비병대 35명의 목숨을 잃은 보다 더 분노에 차 있었다. 일본기를 대포로 쏘아서 불태운데 대한 응분의 사과와 보상이 없으면 정식으로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행위로 간주하여 이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하겠다니 참으로 답답할 일이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우리 입장에서는 더 이상의 전쟁은 없어야겠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정당한 방어를 하다가 오히려 피해를 더 입은 우리측이 일본기 하나 잘 못 건드려 낭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우리나라는 일본이 요구하는 보상과 함께 문호를 개방하겠다는 수호조약을 맺게 되었고, 국기의 필요성을 수모와 함께 느끼게 되었다
3. 태극기의 도안
지금까지 전해진 바에 의하면 최초의 태극기는 박영효(朴泳孝)가 창안, 도안한 것으로 대부분을 알고 있으나, 시사신보(時事新報)가 발견됨으로써 최초의 태극기는 고종(高宗) 황제가 직접 창안하였음이 밝혀졌다.
최초의 태극기를 소개한 일본발행 1882년 10월 2일자 시사신보
그 기사의 내용을 보면 고종(高宗) 황제가 일본 수신사로 떠나는 박영효(朴泳孝)의 일기 사화기략(使和記略)에도 기록되어 있다. 즉, 4각형태의 흰색 바탕에 폭부분 5분지 2를 중심삼아 태극을 그려 청색과 홍색을 칠하고 네 귀퉁이에 4괘가 바라보도록 만든 새 국기를 임시숙소(고베의 니시무라야) 옥상에 휘날림으로써 국왕(고종)의 명령을 다 받들었노라는 내용이 곧 최초의 태극기를 창안하고 도안하였음을 잘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만들어진 당시의 태극기는 다만 태극을 한가운데 두고, 네 모퉁이에 건(乾), 곤(坤), 이(離), 감(坎)의 4괘를 배치한 것일 뿐, 확고한 규격과 도식을 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태극의 음양이나 네 괘의 배치가 통일되지 않아, 어느 것이 올바른 것인지 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보게된 다음해에 정확한 국기를 만들어 쓰게 되었다.
1. 태극기에 담긴 뜻
흰색 바탕은 백의 민족의 순결성과 전통적으로 평화를 애호하는 민족성을 표상하고 태극도형과 4괘는 음(陰)과 양(陽)의 상호 작용에 의하여 우주만물이 생성,발전하는 대자연의 이치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태극기는 민족의 이상과 우주관이 담겨진 나라의 상징으로서 이는 우주와 더불어 길이 길이 발전하고자 하는 우리 겨레의 이상을 집약, 표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태극기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
한 가운데 태극 도형과 4괘(건,곤,감,이)로 이루어진 태극기는 간결하면서도 대자연의 진리를 그대로 나타내고있다.
◎창조 : 우주의 근본인 태극이 음과 양 두 가지의 힘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듯이, 우리 민족의 창조성을 나타내고 있다.
◎발전 : 우리 민족이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주적인 발전을 한다는 뜻이다.
◎자유 : 태극의 이론은 만물이 자연의 원칙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서로 방해하지 않는데 있다. 이는 자유를 사랑하는 우리의 국민성을 나타낸 것이다.
◎평등 : 태극과 4괘가 전체적으로 음과 양이 균등할 뿐만 아니라, 서로 마주보는 관계에 있는 것은 우리의 평등 사상을 말해주는 것이다.
◎발전: 태극 도형의 청, 홍의 음양 곡선은 끝없는 계속을 뜻하는 것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가 무궁하게 발전한다는 것을 뜻한다 .
3. 4괘의 설명
최초 태극기의 4괘는 현재처럼 건(乾),곤(坤),감(坎),리(離)가 아니고 선(選),양(良),진(震),리(離)였다.
그러나 괘의 의미는 똑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고종(高宗) 황제는 최초의 태극기를 그릴 때 4괘의 의미를 동서남북이라고 분명히 언급하였기 때문이다. 바로 "국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역괘(易掛)를 그린 것을 조선의 국기로 정한다"라는 부분이다.
역괘중에 태극기의 네 귀퉁이에 그려진 4괘에 설명을 평범하게 동서남북이라고 강조한 것은 국민 누구나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역괘중에 태극기의 네 귀퉁이에 그려진 4괘에 설명을 평범하게 동서남북이라고 강조한 것은 국민 누구나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4괘가 동서남북을 의미하였다면 태극원은 주역의 음양으로 해석되는 해와 달이 아니라 우주 천체를 으뜸으로 상징하는 하늘과 땅 또는 태양과 지구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런데 현재의 태극기 설명은 주역에 근거하여 무궁한 사상을 주입시키고 온갖 형용사로 상상을 유도하고 있어 4괘와 태극의 문양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국민은 극히 소수에 불과한 실정이라고 한다.
그런데 현재의 태극기 설명은 주역에 근거하여 무궁한 사상을 주입시키고 온갖 형용사로 상상을 유도하고 있어 4괘와 태극의 문양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국민은 극히 소수에 불과한 실정이라고 한다.
태극기에 나타난 민족정신 건곤양괘는 무궁한 정신이다.
"건" 괘는 하늘을 뜻하며, 기면의 왼쪽 부분에 "건" 괘를 배치한다.
"건" 괘는 하늘을 뜻하며, 기면의 왼쪽 부분에 "건" 괘를 배치한다.
"곤" 괘는 땅을 나타내며, 기면은 오른쪽 아랫 부분에 "곤" 괘를 배치한다.
"건,곤" 양괘를 취함은 우리나라의 국운도 천지와 함께 '영원무궁'하자는 무궁의 정신을 표현한것이다.
감리양괘는 광명의 정신이다.
"감" 괘는 달을 나타낸 것이요, 기면의 오른쪽 윗부분에 "감" 괘를 배치한다.
"리" 괘는 해를 뜻하며, 기면의 왼쪽 아랫 부분에 "리" 괘를 배치한다.
"감,리" 양괘를 취함은 우리나라가 언제든지 '달'과 '해'와 같이 영원토록 빛나는 나라가 되자는 광명의 정신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감,리" 양괘를 취함은 우리나라가 언제든지 '달'과 '해'와 같이 영원토록 빛나는 나라가 되자는 광명의 정신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음효 양효는 사괘의 모체로서 "사" 괘는 실상 팔괘 중에서 건, 곤, 감, 리 괘를 채택한 것이며, 태극의 "음,양" 원리가 합치된 것이다.
하나의 괘를 형성함은 3개의 "효"가 합하여 형성되며, "효"는 양효"와 "음효" 이 두가지로 구분되어 있다.
하나의 괘를 형성함은 3개의 "효"가 합하여 형성되며, "효"는 양효"와 "음효" 이 두가지로 구분되어 있다.
"양효"와 "음효"는 기면 네귀에 사괘를 구성하는 모체이다.
"태극기"는 역리학상으로 여러가지 위대한 뜻을 가지고 있는데, 요약 설명하면 평화, 단일,창조, 무궁, 광명의 근본원리와 그 정신이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정신과 우리 민족의 숨결을 간직하고 있는 태극기를 사랑하는 것이 국기에 대한 존엄성을 높이는 길이며 국기게양은 우리 국민이 마땅히 해야 할 도리로서 애국의 실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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