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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꼭 알아야 할 유용하고 세상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차원 높은 정보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본 블로그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잘 간파하셔서 끊임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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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천개벽의 염원이 서린 고부땅

by 바로요거 2009. 10. 26.

 후천개벽의 염원이 서린 고부땅
 


 후천개벽의 염원이 서린 땅, 고부古阜
 
 우종경(본부)
 
 
 신천지의 여명을 알린 갑오동학혁명
 
 동학 주문에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이라 하였으니 나의 일을 이름이라. (道典 3:184:9)
 나를 믿는 자는 무궁한 행복을 얻어 선경의 낙을 누리리니 이것이 참동학이니라. (道典 3:184:12)
 최제우는 유가(儒家)의 낡은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나니 나의 가르침이 참동학이니라. (道典 2:94:9)

 
 “나의 가르침이 참동학이니라.” 이 말씀은 증산 상제님께서, 당신의 무극대도 시대를 선포했던 동학의 이상(후천개벽, 천주님 강세, 무극대도 출현)을 9년 천지공사로써 실현하시게 됨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곧 ‘태을주의 참동학’입니다. 증산 상제님께서 주로 객망리에 계셨던 경자(道紀 30, 1900)년까지의 사건 중 다른 어떤 것보다 큰 사건이 갑오동학혁명입니다. 이 동학이 주는 역사적 교훈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시천주(侍天主) 신앙관이 무엇인가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상제님께서 탄강하신 고부 일대는 갑오동학의 진원지였습니다. 객망리 본댁에서 북쪽으로 10여리 떨어진 곳에 있는 이평면 말목장터는 동학혁명의 최초 봉기장소입니다. 동학혁명의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가 이곳 고부의 한 작은 시골장터에서 발원된 것입니다.
 
 그곳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에는 학동들을 가르치던 훈장이자 당대 지식인이었던 녹두장군(綠豆將軍) 전봉준(全琫準:1854~ 1895)이 그 물줄기의 한 가운데에 있었습니다. 갑오(道紀 24, 1894)년 전라도 고부군(古阜郡)에서 일어난 동학혁명. 당시 배들평 농민 수천 명이 고부로 가기 전 모였던 곳에 큰 감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데, 이곳에서 전봉준 장군은 모여든 농민들에게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과 수탈의 실정을 고발하고 창의흥병(倡義興兵)을 역설했습니다.
 
 당시 전명숙 장군은 상제님과 비록 나이 차이가 열일곱 살이나 났지만, 일찍부터 상제님의 존명을 익히 듣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인(神人)’이라 소문이 나 있던 24세의 청년 상제님을 찾아와서는 거사에 참여해 주시기를 간청하게 됩니다. 하지만 상제님께서는 거사를 만류하셨고, 전 장군은 끝까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과연 ‘시천주’ 신앙의 원주인 되시는 천주님의 말씀조차 그의 뜻을 꺾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내 흉중에 품은 뜻은 나라와 백성을 위해 한 번 죽고자 하는 마음뿐이라.”던 녹두장군의 심중에 새겨진 굳은 결의로써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이렇게 하여 후천 대개벽을 알리는 큰 난리, 동학농민전쟁이 갑오(1894)년 새해 정월로부터 시작되게 됩니다.
 
 
 비운(悲運)의 땅, 고부
 
 난을 짓는 사람이 있어야 다스리는 사람이 있느니라. 최수운은 동세(動世)를 맡았고, 나는 정세(靖世)를 맡았나니 전명숙의 동(動)은 곧 천하의 난을 동케 하였느니라. (道典 2:31:2∼4)
 
 1894년 1월 10일 새벽. 그 새벽은 동학혁명의 불씨가 발화한 새벽인 동시에 새 우주의 여명이 비춰오기 시작한 운명의 시간이었습니다. 말목장터에서 봉기한 고부농민들이 관아를 습격하자, 이 사건이 발단이 되어 결국 그해 7월 23일, 텐진조약으로 비롯된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종국에 가서 지구촌 전체가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껏 왔던 길을 되돌아서 상제님의 진외가(아버지의 외가)인 장문리로 가다보면 해발 35m의 작은 언덕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황토재입니다. 바로 그해 4월 7일 새벽, 동학군과 관군의 큰 전투가 벌어진 현장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전투에는 동학군으로 가담한 백인수 성도를 비롯, 각기 동학접주로 활약한 중형과 아버지를 따라온 16세의 문공신 성도와 15세의 차경석 성도가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문공신 성도와 차경석 성도는 그로부터 약 13년 후 정미년에 상제님을 뵙고 입도를 하게 됩니다.
 
 동학군은 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세를 몰아 정읍·흥덕·고창·무장·영광·함평을 차례로 점령해 나가자, 이에 위기를 느낀 조정은 청국에 출병을 요청하게 되었고, 기회를 엿보던 일본군까지 인천에 상륙하여 조선 강토에 전운이 드리워지게 됩니다.
 
 당시 동학군의 기세를 대변하듯 황토현 전투 기념관과 전적비가 이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적비에는 다음의 노랫말들이 함께 실려 있습니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여기서 파랑새는 외세를, 녹두꽃은 민중의 희망을, 청포장수는 그 당시 외세의 압제와 부패한 지배세력 관리 밑에서 신음하고 분노를 느끼던 민중들을 상징한 것입니다. 

 두승산 자락에 있는 황토현은 또한 고부관아로 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오학지지(五鶴之地)의 혈이라 해서 상학, 중학, 하학, 학전, 학림을 지나 하늘재를 넘으면 장문리, 고부로 들어가게 되는데 객망리에서 약 8km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고부는 당시 호남 곡창지대의 주축을 이루는 거대한 군이었으며, 당시 두승산을 중심으로 펼쳐진 평야 대부분이 고부군이었습니다. 그것은 향교의 규모로도 예측을 할 수 있는데 그 규모가 성균관에 버금갔다고 합니다. 이후 일제가 1914년과 1935년, 두 차례에 걸쳐 조선팔도의 행정구역을 전면 개편하면서 고부군을 부안, 정읍, 고창 등으로 나누어 버리고 조그만 면소재지로 축소해 버립니다. 다만 고부군이 동학혁명의 진원지라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말입니다. 
 지금의 고부를 둘러보면 굉장히 왜소한 마을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곳에 고부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고, 향교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인고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꿈을 먹고사는 어린이들이 뛰어 놀고, 공부하는 시골의 아늑한 학교. 100년 전의 사건이 너무 가슴이 아파 그저 묻어두고 싶어서일까? 그 자리에는 아담한 유치원 건물도 함께 자리하고 있습니다. 지금 발 딛고 서있는 이곳은 참으로 한(恨) 많은 땅입니다. 고부초등학교가 자리한 이곳은 한민족을 말살하려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관아를 경무청으로 현판만 바꾸어 식민통치를 감행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이 민중 수탈과 식민지 정책이 자행된 장소임을 고발하는 비석을 교정 한곳에서 찾을 수 있는데, 보통 사람들이라면 무심코 지나칠 법한 조그만 돌에 ‘고부관아지’라고 새겨져 있을 뿐입니다.

 

 
 천지일월의 홍은(鴻恩)을 갚는 일꾼
 
 대저 이때는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나므로 인심이 소동하여 실로 공포시대를 이루었더라. (道典 5:212:10)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는 통감정치로 조선 식민지화의 수순을 차근차근 밟아가며 정미(道紀 37, 1907)년 8월에는 급기야 조선의 군대까지 해산시켜 버립니다. 그 결과, 해산된 군인들이 지방으로 내려와 결집하여 의병전쟁으로 항거하게 됩니다. 하지만 조선의 강토는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인들의 세상이었습니다. 동학군이나 의병으로 밝혀지면 정식 재판 없이 일본군에 의한 즉결처분으로 형이 집행되던 공포시대에 상제님께서 주요 성도들과 더불어 보신 공사가 ‘진주천자도수’입니다. 이 고부초등학교 자리가 바로 그 공사의 현장입니다. 운산리에서 이곳까지는 40리 길, 약 16km 거리입니다. 일본 순검들이 의병으로 몰아세우고는 상제님을 필두로 21명의 성도들을 굴비 엮듯 묶어서 객망리를 지나 두승산 자락의 황토재와 하늘재를 넘어 압송해 갔습니다.
 
 이 길을 가실 때 상제님의 심경은 과연 어떠하셨을까요? 어린 시절로부터 청년시절, 그리고 대도통을 하시고도 천지공사를 행하시며 무수히 지나다니신 길이었습니다. 가난에 찌든 집안을 돌보시며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니셔야만 했던 아픈 추억과, 구한말 당시에 민초의 삶들을 애통해하시며 흘리시던 눈물, 그리고 광구천하의 큰 뜻을 세우신 뒤에는 유·불·선, 음양참위를 비롯한 모든 글을 읽으시고, 천하유력을 떠나시어 천지공사를 준비하실 때도 거니셨던 길. 그 길을 대우주 통치자 하나님이신 증산 상제님께서 순검들에 의해 끌려가다시피 하셨던 것입니다. 상제님께서는 왜 그렇게 공사를 보실 수밖에 없었는지… 가슴 한켠이 메어져 옵니다.
 
 고부 일대의 성지가 각별한 의미를 갖는 또 다른 이유는 9년 천지공사 기간 중 가장 치열했던 공사의 현장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도전 속에는 객망리와 관련된 내용이 유달리 많이 나옵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무심코 지나쳐 가는 이 길들이 상제님께서 천지공사의 완결을 위해 그토록 바라시고 사무친 일심정성을 기울이셨던 그 성스러운 공사의 현장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곳을 가더라도 상제님의 성령이 함께하심을 느낍니다. 상제님 성수 24세 때 선언하신 광구천하의 큰 뜻을 우리는 얼마나 사무치도록 절감하고 있는가? 상제님 진리를 신앙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다시금 깊은 사색으로 되새겨 봅니다.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천지의 홍은(鴻恩)을 갚지 못했건만, 천지의 원주인이신 증산 상제님께서 친히 인간으로 모범을 보이시며 그에 보은하셨습니다. 그 방법이 바로 도전 속에 있음을 이번 성지순례를 통해 절감했습니다.
 
 우리가 서 있는 곳 모두가 성지(聖地)가 아닌 곳이 없으며, 천지공사 현장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가 깃들어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고스란히 담아놓은 진리의 그릇(道器)이 바로 『도전』입니다. 태사부님과 사부님께서 왜 그토록 도전 말씀 받들기를 강조하셨는지 가슴 절절히 느껴집니다. 이제는 우리가 천지일월의 홍은에 보은할 때임을 다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