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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의 역사문화

잃어버린 한민족사의 연결 고리, 부여사

by 바로요거 2009. 5. 23.

 

잃어버린 한민족사의 연결 고리, 부여사

 

*여기서 동명왕은 고두막한이며 동명왕이 세운부여가 동명부여이다.

그 외 연나부여도 있었으며, 부여사는 고조선에서 고구려를 이어주는 우리 한민족 뿌리역사를 연결해 줄 수 있는 연결고리이기 때문에 부여사를 모르면, 우리 한민족 고대 상고역사의 뿌리를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커버스토리]베일 속 부여사, 그것이 알고 싶다
[뉴스메이커 2006-09-08 10:39]    
인터넷 토론방·역사연구단체 등 새로운 주장 봇물 정통 역사학계 “정확한 사료 통해 실증돼야 인정”

 

 

고구려의 첫 도읍지로 알려진 오녀산성. 우뚝 솟아 만주벌판을 지키던 오녀산성에는 주몽의 꿈이 담겨 있다. 현재 중국 고고학 10대 유적지고 선정돼 있다. <김대진 기자>
잃어버린 한민족의 고리, 부여사. 그 사라진 역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21세기 벽두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각종 인터넷 토론방과 카페, 블로그에선 부여사에 관한 글이 넘치고 감춰진 역사에 관한 새로운 주장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사실 부여사에 관한 주장은 이전에도 꾸준히 제기됐지만 MBC 드라마 ‘주몽’이 촉매제 역할을 했다. 덕분에 이같은 주장이 부쩍 주목받고 있는 셈이다.

다음카페 연구모임 6680여 명 회원

열풍은 온라인 공간이 주도하고 있다. 인터넷 포털 다음의 아고라에선 검색창에 ‘부여 역사’라는 키워드를 치면 무려 3900여 건의 글이 뜬다. 이같은 사정은 또 다른 포털인 네이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밖에 다음카페 ‘우리역사연구모임’은 부여사에 관한 뜨거운 토론을 벌이고 있다. 최근 부쩍 가입 회원 수가 늘어 6680여 명 회원에 게시물만 2만90여 건에 이른다.

비단 온라인뿐만이 아니다. 사단법인 참역사문화연구회는 서울 금천구 독산동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10여 명 정규직원을 가동하고 있다. 부여사뿐 아니라 고조선과 고구려, 백제 등 고대사에 관한 연구와 주장을 잇따라 내놓으면서 교과서 개정운동까지 펼쳐 눈길을 끈다. 최근 일간지에 ‘교과서 내용이 사실이라면 1억 원을 주겠다’는 파격적 광고를 싣기도 했다. 이 단체는 홈페이지(www.history.or.kr)에 교과서 개정 1000만인 서명운동을 벌여 불과 20여 일 만에 500여 명이 동참하는 성과도 거뒀다. 연구회의 김승태 실장은 “실명제로 운영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적잖은 결과”라고 주장했다.

김종서 박사가 주장하는 3~5세기 말의 부여, 백제, 고구려 영역도. 한사군이 한반도를 벗어나 요서지역에 위치한 데다 백제가 중국 본토 일부를 차지한 것으로 묘사됐다. 사진 아래는 고교 국사교과서에 실린 역사지도. <참역사문화회 제공>
하지만 이같은 관심에도 불구하고 부여사에 관해 밝혀진 사실과 연구물은 현재 미흡하기 이를 데 없다. 부여사가 고구려 초기사와 겹치며 고조선에서 비롯된 한민족 역사의 주요 고리라는 점에선 아쉬운 대목이다.

국민 역사인식의 시금석이라 할 고교 교과서는 ‘부여는 1세기 초 왕호를 사용해 중국과 외교관계를 맺는 등 발전된 국가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북쪽으로 선비족, 남쪽으로는 고구려와 접해 있다가 3세기 말 선비족의 침략으로 쇠퇴, 결국 고구려에 편입됐다’고 간단히 기술하고 있다.

부여사에 대한 변변한 개설서도 없다. 국사편찬위원회와 한길사 등에서 쓴 ‘한국사’ 통사, 북한에서 출간한 ‘조선전사’의 부여에 관한 부분이 그나마 이해를 돕고 있을 따름. 국내에서 발표된 부여 관련 논문도 30여 편에 불과하다. 송호정·박경철·유태용 교수 정도가 활발한 글을 쓰는 연구자로 꼽힌다. 그렇다면 이같은 무관심에 가까운 역사적 빈곤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임기환 서울교대 교수는 “문헌이 매우 부족해 고고학적 발굴을 바탕으로 설명해야 하지만 대부분 중국 영토 내에 자리해 어려운 상황”이라며 “국내 연구자도 10여 명에 그친다”고 설명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각종 이설도 대두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참역사문화연구회의 김종서 박사가 주장하는 ‘1000년 왕국 부여설’. 현재 알려진 부여사는 중국과 일본에 의해 심각하게 왜곡됐다는 주장이다. 그는 부여를 한나라와 대등한 관계를 설정한 뒤 조공까지 받은 대제국으로 묘사하며, 부여가 하북성 북부, 요녕성 북부, 내몽고, 동몽고, 동시베리아의 광활한 지역을 지배했다고 주장한다.

참역사문화연구회 ‘1000년 왕국설’

김 박사는 이같은 주장의 근거로 중국 전국시대(기원전 453~기원전 221)의 지리위치와 각 지역 특산물 등을 기록한 ‘사기’ ‘화식열전’을 꼽는다. 이 책은 연나라 북쪽에 부여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부여의 건국 시점도 최소 기원전 221년 이전으로 끌어올려진다.

한나라 황제가 부여왕이 죽었을 때 보냈다는 옥으로 만든 수의 옥갑. <참역사문화회 제공>
그는 또 “연나라는 하북성 중부, 남부지방을 영토로 한 국가이므로 연나라 북쪽의 부여는 하북성 북부, 요녕성 서북부, 내몽고, 동몽고 지방에 있었다”며 “부여 북쪽에는 어떤 국가도 없으므로 그 강역은 시베리아 동부지방에 까지 미쳤을 것”이라고 밝혔다.

부여도 해모수왕이 건국한 북부여, 동명왕(주몽과 다른 인물로 해석)이 북부여 땅에 건국한 부여, 동명왕에게 북부여 땅을 빼앗긴 해부루왕이 동부 연해주로 이동해 건국한 동부여, 주몽이 동부여에서 탈출해 고구려 건국의 기초를 다진 졸본부여, 백제 성왕이 538년 백제에서 국호를 바꾼 남부여까지 다양하다는 것이다.

특히 한나라의 대부여 조공설에 대해선 옥갑(玉匣)을 예로 들었다. 옥갑은 중국 전한(前漢:기원전 206~서기 8년) 시절 황제와 제후왕을 매장할 때 쓴 2498편의 옥편을 가공해 만든 수의. 이 옥갑을 황제가 미리 만들어 현도군 창고에 보관하다가 부여 왕이 서거하면 곧바로 선물로 보냈다는 기록이 단초가 됐다. 삼국시대 역사서인 ‘삼국지’의 이 기록을 들어 금은보화 등의 조공도 뒤따랐을 것으로 유추한다.

그는 또 수학적 위치고증방법을 고안해 한사군이 알려진 것과 달리 한반도 역외에 존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 단군을 신으로 모시는 종교의 일부 논객은 “중국은 한 무제 때 사마천이 ‘사기’를 쓴 이후로 조선에 관해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다. 고조선을 역사에서 지우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부여사를 지우는 것이다”며 의도적 역사 삭제론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이를 두고 네티즌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놀라운 의견이 제기됐다며 정부가 나서 검증해야 한다”는 의견부터 “일개 단체의 주장일 따름이며 종교단체가 개입했을 가능성도 있다”며 폄하하는 태도까지 가지각색이다.

정작 역사학계의 반응도 냉담하다. 송호정 한국교원대 교수는 “역사는 주장만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정확한 사료와 발굴자료를 통해 실증해야 한다”며 이같은 주장을 일축했다. 특히 김종서 박사가 아직 정식으로 학계에 논문을 단 한 편도 발표하지 않아 그의 주장이 힘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김 박사는 “대국민 인식전환이 목표라 소수만 참가하는 학계를 배제하고 저술과 강의를 하고 있다”고만 밝혔다. 2006년 가을을 달구고 있는 부여사 바로알기 운동의 귀추가 주목된다.

정통사학계는 부여를 어떻게 볼까

정통 학계는 부여를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기원후 494년까지 북만주 땅에 있던 예맥족 계통 국가로 인식한다. 비록 연맹체 국가에 머물렀지만 역사상 고조선에 이어 두 번째로 국가체제도 마련한 것으로 본다. 물론 무려 700여 년간 만주를 무대로 활동하던 우리의 고대사라는 데는 의견이 일치한다. 송호정 한국교원대 교수는 “이들은 일찍부터 송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송눈과 송요 평원을 개척했고 서단산 문화라는 수준 높은 문화를 영위했다”고 밝혔다.

국명의 유래는 사슴이나 평야에서 왔다는 설로 압축되지만 영역에 관해선 명확한 기록이 없고 사서마다 차이가 있다. 다만 ‘진서’ 부여전에선 ‘남으로 선비와 접하며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고 기술돼 있다. 이를 두고 송 교수는 “시간 흐름에 따라 영역에 일련의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고 유추했다. 발전단계도 초기부여-동부여-졸본부여(주몽집단)로 해석된다.

부여족의 기원에 대해선 동이족이 동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일부가 발해만 일대 장춘, 농안 지방으로 이동해 건국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건국신화에 따라 북방계통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도 본다. 이는 시조 동명이 스스로를 망인(亡人)이라 부른 데서도 엿볼 수 있다. 특히 부여는 고구려와 달리 중국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삼국지’에선 부여국 4개 지방을 ‘사출도’로 표현했는데 이는 도읍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통하는 길을 의미하기도 했다. 송 교수는 “고구려, 백제, 발해가 그 정신적 자산을 부여에서 찾을 만큼 고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고 밝혀 부여사의 의미를 강조했다.

<오상도 기자 sdo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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