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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사 바로알기

잃어버린 역사의 고리 북부여와 동명성왕 고두막한

by 바로요거 2009. 3. 2.

 

잃어버린 역사의 고리 북부여와 동명성왕 고두막한

 

뿌리 뽑힌 한민족혼
 자, 이제 2장 ‘뿌리 뽑힌 한민족혼’을 보자. 여기서부터 중요한 것은 우리 한민족사의 국통맥이다.
 
 한반도는 ‘지구의 혈 자리’로서 지구촌 해양문화와 대륙문화가 하나로 수렴 통합되는 중심지이며, 선천의 인류문명사가 총체적으로 종결되고 후천 새 역사가 시작되는 개벽의 중심 땅이다.
 
 그런데 최근 한반도를 둘러싸고 동북아에 비상사태가 발생했다. 선천의 마지막 역사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일본과 중국은 동서고금을 통해 지구촌의 어떤 나라도 저지른 적이 없는, 남의 역사를 통째로 강탈하여 제멋대로 왜곡하고 먹어치우는 과오를 범하고 있다.
 
 한민족은 환국-배달-조선의 삼성조시대가 지난 후 열국시대 이래 중국 한족(漢族)과 일본에 의한 상고(上古) 역사의 왜곡으로 민족사의 뿌리가 단절되어 그 상처가 심히 깊더니…. (道典 1:1:7)
 
 우리의 상고사는 중국과 일본에 의해 너무도 오랫동안 왜곡과 말살의 질곡에 갇힌 채 신음해 왔다. 역사의 맥이 단절되어 천애의 고아 아닌 고아가 된 동방의 한민족! 선천 상극의 인류사에서 강대국들이 저질러 온 온갖 불의가 ‘동북아의 고대사’에 압축되어 있다.
 
 후천개벽을 목전에 두고 동북아 삼국 간에 벌어지고 있는 총성 없는 역사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독도 망언! 벼랑 끝에 서 있는 한민족의 미래! 동북아의 시원역사, 그 진실을 바로잡지 못한 채 오늘날 한민족은 혼 빠진 역사의 주인공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 세계사 속에서 사라진 한국 고대사
 실제로 서양 여러 나라의 역사 교과서에는 고대 한민족의 실체가 단 한 줄도 제대로 나와 있지 않다. ‘한반도의 북부는 한사군을 통해 중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는, 터무니없는 역사가 마치 진실인 양 그대로 유포되고 있다.
 
 캐나다의 밴쿠버에 있는 브리티쉬 콜럼비아 대학의 한국학과 학장 베이커는 ‘고조선과 단군은 뚜렷한 증거가 없으므로 신화라고 단정지을 수밖에 없는, 믿을 수 없는 역사(unreliable history)다’라고 말하고 있다.
 
 ‘역사는 문서를 바탕으로 한다. 중국 서적에서 고조선을 언급하지만 고조선이 한국역사였다는 고고학적인 믿을 만한 문서 증거가 없다. 한사군 이후부터 기록에 있으므로 한국역사는 이로부터 시작한다. 진정한 한국사는 고려부터이다. 그 이전은 하나의 통합된 나라가 아니었고 단지 고구려인, 신라인, 백제인들이 있었을 뿐이다.’
 
 이것이 북미에서 가르치고 있는 ‘한국 고대사의 실상’이다. 이미 동북공정은 캐나다인들의 의식 속에 깊숙이 뿌리박혀 있다. 한국의 역사는 머리와 사지가 절단된 불구의 몸이 되어 환국-배달-고조선으로부터 내려 온 9천년 역사가 ‘1천년 역사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영어의 코리아(korea)가 고려에서 온 것이다. 고려의 창업시조 왕건이 나라 이름을 정할 때 북방의 고구려 유민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고려라고 했다.
 
 그리고 그 전에는 북쪽의 대조영(大祚榮)의 아버지 대중상(大仲象 : 대진국 열황제)이 세운 대진국(大震國 : CE 668~926)과 남쪽의 소위 통일신라라고 하는 후신라의 남북국 시대가 있었다.
 
 또 그 전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사국시대가 있었고, 그보다 앞서서는 열국시대가 있었다. 즉 북부여를 중심으로 백제의 전신인 마한, 가야 땅의 번한, 신라의 전신인 진한, 평양 쪽의 최숭(崔崇)이 세운 낙랑국(樂浪國 : BCE 195~CE 37), 동부여, 동옥저, 동예 등의 여러 나라 시대가 있었다.
 
 낙랑국은 본래 요하지역에 있던 나라였다. 그런데 서기전 195년 12월, 연나라의 인구 증가로 인해 압박이 가해오자 최숭이 백성들을 이끌고 대동강 유역(지금의 평양)으로 이주하여 낙랑국을 세웠다. 흔히 알고 있는 중국의 한 무제가 설치했다고 하는 한사군의 낙랑군과 최숭의 낙랑국은 전혀 다르다.
 
 - 옛 조선은 과연 한나라에게 망했나?
 전국을 통일한 진(秦 : BCE 221 전국통일 ~ BCE 207 멸망)나라가 15년 만에 망하고 난 후, 한 고조 유방(劉邦)과 초패왕 항우(項羽)가 6년 동안 아주 피가 터지도록 싸운다. 결국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고 한(漢 : 전한 BCE 206~CE 8)제국을 열게 되는데, 그 7대 임금이 무제(武帝 : BCE 141~ BCE 87)다.
 
 오늘의 사가들은 북쪽의 흉노를 굴복시킨 한 무제가 자신감을 얻어 동북방의 고조선을 쳐들어왔다, 그리하여 준왕(準王)을 몰아내고 고조선을 멸망시킨 후, 그 자리에 식민지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한다. 마치 준왕이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것처럼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무엇인가?
 
 준왕은 고조선의 서쪽 날개였던 번조선(番朝鮮)의 부단군이었을 뿐이다. 또한 진조선(辰朝鮮)의 마지막 제왕인 고열가(古列加) 단군이 장수들의 거듭된 화란 속에 퇴위하여 고조선 본조시대가 마감(BCE 238년)된 것은, 찬적 위만(衛滿)이 번조선을 점거하여 스스로 왕위에 오르기(BCE 194년) 44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다.
 
 특히 고열가 단군 시절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춘추시대 BCE 722~ BCE 403, 전국시대 BCE 403~ BCE 221)의 혼란기에 처해 있었다. 사실이 그러할진대 당시 한족이 고조선을 위협한다거나 고조선을 찬탈할 여력이 어디 있었겠는가!
 
 - 위만조선의 진실
 그러면 식민주의 사관에 물든 역사학계에서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라고 주장하고 있는 위만조선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위만(재위 BCE 194~BCE 180?)은 본래 중국 한족 출신으로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죽마고우였던 노관의 부하이다. 중원을 평정한 한 고조는 여태후와 더불어 개국공신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이 때 연나라 왕 노관은 흉노로 달아나고, 위만은 조선인으로 변장한 뒤 부하 1천 명과 함께 왕검성에 와서 번조선의 준왕에게 거짓 투항을 했다. 이에 준왕은 덕으로써 그를 받아주고 서쪽 변경을 지키는 수비대 책임자로 임명까지 했다.
 
 그러나 그 곳에서 한족 망명 집단을 이끌고 몰래 세력을 기른 위만은 이듬해 준왕을 배반하고 왕검성을 쳤다. 그리고 나라 이름은 그대로 둔 채 스스로 왕이 되었다(BCE 194). 『삼국유사』에서 말한 위만조선은 바로 우리 민족의 서쪽 영토였던 번조선의 한 모퉁이를 잠깐 강탈하여 지배했던 위만정권에 불과하다.
 
 그런데 현 역사학계에서는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준왕을 잡아먹은 위만 같은 배은망덕한 자가 고조선의 정통을 계승하였다는 것이다.
 
 『사기』에도 분명히 위만을 연나라 사람[燕人]이라고 기록했을 뿐 아니라, 안정복의 『동사강목』에서는 ‘위만은 나라를 찬탈한 도적’이라 했고,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용은 ‘위만은 한 명의 강도에 불과하다[乃一强盜]’고 하였다. 이처럼 위만은 중국 한족의 인물로서, 한마디로 은혜를 원수로 갚은 배은망덕한 떠돌이 도적인 것이다.
 위만정권은 손자 우거왕 때에 이르러 밖으로는 한 무제의 침입과 안으로는 지도층의 분열로 인해 결국 망하게 된다(BCE 194~BCE 108).
 
 - 조선 역사를 부활시킨 동명성왕, 고두막한
 한 무제는 그 여세를 몰아 고조선의 뒤를 이은 북부여로 쳐들어온다. 그런데 당시 북부여의 4대 고우루(高于婁) 단군은 워낙 심성이 유약하여 제대로 맞서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중에 병사하고 만다. 그리하여 우리 조선 민족이 다 넘어가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하는데, 이를 지켜보고 있던 고조선 47대 고열가 단군의 후손 고두막한(高豆莫汗)이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한 무제의 군대를 물리치고 나라를 구한다.
 
 고두막한은 기원전 108년, 졸본(卒本)에서 나라 이름을 ‘북부여’에서 동방의 대광명이라는 뜻의 ‘동명(東明 : 동명부여, 또는 졸본부여)’이라 바꾸고 동명왕으로 즉위한다. 그리고 기원전 87년에는 북부여를 계승하여 조선 역사 부활의 푯대를 다시 세우니, 이분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동명성왕(東明聖王)이다.
 
 이 때 본래 북부여 4대 단군의 승계자인 해부루(解夫婁)가 동쪽으로 가서 가섭원(迦葉原) 땅에다 나라를 세우는데, 동쪽에 있는 부여라는 뜻으로 동부여(東夫餘)라 했다. 해부루는 북부여 4대 단군의 동생이다.
 
 그리하여 고두막한이 북부여의 5대 고두막 단군이 되는데, 그때부터 북부여의 후기시대[後北夫餘]라고 한다. 북부여는 시조 해모수(解慕漱) 단군으로부터 6대 만인 고무서(高無胥) 단군 때에 막을 내린다.
 
 6대 고무서 단군은 딸만 셋이었다. 그 둘째딸이 소서노(召西弩)인데, 고주몽과 혼인을 시켜 사위로 삼아 주몽으로 하여금 북부여를 계승토록 한다. 그리하여 고주몽이 북부여의 7대 단군이 되었으며, 그 후 기원전 37년에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로 변경하여 고구려 700년 역사의 창업 시조가 된 것이다.
 
 이것이 고조선이 멸망한 후 열국시대로 들어서는 과정이다.
 
 - 왜 중국인들은 부여사를 말살했을까?
 북부여가 단군조선을 계승하였다. 이것이 한민족 고대사의 국통맥을 바로잡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 역사에서는 북부여 역사라는 게 완전 말살됐다.
 
 그 역사의 원형이 『환단고기』 「삼성기」상, 하 두 편과 「단군세기」에 나온다. 「단군세기」에는 47대 단군 역사가 나오고 「북부여기」상, 하에는 북부여의 역사가 나온다.
 
 「북부여기」상에 해모수 단군서부터 역대 단군들이 나오는데, 5대 단군 고두막한이 바로 동명성왕이다. 고두막한은 중국 한족의 침략을 받아 완전히 멸망할 위기에 놓인 우리 동방 조선의 역사를 부활시킨 인물이다.
 
 그런데 중국 한 무제가 고두막한을 죽이려고 덤벼들었다가 참패를 당했다. 한 무제가 패퇴한 대사건, 이것은 중국 역사상 최대의 수치였다. 중국 5천년 역사에서 당태종이 안시성에 와서 양만춘 장군한테 화살을 맞아 눈 빠진 것보다 더 부끄러운 사건이다.
 
 그래서 중국의 역사가들과 국내 사대주의자들이 이 북부여 역사를 완전히 뿌리 뽑아 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민족 역사의 맥, 사통의 허리가 잘려버렸다. 그래서 국통 맥이 연결이 안 된다.
 
 지금 역사학자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부여의 역사를 중국의 사료에 맞추어 꿰매고 있다. 그러니 너덜너덜하다. 이렇게 꿰매면 이런 작품이 나오고, 저렇게 꿰매면 저런 작품이 나오고, 전부 애꾸눈이처럼 찌그러져 버렸다. 그 결과가 바로 다음 주부터 방영하는 주몽이야기다. 이 드라마에서는 고주몽이 해모수의 아들로 나온다. 그게 다 중국 측 사료를 보고 만들어서 그렇다. 해모수와 주몽은 무려 120여년 이상 차이가 난다. 해모수는 북부여의 초대 단군이고 주몽은 6대 마지막 단군 고무서의 사위인데, 어떻게 주몽이 해모수의 아들이란 말인가!
 
 북부여는 단군조선과 고구려를 이어주는 잃어버린 열국시대의 역사의 맥을 이어주는 고리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부여사를 잘 알아야 한다. 우리 한민족을 제대로 알려면, 한민족 정신의 뿌리를 알려면 부여사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왜 이 부여역사의 맥을 가지고 오셨는지를 알 수 있다.
 
 - 부여사에 담긴 간도수의 비밀
 먼저 부여라는 나라 이름을 살펴보자.
 
 첫째, 초대 단군 할아버지의 막내아들이 부여(夫餘)다. 첫째인 태자가 부루(夫婁 : 2세 단군, 재위 BCE 2,240~BCE 2,182), 둘째가 부소(夫蘇 : 구려(원시 고구려, 고리국)에 봉해짐), 셋째가 부우(夫虞 : 진번국(요동의 제후국)에 봉해짐), 막내인 넷째가 부여(夫餘)이다. 단군성조는 막내왕자 부여를 도읍인 아사달의 서쪽인 녹산(鹿山 : 백악산 아사달, 지금의 길림성 장춘)의 제후로 봉한다. 이것이 원시부여, 부여라는 나라 이름의 기원이다.
 
 둘째, 그런데 그 부여의 문화, 부여의 정신, 부여의 역사가 얼마나 큰 영향을 주고 감동을 줬는지, 44대 구물 단군 때 우화충의 반역사건(BCE 426)을 진압하고 나서 국력이 급속도로 쇠약해지자 나라이름을 바꾸게 된다. 나라를 운영하다가 도저히 안 되면 극적으로 모든 걸 일신하기 위해서 나라이름을 바꾸는 경우가 있다. 이번 조선의 고종임금이 그랬고, 그 때 조선도 그랬다. 그래서 조선을 대부여(大夫餘)로 바꾼다.
 
 셋째, 해모수(解慕漱)가 그 대부여의 중심지인 만주 땅에 세운 나라가 북부여(北夫餘)다. 즉 삼조선의 중앙 북쪽만 차지하여 국통을 계승을 했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대부여에서 대 자를 빼고 북부여라고 한 것이다.
 
 넷째, 고주몽이 어릴 때 자라던 나라, 동부여(가섭원부여)가 있다. 사실 북부여와 동부여의 역사는 4대 단군의 차이가 난다. 앞에서 말했듯이 북부여 4대 단군의 계승자였던 해부루가 피난을 가서 세운 나라가 동부여다. 그 역사만 해도 벌써 한 5, 60년 두세대 이상 차이가 난다.
 
 이 밖에도 고두막한이 졸본 땅에 세운 동명부여(졸본부여)가 있고, 또 동부여 멸망 후 마지막 3대 대소왕의 동생이 압록곡 부근에 건국한 갈사(曷思)부여, 대소왕의 종제(從弟)가 고구려에 투항한 후 왕으로 봉해진 연나부(椽那部)부여가 있다. 또 백제 26대 성왕(CE 253~554)이 538년에 도읍을 웅진(곰나루)에서 사비성으로 천도한 후 ‘남부여(南夫餘)’로 국호를 변경하였다.
 
 간도수는 막내도수다. 4,300년 전에 단군성조의 막내아들 부여를 통해 이미 막내도수의 씨알이 떨어진 것이다. 이것이 부여사에 담긴 간도수의 비밀이다. 이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역사 인식이 전혀 안 되고 있다. 이것을 제대로 인식하려면 천지와 더불어 생각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천지 조화성령이 알음귀를 열어준다. 그리하여 간도수의 원 씨가 어디서부터 떨어졌는지, 그리고 이 씨가 어떻게 커서 하나님이 오시게 되는지,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안다.

 

道紀136년 양력 5월 13일 사부님 말씀

월간개벽 2006년 6월호 http://www.greatope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