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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수난의 역사

by 바로요거 2008. 12. 30.

<일제시대 숭례문 '수난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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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 기사입력 2008.12.30 06:52 | 최종수정 2008.12.30 08:42

 

사진 5점이 전하는 생생한 흔적


(서울=연합뉴스) 경수현 기자 = 일제 시대 숭례문의 수난의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일련의 사진이 새해를 눈앞에 둔 30일 공개됐다.

1890-1930년대에 찍힌 이들 5점의 사진은 일제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왜곡하려 했던 흔적들을 여실히 보여준다.

정성길 계명대 동산의료원 선교박물관 명예관장이 소장하고 있던 이 사진들 중 1890년대 말께 찍힌 숭례문은 양쪽 성곽이 살아있고 2층 누각의 태극무늬 창문도 그대로 남아있다.

 

 

 

 

 

 

대신 인력으로 움직이는 궤도차량이 문을 통과하고 있다.
일제가 신사 참배를 강요하기 위해 남산에 신궁(神宮)을 짓고 신궁에서 남대문쪽으로 380여개의 계단을 만들었던 1925년에는 통로에 숭례문을 통한 통행을 방해하려는 듯 흙을 쌓아놓은 모습이 포착된다.

이미 일제는 1907년 숭례문 오른편(현 남대문 시장방향)의 성곽 일부를 허물고 순종의 즉위식에 참석하기 위해 조선 땅을 찾은 자국의 황태자가 숭례문이 아닌 성곽의 허문 통로 부분을 이용하도록 했으며 이후 숭례문 앞에 파출소를 설치하는 등 일반인의 출입도 억제하려했다.

1925-1926년께 찍힌 사진에는 숭례문 2층 누각의 태극 창문 부분이 누구가에 의해 모두 제거돼 있고 담에는 넝쿨이 무성한 상태에서 숭례문 주변에는 전기선이 어지럽게 설치돼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모습이 확연하다.

1935년 전후로 찍힌 두 장의 사진은 오른편에 깔려있던 전차 선로가 무슨 이유인지 왼편으로 이동했음을 확인해준다. 멀리 명동성당(동그라미로 표시된 부분)이 보이는 가운데 일부 건물이 달라진 점에 비춰 두 사진간에 어느 정도 시차는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와 관련, 정 관장은 "숭례문은 조선 시대 유생들이 연초에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빌며 오갔던 민족의 정체성이 담긴 대문"이라며 "일제가 민심 때문에 숭례문을 부수지는 못했지만 의도적으로 정체성을 파괴하려고 조금씩 망가뜨렸던 것을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숭례문의 복원도 중요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숭례문의 의미를 새롭게 다져 정체성을 되찾아 줘야 한다"고 말했다.

evan@yna.co.kr (끝) < 긴급속보 SMS 신청 > < 포토 매거진 > < 스포츠뉴스는 M-SPORT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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