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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법칙*생존법/우주변화의 원리

[월간개벽 2002년 7월호] 마음 닦는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by 바로요거 2009. 2. 28.

월간개벽 2002년 7월호

둘째, 마음 닦는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마음은 실체가 아니다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마음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 마음의 세계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마음이라는 게 실제로 있는 것인가?
 우리는 생활 속에서 종종 마음을 언급하고 있다.
 “난 지금 마음이 언짢아.” “그 사람은 마음이 넓어.”
 상제님께서 “대장부는 뒷구멍이 넓어야 된다.”고 하시며, 마음의 변화무쌍한 경계를 여러 번 지적해 주셨다.
 그렇다면 마음이 실제로 있는가?
 마음은 어떤 실체로 있는 게 아니다. 우리 몸 속 어디에 마음이 있는가? 머리에 있는가? 심장에 있는가?
 마음은 어떤 구체적인 형체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마음이란 무엇인가?
 상제님은 “사람 마음이 천층 만층 구만층이다.”, “마음 얕은 것이 가장 큰 한이 되리라.”고 하신다.
 또한 “앞으로는 마음을 완전히 열고 온 우주와 하나된 경계에서 새 역사를 여는 신문명이 태어나는데, 그걸 도술문명이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지심대도술’의 세계다.” “백성까지도 제 마음을 다 알아 분수를 넘지 않는다.” 등등 여러 말씀이 있다.
 “사람 마음이 천층 만층 구만층이다.”
 이 말씀은 어떤 열려있는 의식의 경계를 이르는 것이다. 마음은 어떤 실체로서 “꼭 요것이다.”라고 꼬집어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현실의 삶을 바탕으로 마음을 닦아야
 
 본래 우주가 태어난 조화세계를 신이다, 도다, 하나님이다, 부처다 등 여러 가지로 얘기한다. 그것을 우리 순수한 한글세계에서는 ‘알’이라고 한다. 태초에 우주가 태어난 생명의 ‘알’이 있었다. 그런데 그 ‘알’에서 마음이 나왔다는 것이다.
 “내 마음이 아프다.” “내 마음이 기쁘다.” 할 때 ‘맘’이란 우주가 태어난 생명의 근원자리 ‘알’에서 왔다. 그러므로 마음은 온 우주가 태어난 생명의 근원이다.
 그런데 그 마음에 무슨 문제가 있어서 닦는다는 것인가?
 닦는다는 것은 이미 더러워진 걸 깨끗하게 씻어낸다는 뜻 아닌가.
 우리의 생명을 움직이게 하는, 우리의 생명을 끌고 나가는 주인이 마음이다. 그런데 그 주인의 깨어있는 경계가 시시각각 다르다. 잘 때와 일할 때가 다르고, 무엇에 집중할 때와 흐리멍덩하게 딴 생각할 때가 다르다. 밥 먹으면서 재미있는 뉴스를 듣는다든가 좋은 영화를 본다든가 할 땐, 뭘 먹고 있는지조차도 잊어버린다. 보는 쪽으로만 정신이 가 있기 때문에 감각이 마비되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 몸 속에서 사물을 느끼고 터득하고, 뭘 배우고 아는 인식 작용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인간의 감각 작용은 너무도 변화무쌍하다.
 태모님께서는 “‘마음 심(心)’자가 무슨 뜻인 줄 아느냐? 이 점 세 개는 유불선이고, 아래로 둥글게 두른 것은 땅이다.”라고 하셨다. 참 멋진 해석이다.
 그러니 마음을 닦으려면, 이 땅에서 현실의 삶을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나를 바탕으로, 불가, 선가, 유가의 가르침을 알아야 된다.
 서양 명언에 이런 말이 있다.
 “나우 앤 히어(Now and here.지금 그리고 여기)”
 생명, 진리, 깨달음, 고통, 자유, 구원, 그 모든 삶의 궁극적인 명제는 지금, 여기를 떠나서는 성립될 수 없다. 곧 인생은 지금 여기서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라는 말이다.
 
 
 감각에 따른 마음의 작용
 
 불가의 유식학唯識學에서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마나식 그리고 알라야식을 얘기한다.
 일반적으로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이 오식五識이다.
 안식은 눈으로 보고 아는 것이고, 이식은 귀로 들어 아는 것, 비식은 코로 냄새 맡아서 아는 것, 설식은 혓바닥으로 맛을 봐서 아는 것, 신식은 온몸으로 느껴서 아는 것이다.
 그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주는 것이 첫 번째 안식眼識이다. 눈으로 강력한 게 들어오면, 그것이 장애물이 되어 끊임없이 괴롭힌다. 주문 읽을 때 집중 못 하고 자꾸 딴 생각으로 빠져버린다. 신유神癒를 하고 신유를 받아보면 그걸 안다. 가장 큰 문제가 음란한 생각, 음기를 품는 것이다. 상제님께서 “무엇을 보되 마음에 두지 말라.”고 하셨다. 무얼 본 게 마음에 걸려있으면, 마치 오장에 음식이 걸려있는 것과 같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온몸으로 느끼는 안이비설신 다섯 가지 감각을 통해 사물이 우리 의식에 들어오는데, 그것이 정상적으로 순화되어 내 생명을 기쁘게 하고, 내 마음을 밝게 해주고, 나를 깨어있게 하고,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경우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그게 전부 마장魔障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오식 다음에 의식이 있고, 일곱 번째 마나식이 있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연결해주는 중간 고리가 마나식이다.
 그리고 제8식이 인간의식의 바탕, 생명 의식의 창고 역할을 하는 알라야식이다. 그걸 장식藏識이라고도 하는데, 장이란 저장한다는 의미다. 우리가 우주에서 태어나 살아온 삶의 전 과정이 의식의 바다인 장식, 무의식에 전부 그대로 기록돼 있다.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수행을 하다보면 어릴 때 생각이 그대로 다 난다. 어릴 때 수행해서 광명통이 터진 사람은, 호연이 상제님과 다니면서 들은 말씀, 본 것을 기억하듯이, 어릴 때 일을 모두 기억한다. 사진이 찍히듯 순수의식에 기록되어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비록 어려서 말은 못해도, 아름다운 노을을 보고 문득 자연과 하나가 됐었다면, 그 때의 장면이 평생토록 잊혀지지 않는다.
 
 
 마음 닦는다는 것의 의미
 
  1) 사물에 대한 인식능력을 높이는 것
 마음 닦는다는 것은, 첫째 사물에 대한 인식 능력을 높이는 것이다. 수행을 통해, 몸의 기운이 수승화강의 과정을 거쳐 정화된다.
 생리학적으로 우리 몸의 기능은 삼초三焦로 나누어진다. 폐, 심장, 머리가 상초上焦이고, 비위 중심의 소화기관이 중초中焦, 방광, 신장 등 배설, 생식하는 기관이 하초下焦다.
 즉 상초에는 신神이 작용하고, 하초에는 신이 생성되는 힘의 근원, 내 몸이 생명활동을 하는 에너지의 근원인 정精이 자리잡고 있다. 그게 내 몸 속의 천지다. 정은 곧 땅이요, 신은 곧 하늘이다. 정신! 인간은 몸 속에 하늘과 땅을 지니고 사는 것이다.
 수행을 통해 우리 몸의 천지 기운이 밝아지면, 사람을 바르게 보고, 사물의 내면과 본성을 보기 시작한다.
 
  2) 본성을 회복하는 것
 둘째, 수행을 하면 모든 생명의 본성인 신성(divinity)을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이 열린다.
 마음은 체와 용으로 나누어 말할 수 있다.
 체란 무엇을 보고 듣고 말하는 등, 주변의 사물과 관계를 맺고 마음이 작용하기 전 단계, 근원 마음이다. 그것을 , 본성이라고 한다.
 “야~, 그래도 걔는 바탕은 착해. 본래 마음은 그런 애가 아니야. 본성은 착해.”
 이런 말에서처럼, 본성이란 ‘본래 성품’이다.
 그런데 모든 생명의 본래 성품은 같은 경계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늘이나, 땅이나, 사람이나, 짐승들이나, 돌멩이나, 흙덩어리나, 흐르는 물이나, 타오르는 불이나, 저 태양과 달, 은하계 별들이나, 그 본성은 모두 똑같다는 말이다.
 본성은 열려있는 우주생명 의식이다. 대우주와 완전히 하나가 돼 있는 환한 불덩어리, 그러면서도 아주 시원하고 의식이 평온해지는 대광명의 경계다. 거기 보면 우주 만유가 다 살아 있다. 천지만물과 하나가 된 일심 경계, 그런 절대 평등의 경계, 절대 순수 의식에 돌아가 머물러야 한다. 이것이 선후천을 막론하고 모든 종교의 핵심 가르침이다.
 이러한 본성에 머무르려면, 그 동안 살아오면서 저지른 모든 죄업을 정화해 나가야 한다. 누군가를 억울하게 했거나 죄를 지었으면, 청수 떠놓고 빌면서 모든 걸 풀어야 한다. 상제님 진리는 해원의 도 아닌가. 해원의 도란 무엇인가? 우주만물의 마음세계를 정화하는 생명정화의 도요 궁극의 자유의 도다. 상제님의 해원의 도를 통해 상생으로 가는 것이다.
 마음 닦는다는 것은, 바로 자기의 죄업을 풀고, 자기의 후천적인 성품 -그걸 기질이라고 하든, 성격이라고 하든, 환경적인 요인 등 여러 구조적인 문제 속에서 형성된 지금의 ‘나’라는 독립된 개체가 갖고 있는 것 - 가운데 문제되는 것을 정화해서, 천지율려의 조화 속에 일체를 이루는 본래의 자기 생명의 모습, 즉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 경계를 불가에서는 불성이라고 한다.
 그 다음, 하나의 개체로서 구체적인 의식활동을 하는 것,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느끼는 걸 정(情, emotion)이라고 하는데, 마음은 동하기 전의 본래의 근원 모습인 본성과, 구체적으로 사물에 동화되어 작용할 때의 감정 둘 다를 포괄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가에서는 “심통성정心統性情”, 즉 “마음은 성과 정을 통섭한다.”고 말한다.
 
  3) 내 몸의 기운을 정화하여 의식의 경계를 넓히는 것
 앞서도 말했듯이, 불가의 유식설에서 말하는 인간의 감정활동에는 오식五識과 의식, 그 다음 의식과 무의식을 연결해주는 통로로서 제7식 마나식, 그리고 내 생명 의식의 거대한 바다와도 같은 바탕인 장식藏識, 알라야식이 있다.
 나무로 얘기하면, 잔가지들이 오식(안이비설신)이고, 잔가지들 아래로 뻗은 줄기가 의식, 의식의 줄기와 뿌리를 연결하는 가운데 큰 줄기가 마나식, 그 다음 뿌리가 알라야식이다.
 뿌리에서 모든 게 뻗어나가는 것처럼, 인간의 말이나 행동, 습관들은 그 사람이 과거에 행해 온 모든 것이 바탕이 되어, 저도 모르게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을 닦으려면 자기의 과거 인생사, 더 나아가 전생부터의 어둠까지 모두 씻어내고, 잘못한 것, 죄 지은 것을 정화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도 기초 작업에 불과하다. 보다 중요한 것은, 실제로 수행을 통해 내 몸 자체를 정화해서 의식의 경계를 넓혀야 하는 것이다.
 수행하려고 눈을 감으면, 처음에는 아무 것도 안 보인다. 안식이 막혀 있기 때문이다. 또 몇 미터 이상만 떨어져 있어도 소리를 듣지 못한다. 냄새도 일정한 거리 이상이 되면 맡지 못한다. 이것이 보통 세속 중생들의 몸이다.
 그런데 수행을 통해 수승화강이 되면서, 내 몸의 음양 기운이 개벽되어 율려도수를 회복하기 시작하면, 혼탁한 음양이 순수음양으로 정화된다.
 그렇게 되면, 눈을 감아도 영적인 신도 경계가 환히 보인다. 또 깊은 밤 주문을 읽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귀에서 뚝 소리가 난다. 귓밥이 스스로 파헤쳐져서 떨어져 버리는 것이다. 또 아주 먼 곳에서부터 소리가 들린다. 히말라야, 알프스 산에 있는 나무들이 바람에 춤추면서 자기들끼리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히말라야, 알프스 산이 여기서 얼마나 먼가. 그뿐이 아니다. 천상 신도세계의 수도원에서 신명들이 주문을 읽으면서 왔다갔다 하는 소리까지 들린다.
 수행한다는 것은 바로 내 의식의 경계가 천지의 대생명과 하나가 되어, 내 생명이 온 천지의 생명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체득하게 되는 경계가 있다.
 정신이 확 깨져서 수도를 잘 하면, 어느 순간 내 몸이 없어진다. 내 몸뚱아리가 온 우주 생명 자체라는 열려있는 의식의 경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 첫 경험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렇게 되면 수행을 하지 말라고 해도 하게 된다.

 

도기 132년 양력 6월 2일 증대 사부님 말씀

 

월간개벽 2002년 7월호 http://www.greatope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