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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환단고기*韓의뿌리

이맥李陌의 태백일사太白逸史(3) -신시본기

by 바로요거 2008. 10. 30.

 

 

글/ 박성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명예교수) 

■환웅은 삼신교의로 민족을 통일하였다

신시神市란 환웅이 세운 나라를 말한다. 일연의『삼국유사』에는 환웅을 환인의 서자라 했고 단군을 환웅의 서자라 했다. 왜 하필 환웅이나 단군이 적자가 아닌 서자란 말인가. 하필이면 서자라고 한 까닭이 있었을 것이다. 서자란 적자가 아니란 말이기도 하고 장자가 아니라 차자 이하란 뜻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삼국유사에서 서자란 말을 쓴 것은 “새로 나라를 세운 건국자”란 뜻으로 해석하고 싶다. 바꾸어 말해서 건국자란 뜻이다.
 
만일 환웅과 단군이 적자도 장자도 아닌데 왕위에 올랐다면 그것은 아버지의 뜻을 거슬리면서 왕위에 올랐다는 것이고 왕조가 교체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태백일사』에서는 환웅이나 단군이 모두 서자라 한 것이며 그들은 스스로 왕위에 올라 정권을 잡았던 것이다. 『환단고기』에서는 환인도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이며 환웅도 하늘에서 지상에 내려왔다고 한다. 단군도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니 이 세 분은 제위를 위양(委讓) 받은 것이 아니라 왕조를 교체한 분들이었다고 해석된다.
 
환국 말기에 호족과 웅족 사이에 갈등이 생겨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 이 혼란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무력보다도 정신의 통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환웅은 양편에 삼신숭배의 가르침을 권고하고 호족이 환웅의 권고에 응하지 않자 마침내 호족을 제거하기로 결심하였다.
 
『삼성밀기』에 말하기를 “환국 말기에 다스리기 어려운 강한 족속이 있어 우환이 되었다. 우환은 원주민인 호족虎族과 이주민인 웅족熊族 사이의 갈등으로 비롯되었다. 환웅은 이 두 족속을 화합하기 위해 먼저 삼신교의三神敎義를 믿도록 권고하였다. 그러나 호족은 이를 듣지 않았고 웅족만 환웅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위의 글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원문을 간추린 것이다. 신시본기의 원문은 아주 복잡하여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자세히 검토해 보면 그 내용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호랑이와 곰 이야기를 다른 차원에서 다시 쓴 것이다. 가령 호족과 웅족의 성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웅족의 성품은 어리석고 괴팍하며 스스로 잘난 채 하고(우퍅자긍愚愎自肯) 서로 어울리기를 싫어한다(불긍화조不肯和調). 그에 반해 호족은 욕심이 많고 잔인하여(기탐잔인嗜貪殘忍) 약탈을 일삼았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호랑이와 곰의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여 여기서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으나 이 신화는 웅족과 호족간의 싸움을 신화적으로 묘사한 데 지나지 않다. 글귀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일이다. 환국에서는 말기에 호족과 웅족 간에 서로 잘났다고 싸웠는데 이것은 요즘에 한동안 영호남이 대립하여 정치적 갈등을 빚은 것과 같다. 남북이 갈라진 것도 억울한데 동서가 갈리어 싸운다면 언제 통일할 것인가. 자칫 잘못하다가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사국시대가 다시 올지 모를 일이다. 이럴 때 가장 긴요한 과제는 신앙의 통일이요 정신의 통일일 것이다.
 
지난 날 냉전시대에는 민족을 분열시키는 것도 종교요 통일시키는 것도 종교였다. 우리는 최근 반세기 동안 남북으로 갈리어 북은 사회주의, 남은 자유주의로 갈리어 싸웠는데,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는 무엇인가. 정치학자들은 그것을 세속종교라 말하고 있다. 한 민족인데 서로 정치이념이 다르고 신앙이 다르니 통일은 멀고 먼 곳으로 떠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 환웅의 말씀을 익히 들어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 홍익인간하자. 홍익인간하기 위해서 개천시교開天施敎하여 우리 모두 천신제天神祭을 지내자. 그리하여 환인의 재세이화在世理化를 믿어야 한다.
 
 
■ 평화시대는 가고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해서 오랜 환인의 시대, 즉 환국시대는 가고 새로운 환웅의 시대 즉 신시시대가 도래하였다. 아래의 표에서 볼 수 있듯이 환인의 나라 환국은 7대로 끝났고 신시는 18대까지 지속되었다. 그 뒤의 단군조선은 47대까지 계속되었으니 날로 왕조의 수명은 길어졌다. 한 왕조가 오래 계속되었다고 해서 나쁜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오랜 정치적 안정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그 나라 백성들에게는 좋은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맥의 『태백일사』는 「환국본기」에 이어 「신시본기」를 싣고 있다. 환국시대는 평화의 시대였다. 풀라톤의 ‘이상국가’, 즉 유토피아를 연상케 하는 지상천국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해서 환국시대가 전설의 시대 신화시대라는 뜻은 아니다. 환국이란 나라가 있긴 있었으나 후대인에 의해 상당 부분 분식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제 환웅이 정권을 잡아 신시를 세우고 새 역사를 시작하였으니 이때부터 사나운 인간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흔히 단군을 신화라 곡해하고 있지만 단군 이전의 환웅의 이야기도 신화가 아니라 역사인 것이다. 『환단고기』의 특색은 단군뿐만 아니라 환웅까지도 역사적 사실로 기술하고 있다는데 있다. 이 점에 유의하면서 이 글을 읽어주기 바란다.

■고시씨가 불을 신지씨가 글자를 발명하였다

환국시대와 신시시대는 어떻게 다른가 하면, 첫째 환국시대는 유목시대였지만 신시시대는 농경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그래서 고시씨가 백성들에게 농경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이다. 고시씨는 농경을 전담하는 장관이었다. 유목시대에는 농경을 맡는 장관이 필요 없다. 그러나 이제 농경을 주업으로 하게 되었으니 환웅이 농경을 맡을 장관을 임명하였는데 그를 고시례라 하였다. 즉 『진역유기』(震域留記)의 「신시기」(神市記)에 의하면,
 
환웅천황께서는 고시례高矢禮를 시켜서 백성을 먹여 살리는 사무를 맡게 하였는데 이를 주곡主穀이라 하였다. 고시례는 불을 만드는 기술을 발명하여 이를 백성들에게 가르쳤다.
 
『진역유기』는 고려시대의 사서로서 조선후기의 역사가 북애北崖가 『규원사화』를 쓰면서 참고하였다는 책이다. 우리 나라 국어사전에 보면 고수례라는 단어가 있는데 그 뜻을 사람들이 “굿을 할 때나 들에서 음식을 먹을 때 먼저 음식을 조금 떼어 던지면서 ‘고수례!’ ‘고수례!’ 라고 하는데 그 소리”를 고수례라 한다고 해설하고 있다. 이 고수례가 바로 고시례이다.
 
우리 국어사전은 고수례의 역사적 유래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있다. 모르기 때문이다. 고수례는 신시시대의 농경 담당 장관이었던 고시례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풍습으로 남아 내려 온 우리 고유의 민속인 것이다. 이렇게 귀한 풍습이 어디 있는가. 김교헌의 『신단실기』(神檀實記)에는 고시례의 역사적 유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고 있다.
 
농가의 농사꾼이 들에서 밭을 갈다가 점심을 먹을 때면 반드시 먼저 한 숟갈을 떠내고 빌기를 “고시례” 라고 한다. 이것은 단군 때 고시라는 사람이 밭과 땅을 맡아 백성들에게 농사를 가르쳤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그 근본을 잊지 않고 밥 먹기 전에 먼저 제사지내는 것이다.
 
김교헌은 고시씨를 단군시대의 인물이라 하였으나 『태백일사』 「신시본기」에서는 그 보다 앞의 신시시대의 인물로 보고 있다. 단군시대냐 신시시대냐 하는 점에 관한 견해 차이는 대종교大倧敎와 단단학회檀檀學會의 견해차에서 비롯된 것이다. 대종교는 단군시대를 단단학회는 환웅의 신시시대를 각각 역사의 상한선으로 잡기 때문에 생긴 의견차이인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차이로 인해서 두 단체가 갈라서게 되었다. 물론 또 다른 견해 차이도 있지만.
 
『신시본기』에는 고시씨가 또 불을 발명한 사람으로 기록되고 있다. 불에 관한 신화는 민족에 따라 다르다. 불의 신을 화신이라 하며 화신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불을 켰다. 우리 나라에도 화신이 있어 오랫동안 부엌 신인 조왕신을 모셔왔다. 불의 사용은 이미 40만년 전부터였다고 하는데 불의 신을 믿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시대 이후였다. 그것은 불의 발명으로 사람이 생식에서 화식火食을 하게 되고 도자기를 굽는 기술 그리고 쇠를 녹이는 기술(鑄冶之術)까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의 발명을 인류 역사상 ‘제1의 산업혁명’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고시씨는 어떻게 불을 지피는 방법을 알아냈을까. 고시씨는 산에서 우연히 마른 나뭇가지와 나뭇가지가 강풍에 부디 쳐서 불이 나는 것을 보고 사람도 불을 지필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고 한다. 이것 역시 신화가 아니다. 다른 나라의 화신火神이야기는 불을 신으로부터 훔쳤다느니 여성의 음부에서 불을 꺼냈다느니 하는 완전한 신화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의 고시씨 이야기는 너무나 사실적이다.
 
 
■신지씨가 글을 발명하였다

『신시본기』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신시시대부터 옛 글이 있었는데 신지씨가 이 글자를 발명하였다고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기까지 우리 문자가 없었던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환웅천황은 또다시 신지神誌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문자를 짓게 하였다. 신지씨가 어느날 사냥에 나갔다가 사슴의 발자국을 따라가다가 글자를 만들게 되었다. 이것이 태고문자太古文字의 시작이라 한다. 그런데 후대에 연대가 까마득히 흘러서 태고문자는 다 사라져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 증거는 무엇인가. 경상남도 남해와 저 백두산 북쪽의 경박호와 선춘령의 바위에 이상한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이 신지씨가 발명한 글자라는 것이다.
 
일찌기 듣기로는 “남해도南海道의 낭하리郎河里 계곡 그리고 경박호鏡珀湖와 선춘령先春嶺의 저 오소리烏蘇里 암석에 언젠지 모르지만 조각한 글씨가 있음을 발견하였는데 범자梵字도 아니고 전자篆字도 아니어서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것”이라 했다. 이것이 혹시 신지씨가 만들었다는 옛 문자가 아닌지 모르겠다.
 
 

남해도 낭하리란 지금의 경상남도 남해의 이동면을 말하는 것이며 여러 개의 바위에 그림인지 글씨인지 알 수 없는 형상이 아직도 잘 보존되어 있다. 이것을 남해각서라고 하는데, 오랫동안 그것이 진시황을 위해 불로초를 찾아다닌 서씨徐氏의 글이라 전해 왔다.
 
그러나 위당 정인보는 남해각서를 단군 때부터 내려오는 옛 글씨로서 그 내용을 “어떤 제왕이 수레의 뒤에 사냥개를 달고 짐승과 새를 쏘면서 가는 형상인데 앞에 물이 있고 그 물 건너에 다 깃대를 꽂았으니 이것은 제왕이 사냥에 나서면서 물을 건너 깃발을 세워 국경을 긋는 공덕비임에 틀림이 없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북한산에 진흥왕순수비가 있는데 그와 같은 순수비라는 것이었다.
 
이 글을 남긴 사람은 누구였을까. 정인보 선생은 고조선인이 상용하던 글이라고 단정하였다. 그 글자 모양이 새 발자국처럼 생겼는데 이것은 고려 성종의 조칙 가운데 나오는 ‘조적현문鳥跡玄文’이란 글이다. 조적현문이란 중국의 성어成語를 따서 표현한 것으로 보기 쉬우나 우리 나라 고대 문자가 실제로 새 발자국과 같았다고 한다. 정인보는 『신시본기』를 보지 못하고 우리의 옛 글이 새 발자국 같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선춘령은 지금의 연변조선자치구 안에 위치하고 경박호는 그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니 실제로 찾아가 보기 어렵다. 그 곳 모두가 발해 땅이었고 고려 때 윤관이 선춘령까지 쳐들어가서 우리 영토로 만들려고 한 일이 있다. 그러나 허약한 고려왕조가 여진의 요구에 못 견디어 내어주고 말았다. 국력이 약하면 영토뿐만 아니라 문자와 신앙까지도 모두 버리고 남의 나라 글자(한자)와 종교(불교)를 자기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한 때 대학 입시에 국, 영, 수가 중요하다고 했었는데 요즘에는 영, 수, 국으로 역전되었다고 한다. 우리의 국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신시본기』는 이렇게 개탄한다.
 
이에 우리 나라가 떨치지 못하고 우리 민족이 강하지 못하여 옛 문자를 잊어버린 것이 아닌지 새삼 한탄하지 않을 수 없도다.
 
그밖에도 환웅은 풍백, 우사, 운사 그리고 치우 등을 시켜서 사회발전에 이바지하게 하였다.
 
환웅천황은 풍백 석제라釋提羅를 시켜 새와 짐승과 벌레와 물고기의 해를 제거하도록 하였다. 환웅천황은 또한 우사 왕금王錦을 시켜 사람의 살 곳을 만들게 하고 목축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또 운사 육악비陸若飛로 하여금 남녀의 혼례법을 정하게 하고 치우로 하여금 병마도적兵馬盜賊을 관장케 하였다.
 
 
■환웅의 신시는 선진국이었다

위의 신시역대표에서 보았듯이 치우는 14세 자오지 환웅이었다. 치우에 관해서는 중국의 사마천 『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사마천은 공자의 『춘추』를 비롯한 여러 중국 문헌과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구전)을 듣고 치우(동이족의 시조)와 헌원(한족의 시조)의 싸움을 기록하였다고 한다. 그러니 치우환웅이 전설상의 인물이 아니라 역사적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마천은 어디까지나 중국인이어서 자기네 조상으로 추정되는 황제를 치켜올리고 치우천왕을 역사의 악역惡役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에 반해 우리측 기록인 『신시본기』에는 헌원을 악역으로 몰고 있다. 서로 보는 입장이 다르니 할 수 없는 일이다. 『신시본기』에서는 『삼한비기』(三韓秘記)를 인용하면서, 먼저 치우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번개와 비를 내리게 하여 산천을 바꾼다”는 뜻이라 한다. 치우는 마치 수퍼맨과 같은 초인이었다고 한다.
 
또 몇 대 지나 자오지慈烏支 환웅시대가 되었다. 자오지(치우) 환웅은 그 용맹이 몹시 뛰어났고 그 머리와 이마는 구리와 쇠로 되었다.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고 구치九治를 만들어 주석과 쇠를 캐내어 무기를 만들고 돌을 날려 목표물을 맞추는 기계(飛石迫擊之機)를 만들었다. 천하가 모두 이를 두려워하여 함께 받들어 천제天帝의 아들, 치우라 하였다. 저 치우란 말은 속어로 번개와 비가 크게 내려 산과 강을 바꾸는 것을 뜻한다.
 
당시 동방의 신시는 쇠를 달구어 농기구를 만들고 창 칼, 그리고 갑옷을 만들 수 있는 선진국이었다. 서방의 한족漢族보다 훨씬 앞서가는 선진국이었던 것이다. 이 같은 발전에 기여한 세력은 치우씨와 고시씨와 신지씨 그리고 풍백 운사 우사였다. 그 때문에 이들 성씨의 세력이 점점 강성해지고 있었다. 치우가 등장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때부터 치우, 고시, 신지의 후손들이 지극히 왕성하게 번영하였다. 치우천왕이 등극함에 이르러 구리와 쇠를 캐서 쇠를 달구어 칼과 창 그리고 대노大弩를 만들었고 그것으로 사냥하고 정벌함으로서 멀리 떨어져 있는 외족外族들이 치우를 신으로 알고 심히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치우가 만든 대궁大弓의 위력을 풍문에 듣고 간담이 서늘한 자가 많았다.
 
이처럼 치우의 명성이 멀리까지 알려지자 한족漢族들은 우리 민족을 동이東夷라 부르기 시작했다. 동이란 말은 본시 저들이 우리를 매우 두려워하고 부러워하였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는데 공자孔子(전 552∼전479) 이후로는 동이가 오랑캐란 멸칭으로 바뀌었다.
 
이 때문에 저들은 우리 종족을 가리켜 ‘이夷’라고 했다. 『설문』說文에 의하면 ‘이夷란 글자는 큰 대大자와 활 궁弓자로부터 나온 글로 동쪽에 사는 사람을 뜻한다’(ㅆ大ㅆ弓爲東方人者)고 되어 있었다. 그러나 공자의 『춘추』春秋에 이르러서는 이夷 자를 가리켜 마침내 융적戎狄과 같은 뜻인 오랑캐의 호칭이 되고 말았으니 애석한 일이다.
 
그것은 우리 나라가 선진국이었다가 뒤에 차츰 국력이 약화되어 후진국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신시와 단군조선시대 까지는 결코 후진국이 아니었는데 그 뒤 한족의 나라가 앞서나가더니 한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중국이 조선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치우환웅은 황제와 싸워 이겼고 중원을 석권하였다

그러면 치우환웅은 어떤 인물이었으며 그의 활동 상은 어떠하였는가. 『신시본기』는 고기의 하나인 『대변경』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대변경』大辯經에 말한다.
우리 치우천왕은 신시의 옛 힘을 받으시어 백성과 더불어 새롭게 태어나셨다. 유망楡罔의 정권이 쇠약해지니 군대를 보내어 정벌하였다. 갈로산의 쇠를 캐내어 도개刀鎧, 모극矛戟, 대궁, 호시弧矢같은 무기를 대량으로 제작하여 탁록琢鹿(지금의 북경 일대)을 함락하고 구혼九渾에 올랐다. 연전연승하는 그 위세는 질풍과 같아서 만군萬軍을 겁에 질려 굴복케 하고 위세는 천하에 떨치었다. 한 해 동안에 아홉 제후의 땅을 점령하고 양수洋水를 건너 재빨리 공상空桑에 이르렀다. 공상은 유망이 도읍했던 곳이다. 이 해에 12제후의 나라를 점령하고 죽이니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가득 메웠다. 이에 서토西土의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해 도망쳐 숨지 않는 자가 없었다.

 
 

치우환웅의 진격은 중원을 석권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회수와 대산 사이의 땅까지 차지하였다.
 
이때 유망은 소호少昊로 하여금 맞서 싸우게 하였으나 대왕(치우)은 큰 안개를 일으켜 적의 장병으로 하여금 혼미케 하여 스스로 혼란에 빠지게 하였다. 소호는 대패하여 변방으로 도망치더니 공상으로 들어가 유망과 함께 도망쳐버렸다.
치우천왕은 즉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천하의 태평을 맹세하였다. 다시 군대를 진격시켜 탁록을 에워싸 일거에 이를 멸망시켰다. 『관자』(管子)에 말하는 바 “천하의 임금이 전장에서 한번 화를 내자 쓰러진 시체가 들판에 그득했다”는 대목이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상의 기록은 사마천 『사기』의 「오제본기」에 나오는 말들이다. 치우환웅의 활약으로 유망이 망하고 삼황三皇 시대가 마감된다. 그리고 나타나는 인물이 헌원(軒轅, 후의 황제黃帝)인데 치우와 싸운 헌원은 뒷날 황제가 되어 한족(중국인)이 그를 자기네 시조라고 숭모한다. 그에 반해 치우환웅은 우리 민족의 시조인데 우리는 치우가 우리 시조인줄 모르고 있다. 그뿐 아니라 치우마저도 현재 중국인의 시조로 이적되어 가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시조를 도둑 맡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치우는 우리의 환웅이었으므로 치우의 헌원과의 싸움은 저들 한족漢族과 우리 한족韓族의 일대 천하쟁탈전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과연 우리의 시조인 치우가 중국인의 시조인 헌원에게 졌는가. 아니면 이겼는가.
 
사마천 『사기』에는 치우가 지고 죽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측 기록인 『신시본기』에는 우리가 이긴 것으로 되어 있다. 왜 두 나라 기록이 다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만일 헌원이 사실대로 졌다고 기록하면 영원히 중국이 동이족에게 패했다는 오명을 남기게 되기 때문에 저들이 역사를 위작한 것이다. 『신시본기』에는 싸움의 승패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때에 공손헌원公孫軒轅이란 자가 있었으니 토착 주민의 괴수였다. 처음 치우천왕이 공상空桑에 입성하여 크게 신정新政을 포고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엄하게도 크게 병마를 일으켜 공격해 왔다. 자기가 즉위하여 천자를 대신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 치우천왕은 앞서 항복해 온 소호少昊를 시켜 탁록에서 적을 전멸시켰다. 헌원은 그래도 굴하지 않고 감히 백 번이나 도전해 오는지라. 치우천왕은 구군九軍에 명을 내려 네 갈래로 길을 나누어 출동케 하고 자신은 기병 3,000명을 이끌고 탁록의 유웅有熊에서 헌원과 싸워 적을 사방에서 압축하여 참살하니 그 숫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또 치우천왕은 큰 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분간치 못하게 만들어 싸움을 독려하니 헌원의 군대는 두려워 달아나 숨었다. 그때 상황이 “백리 안에 병사와 말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百里兵馬不相見)고 할 정도였다. 이에 치우천왕은 회대淮垈 지방을 모두 점령하고 탁록에 성을 쌓으니 헌원의 무리들은 모두 신하되기를 원하여 조공을 바쳤다.

 
이와 같이 헌원과 치우의 싸움 즉 중국민족과 한국민족의 전쟁은 압도적으로 우리의 우세 속에 진행되었다. “백 리 안에 병사와 말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고 할 정도였다면 완전한 패배였다. 왜 그렇게 치우의 군대가 강했는가 하면 무기가 월등히 우수하였기 때문이다. 치우는 안개를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갑옷을 만들어 적의 화살을 무력화시켰다. 그래서 중국인은 치우를 사람이 아니라 “머리가 구리요 이마가 쇠로 된 도깨비”라고 생각했다.
 
대저 서방에 살던 사람들은 함부로 활과 돌의 힘을 믿고 갑옷의 쓸모를 알지 못하였는데 치우천왕의 법력이 높고 세어 싸울 때마다 패했다. 『운급헌원기』에 보면 치우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는데 당시의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치우를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銅頭鐵額)라고 썼으니 그 낭패한 모습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치우환웅은 백전백승하였는데, 그가 만든 무기 가운데에는 지남차와 비석박격기가 있었다.
 
치우천왕은 더욱 더 군용軍容을 정비하여 사면으로 진격한 바 10년 동안에 헌원과 73회나 싸웠으나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었고 군은 물러설 줄 몰랐다. 헌원은 여러 차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자 원한이 쌓여만 갔다. 헌원은 군을 일으켜 우리 신시를 본 따서 무기와 갑옷 그리고 지남차指南車를 만들어 도전하였다. 치우천왕은 크게 성을 내어 형제종당兄弟宗黨으로 하여금 전쟁 준비를 갖추어 위엄을 세웠으며 헌원의 군대가 감히 도전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렇게 시종 치우가 우세하였는데 어떻게 해서 사마천 『사기』에는 치우가 헌원에게 죽었다고 기록하였는가. 그것은 사마천이 중국인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한국인이었다면 사실을 사실대로 기술했을 것이다.
 
 
■치우환웅은 영원한 군신으로 추앙되었다

그러면 사실은 어떠했는가. 사실은 치우환웅 자신이 싸움터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치우비라는 한 장수가 전사한 것이다. 사마천 『사기』에는 치우비의 죽음을 치우의 죽음으로 바꿔 썼다. 그러나 『신시본기』에는 사실대로 쓰고 있다.
 
그런데 한 바탕 큰 싸움이 벌어졌는데 우리측 장수 치우비蚩尤飛가 급히 공을 세우려 서둘다가 불행히도 전사하였다. 사마천이 『사기』에서 “치우를 잡아 죽였다”(擒殺蚩尤) 한 것은 치우비의 죽음을 두고 한 말이지 치우천왕의 죽음을 말한 것이 아니다. 이에 치우천왕은 격노하여 새로 비석박격기飛石迫擊機를 만들어 진을 치고 서로 연합하여 진격하니 적진은 감히 맞서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치우천왕은 정예부대를 둘로 나누어 한 부대는 서쪽의 땅을 지키도록 하고 다른 한 부대는 동쪽으로 진격하여 회대淮垈의 땅을 취하여 성읍으로 삼게 하였으며 헌원의 반격에 대비하였다.
 
그러므로 치우환웅은 헌원에게 잡혀 죽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살아서 훌륭하게 신시를 지켰다. 그러기에 치우환웅의 능이 중국 산동성에 남아 있으며 치우의 이름이 치우기蚩尤旗라는 별 이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패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양 3국의 군신軍神으로 추앙 받고 있는 것이다.
 
치우천왕이 돌아가신 지 수천 년이 되었으나 지금까지 만장의 광열이 있어 능히 후대인으로 하여금 흥분케 하여 떨쳐 일어나게 하는 듯 하다. 『한서』漢書지리지에 의하면 치우천왕의 능은 중국 산동성 동평군 수장현 관향성 안에 있다고 하며 높이가 7척으로 진한시대의 주민들은 매년 10월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제사 때는 반드시 붉은 기운이 있어 한줄기 붉은 띠 모양의 연기가 뻗었는데 이를 치우기蚩尤旗라 하였다고 한다.
 
치우천왕의 영명한 혼과 웅장한 육체는 보통 사람과 아주 달라 수천 년이 되도록 오히려 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에 반해 헌원은 쓸쓸히 잊혀져 갔고 유망 또한 영구히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치우천왕의 공덕은 세상에 전하여 능히 떨치고 그윽한 푸르름 속에 그 위엄이 살아 있다. 그러나 헌원의 경우는 다르다. 헌원 이후의 세상은 안정되지 못하고 헌원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편안히 베개를 베고 눕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사기』에 이르기를 “산을 뚫고 길을 내어도 한번도 편안한 적이 없었다. 탁록의 강에 도읍하고 옮겨 다니며 항상 거처를 안정시키지 못하고 장수와 사병을 시켜 지키게 하는 등 마치 전장터와 같은 곳에서 살아야만 하였다”라고 한 것은 아마도 헌원이 생존시에 전전긍긍하던 모습을 역력히 보여주는 기록이라 할 것이다.

■ 태백산은 본시 백두산이었다

신시의 중심은 태백산이었다. 본래의 태백산은 백두산이지 묘향산이 아니었다. 『삼국유사』에 보면 "환웅이 삼천 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에 내려왔다”고 하면서 괄호하고 ‘태백산은 오늘의 묘향산太伯山이다’라고 주석을 달았다. 이 주석 때문에 태백산의 백자는 흰 백자가 아니라 맏 백자요 태백산의 위치는 묘향산이라 주장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저자는 고려시대의 불교신자였으므로 제대로 역사를 전했다고 볼 수 없다.
『태백일사』는 『삼한비기』를 인용하면서 백두산이야말로 배달국의 진산鎭山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저 백두거악白頭巨嶽은 대황大荒의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으니 가로는 1,000리요 높이는 200리가 넘는다. 웅장하고 험준하고 울퉁불퉁 거창하니 배달천국의 진산이다. 지금 백두산 정상에는 큰 연못이 있는데 둘레가 80리이며 압록 송화 두만의 물줄기가 모두 여기서 시작된다. 가로대 천지라 하는데 환웅씨가 구름을 타고 하늘로부터 내리신 곳이다. 신인神人이 오르내린 것도 모두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어찌 묘향산을 가지고 태백산이라 하는가. 묘향산에는 한웅큼의 물구덩이도 없으니 환웅천황이 내려온 곳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신시본기」)
 
 만일 묘향산을 태백산이라 하면 우리 스스로가 우리 땅을 압록강 이남으로 국한하는 꼴이 된다. 태백산을 묘향산이라 주장하는 자들은 그 눈구멍이 콩알만해서 대륙의 강토가 보이지 않고 한반도만 보였던 것이다. 묘향산의 위치를 보라. 만일 거기가 태백산이라면 그 결과 우리 역사의 절반이 잘리고 없어진다.
 
세상의 속담에는 평안도 영변에 있는 묘향산을 가지고 태백산이라 한다. 이것은 『삼국유사』의 설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이것은 저들의 눈구멍이 콩알만하여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이 사실을 인정할 경우 우리 나라 강역은 압록강 이남의 땅으로 좁혀지고 마는 것이다. (「신시본기」)
 
태백산을 묘향산이라 보게 되면 우리 스스로가 반도사관에 빠지고 만다. 압록강 이남의 땅만 우리 땅이 되고 광활한 대륙의 땅은 몽땅 남에게 넘겨주고 마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반도사관을 주장하는 꼴이 되는 것이 아닌가. 반도사관은 일제침략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하였는데 놀랍게도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물론 일연의 『삼국유사』가 모두 그런 것들이었고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사대주의가 마치 국시國是처럼 되어버려 사대주의 유학자들은 중국의 곤륜산을 우리 민족의 태백산으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소중화小中華를 가지고 만족하는 사람들이 있다. 조공朝貢을 바치느라 중국을 들락날락한 역사가 이미 백년이나 되었다. 이를 치욕으로 알지 못하니 정말로 붓을 던져 장탄식할 일이 아닌가. (「신시본기」)
 
사대주의가 극에 달한 조선시대를 비방할 자격이 현대인에게는 없다 할 수 있다. 우리가 지금 미국에 사대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옛날 사람들을 욕할 수 없는 것이다.
 
 
■태백산은 신성한 산이요 불로초가 나는 산이었다

태백산은 중국의 여러 기록에 신비스런 산이라 소개되고 있다. 『위서』(魏書) 물길전勿吉傳에 보면 “나라 남쪽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다”고 하였다. 위 나라에서는 이를 태황太皇이라 하였다. 범, 표범, 곰, 이리가 살고 있지만 사람을 해치지 않았다. 사람들은 산에 올라가서 소변을 보지 않았다. 이는 아마도 환웅이 이 산에 내려 오셨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산을 신주흥왕神州興王의 영지靈地라 하니 소도제천蘇塗祭天의 옛 습속이 이 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백두산에는 산삼이라는 불로초가 있고 불로초를 먹고 장수하는 선인이 살았다는 것이다. 참으로 신비의 산이어서 진시황이 서복이라는 사람을 시켜 산삼을 캐게 하였다는 산이 바로 백두산이었다. 서복은 결국 중국에 돌아가지 않고 어디론가로 도망치고 말았다.
 
『사기』(史記) 봉선서에 보면 “이 산은 발해의 한 가운데 있다”고 전한다. 아마도 일찍이 그 곳에 갔다 온 자가 있는 듯, 모든 선인仙人과 죽지 않는 약이 그 산에 있다 하며 그 산의 사물들과 짐승들까지도 빠짐없이 흰 색이요 황금과 백은으로 궁궐을 지었다고 하였다. 또 『선가서』(仙家書)에 가로대 “삼신산에는 사람의 혼을 살리고 늙지 않게 하는 약초가 있는데 일명 진단眞丹이라 한다고 했다. 지금의 백두산은 예부터 흰 사슴, 흰 꿩 등속의 짐승이 있었는데 『괄지지』(括地志)가 말하는바 “새 짐승 풀 나무가 모두 희다”고 하였다. 또 백두산 일대에서는 많은 산삼이 나오는데 세상 사람들은 산삼을 불로초라 하였다 한다. 산사람들이 산삼을 캐러 갈 때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산신께 제사를 지내고 난 후라야 입산하였다. 『단군세기』에 가로대 “단군 오사구烏斯丘 원년에 북쪽을 순수할 때 영초를 얻었다” 하였다. 아마도 산삼을 말하는 것 같다. (「신시본기」)
 
어찌 되었건 민족의 성산 태백산은 환웅이 3천명의 무리를 이끌고 내려오신 산으로서 그 후예가 우리들인 것이다. 백두산이 갖는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대저 우리 환족桓族은 모두 신시가 이끄는 삼천의 무리에서 나왔다. 후세에 여러 성씨의 구별이 생겼다고 하나 실은 환단 한 줄기의 후예 후손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환웅이 신시에 내려오신 공덕은 당연히 전송傳誦하여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선왕先王과 선민先民들이 삼신고제三神古祭의 성지를 가리켜 삼신산三神山이라 함도 역시 이를 후손들에게 전송하여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신시본기」)
 
그런데 한가지 덧부쳐 이야기 할 것은 태백산이 백두산에서 묘향산 그리고 태백산 지리산으로 옮아갔다는 사실이다. 우리 나라 태백산은 처음 배달국(신시)의 영산이었으니 당연히 그때는 백두산이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이 광활한 대륙을 상실하게 되자, 후대의 후손들이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나라들은 각기 따로 태백산을 두게 되었다. 산은 옮길 수 없으나 산 이름은 옮길 수 있으니 일정한 산을 태백산이라 부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신라는 그 강역이 경상도에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득이 경상도 봉화군의 한 산을 태백산으로 이름 붙여 숭앙하게 되었다. 태백산은 현재 강원도 태백시에 있으나 옛날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경상도 봉화군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태백산이 신라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백제는 지리산을 태백산으로 삼은 것 같고 고구려는 어떤가 하면 수도를 압록강 건너 집안集安에서 평양으로 옮긴 뒤 영변의 묘향산을 태백산으로 삼았다. 일본으로 건너 간 우리 조상들은 그들대로 일본 땅에 태백산을 정하여 제사를 지냈다. 지금도 곳곳에 그 유적이 남아있다.
 
그런데 태백산 옆에 보면 반드시 소백산이 있어 태백산과 짝을 이루고 있다. 이것도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제사 드리는 천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태백산에서 대제大祭를 지내고 소백산에서는 소제小祭를 지냈던 것이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사실은 우리 민족이 사는 곳에는 반드시 고을마다 백산이 있었고 마을마다 신목神木이 있었다는 것이다. 훗날 백산을 이름하여 진산鎭山이라 했고 신목을 당목堂木이라 했다. 비록 이름은 바뀌었으나 그 실체는 같은 것이다.
 
 
■태백산에서 삼신에게 천제를 지냈다.
 

이처럼 태백산 이외에도 소백산이 있고 또 백산이 있는데 태백산에서는 나라님이 하늘에 큰제사를 지내고 소백산에서는 작은 제사를 지냈는데 백산에서는 고을 원님들이 그 지역의 안녕을 위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마을에서는 마을대로 신목에 제사를 지냈는데 모두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위한 기도였다. 이것은 우리 나라 특유의 풍습이었고 그 역사는 단군조선을 더 거슬러 올라가서 환웅의 신시시대로 소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백산이 있고 제천하는 풍습이 있다면 그곳에는 우리 민족이 살고 있었다고 가정할 수 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시기는 매년 10월 3일이었고 그 뜻은 우리가 하늘의 백성 즉 천민天民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을 10월 제천이라 하였다.
 
10월 제천十月祭天은 마침내 천하 만세의 유습이 되었으니 이는 신의 나라 특유의 성전聖殿으로서 다른 나라에 이와 견줄 만한 것이 없다. 태백산은 홀로 곤륜산의 명성을 누르고도 남는 것이다. (「신시본기」)
 
그러면 하늘에 누가 계시는가. 삼신三神이 계시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삼신에게 기도 들였었는데 그 유습은 오늘까지도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옛날의 삼신산은 곧 태백산으로 지금의 백두산이다. 대저 그 옛날 신시의 인문교화는 비록 건전하게 행해지고 있지 않았다고는 하나 근세에 이르도록 전해졌고 천경신고天經神誥는 오히려 후세에 전해져서 거국 남녀가 모두 말없는 가운데 받들고 있는 바이다. (「신시본기」)
 
그러면 왜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꼭 산 위에서 행하는가. 그것은 양은 음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천天은 음을 좋아한다. 그러므로 천에 제사 지낼 때는 반드시 높은 산기슭의 작은 산 위(高山之下小山之上)에서 제사를 지낸다. 이것이 곧 태백산 기슭에서 천제를 지내게 된 유습이다. (「신시본기」)
 
천은 양이기 때문에 음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그러기 때문에 강화도 참성단처럼 네모진 언덕에서 천제를 지내기도 한다.
 
땅은 양을 귀하게 여김으로 땅에서 제사 지낼 때는 반드시 연못 가운데의 네모진 언덕(澤中方丘)에서 지내게 되어 있다. 이것이 곧 강화도 참성단에서 천제를 지내는 연유이다. (「신시본기」)
 
강화도 마리산의 참성단은 상방하원上方下圓, 즉 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둥굴다. 네모진 것은 땅이요 둥근 모양은 하늘을 상징한다고 했는데 어찌해서 땅이 위에 있고 하늘이 밑인가 의아하게 여길 것이지만 하늘이 땅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게 만든 것이다.
 
강화도에 가면 전등사가 있는데 본시 그 이름이 삼랑성이었다. 단군의 아들 삼랑이 성을 쌓아 그곳에 천제단을 만들었다 하여 삼랑성이라 부른 것이다. 삼랑은 또 삼신을 수호하는 관직을 말한다고도 한다.
 
『고려팔관잡기』(高麗八關雜記)에 말하기를 “삼랑三郞은 배달의 신하이다. 삼랑은 교화하고 복종하게 하는 것을 주관한다. 지금 혈구에 삼랑성이 있는데 성은 삼랑이 머물던 자리이다. ‘랑’은 곧 삼신을 수호하는 관직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신시본기」)
 

 

그러면 삼신은 우리 인간에게 어떤 은혜를 베풀어주시는가. 삼신은 우주를 창조하고 만물을 만드신 천일신天一神이기 때문에 그는 바로 우리의 목숨을 관장하고 있는 것이다.
 
삼신은 곧 인간의 생사를 주관하는 신이시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10세 미만일 때에는 목숨의 안전과 위험, 우환, 잘나고 못남 따위는 애오라지 삼신에게 의탁한다. 저 삼신은 우주를 창조하고 만물을 만드신 천일신天一神이다. (「신시본기」)
 
한편 삼신은 천주로서 천지만물의 조상으로 일컬어졌다.
그리고 치우는 군신軍神으로서 천하 전쟁의 주신이기도 하다. 그래서 중국의 역대 장수들은 싸움에 임하여 반드시 먼저 치우에게 제사를 올렸다. 그래야 승리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관례는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천주로서 삼신에 제사하고 병주兵主로서 치우를 제사하니 삼신은 천지만물의 조상이고 치우는 만고의 무신武神으로서 용강의 조상이라 할지니 큰 안개를 일으키고 물과 불을 마음대로 사용한다. 또 만세 도술道術의 조종으로서 바람과 비를 부르고 모든 귀신을 부른다. 이로서 태시太始의 시대로부터 항상 천하 전쟁의 주(天下戎事之主)가 되었다. (「신시본기」)
 
 
■민속에 남은 삼신신앙은 모두 신시시대의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일찍부터 불교와 유교 등 외래종교가 들어와서 신시시대의 우리 고유문화가 잠적하여 민속문화로 살아남거나 불교나 유교문화의 일부가 되어 죽음을 면하였다. 그 좋은 예가 지석묘라는 것이다. 일명 지석단이라고도 하는데 제석단帝釋壇이라고도 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신시시대의 천제단이거나 신단들이었다. 불교가 들어와서 불교신자들이 이를 제석단이라 이름을 바꿨다.
 
『밀기』(密記)에 옛날엔 사람이 죽으면 향리를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합쳐서 한군데에 매장하고 표시하기를 지석支石이라 하였다. 뒤에는 변하여 단을 만들고 이를 지석단支石壇이라 하였다. 혹은 제석단이라고도 하였다. 산마루에 산을 파고 성단을 만들어 이를 천단天壇이라 하였다. 산골짜기에 나무를 심어 토단을 만든 것을 신단神壇이라 하였다. 지금 승도들이 이를 혼동하여 제석이라 말하고 있는데 실제 고사古事와 다르다. (「신시본기」)
 
우리 민족종교가 불교 속에 살아남은 것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사찰의 대웅전大雄殿이다. 대웅전이란 본시 불교에서 사용하는 말이 아닌데 우리 나라에서만은 대웅전이라 한다.
 
불상이 처음 들어 와서 절을 질 때 이를 대웅大雄이라 하였다. 이는 승도들이 옛것을 세습하는 칭호로서 본래는 승가의 말이 아니었다. (「신시본기」)
 
대웅전에는 본래 삼신이 모셔져 있었는데 그 중에서 환웅이 제일이었다. 환인은 만물창조의 신 즉 조화造化의 신이요 환웅은 가르침의 신 즉 교화敎化의 신이요 환군 즉 단군은 다스림의 신 즉 치화治化의 신이었다. 종교란 교화다. 따라서 환웅의 이름을 빌어서 불상을 모신 전각을 대웅전이라 하였던 것이다. 대大는 한 즉 크다는 뜻이다.
 
우리 나라 절에는 실제로 삼신을 모신 삼신각三神閣(산신각의 원명이 삼신각이다)이 있다. 한국의 사찰이라면 반드시 대웅전 옆에 삼신각을 지어 삼신을 모신다. 삼신각이 없는 절은 절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한국의 사찰에는 반드시 삼신각이 있다. 그러면 왜 절에 삼신각을 두고 삼신에게 제사를 들였을까. 여기에는 엄청난 종교전쟁이 있었던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차돈이 신라에서 처형당한 이야기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이차돈 이외에도 순교자가 많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사실은 기록에 나오지 않았다 뿐이지 사실은 종교 침략자 불승들은 수없이 박해를 당했던 것이다.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박해 당했듯이 스님들도 단군 신도들에게 지독한 박해를 당했고 스님들이 애써 지은 사찰들이 화염에 싸여 불탔다. 그러니 절에 가는 것을 모두 꺼려했다. 그래서 절 안에 삼신각을 지어 신도를 유혹했고 불상을 모신 전각을 대웅전 즉 환웅전이라 했다. 그래야 방화사건도 예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신도를 확보하고 나라의 종교로 공인된 후에는 삼신각을 산신각이라 이름을 바꿨다. 이제는 절에 방화하는 자도 없고 삼신각을 찾는 신도도 없어졌으니 이름을 삼신에서 산신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름을 바꿔놓고 역사를 왜곡해도 삼신은 산신이 아니요 삼신인 것이다.
 
 
■신시의 삼신문화가 중국에까지 뻗어 갔다
 

삼신신앙은 비단 우리 민족만 믿었던 신앙이 아니라 이웃한 한족(중국인)들에게까지 전파되었다.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는데, 그 첫째 증거는 한무제가 삼신을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무제는 고구려를 여러 차례 침공했다가 패전한 중국의 제왕인데 그가 삼신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흥미 있는 이야기다.

 


 

 

 


 

옛날 사마상여司馬相如는 한 나라의 왕 유철劉徹 무제武帝에게 말하기를 “폐하께서 겸양하시고 방탕치 않으시면 삼신의 즐거움을 얻으실 것입니다”라고 했으며 위소韋昭는 삼신상제三神上帝에 주를 달아 말하기를 “삼신의 설은 일찍이 저들의 땅에도 전파되었음이 명백하다”고 하였다. (「신시본기」)
 
둘째로 제나라 풍속에 팔신제가 있다고 하는데 이것 또한 우리 문화였다.
 
『진역유기』(震域留記)에 말하기를 “제齊 나라 풍속에 팔신제八神祭가 있다. 팔신이란 천주天主, 지주地主, 병주兵主, 양주, 음주, 월주, 일주, 사기주 등 여덟 신을 말한다. (「신시본기」)
 
고려 때 묘청이 난을 일으켰는데 그 역시 팔신제를 지냈고 또 고려의 팔관제가 유명하다.
 
셋째로 중국의 명장들이 모두 치우에게 제사를 지내고 전쟁에 승리하기를 바랐다. 한漢 나라 유방은 분명 동이족이 아닌데 그 마저 치우제를 지냈으니 기이한 일이다.
 
유방劉邦이 동이 계통의 인물이 아니라고 하나 풍패豊沛에서 군사를 일으킨 인물이다. 풍패에서는 치우에게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있고 나라에서도 그 풍속을 따라 치우에게 제사를 지냈다. (「신시본기」)
 
더욱이 치우의 후예들이 아직 중국에 살고 있는데 여러 곳에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치우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데다가 치우기란 별 이름까지 있고 보니 치우가 중국에 끼친 영향이 심대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진晉 나라 『천문지』(天文誌)에 “치우기蚩尤旗는 꼬리별 혜성과 비슷하여 꼬부라져서 깃발과 닮았다. 깃발이 보이는 곳 바로 밑에 병란兵亂이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치우천왕이 승천하여 별이 되셨다고 전하기 때문이다. 또 『통지』(通志) 「씨족약」(氏族略)에는 “치씨는 치우의 후예”라고 했고 혹은 창힐蒼?은 고신과 더불어 역시 모두 치우씨의 후예라고 했다. 대저 치우천왕의 영풍위열英風偉烈함이 먼 나라 깊숙한 곳에 이르기까지 전파되었음을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신시본기」)
 
그뿐만 아니라 치수법이 우리 신시에서 중국으로 건너갔다. 기자의 홍범 역시 신시의 것이었다. 
중국에 『오행치수의 법』과 『황제중경』(黃帝中經)이라는 책이 있다. 사실 이것은 단군의 태자 부루夫婁가 우사고虞司空에게 전한 것으로 중국인의 책이 아니다. 뒤에 다시 기자箕子가 주왕紂王에게 홍범洪範을 전했다하는데 이 역시 태자 부루의 『오행치수설』과 『황제중경』인 것이다. 즉 이들 두 책의 근본은 신시의 구정邱井과 균전均田의 법이 중국에 전해진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신시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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