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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환단고기*韓의뿌리

치우천황이 실존인물인 역사 증거자료

by 바로요거 2008. 9. 25.

치우천황이 실존인물인 역사 증거자료

<치우천황은 신화적 인물이 아니다>

 

 

붉은악마로 인해 한국인들에게 잘 알려진 치우천황(일명 자우지 환웅)은 신화적 인물이 아닌 실존인물이다. 치우천황은 기원전 2707년부터 2598년까지 109년 간 전쟁에 나가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불패의 신화가진 고대 조선의 군신(軍神)으로 ‘천하융사지주(天下戎士之主)명성을 갖고 있는 역사적인 인물이다. 

일반적으로 단군을 신화로 배워 온 우리 젊은 세대들은 단군조선 보다 더 앞선 나라 배달국의 제14대 환웅천황이신 치우천황을 신화의 인물로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며 혹시 실존인물로 인정을 한다하더라도 치우는 전설속에 회자되는 중국에서 건너 온 인물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렇지만 치우천황은 엄연히 우리 한민족의 역사속에 살아있는 실존인물인 것이다.

중국의 정사로 공인되고 있는 마천의 『史記』〈오제본기 제1편〉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황제는 유능국의 임금 소전의 아들이다. 성은 공손(公孫)이고 이름은 헌원(軒轅)이다. 헌원은 나면서부터 신령스러웠고 백일이 못 되어 말을 할 수 있었으며 어릴 때부터 재지(才智)가 번뜩였다. 자라면서는 돈후·민첩했고 성장해서는 총명했다.

 

▲ 치우천황(김산호 화백 그림)    

 

(중략) 제후들은 모두 헌원에게 복종했는데 오직 치우만이 난폭해서 헌원도 징벌할 수 없었다. (중략) 그러나 치우가 천하를 어지럽혀 황제의 명을 듣지 않았으므로 황제는 군사를 제후에게서 징집해 치우와 탁록의 야(野, 현재의 河北省)에서 싸워 드디어 치우를 잡아 죽였다.’

 

사마천은 더불어 다음과 같은 주(註)를 적었다.

 

응소가 말하기를, 蚩尤, 古天子(치우는 옛 천자이다)

 

관자가 말하기를, 蚩尤受盧山之金 而作五兵 明非庶人(치우가 노산의 금으로 오병을 만들었으니 분명히 사람아니다)

 

용어하도가 말하기를, 黃帝攝政 有蚩尤兄弟八十一人 竝獸身人語 銅頭鐵額 食沙石組立兵仗刀戟大弓 威振天下(황제(헌원)가 섭정할 때 형제가 81명 있었으며 짐승의 몸으로 말을 하구리머리에 쇠 이마를 했으며 모래를 먹고 칼, 창, 커다란 활 등의 무기를 만들어 위엄이 천하에 떨쳤다)

 

공안국이 말하기를, 句黎君號蚩尤(구려의 임금을 치우라 불렀다)

 

황람이 말하기를, 蚩尤塚在東平郡壽張縣(치우의 무덤이 동평군 수장현에 있다)

 

그런데 황제헌원과 치우천황이 전투를 벌인 탁록은 지금의 북경 근방이므로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자처하는 중원은 한족(漢族)의 땅이 아니라 동이족의 땅이었던 사실.... 아이러니가 아니겠는가? 

사마천은 오제(황제·전욱·제곡·요·순) 앞에 있다고 알려진 ‘삼황(三皇)’을 신화로 보고 오제 때부터 역사시대로 들어갔다고 보았다. 우리나라 상고사와 대비해보면 배달국의 환웅시대는 중국의 삼황과 오제 양 시대에 걸쳐 있고 단군시대 역시 오제시대 끝자락인 요·순시대와 같은 시기이다(단군의 건국을 기원전 2333년으로 기준할 경우). 즉 치우천황은 중국의 황제와 동시대 인물이고 우리의 단군은 요·순과 동시대 인물인 것이다.  

 

한편, 중국의 정사로 인정되는 사마천 사기에 기록된 치우천황을 박선식 박사는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우선 치우천황이 각종 병장기를 만들었다는 것은 고도의 기술 수준이 있었다는 것을 뜻하며, 한국 측 기록에 의하면 치우천황은 벽토지(闢土地), 흥산(興産), 작병(作兵), 연병(鍊兵)과 뛰어난 숭생중물(崇生衆物)의 치세이념을 구현했다.

벽토지란 산과 계곡을 뚫어 길을 냈음을 말하며 흥산이란 산업을 진흥시켰다는 것이다. 『史記』에는 노산 등지의 광물을 뽑아 제련사업을 일으켰다고 적었는데 이때 치우천황은 구야(九冶)라는 일종의 기술부대를 운용했다고 한다. 

연병이란 강력한 군대를 양성했으며 숭생중물이란 살아있는 생명체와 모든 물상의 존귀함을 인정하고 드러내는 것을 뜻한다. 고대 사회에서 야금 즉 금속의 생산은 매우 중요한데 철(鐵)의 옛글자가 금(金)과 이(夷)를 합친 글자였음에 비추어 볼 때 금속의 생산기술이 동이족으로부터 나왔음은 말할 것도 없다.

 

사마천은 치우천황이 마치 악당인 것처럼 기술하고 반대로 제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훌륭한 사람이요 중국의 통치자인 것처럼 기술했다.

그러나 사마천의 기록을 엄밀하게 해석한다면

치우는 황제 헌원보다 먼저 천하를 다스리던 천황이었다.

그러므로 치우천황이 반역자가 아니고 헌원이 반역자이다. 왜냐하면 황제헌원은 그 당시 배달국의 일개 제후였기 때문이다.

중국의 하(夏)나라 우왕(禹王)이 편찬한 것으로 알려지는 『산해경』에도 헌원이 치우천황에 대한 반역자로 기술되어 다.

 

<금살치우에 대한 사마천의 왜곡>

‘치우가 군사를 일으켜 황제를 토벌했다. 이에 황제는 치우를 기주의 들에서 공격했다. 치우는 풍백과 우사를 불러 크게 바람을 일으키고 비를 퍼붓게 하였다. 이에 황제는 천녀를 불러 비를 멈추게 하고 마침내 치우를 살해했다.’

 

<치우가 헌원에게 살해되었다는 왜곡에 대한 진실>

위의 내용처럼 사마천 사기의 '금살치우'의 내용에 대해서는 치우의 형제 81인이 쇠 이마로 된 똑같은 복식을 했기 때문에, 치우를 살해했다고 기록한 것은 81명 중의 한 장수가 죽었다는 점이다.

(치우군의 부장인 치우비가 죽었다는 주장도 있음). (계속)

 

『산해경』은 일반적으로 하(夏)나라 우왕(禹王, 또는 백익(伯益))이 저술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는 기원전 4세기 전국시대 후의 저작으로 추정한다. 이 책은 중국의 자연관을 아는 데 귀중하며 신화의 기록이 적은 중국 고전에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원래는 23권이 있었으나 전한(前漢) 말에 유수(劉秀)가 교정한 18편만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탁록전투: 치우천황은 기원전 2700년경 도전해오는 중국의 황제 헌원의 중원 패권 야욕에 사로잡혀 도전해오던 중국의 황제헌원과 전쟁을 벌였는데, 중국에서는 이 전투를  중국 한족이 이민족과 벌인 최초의 전투로 간주하고 있다.

(김산호 화백 그림)  ⓒ

 

 

탁록전투는 중국 한족(漢族)이 이민족(異民族)과 벌인 최초의 전쟁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시하며, 헌원은 한족(漢族)의 수장이고 치우천황은 구려(句黎) 즉 동이족의 수장인 것이다. 더불어 묘족(苗族)은 치우천황을 자신들의 시조로 모시고 있다.

(박성수 교수는 황제와 치우 모두 동이족이라고 설명함). 

치우천황은 중원의 패권을 놓고 도전자 헌원과 73회나 전투를 했는데, 치우천황께서는 73회의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하지 않은 불패의 신화를 남겼으며, 헌원은 단 한번도 이기지 못하였다. 또한 한국측 자료인 「삼성기전 하편」에는 치우천황이 탁록의 벌판에서 헌원을 격파하고 신하로 삼았다고 적혀 있다. 『환단고기(桓檀古記)』와 『규원사화』에서도 치우천황과 황제가 싸워 이

싸움에서 치우천황이 이겨 먼저 제위에 올랐다고 적었다. 또한 『한단고기』에서는 배달나라(환웅시대) 영토를 중국의 산동반도 이남에 있는 희대 땅까지 넓혔다고 기록했다.

 

 

원글 출처 : 사이언스타임즈/이종호 과학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