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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의 비밀코드

[6] 정체성의 혼란

by 바로요거 2008. 10. 14.

[6] 정체성의 혼란


- 반복되는 외침과 전쟁, 그리고 생존을 위한 내부의 갈등



1. 서문(序文)



 현재의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른다. 이유는 크게 스스로 역사를 버렸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역사에 대하여 무관심해져 버렸기 때문이며, 세번째는 외세에 의해 자신들의 역사에 대해서 무관심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를 가장 잘 지적한 사람이 바로 단재 신채호와 백범 김구다.



 아뭏든 최근 우리역사를 잃어 버린 이유는 그 탓이 역사학계의 영향이 크다. 8.15후 국내로 돌아온 이승만 박사는 헌법제정위원회를 협박하여 초대대통령의 자리에 올라 문교부 장관에 안호상 철학박사를 앉혔고, 안호상 박사는 해외유학파로 국내사정을 잘 몰라 이병도 박사를 서울대학교 역사학과 주임교수로 앉혔다.



 이병도는 구한말 조선통감부 시절 이후 그의 스승인 금서룡(이마니시 류)과 함께 조선총독부 산하인 조선사편수회에서 『조선사』35권을 찍어 낸다. 이 『조선사』 35권은 해방후 역사학과 주임교수가 된 이병도 박사가 국사편찬위원으로 선임되면서 다시 국사 교과서를 만드는 사료로 쓰였고, 이것이 50년이 지난 후에도 고쳐지지 않았다.



이병도 박사의 제1대 제자들이 지금 명예교수 및 각 대학의 역사학과 교수가 되어 있고, 다시 그 2대 3대 제자들이 각 대학의 교수, 부교수 및 강사들이 되어 있으며, 이들에 의해서 교육받은 유치원,초,중,고등학교의 국사 선생들이 되어 전국에 부임하여 왔으며 이 지랄을 지난 50년간 반복해 왔다.



 과거 일제가 『조선사』 35권을 편찬할때 수백만석의 예산을 들였다. 자금의 규모면에 있어서 현재 중국이 동북공정에 1천억원 이상을 쓰고 있는것과 동일하거나 그보다 훨씬 많은 돈을 들였던 셈이다.



후에 이병도는 법학계의 산증인인 최태영박사(올해 106세)에 의해 『한국상고사입문』(1989년판)에서 古조선의 실재함과 이에 대한 여러 연구를 밝혀 놓았다. 물론 이는 이병도의 제자들에 의해 이병도 박사를 노망든 늙은이로 취급함으로서 역사에 묻혔다. 그 뒤 50년간 일제때 만들어진 사료를 바탕으로 쓰여진 역사서를 공부해 왔고, 서교(유대교, 구교, 신교, 맑스교)신자들에 의해서 단군은 신화로 古조선은 환상의 나라가 되었다. 그 뒤 한국은 역사를 잃음으로서 혼을 잃었고,  미국 등의 펑크(쓰레기) 문화와 함께 일본의 가장 저급한 문화가 섞여진 체로 들어와 넋까지 잃어 자신의 본래 정체성을 거의 잃게 되었다.



 이제 살펴볼 것은 한민족의 역사가 여기까지 오게된 과정과 무엇이 어떻게 영향을 미쳤길래 이런 현상이 초래되었는지 연구해 보기로 한다.



2. 사대사관 - 생존을 위한 전략적 선택



가야와 백제, 고구려가 차례로 멸망하고, 당이 신라를 압박하던 무렵 신라의 문무왕은 당 고종에게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린(!)다.



"신은 죽을 죄를 삼가 말하나이다. 전일에 우리의 위급한 처지가 마치 거꾸로 매달린 것과 같았을 때 멀리서 구원을 입어 도멸을 면하게 됐으니, 우리는 분골쇄신으로도 (황제의) 크나큰 은혜를 갚기에 충분하지 못하고 머리를 부스러뜨려 재와 티끌을 만든다 하더라도 어찌 그 은덕을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큰 원수인 백제가 신의 변경에 닥쳐 천병(天兵)을 이끌어 신을 멸해 (그들의) 치욕을 갚으려 하므로, 신은 파멸의 지경에 이르러 스스로 생존을 구하려 했는데, 잘못 흉역의 이름을 뒤집어쓰고 드디어 용서키 어려운 죄에 빠지게 됐나이다. 신이 사정을 아뢰지 못하고 먼저 죽음을 받는다면, 살아서는 (황제의) 명을 거역한 신하가 되고 죽어서는 은혜를 저버린 귀신이 될까 두려워 삼가 사실을 기록해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는 바이니 신청을 적이 기울여 (사실의) 사연을 분명하게 살피기를 바라나이다.



신은 전대부터 조공을 끊이지 않다가 백제 때문에 직공을 결하게 되어, 드디어 성조로 하여금 성언을 내고 장수에게 명해 신의 죄를 치니 죽어도 받아야 할 형벌이 있을 것입니다. 남산의 대나무로도 신의 죄를 족히 쓸 수 없고 포사의 숲으로도 족히 신의 계(械 : 손발을 붙들어 매는 형틀)를 만들 수 없을 것입니다. 종묘와 사직을 헐어 연못을 만들고 신의 몸을 찢어 죽이더라도 (황제께서) 이 사정에 귀 기울여 판단해 주신다면 달가운 마음으로 죽음을 받겠나이다. 신의 관과 상여가 곁에 있고 니수(泥首 : 머리를 진흙땅에 대고 죄를 빈다는 뜻)가 아직 마르지 않은 채 피눈물로 조정의 명을 기다리고 형을 복청하나이다.



엎드려 생각건대 황제 폐하께서는 밝으심이 일월과 같아 모두 그 용광의 비춤을 골고루 받고 덕은 천지와 합치해 동식물이 다 그 은혜를 입으며, 호생의 덕은 멀리 벌레에까지 미치고 살생을 싫어하는 어짐은 새와 물고기에게도 흘러가니,만일 복사(服捨 : 석방)의 용서를 내리시고 목숨을 보존시키는 은혜를 주신다면, 비록 죽는다 해도 산 것과 다름이 없겠나이다.



바라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감히 품은 바를 말하니 황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으며, 삼가 원천 등을 보내 표를 올려 죄를 빌고 칙지를 엎드려 들으려 하나이다. 신 모는 머리를 조아리고 조아리고 사죄사죄하나이다." 『삼국사기』「신라본기」문무왕 12년(672년).



그리고 천년 뒤인 병자년(1636년) 3월 초하루(丙午日) 국제정세상 중립을 지키고 있던 광해군을 내쫓고 쿠테타로 왕이 된 인조는 느닷없이 전쟁준비를 선포한다. 4월 을유일(乙酉日)에 거행된 호타이지의 황제 즉위식에서 인조를 대신해 청에 회답사로 간 이확과 춘신사로 후금의 수도 심양으로 간 나덕헌은 국궁배례를 하지 않았다. 조선 사신을 처형하자는 주장에 홍타이지는 만류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 나라 임금은 나에게 원한을 품고 있어서 짐이 사신을 죽이게 해서 구실을 찾고자 한다. 풀어주어 돌려보내라.』



인조가 전시체제를 선포했지만 왕실은 호화저택을 짓는 등 사치가 여전하였다. 대간들이 이를 만류하였으나 인조는 듣지 않았다. 거란과의 전쟁에 대비해 근신하였던 고려 현종의 처신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그 뒤 7월 청군은 북경과 북방을 친다. 청군은 12개 성을 무찌르고 56번의 전투를 치러 모두 이기는 등 북경 위쪽을 손에 넣는다. 포로와 가축 등 전리품을 얻어 9월에 심양으로 돌아갔다. 9월 10일, 마부대가 인삼 무역으로 중강에 와서 의주부윤 임경업과 만났다.



마부대는 청 태종이 얼마나 조선을 비웃는지를 전했다.



『한(汗)이 여러 왕자들과 더불어 매번 이르기를 `조선은 아녀자의 나라인데 무엇을 믿고 저러는가`하고 항상 웃는다.』



9월 19일, 조선은 박인범을 심양에 보냈다. 청 태종은 사신으로 온 박인범에게 말했다.


『너희 나라가 만약 11월 15일 이전에 대신과 왕자를 보내서 화의를 다시 정하지 않으면 크게 군사를 일으켜 너희 나라를 무찌를 것이다.』


청 태종이 보내온 답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귀국이 산성을 많이 쌓는데 만약 내가 큰길로 바로 서울로 향해도 산성으로 나를 막아낼 수 있겠소? 귀국이 믿는 것은 강화도인데 만약 내가 조선 땅을 다 유린하면 조그만 섬 하나 가지고 나라라 할 수 있겠소? 척화를 주장하는 자들은 유신(儒臣)인데 그들이 붓끝을 휘둘러 나를 물리 칠 수 있겠소?』



12월 1일, 청병 7만 8천 명, 한병 2만 명, 몽고병 3만 명으로 편성된 도합 12만 8천 명의 조선 원정군이 심양에 집결하였다. 명나라와의 전선에 배치한 병력까지 이동하여 참전시킨 대규모의 원정군이었다.



12월 2일, 마부대가 이끄는 기병 6천 명이 선두에 서고 좌익군과 우익군 전부가 뒤따라 출발했다. 이날에야 조선은 사신 박노와 박난영을 심양으로 출발시켰다.



12월 3일(양력으로 1637년 1월), 청 태종은 예친왕 다이산(누르하치의 장남)과 함께 중군을 이끌고 심양을 출발하여 의주로 향했다.


12월 8일, 가장 먼저 출발한 마부대의 기병 6,000명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마부대가 이끄는 청군은 지나는 성읍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질풍같이 조선의 수도로 직진했다. 이날 오후에는 예친왕 도도가 이끄는 좌익군 3만 명도 압록강 건너편에 도착하였다. 조선이 의주의 진을 비워 둔 상태라 이들은 도강하여 의주에 무혈입성한다. 도도(누르하치의 15子)는 시간을 지체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남진을 계속한다.



12월 10일, 청 태종이 이끄는 중군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 영내에 진입했다. 청 태종은 의주, 용천, 곽산, 선천, 정주 등 여러 지역에 소수의 병력만을 잔류시켜 조선군의 동태를 감시하게 하고 계속 남진하였다.



12월 12일, 의주부윤 임경업 장군의 장계로 조선 조정은 청군의 침입 소식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내용은 `9일 압록강 건너편에 적병이 가득 차더니 이날 저녁에 길을 나눠서 강을 건너고는 진군 속도를 더욱 빠르게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12월 13일, 도원수 김자점이 장계를 보내와 청군이 안주에 이른 것을 알게 되었고, 날이 저물 무렵에는 김자점의 장계가 또 도착하여 청군이 이미 평양에 이르렀다고 전했다. 이날 조선 조정은 강화도로 들어가기로 결정한다.



12월 14일, 개성유수의 장계로 청군이 개성을 통과한 것을 알게 되자 귀양보낸 사람 등 모든 죄인을 사면시키라는 명이 내려졌고, 새로 임명한 수령들을 급히 부임하게 하였다. 또 한성 판윤 김경징(영의정 김류의 아들을 도검찰사로 삼고, 부제학 이민구를 부검찰사로 명하고 강화유수 장신을 주사대장을 겸임하게 하여 강화도를 지키도록 했다. 한편 상중에 있는 심기원을 서울을 지킬 유도대장에 임명했으나 그에게는 수하 병력이 600명에 불과했다. 세자빈과 원손, 봉림대군, 인평대군은 강화도로 피신했다. 오후들어 인조는 소현세자와 함께 도성을 빠져 나와 강화도로 가려했다. 그러나 청군의 선봉부대가 양천에서 길을 차단하는 바람에 남대문으로 돌아왔다.



최명길이 자청하여 청군 진영을 찾아갔고 청의 마부대와 회담으로 시간을 끄는 사이에 인조는 세자와 백관을 이끌고 동현로를 지나 수구문(지금의 을지로)으로 도성을 빠져나갔다. 인조 일행은 살곶이 다리를 건너고 마장리를 거쳐 얼어붙은 신천과 송파나루를 건넜다. 남한산성에 들어간 것은 이경(밤 10시전후)무렵이었다.



이때 왕을 호위하던 군사는 중도에 달아나 겨우, 5,6명만이 산성에 따라 들어갔으며 소현세자를 수행하던 군사들도 모두 도주해 세자가 손수 말채찍을 잡고 말을 몰아 산성으로 들어가는 참담한 상황이었다.



12월 15일, 새벽,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와 강화도로 피신하려 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데다 큰 눈이 온 후 길이 얼어붙어 인조가 탄 말이 미끄러져 넘어졌다. 인조가 말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으나 수없이 자빠지고 엎어져 발을 다쳐 다시 성안으로 들어갔다.



성안에 있는 군사는 1만 2천여 명이었고 문무관과 산관이 2백여 명, 종실과 의원 관리등 3백여 명이었다. 왕을 뒤따라 입성한 어영청 총융청 훈련도감 군을 합하여 가까스로 13,800명의 군사를 확보했다. 정묘호란 때와 마찬가지로 인조가 전쟁에 직접 출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청은 임금과 임금의 형제 자식이 지휘관으로 출정하는데 이씨 왕조는 임금과 왕자가 피신하기에 바빴다.



해가 바뀐 정축년(1637년) 홍서봉, 김신국, 이경직이 적의 진중에 가서 청 태종이 인조에게 내린 조서를 받아온 날이 1월 2일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청국 관온인성황제는 조선국왕에게 조서를 내려 깨우치게 한다. 우리나라 군사가 지난해 동쪽 우량하를 칠 때, 너희 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요격을 한 뒤에 또 명나라의 협조하여 우리나라를 해쳤다. 그러나 이웃나라끼리 사이좋게 지내기를 생각하여 끝내 개의하지 않았는데, 우리가 요동을 얻게 되자 너희는 다시 우리 백성을 불러다가 명나라에 바쳤으므로, 짐이 노하여 정묘년에 군사를 일으켜 너희를 정벌하였던 것이다. 이것을 어찌 강함을 믿고 약한 자를 능멸하여 군사를 일으킨 것이라 할 것이냐?(중략)



이제 짐이 친히 너희를 치러 대군을 거느리고 왔다. 너는 어찌하여 지모 있는 자가 책략을 본받고 용감한 자가 종군하게 하지 않고서 몸소 일전을 담당하려 하느냐? 짐이 강대함을 믿고 추호도 서로 범하지 않았는데, 너희는 약소국으로 도리어 우리의 변경을 소란하게 하며, 산삼을 캐는 자 사냥을 하는 자를 어찌하여 짐의 도망한 백성이라 하여 데려다가 명나라에 바치느냐? 또 명나라의 공 경(청에 투항한 명의 장수 공유덕과 경중명) 두 장수가 귀순하여 짐의 군사가 가서 그를 응접하려 하는데, 너희 군사가 대포를 쏘아 방해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 이것은 너희가 함부로 전단을 일으킨 것이다.(중략)



정묘년의 치욕을 씻는다고 눈앞의 안락을 깨뜨리고 화를 스스로 불러서 후세에 웃음거리를 남기려 하니, 이 치욕은 또 장차 어떻게 씻으려 하느냐? 이미 정묘년의 치욕을 씻으려 생각했으면, 어찌하여 목을 움츠려 나오지 않고 여인의 처소에 들어앉아 있는 것을 달게 여기느냐? 네가 비록 이 성에 몸을 숨기고 있으면서도 생각은 욕되게 살기를 바라지만, 짐이 어찌 너를 놓아줄까 보냐?



짐의 여러 내외 왕과 문무 모든 신하들이 짐이 칭제하기를 권고하였음을 네가 듣고는, `이런 말을 우리나라 군신이 어찌 차마 들을 수 있느냐`고 말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 황제를 일컫는 것은 옳고 그름은 너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이 도우시면 필부라도 천자가 될 수 있고, 하늘이 화를 주시면 천자라도 외로운 필부가 될 것이다. 그러니 네가 그런 말을 한 것도 또한 매우 망령된 소리이다.(중략)



이제 짐이 대군을 이끌고 와서 너희 나라를 소탕할 것인데, 너희가 어버이로 섬기는 명나라가 장차 어떻게 너희를 구원하는가 두고 볼 것이다. 자식에게 위험이 절박했는데 어찌 구원해 주지 않는 아버지가 있으랴. 그렇지 않으면 이는 스스로 백성을 물과 불 속에 빠트리는 일이니 억조 중생이 어찌 너에게 원한을 품지 않겠느냐? 네가 할 말이 있거든 분명히 고하라, 막지 않을 것이다.』



아무런 대책없이 만 백성을 사지로 몰아넣은 임금이라면 마땅히 내부로부터 비판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전쟁불사`를 외친 적국의 왕에게 조차 이런 우롱을 당한 것이 당시 조선의 조정이었다.



1월 18일, 이조판서 최명길이 답서를 황태극의 편지에 답서를 작성하자 예조판서 김상헌이 이 글을 보고는 발기발기 찢고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 김상헌이 최명길을 보고 말했다.



"그대의 선친(최기남)께서는 선비들 사이에 도덕과 의리로서 명망이 높으신 분이셨는데, 그대는 어찌 이처럼 서슴없이 군부를 욕되게 하는 일을 할 수 있단 말이오."



최명길이 말하길 "대감께서 나라를 위하는 충정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러나 나 역시 나라와 백성의 안전을 위해 이러는 것입니다. 대감께서 이 국서를 찢으시면 나는 다시 붙이곘습니다."



병조판서 이성구가 크게 화를 내며 김상헌을 책망하였다.



"대감이 이미 오래 전부터 척화를 주장하여 오늘날 나라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대감은 후세에 비록 아름다운 이름을 얻을지언정, 군부와 종묘사직, 그리고 백성들은 어찌한단 말이오. 그다지도 대의를 부르짖으면서 대감은 어찌 몸소 적에게 의로써 대항하지 못하시오?"



1월 28일, 홍서봉 김신국 최명길이 청군 진영에 가서 항복절차를 논의했다. 용골대는 제이등 절목으로 항복이 예를 치르기로 결정했음을 알렸다. 제일등 절목이란 `함벽여츤`을 가리킨다. 함벽여츤은 항복한 군주가 손을 뒤로 결박 짓고 구슬을 물며 관을 짊어지고 가는 항복 의식을 말한다. 구슬은 진공을 뜻하고 관을 짊어지고 가는 것은 승자가 죽여도 이의 없다는 의사 표시이다. 한 마디로 무조건 항복을 말한다. 진의 3세 황제 자영이 한 고조 유방에게 항복할 때 이 의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청 태종은 함벽여츤을 명하지 않고 제이등 절목을 제시했다.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윤섭, 천하의 중심 고구려, 코리아북케이스, 2004, 16~35쪽 정리.



3. 식민사관 - 40년간의 단절



1902년 초 대한제국의 군인의 총수는 17,560 여 명에 이르렀다. 당시의 대한제국 군대의 횡포는 민중을 수탈하는 조직폭력배가 연상된다. 군인들은 황제의 군대라는 위세를 부려 민전을 탈점하거나 주변 주민에게 각종 잡세를 징수하였고 국민을 체포하여 재물을 약탈하는 등의 횡포를 저질렀다. 진위대(1895년 지방의 치안과 변경수비를 목적으로 설립한 지방군대)의 탐학은 화적보다 심하다는 평을 받았고 활빈당은 진위대 대대장이 진짜 화적이라고 성토하였다. 원수부 총장 신기선도 군대가 `규율이 없는 무뢰배의 소굴`이라고 지적할 정도였다. 이는 임진왜란 발발시보다 더 질이 악화된 모습이다. 그러므로 1만 정의 소총을 구입하고도 군인들의 부주의로 파손될 것을 우려하여 기기국에 보관하고 있었던 일도 그리 놀랄 일은 못된다. 조선왕조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문호 개방 후 일본의 침략 등 3차례 외침을 겪는데 앞서 두번은 모두 의병의 활동, 명의 참전, 청의 조선 항복후 정권 용인 등 다른 왕조의 경우라면 기대하기 어려운 일로 정권을 지켜냈지 이씨 왕조가 주체적 역량으로 정권을 수호한 것이 아니었다.



이씨 왕조는 백성에게 무엇을 해 줄 것인가 하는 고민은 없고 백성이 왕조에 무엇이든 해줄 것만을 요구하는 정권이었다. 일본의 침략에도 조선 왕조의 태도는 여전하였다.



많은 외국인들도 개혁을 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것으로 보았지만 1898년 독립협회의 해산으로 조선 왕조는 근대적 개혁을 할 의사가 없음이 명백해졌다. 조선 왕조가 무력하게 멸망하는 과정을 목격한 많은 외국인들은 조선의 자치능력에 의문을 던졌다. 친한파 외교관이나 선교사의 일부는 부패한 왕정에서 무제한의 착취를 받는 조선 민중의 앞날을 걱정했다.



한때 조선의 주권 수호에 열성적이었던 당시 미국 공사 알렌도 조선 위정자들의 부패와 무능에 지쳐 끝내는 한국의 독립지지 입장을 포기하였다. 1904년 1월 4일 알렌은 " 이 사람들은 자치할 능력이 없습니다. 한국은 일본에 속하여야 합니다. 독립이라는 허구를 일본으로 하여금 더 이상 계속토록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라는 내용의 견해를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 동아시아정책담당보좌관인 록힐에게 밝혔다.



러일전쟁 개전 직전 탁지부 대신으로 나라의 재정을 맡았던 이용익이 친한파 기자로 유명한 맥켄지와 가졌던 대화는 당시 위정자들의 수준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맥켄지는 그의 저서 <한국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이용익과의 대화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우리는 그의 사랑방 마루에 앉아서 시국을 토론했다. 나는 한국이 멸망하지 않으려면 개혁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는데, 그는 미국과 유럽나라들이 독립을 보장하고 있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반론했다. "아니 그것을 모르시오? 힘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조약은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것을 모르시오? 당신이 그 조약들을 지키도록 하려면 그만한 노력을 해야 할 것이 아니오? 당신 나라는 개혁을 하지 않으면 망하게 될 것이오."라고 나는 역설했지만 그는 "다른 나라들이 무엇을 하든 상관이 없소. 우리는 우리가 중립이라는 것을 천명했고, 우리의 중립을 존중하라고 당부했소"라고 고집했다. "미국은 약속했소. 무슨 일이 있든지 미국은 우리의 우방으로 남을 것이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의 입장을 굽히려고 하지 않았다.』

1904년 1월 22일자 제국신문의 한 기사도 당시 지배층의 파렴치한 모습을 잘 보여준다.



『최근 여러 외국 공사들은 소위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뻔뻔스럽게도 수천 명의 군대를 (서울로) 불러 들였다. ... 오늘날 소위 개화된 세계란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과거의 시대보다 더욱 악랄하다. ... 오늘날 각국들이 대한(大韓)을 대하는 태도는 우리들의 깊은 분노와 근심을 자아내게 한다. 이들의 후안무치는 한계가 없다. 이들 나라에서 온 외국인들의 눈에는 한구이란 두 글자는 존재하지 않겠지만, 우리나라는 여전히 독자적인 정부와 (외세에) 대해 정당한 저항을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위엄있는 독립국이다. 왜 너희 신민(臣民)들은 이들 후안무치한 외국군인들을 몰아내려 하지 않느냐 ... 국가가 편안해야 나의 생명과 재산이 편안하다는 것이 만고의 법칙이다.』



맨주먹의 `신민`에게 외적을 물리치라고 호통을 치고 있다. 그러나 `신민`들이 일본을 몰아내려는 의병전쟁을 시작했어도 이씨 왕조는 이들을 지원하는 어떠한 조치도 내린 적이 없었다. 이윤섭, 앞의책 35~38쪽 정리.



한편 기미년(1919년)에 거국적인 3.1 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무단통치와 사서 말살만으로는 한민족의 항일의지와 역사 혼을 근원적으로 뿌리 뽑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항구적인 식민지배를 위해 치밀하고 조직적인 역사왜곡의 정책을 세우게 된다.



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齊藤實)는 부임하자마자 기존의 문맹화 정책을 바꾸어 전국에 이른바 `조선인을 반(半) 일본인으로 만드는` 문화통치 교육시책을 하달했다.



3대 총독 사이토 마코토(1858~1936)가 하달한 문화통치 교육시책은 다음과 같다.



(가) 먼저 그 사람들이 자기의 일과 역사와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들어 그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만들고



(나) 다음 그 모든 선인들의 무위와 무능, 악행 등을 들춰내어 그것을 과장하여 가르침으로써 조선인 청년들이 부조들을 경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며



(다) 그리하여 그것이 점차 자아 혐오증으로 발전하게 함이 가장 효과적인 것이다. 이미 배움에 갈증이 심한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에 관하여 왜곡된 지식을 얻어 경멸적 혐오증에 걸리게 되면 그들은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질 것이니, 그러한 때에 장식, 미화, 과장된 일본사적, 일본인물, 일본문화들을 소개하면 그 주입효과가 클 것이다. 제국 일본이 조선인을 반(半) 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과 첩경이 실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문정창, 군국일본조선강점 36년사, 박문당, 1967, 319쪽. 안경전, 개벽실제상황, 173쪽에서 재인용.



4. 유물사관 - 역사는 유물로만 이야기 되는가?



 일제시대 독립노선은 크게 두가지였다.


 하나는 무장독립투쟁의 노선이었고, 다른 하나는 실력양성운동이었다.


 주로 무장독립투쟁은 반도의 밖에서 진행되었고, 실력양성운동은 반도 안에서 진행되었다.1930년 이후에 이르면 반도내에서 실력양성운동을 부르짖던 사람들은 일본의 강경과 회유책에 힘입어 아뭏든 결과적으로 친일파로 돌아서게 된다. 무장독립투쟁노선과 실력양성운동노선 또한 각기 두 갈래로 나뉘어 진다.



 무장독립투쟁노선은 자유민주,민족주의 계열과 공산주의, 사회주의 계열로 나뉜다. 실력양성운동 또한 사회주의 노선과, 민족자본양성운동으로 나뉜다. 『백범일지』를 통해 김구선생에 따르면, 국내외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노선은 무장독립노선이든, 실력양성운동이든, 한국인들의 삶을 스탈린에게 송두리째 갖다 바치려한 사람들로 기억한다. 곧 식민의 주체를 일본에서 맑시즘과 레닌주의 그리고 스탈린주의의 소련으로 바꾸려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무장독립투쟁계열의 분열을 조장하고 국공통합작전을 통해 자신들의 세력을 넓히려 하여 결국 만주 한인사회를 분열시켜 통합을 이끌어내는데 실패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였다는 것이다.



 칼 맑스가 『자본론』을 통해 2천년 자본주의의 폐해를 예리하게 지적하고 역사의 단계적 발전과 근대를 재해석하는 원초적 힘을 제공해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사상이 한반도로 들어와서는 일본제국주의 정부에 의하여 한민족의 역사를 말살하고, 역사정신을 빼앗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워주었다. 그것은 곧 유물로서 남아 있는 것만이 역사의 진실이라는 생각에서 부터였다. 1910년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병합한 직후, 조선총독부 초대 총독으로 부임한 테라우치 마사타케는 불온서적을 수색한다는 명목으로 군경을 동원, 마치 군사작전을 하듯 전국 각지에서 20만권의 사서를 강탈, 소각하였다. 김진학, 한철영, 제헌국회사, 신조출판사, 1954, 25쪽; 문정창, 군국일본조선강점 36년사, 박문당, 1967, 80쪽. 안경전, 개벽실제상황, 172쪽에서 재인용함.



그리고 1916년 부터 3년 동안 조선사를 편찬한다는 명목으로 또한 차례 서적을 거둬들여 그 가운데 희귀한 비장사서들은 일본으로 가져가 깊이 감춰 두었다. 이 사실은 일본 궁내성의 왕실 도서관에서 12년 동안 근무했던 박창화(1889~1962)씨에 의해 폭로된 바 있다. KBS 1TV, 역사스페셜, 추적, 화랑세기 필사본의 미스터리, 1999년 7월 10일.안경전, 개벽실제상황, 172~173쪽에서 재인용함.



이후 제헌국회를 협박하여 초대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이승만 박사는 국내사정에 어두웠던 해외유학파 출신 안호상 철학박사를 문교부 장관에 앉혔고, 안호상 박사는 서울대 역사학과 주임교수로 이병도 역사학 박사를 임명한바 있다. 이병도 박사의 스승은 도쿄제국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조선사를 연구, 도쿄제국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후에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 조선총독부 조산사편수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한민족 고대사를 근본적으로 말살함으로써, 중국, 일본사에 조선사를 종속시키는 소위 반도식민사관을 확립한 이마니시 류(1875~1932) 박사였다. 이마니시 류는 조선사 35권을 편찬하여 한국사 개조작업을 완결지은 공로로 왜왕으로 부터 거액의 포상금과 금시계를 받은바 있다. 1926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가 설립되자 조선사 교수가 되었다. 해방 후에는 그의 제자 이병도 등이 한국의 강단사학을 주도하면서 식민사관을 깊이 뿌리내림으로써, 오늘날까지도 조선의 역사는 왜곡과 단절의 아픔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 『조선고사의 연구』,『단군고』 등이 있다.



한편 1926년 일본 경도제대 나이토 코우지로(內藤虎次郞) 교수와 이마니시 류 조교가 공모하여 『삼국유사』「정덕본」을 극비리에 날조하고 영인(影印)하였다. 그들은 이 사실을 감추기 위해 「경도제대 영인본」이라는 이름으로 대량 배부하였다. 『삼국유사』「정덕본」에는 석유환국(옛적에 환국이라는 국가가 있었다. 역사적 사실)이라 쓰여 있고, 나이토 코우지로 교수와 이마니시류 조교가 공모하여 날조한 「경도제대 영인본」에는 석유환인(옛적에 환인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전설, 설화, 신화)고 기록하였다. 안경전, 개벽실제상황, 대원출판, 174쪽, 2004년.



육당 최남선은 조선사편수회 제6차 위원회에서 『삼국유사』 제1권 고조선 편에 있는 환국(桓國)이라는 글자가 환인(桓因)으로 변조된 사실을 지적하며 울분을 터뜨렸다. 당시 회의록에 남아 있는 육당의 발언은 다음과 같다.



『<단군고기>는 광범한 고기록을 지극히 간략하게 요약하여 놓은 것이므로 그 편언척자에도 중대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 그러므로 가령 한 자의 잘못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전문의 해석상 미치는 영향은 지극히 크다. <삼국유사>의 <단군고기> 중에 석유환국(昔有桓國)이라고 되어 있던 것을 석유환인(昔有桓因)이라고 고친 천인(淺人)은 이마니시 류(今西龍)의 망필(妄筆)을 인용한 것이 바로 그 하나다.』



육당은 생존에 변조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임신본 원본을 보고자 노력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신채호 선생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10년을 두고 <삼국유사>를 좀 보았으면 하였으나 불가득하였다."고 한탄했다.(문정창<단군조선사기연구>) 조선사편수회 위원이었던 육당조차 보지 못했다고 하니, 조선총독부가 <삼국유사> 임신본을 비밀문서로 특별 관리했거나,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한 소수 일본인 학자들만 소재를 알고 있었던 듯하다. 광복 후 1960년대에는 문정창 선생이 <삼국유사> 임신본의 변조를 주장했다.



한편 2001년 이도학 씨가 쓴 <한국고대사 그 의문과 진실>에서는 "<삼국유사>에 환국으로 기재되어 있는 것을 일본 학자가 환인으로 변조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환국의 존재는 허구"라고 했다.



그런데 국립중앙도서관에서 1904년 도쿄제국대에서 발생한 <삼국유사> 책 뒷면에 1904년 동경제국대학장판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이 책의 고조선편에는 환국(桓國) 이라는 글자가 분명히 있다. 최태영 선생이 확인한 1902년 도교제국대 발행한 <교정 삼국유사>와 출판 연도만 다르고 교감자는 같았다.



재밌게도 1904년 도쿄제국대 발행 <삼국유사>에는 아사달의 위치에 대해 "아사달이 .... 관성의 동쪽에 있다고 전해진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관성(關城)은 산해관(山海關)을 의미할 수도 있다고 한다. 산해관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 관문으로 남쪽을 관내, 북쪽을 관외로 부르는데 고대에는 이곳이 국경이었음을 의미한다고 했다. 일본역사교과서왜곡대책반 실무반장 성삼제, 고조선 사라진 역사, 동아일보사, 2005, 174쪽.



5. 유일신사관 - 굴러온 돌의 박힌돌 빼기



태풍(또는 허리케인, 사이클론)이 한번 불어 휘몰아쳐 지나간 자리에는 이전과 그 이후가 다르다. 인간의 역사속에서도 그런 일들이 종종 닦치곤 한다.



Time(1999.12.31, THE MOST IMPORTANT PEOPLE OF THE MILLENNIUM)과 워싱턴포스트(1995.12.31, The Era of His ways ; In which We Choose The Most Important Man of the Last Thousand Years)는 지난 1천년간 가장 중요한 인물로 칭기스칸을 선정한다.



몽골고원에서 독살된 아버지 예수게이와 홀로 칭기스칸의 형제들을 키운 어머니 허엘룬의 이야기 그리고 알렉산더, 나폴레옹, 히틀러가 정복한 땅을 모두 합합 것보다 더 넓은 땅을 차지했던 한 인간의 일생에 대해 주목하는 이유에 대해 크게 세가지를 들고 있다.



① 동서문명의 벽을 터놓음으로서 지구가 인터넷으로 연결되기 800년전에 동서문명을 자극하여 거대한 이동(사람, 물자, 정보, 기술) 곧 전 지구적인 통신망을 연결시켜 놓았다.



② 칭기스칸의 간접적인 영향으로 발생한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1/3이 전멸했고 이후 노동력가치의 상승이 자본주의 발달의 촉진으로 나타났다.



③ 더 넓은 땅덩어리에 대한 호기심을 일으키고 동서문명의 모험가들을 자극하여 새로운 대륙으로의 발견을 낳게 했고, 결과적으로 800년전 가장 발달한 중국문명의 발전을 억제시키고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괴멸시켰으며, 당시 세계의 가장 후진국이었던 기독교문명이 전 세계를 지배하도록, 강력한 경쟁심을 부추겨 일으켜 지구전체를 소용돌이로 몰고갔다는 것이다. 김종래, 밀레니엄맨 칭기스칸, 꿈엔들. 참고.



아뭏든 칭기스칸의 공포와 쿠빌라이칸에 자극받아 고향인 이탈리아에서 허풍선이로 알려진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에 자극받아 유럽은 범선을 타고 전 중국과 황금의 나라 지팡코를 찾아 헤맨다. 후에 유럽이 제국주의란 괴물로 탈바꿈하여 전 세계인들을 식민 노예로 만들어 갈 무렵 가장 먼저 시행한 일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먼저 들여놓아 그 땅을 정신적으로 지배하는 일이었다. 유럽제국주의를 이른바 신대륙에 발닫게한 콜롬부스는 원주민의 손을 짜르며 잔인하게 정복을 시행했고 또한 야만적인 질병을 들여 놓아 원주민들을 죽음으로 몰고갔다. 낯선질병과 동식물이 유럽을 통해 건너왔고, 콜롬버식의 모험은 이후 유럽이 전 세계를 식민지배하는 문을 열어 놓았다.



아메리카 원주민을 실질적으로 도륙한 것은 기독교선교사가 뿌린 질병을 통해서였는데, 20세기에만 5억명의 생명을 앗아간 시두(時痘)에 의해서였다. 아즈텍과 잉카제국은 16세기초 스페인 군대가 옮긴 시두 때문에 멸망하였다. 시두는 이미 천년전 로마제국 시대인 165년 부터 15년간 전체 국민 1/3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었다.



이때문에 칼 맑스는 종교를 특히 기독교를 빗대어 인민을 노예로 만드는 아편이라 한 바 있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바 있다.



"어떤 민족을 멸망시키기 위해서는 역사를 말살하라는 것이 식민주의자들의 철학이다." 안경전, 개벽실제상황, 대원출판, 2004, 172쪽.



결국 현재 전 세계에 퍼진 한국인들은 기독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미국에 의한 일본의 강제개항과 불평등조약이 일본에 의한 조선의 강제개항과 불평등조약으로 이어졌고, 유럽의 제국주의는 일본의 제국주의로 이어져 제국주의를 이겨나는 와중에 그들의 신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민족 고대의 역사는 신화로 전락하였고, 4천년전 수메르에서 갈데아 우르로 갔던 아브라함 보다 수백년 앞서 있는 단군왕검의 역사는 그들의 표현대로라면 "욕심의 산물"이 되고 말았다. 아마도 지금의 역사가 좀더 흐른다면, 수백년이 지난뒤에 한국인은 만주족처럼 역사속에서나 등장할지도 모르고, 기독교 성경에 등장하는 소돔 또는 고모라와 같은 곳으로 기록될지도 모를 일이다.



단군 동상을 세우는 것이 우상이라면 마리아의 동상과 예수의 동상을 세우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우상이 아닌가? 한국인의 역사보다 유대인의 역사가 더 소중하다는 것인가? 한국의 전통보다 기독교의 전통이 더 중요한 것인가? 그럼 그들은 한국인이긴 한 것일까?



6. 살아남기와 이어가기, 그 팽팽한 줄다리기의 틈에서


 

역사속에서 살아남는 다는 것은 무섭고 외롭고 힘든일이다.


특히 강대한 국가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는 것은 더더욱 힘든 일이다. 유대인의 경우 2천년간 유랑생활끝에 1945년 미국 유대인들에 의해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을 모아 이스라엘이라는 그들만의 국가를 세울수 있었다.


그러면 그들 유대인들의 역사속에서의 고통이 크고 힘들었음으로 또 오늘날 뛰어난 노벨상 수상자들을 30%씩 배출하고 있음으로 그들이 살아남는 과정에서 만났던 그들의 신과의 조우를 우리도 따라야 할 것인가?


지나족의 창세신 반고, 일본의 창세신 천조대신, 북유럽의 창세신 오딘, 유대족의 여호와 등 모든 민족에게는 그 민족의 시초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며 어김없이 각 민족의 창세신이 등장한다.


한민족의 창세신은 환웅이다.


3천의 무리를 이끌고 제세핵랑군의 깃치를 높이들고 동방개척을 통해 감방에서 진방으로 진방에서 간방으로의 터전을 닦은 환웅의 역사가 우리민족의 역사다.


전대 선조들이 또는 부모님이 못났고 밉고 싫다고 해서 그들이 나의 선조들이 아니고 또 나의 부모님이 아닌가? 내 성은 박가인데, 이가로 바꿀 수 있는가? 스미스라는 성이 마음에 든다고 해서 박가를 버려야 하는가?


한 민족의 역사에는 뛰어난 영웅이 등장해 세계를 정복하기도 하고, 또 몰락과 망국의 역사로 접어드는 때도 있다. 그러면 그때마다 민족을 바꾸고 잘 되는 민족에 붙을 것인가?


한 가정에서도 그것은 용납이 안되는 일이다.


하물며 국가와 민족이라고 해서 크게 달라질까?


물론 그것으로 일시적인 부귀와 영화를 또 복록을 누릴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할까?



7. 결문(結文)



성장과정에서는 누구나 환경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과거의 기억을 지워버리고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을테고, 지난 날을 회상하며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결국 사람은 과거의 영향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받게 된다. 그것은 개인의 상처일 수도 있고, 행복한 기억일 수도 있다.


다만 그 기억이 한 개인이나, 가정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한 사회, 한 민족, 한 국가에 이르는 사안이라면, 상황은 심각해 질 수 밖에 없다.


한 집단의 행로가 인류의 운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속에서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어떤 도덕적 가치를 선택할 것인가, 내 자신의 삶을 무엇과 견주고 어떤 사회윤리로서 험난한 현실을 헤쳐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늘 숙제로 남겨진다.


다만 이 시대는 가을이 되면 낙엽은 뿌리로 되돌아가 거름이 되고 열매가 다시 뿌리가 되어 그 다음 세상을 준비하듯 대자연의 질서가 원시로 반본하는 때이다.

"천지도 목적이 있다. 그래서 질서정연하게 둥글어가는 것이지 그냥 그 속에서 생명이 왔다 가는 것이 아니다. 그 목적이 뭐냐 하면 지구년은 초목농사를 짓는 것이고, 우주년은 사람농사를 짓는 것이다. 지구 1년이 생장염장하는 것을 보면, 봄에 씨 뿌리고 싹을 내서 여름철에 성장시켜 가을철에 추수를 한다. 그것과 같이 우주 1년은 사람농사를 짓는다." 안운산 증산도 종도사님 말씀.



이시대에는 천지의 목적을 찾아 그 목적을 성취하여야 하는 때이다.


가을의 정신은 천지의 열매를 거두고, 낙엽을 떨어뜨려 뿌리로 되돌린다.


그것이 곧 불의한 것은 숙살하고 정의로운 것을 바로 세우는 의(義)의 가을 정신이다.


지금은 다음과 같은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때이다.


"지금은 온 천하가 `가을 운수의 시작`으로 들어서고 있느니라."(도전 2:43:1)


" 천지대운이 이제서야 `큰 가을`의 때를 맞이하였느니라."(도전 7:38:4)



다시한번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완전히 빨려 들어가기 전에 이 시대 자신의 삶에 대한 목표, 방황과 고민, 어려움에 봉착했을때,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는 바로 그 힘을 얻어 자신이 속한 또 나아가야할 방향을 질정함은 어떻겠는가?


도기 136년 9월 14일 목요일 늦은 3시 32분

환기 9205년 웅기(신기개천) 5904년 단기 4339년

불기 3032년 유기 2553년 서기 2006년 이슬람력 1385년


참고 서적 : 김종래, 밀레니엄맨 칭기스칸, 꿈엔들, 2004.

             안경전, 개벽실제상황, 대원출판, 2004.

             성삼제, 고조선 사라진 역사, 동아일보사, 2005.

             이병도, 최태영, 한국상고사입문, 1989.

             이윤섭, 천하의 중심 고구려, 코리아북케이스, 2004.

             나카무라 편저, 동아시아 역사교과서는 어떻게 쓰여 있을까?, 에디터, 2005.

             정재승 역음, 바이칼, 한민족의 시원을 찾아서, 정신세계사,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