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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꼭 알아야 할 유용하고 세상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차원 높은 정보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본 블로그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잘 간파하셔서 끊임없이
한민족 역사문화/한민족의 비밀코드

[7] 교과서상의 한국인

by 바로요거 2008. 10. 14.

[7] 교과서상의 한국인


 

1. 서문(序文)



"천자는 동이족 임금의 호칭이다. 하늘을 아버지, 땅을 어머니로 섬기는 까닭에 하늘의 아들이라한다."(원문 : 天子, 夷狄之所稱, 父天母地故, 稱天子), 채옹(蔡邕), 『독단(獨斷)』, 후한시대(132~192년). 안경전, 개벽실제상황, 156쪽 에서 재인용.



현재 대한민국의 역사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공식적으로 어떻게 알고 있을까?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은 공식적인 교과서상에 비치는 한국인의 모습은 이웃 일본의 식민지,위안부,독도 등 역사교과서왜곡과 이웃 중국의 동북공정,백두산공정,한반도공정 등 역사교과서왜곡이라는 양국의 압박과 함께, 일본과 중국에 의해 왜곡된 한국의 역사를 미국과 캐나다 및 유럽의 각국이 그대로 인정하고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과 중국보다 한걸음 더 나아간 왜곡을 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단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우리자신의 교과서와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국가들이 자국의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대한민국의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2. 한국교과서 - 2700년의 역사



 초, 중, 고의 역사교과서를 보면 4,338년 전(2005년 기준)에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하면서 실제 우리 역사는 2,700년이라고 한다. 그 4,338년에서 2,700년 사이의 역사 과정이 깨끗이 사라지고 없는 유령의 역사가 되어버렸다.



특히 고조선 연구의 1호 박사라고 자처하는 교원대의 송호정 교수는 『한국 고대사 속의 고조선사』 (2003.2), 『단군, 만들어진 신화』(2004.10)등에서 단군의 역사 일체를 부정하고 고조선의 역사는 기껏해야 2,700년 전에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그가 내세우는 근거는 천편일률적으로 무덤과 집터에서 발굴된 토기

들뿐이다. 유물을 올바로 해석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는 민족정신의 맥에 대해서는 기본 개념조차도 없다. 그가 평생 했다는 고조선사 연구는 단군 없애기 연구였을뿐이다. 안경전, 개벽실제상황, 대원출판, 2004, 535쪽.



아래 교과서의 시대별 서술 비중을 살펴보면, 전체를 100으로 놓고 보았을때 교과서가 개정된 시대별로 원시시대와 부족국가의 서술비중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945, 진단학회, 국사교본, 일본군정청 문교부.

1956, 이병도, 국사, 일조각.

1967, 한우근, 국사, 을유문화사.

1974, 국사편찬위원회, 국사, 문교부.

1979, 국사편찬위원회, 국사, 문교부 1종도서연구개발위원회.

1982, 국사편찬위원회, 국사 上,下, 문교부 1종도서연구개발위원회.

1990, 국사편찬위원회, 국사 上,下, 문교부 1종도서연구개발위원회.

1996, 국사편찬위원회, 국사 上,下, 문교부 1종도서연구개발위원회.

2002, 김학준, 고등학교 한국 근,현대사, 금성출판사.



시대/비율(%) 1945   1956   1967   1976   1979    1982   1990    1996a   1996b

원시시대      1      3      4        3        2        2      2        2         2

부족국가      3      8      8        4        3        4      5        5         4



교과서의 집필방식은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면서 끊임없이 자기성장을 해왔다는 서술방식을 취하고 있고 이같은 서술방식은 [1967]부터 명확해져 그 후 점차 강화되고 있다.



고대사와 관련해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한군현에 대한 서술이다.  한군현은 『신당서』에 등장하는 내용으로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이 한반도의 북부와 중국 동북지방에 설치하였다는 일종의 식민통치 기구다. [1945]는 「평양 일대의 낙랑군을 중심으로 한 재래문화와 한문화가 교류하여, 낙랑문화가 발달했다. 이 문화가 우리나라에 끼친 영향도 컸다」고 서술했고, [1956]은 「낙랑군과 대방군은 한군현 중에서도 오랫동안 존속하여, 한 본토와의 연락이 긴밀하였다. 두 개의 군은 중국 고도의 물질문화, 정신문화의 이식지였다」고 서술하여 한군현을 통한 문화의 전파를 언급하였다.


 

 그런데 [1967]은 「낙랑의 문화는 찬란했지만 그것은 우리 민족의 문화는 아니었다. 한반도인은 그들의 호화롭고 화려한 생활의 희생이 되었다. 우리 문화의 발전은 저해되었다」고 서술하여, 한군현이 미친 부정적 영향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1990]은 「한의 군현 설치 후 가중되는 억압과 수탈을 피하기 위하여 토착민은 이주하거나 단결해서 군현에 대결했다. 이것에 대하여 군현측은 엄격한 율령을 규정하여 생명과 수탈한 재산의 보호를 꾀했다. 그 때문에 법 조항도 60여 조로 증가하고, 인심은 사나워졌다」고 하여, 한군현의 침략자적인 성격과 그것에 대한 한반도 토착세력의 저항을 강조하고 있다. [1996]은 [1990]과 같다. 나카무라 사토루 편저, 동아시아 역사교과서는 어떻게 쓰여 있을까?, 에디터, 2006, 114~115쪽.



말하자면 한국의 역사는  한무제가 위만정권을 멸망시키고 한군현을 설치한 때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이에 대한 근거를 『사기』와 『한서』를 통해 대고있는 것이다. <사기> 조선열전은 한이 고조선을 평정하고 4개의 군, 즉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사군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한서> 부터다. 반고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한서>의 고조선 기록은 대부분 <사기> 조선열전과 토씨 한자 틀리지 않는다. 한사군과 관련된 부분에서야 <사기>에 기록되지 않은 진번, 임둔, 낙랑, 현도 등 사군의 이름이 나온다.



한이 고조선을 평정하고 4개의 군을 설치한 것이 아니라 후대에 그 지역에 있었던 지방의 명칭을 적은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면서 한사군의 문제는 새로운 논쟁에 휘말린다. 성삼제, 고조선 사라진 역사, 동아일보사, 2006, 122쪽.



한무제 때에 대해 사마천의 <사기>에는 한의 군대는 왕험성을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특히 <사기>를 통해 관련 기사를 살펴 보면 중국측의 사서인 <사기>에서 조차 한나라 군사가 전투에는 졌는데 고조선이 자중지란을 일으켜 항복해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이 아니라 고조선이 승리한 전쟁이라는 반증은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과 한과의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인데 한의 장군들이 작전 실패의 책임 등을 물어 연이어 처형당하고 있는 기록이 바로 그 반증이다.


 

<사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누선장군 역시 방사가 열구에 이르렀을 때 마땅히 좌장군을 기다려야 함에도 제멋대로 앞서서 서두르다 죽고 잃어버린 병사가 많았기에 당연히 주살되어야 했으나 속을 바치고 서인이 되었다." (성삼제, 고조선 사라진 역사, 동아일보사,  2006, 111쪽에서 재인용.)



좌장군 휘하의 보병 우두머리인 다(多)는 군사들을 잘못 통솔했다는 책임을 물어 사형에 처해진다. 육로로 침공한 선발대인 좌장군 군대와 바다를 통해 침공한 누선장군의 전과가 신통하지 않자 한무제는 위산을 전선에 추가 투입한다.



초기에 고조선을 침공한 군대가 죄수들로 구성된 비정규군이라면 추가 투입되는 위산의 군대는 황제 직할의 정예군이었으나 위산은 패수를 건너보지도 못하고 회군한다. 그러자 한무제는 위산도 처형한다.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 못한 위산에 이어 한무제는 제남 태수 공손수를 파병하여 조선을 침공하라고 추가 파병된 공손수는 도리어 아군 장수인 누선장군을 체포한다. 보고를 받은 한무제는 제남 태수 공손수도 처형한다.



1년간의 전쟁을 통해 고조선 장수를 생포하거나 사살한 전과는 전혀 없이 황제는 직접 파견한 장군들을 차례로 사형에 처한다.



또 전쟁후 논공행상에 있어서도 누선장군은 관직을 박탈당한다. 승리한 장군의 허물은 어떤 식으로든 덮는 게 고대나 현대나 승리한 장군을 우대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사기>의 기록은 전쟁에 참여한 한(漢) 군대의 장군이 모두 징계당했다는 것이다.



1970년대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한사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한은 고조선을 넘어뜨린 후 4군을 두어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 4군의 위치는 우리 민족의 이동로였던 교통로와 관계가 있다. 당시의 교통로는 요동 방면에서 통구에 이르러, 여기서 다시 한 갈래는 지금의 청천강과 대동강 유역으로 나오고, 한 갈래는 부전 고원을 넘어 원산만으로 진출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교통로의 분기점인 통구 지방에는 현도군을, 고조선의 옛 지역에는 낙랑군을, 그 남쪽 한강 이북 지역에는 진번군을, 그리고 원산만 일대에는 임둔군을 설치하였다.(1976년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한 군현의 변천`이라는 10줄도 안 되는 짧은 단원에서 가장 소극적인 표현으로 고조선과 한사군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내용이다. 한이 고조선을 넘어뜨리고 현도군,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을 설치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현도군,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이 설치되어 있던 지역은 고조선 영역이어야 한다.



지금부터 2000년 전에 오늘날 한반도 북부와 통구 지방에 걸쳐 있었던 고대 국가인 고조선은 비록 망하기는 했지만 대단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런데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면 설명이 달라진다. 현도군,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중 고조선의 옛 영토는 낙랑군이 설치된 지역에 한정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한의 군대가 고조선뿐만 아니라 고조선 주변의 국가들을 초토화시키고 고조선을 포함한 주변국가 모두를 식민지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40대 또는 50대 성인들이 학교에서 배운 고조선과 한사군에 대한 수업 내용이다. 고대 역사는 전해지는 기록이 많지 않고 그나마 상충되는 내용이 있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영역이다.



한사군의 위치에 관해서도 평양지역, 요동지역, 고대 요동 즉 오늘날의 요서 지역 등 여러 가지 학설이 갈리고, 심지어 한사군 설치 자체가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고조선의 위치와 크기에 대해서도 평양 중심의 조그만 지역 왕국이었다는 주장에서부터, 서쪽으로는 북경 지역, 북쪽으로는 송화강 유역과 남으로는 한반도 남해안 까지 걸치는 거대한 왕국이었다는 주장 등 다양한 학설이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고조선 역사를, 1970년대에는 학생들에게 가장 협소하고 불리하게 해석될 수 있는 것만 골라서 가르친 셈이다. 그래서 지금의 40대나 50대들은 고조선을 400년 동안이나 한의 식민지에서 벗어나지 못한 왜소하고 초라한 왕국으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2005년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나와 있는 한사군에 대한 설명은 1970년대 국사 교과서의 그것과 비교하면 큰 차이가 있다. 다음은 7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의 내용이다.



「고조선이 멸망하자 한은 고조선의 일부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여 지배하고자 하였으나 토착민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쳤다. 그리하여 그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고 결국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소멸되었다.(2005년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1970년대 교과서는 한사군이 고조선 전역에 설치되어 있었다고 기술한 데 비해, 2005년 교과서는 한사군이 고조선의 일부 지역에만 설치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 1970년대 교과서는 옛 고조선 지역이 평안도 지방 일대라고 표현하였으나, 2005년 교과서에는 한사군이 설치되었는데 그것이 고조선의 일부 지역이라고 되어 있다. 이는 고조선의 영토가 한사군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컸다는 의미가 된다. 2005년 교과서에 따르면 한사군이 한반도가 아닌 요동 지역이나 요서 지역에 설치되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고조선과 한사군의 역사에 한정해서 이야기한다면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부모 세대가 배운 역사와 자식들이 배운 내용이 다르다. 부모들은 국가에서 자기 나라 역사를 소극적으로 가르쳤다고 비판하고, 자식들은 부끄러운 역사를 감췄다고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성삼제, 고조선 사라진 역사, 동아일보사, 2006, 122~125쪽.



그런데 부모세대와 자식세대 둘다 천년왕국 부여의 역사에 대해서는 까맣게 모르고 있음은 이미 앞서 글을 통해 지적한 바 있다. 아뭏든 현재 대한민국의 역사 교과서상 한국인의 역사는 2700년 전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기원전 108년에 중국 한나라 무제가 위만정권을 멸하고 그 땅을 식민 통치하기 위해 설치했다는 4개의 군(郡)은 한반도에 있었다는 기존의 주장은 고대 한민족의 역사무대를 한반도에 국한시키려는 식민사관, 반도사관의 낭설이다. 실례로 대동강에 있었다고 알려진 낙랑군의 속현들(패수현, 장잠현, 누방현, 해명현 등)이 지금의 요하 일대에 있었다고 밝힌 『요사지리지』의 기록만 봐도 식민사관 논리의 허구성이 백일하에 드러난다. 안경전, 개벽실제상황, 대원출판, 2004, 168쪽.



더군다나 한사군 중 하나인 낙랑군이 평양 지역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제시하는 양자강과 황하 등 40개 강의 본류와 지류의 지리와 물길의 흐름에 대해 기록한 문헌인 <수경주>에는 패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패수는 낙랑 누방현에서 나와서 동남쪽으로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그런데 패수가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고 되어 있다. 한국의 서해안을 끼고 있는 강 중에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가는 강은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곧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가는 강은 난하 부근에서 찾아야 한다.



또한 <한서>에는 전한 무제의 업적을 말하면서 동쪽으로 갈석산을 지나 현도와 낙랑으로 군을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만약 한사군이 한반도 안에 있었다면 난하 하류의 동쪽 연안에 있는 갈석산을 기준으로 그 위치를 설명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또, `갈석산은 한나라의 낙랑군 수성현에 있다. 진나라가 쌓은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를 끊고 이 산에서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대로라면 낙랑은 한반도의 평양지방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에 있었던 것이 된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스님 역시 왕험성이, 평양 즉 당시 서경이라고 하지 않았다.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를 집필할 당시 오늘날의 평양은 서경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독자들이 옛 명칭을 당시의 명칭으로 잘 알수 있도록 각주를 달아 놓고 있다. `평양성(지금의 서경)`이라고 옛 지명과 당시의 지명을 병행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왕험성에 대해서는 "이 씨가 말하기를 지명이라 하였고, 신찬은 말하기를 왕검성이 낙랑군의 패수의 동쪽에 있다고 하였다."라고 적고 있을 뿐, `지금의 서경`이라는 주석을 달지는 않았다.



"그리고 차츰 진번조선의 위만이 및 연나라와 제나라의 망명자를 복속시키고 왕이 되어 왕검(이 씨는 말하기를 지명이라 하였고, 신찬은 말하기를 왕검성이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고 하였음)에 도읍한 후 ........" <삼국유사> 성삼제, 고조선 사라진 역사, 동아일보사, 2006, 115~118쪽 정리.



3. 중국교과서 - 2200년의 역사



중국인들이 말하는 조선은 `은나라 말에 중국인 기자(箕子)가 세운 기자조선`과 한무제가 멸망시킨 기자조선의 마지막왕인 기준의 왕권을 찬탈한 찬적`위만(衛滿)조선`이다. 은나라 말에 중국인 기자가 세웠다는 기자조선동래설이 조선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동북공정과 백두산공정, 그리고 한반도공정은 이마 저 중국 변방사로 편입하고 있고, 이후 고구려와 백제, 대진국(발해)의 역사 또한 중국 변방의 역사로 편입하고 있다.



이 대로라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신라만을 역사로 시작하고 신라 이후 고려로 이어지는 역사로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신라의 시로 박혁거세 할아버지의 혈통 또한 북부여이므로 중국의 단대공정의 일환으로 벌어졌던 서남공정, 서북공정, 동북공정과 단대공정이후의 탐원공정까지 마무리 되면 삼국사 전체 그리고 고려사와 조선사 전체가 결과적으로 중국의 변방사로 편입될 수밖에 없다.



4. 일본교과서 - 2000년의 역사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으로 한국인의 역사를 규정짓는 것은 일본 또한 마찬가지이다. 일본중학교 역사교과서왜곡사건을 일으킨 후소샤 출판사의 중학교 교과서에 따르면 이후 역사는 열도 본토에서 야마토 조정의 군대가 바다를 건너와 한반도 남부를 200년간 다스렸다는 임나일본부로 이어진다.



한편 일본 정부가 왜곡교과서에서 수정하겠다는 의견을 제시한 2개 항목 중 다른 하나는 한국의 청동기시대와 관련된 부분이다. 다음은 `한국 정부의 수정 요구에 대한 일본 정부의 답변`중에서 청동기시대 부분을 옮긴 것이다.



"일본 학계는 조선이 기원전 1000년 경에 청동기 시대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이 널리 인정되어 있으나 (교과서의) 연표 기술은 기원전 400년경에 신석기시대에서 소국분립으로 이행한 것처럼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학설 상황에 비추어 적절하지 않고 오류로 생각되며 정정할 필요가 있다. 또, 본문에는 기원전 1000년경으로부터 농경이 성하게 되어 청동기를 사용하게 되었다는 기술이 있다." -일본 정부의 답변서 중 - 성삼제, 앞의책, 36쪽.



 곧 청동기의 연대를 올려주는 것처럼 하여 그 이전에 있었던 역사는 모두 부정한다는 것이다.



5. 미국교과서 - 한사군과 그 후 식민100년의 한국사



하와이 미노아 대학의 슐츠(Edward J. Schultz)교수는 한사군이 한국고대사에 끼친 영향이 클 뿐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가 조직적인 국가로 성립하는 데 촉진제가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그들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는 한반도의 평양까지 중국 한나라의 영토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미국의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중국 고대사에 대해서는 자세히 나오지만 한국 고대사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다만 지도에 잠깐 비치고, `중국에 쫓겨서 한반도 남쪽으로 이주했다`고 나올 뿐이다. 그들 교과서에 공식적으로 등장하는 최초의 한국 역사는 19세기 일본식민지 시대 바로 직전부터이다. 이것이 오늘의 세계가 알고 있는 한국사의 상식이다. 안경전, 앞의책, 168쪽.



6. 캐나다학자 - 1000년의 역사



서양 여러 나라의 역사 교과서에는 고대 한민족의 실체가 단 한줄도 제대로 나와 있지 않다. "한반도의 북부는 한사군을 통해 중국의 식민 지배를 받아고, 남쪽은 임나일본부를 통해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다"는, 중국과 일본이 왜곡한 터무니없는 역사가 마치 진실인양 그대로 유포되어 있다.



캐나다의 밴쿠버에 있는 브리티쉬 콜럼비아 대학의 한국학과 학장 베이커(Don Baker)는 `고조선과 단군은 뚜렷한 증거가 없으므로 신화라고 단정지을 수밖에 없는, 믿을 수 없는 역사(unreliable history)`라고 말하고 있다.



"역사는 문서를 바탕으로 한다. 중국 서적에서 고조선을 언급하지만 고조선이 한국역사였다는 고고학적인 믿을 만한 문서 증거가 없다. 한사군 이후부터 기록이 있으므로 한국역사는 이로부터 시작한다. 진정한 한국사는 고려부터이다. 그 이전은 하나의 통합된 나라가 아니었고 단지 고구려인, 신라인, 백제인들이 있었을 뿐이다.



이것이 북미에서 가르치고 있는 `한국 고대사의 실상`이다. 이미 동북공정은 캐나다인들에게 깊숙이 뿌리박혀 있다. 한국의 역사는 머리와 사지가 절단된 불구의 몸이 되어 환국-배달-고조선-북부여로 내려오는 9천년 역사가 `1천년 역사로 전락`하고 말았다. 안경전, 앞의책, 168~169쪽.



7. 러시아학자 - 최소 기원전 3세기 이상 전에는 지금의 북경에 있었다



  현재 고조선의 영역을 표시하는 지도는 대략 5종류가 있다.



∇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학자들이 평안도를 중심으로 조그맣게 그린 고조선 영역.



∇ 옛 요동을 중심으로 위만조선의 영역을 표시한 지도(윤내현, 고조선 연구.)



∇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나와 있는 고조선의 세력 범위. 고조선의 영토는 서쪽으로 대릉하와 산해관을 아울렀다.



∇ 북한의 리지린이 주장하는 고조선 영역



∇ 러시아 학자 유 엠 부찐 저; 이항재,이병두 역, 고조선-역사 고고학적 개요, 소나무, 1990, 54쪽에 나와 있는 고조선의 영토는 기원전 3세기까지는 요서지방의 산해관과 난하와 대릉하를 포함하여 만리장성 안쪽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3세기 이후가 되면 난하와 대릉하에서 요하까지 밀려 요하를 기준으로 하는 요동지역만 차지하는 그림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가운데 러시아 학자 부찐의 그림이 의미 있는 이유는 우리역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외국학자여서 고조선을 좀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 때문이다.



그런데 러시아 학자 부찐이 그린 지도와 서울시립대학교 인문과학 연구소 박선미 연구원이 2000년 발표한 석사학위 논문 <기원전 3~2세기 고조선의 문화와 명도전 유적>에 나오는 명도전 유적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가 거의 일치한다.



곧 서쪽으로는 만리장성 안쪽인 지금의 북경지역과 요서의 난하와 대릉하, 서북쪽의 서랍목륜하 북쪽의 서요하 요하, 동요하 송화강, 동북으로 흑룡강, 오소리강 그리고 동쪽으로 혼강, 두만강, 남쪽으로 청천강과 대동강으로 펼쳐지는 그림이 거의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이미 앞서의 글로서 명도전에 대해 길림대학 역사학과 교수로 초기 만주사 연구의 기초를 닦은 것으로 유명한 권위자인 장보촨 교수가 쓴 중국 흑룡강성에서 발행하는 고고학계 학술지 <북방문물> 2004년 제4기 논문집에 실린 『명도폐연구속설』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음을 말한바 있다.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 무렵까지 만주 지역에는 3종의 화폐가 있었다. 즉 첨수도, 원절식도폐, 방절식도폐가 그것이다. 이들 화폐 가운데 첨수도는 고죽 또는 기자 관련 족의 화폐이고 원절식은 (고)조선의 화폐이며 방절식은 연나라 화폐다."



곧 칼 모양의 청동화폐인 명도전은 고조선 화폐라는 것이다. 명도전이라는 이름은 일본인이 붙인 이름이며, 연나라화폐라고 규정한 것은 중국학자라고 한다. 이는 중국측이 연나라의 지역이었다고 보는 요서지역에서도 많은 명도전이 발굴된다는 이유에서 였다. 명도전은 유적지에 너무 흔하게 발굴되어서 1990년대 까지 개당 천원에 관광 기념품으로 구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연과 고조선은 서로 침공하고 침공당하는 적대적인 국가였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후 취한 경제조치 가운데 하나가 후세인 정권 때 사용하던 화폐를 무력화한 것이었다. 만약 고조선이 화폐를 발행하지 않고 연나라의 화폐를 사용했다면 두 나라 사이에 엄청난 불균형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론적으로 연나라는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화폐를 찍어 고조선에서 사오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고조선과 연은 전쟁을 치렀는데, 고조선이 전쟁 중인 연나라의 화폐를 받고 물자를 공급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한편 연의 국경을 압록강까지로 표시한 것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주장과 정확히 일치한다. 곧 조선총독부 산하의 조선사 편수회의 학자들은 고조선의 국경을 청천강까지로 봤으며, 연나라는 압록강을 국경으로 삼고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는 어느 쪽의 땅도 아닌 공지로 남겨두었다고 한다. 일본역사왜곡대책반 실무반장 성삼제, 고조선 사라진 역사, 동아일보사, 2006, 139,141쪽.



일본이 200년간 경영했다는 임나일본부설과 이상하게 맥이 닿아 있지 않는가?



8. 한국청동기의 실제역사 - 전 세계 70%의 거석문화가 집중된 곳, 발해연안



"고조선 지역의 청동기 문명이 이미 기원전 24세기 무렵에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다수의 학자들은 단군은 신화 혹은 설화일 뿐이라고 말한다. 어느 쪽 주장이 옳고 그른가를 떠나 흥미로운 것은 양쪽 모두 고인돌 만큼은 청동기 시대의 유적이자 고조선의 유적으로 인정한다는 사실이다." 성삼제, 앞의책, 61쪽.



고인돌의 명칭은 큰 돌을 받치고 있는 `괸돌` 또는 `고임돌` 또는 `고여 있는 돌`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영어로는 Table Stone,켈트어로는 탁자란뜻의 Dol과 돌이란 뜻의 Men을 합해 Dolmen 이라고 한다.



세계적으로 고인돌은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에 걸쳐 분포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규슈 지방에 분포되어 있고 중국은 산동반도와 연해 지역에서 발견된다. 중국의 복건성, 사천성, 절강성 등에서도 고인돌은 발견되지만 그 수는 많지 않다. 베트남, 라오스, 태국 등의 동남아시아와 인도, 팔레스타인, 요르단, 예멘 등지에도 분포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아일랜드, 영국에 집중되어 있다.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 내륙 지방과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등 지중해 연안에서도 발견된다.



세계적인 분포로 미루어 고인돌은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진행된 문명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전 세계에 약 7만 기의 고인돌이 있고, 그중 3만개 이상이 한반도에 있다고 한다.(이종호,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전라남도 내에 있는 것만 1만 기가 넘고, 대동강 유역에서도 1만 4000기의 고인돌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성삼제, 앞의책, 61~67쪽에서 발췌.



남한에서 고인돌이 세워진 때는 대략 서기전 10세기에서 서기 2세기 사이로 알려져 있다. 북한에서는 서기전 30세기까지 보고하기도 한다. 유럽 전역에도 고인돌이 퍼져 있다. 이것들의 축조시기는 대개 서기전 48세기에서 서기전 23세기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세계 지도를 펴 놓고 고인돌의 분포지를 죽 이어 보면 하나의 긴 띠가 만들어진다. 유럽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한쪽 끝으로 하여 지중해 연안, 인도 대륙, 동남아시아를 거쳐 중국 동북지방, 일본 규슈지방과 한반도에서 끝이 난다. 박창범,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김영사, 2004, 98~99쪽.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는 전라북도 익산군 금마면에 있는 고인돌을 구경하고 나서 "지석이란 것이 세속에 전하기를 옛날 성인이 고여 놓은 것이라고 하는데 과연 신기한 기술로 이상하다."라고 『동국이상국집』에 소감을 적어놓았다.



반고가 쓴 『한서』에는 "원봉 3년(기원전 78년) 1월 태산 지역의 내무산 남족 흉흉에 수천 명의 소리가 들려 사람들이 가보니, 큰 돌이 섰는데, 높이가 1장 5척이고 크기가 48위 이며 땅속 깊이 8척에 돌 3개가 다리를 하여 세워져 있다. 돌이 세워진 곳에는 흰 까마귀들이 수천 마리 몰려 있었다."<한서> 권 27 오행지.



태산 지역 내무산은 오늘날 산동반도 제남의 동남쪽에 있다. 기록의 돌을 현대의 단위로 환산하면 높이는 약 3미터, 길이는 약 1.6미터이다.  이규보가 고인돌을 `옛 성현들이 고여 놓은 것`으로 적고 있는데 비해 <한서>를 쓴 반고는 "다른 종족들이 세워 놓았다"라고 기록해 비교가 된다.



고인돌의 기능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기록은 조선왕조 중동 때의 학자인 이맥이 쓴『환단고기』「태백일사」의 기록이다.



"옛날엔 사람이 죽으면 향리를 벗어나는 법이 없었다. 합쳐서 한군데에 매장하고 표시하여 지석이라 하더니, 뒤에는 변하여 단을 만들고 지석단이라 불렀다. 또, 제석단이라고도 했다. 산의 꼭대기에 있으면 산을 파고 성단을 만들어 천단이라고 했다."



미국의 고고학자 사라 넬슨(Sarah Nelson)은 경기도 양수리의 고인돌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기원전 2665~2140년 것들로 추정된다고 한다. S.M. Nelson, The Archaeology of Korea. Cambridge, Cambridge Unversity Press, 1993. 성삼제, 앞의 책 70쪽에서 재인용.



북한학자들은 우리나라 고인돌이 기원전 4000년대 후반기에 생겨나 기원전 2000년대 전반기까지 성행했으며, 기원전 200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서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고 본다. 북한은 평양 일대에서 발굴된 고인돌을 만들어진 시대와 발굴지역의 명칭을 따서 침촌형, 오덕형, 묵방형으로 구분하고 있다. 가장 먼저 생긴 형식이 침촌형인데 기원전 4000년대 후반기에 생겨나 기원전 3000년까지 성행했다고 보며, 오덕형은 기원전 3000년대 후반기에 생겨나 기원전 2000년대 전반기까지 성행했다고 한다. 그리고 묵방형은 기원전 3000년대 전반기에 시작하여 기원전 2000년대 전반기까지 존속했다고 한다.



그러나 남한 학자들은 고인돌에서 발견된 유물이나 유기물에 대한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영문 교수는 우리나라에서는 기원전 12세기부터 고인돌이 본격적으로 건축되었다고 보는 것이 무난하다고 한다. 하문식 교수는 요령지역은 기원전 15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나 기원전 20세기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길림 지역과 북한 지역의 고인돌은 기원전 10세기경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종욱 교수는 <고조선사 연구>에서 한반도에는 기원전 9~8세기경에 이르러 고인돌이 축조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곧 그간 단군의 고조선 건국을 신화로 보는 학자들은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는 아무리 올려잡아도 기원전 10세기를 넘기 어렵다고 주장해 왔다. 고인돌 축조 연대가 기원전 24세기 이전까지 올라간다면 우리나라 역사에서 청동기 시대의 시작도 기원전 24세기 전후로 정리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무슨 연유인지 거부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유럽의 경우 고인돌 건축 연대는 대개 기원전 2500~2000년 사이며 최근 영국의 고고학자 렌프루가 기존의 방사성탄소연대를 보정해 본 결과, 유럽의 고인돌은 이집트 피라미드의 제작 연대보다 약 1500년 앞서는 기원전 4000년대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밝혀졌다. 영국이나 프랑스의 경우 가장 오래된 고인돌의 연대는 기원전 4800년까지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기원전 4000~3000년대에 이미 고인돌이 유럽 전역에서 축조되었다는 설이 널리 인정되고 있다.


 이형구, 발해연안에서 찾은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김영사, 2004.을 보면 기원전 5~6000년전 이미 신석시 문명이 시작되었고 발해연안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는 아주 다양한 용도와 세련된 모습을 띤 신석기 유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왜 청동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면서 거석문화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줄로 안다.



그것은 거석문화가 청동기 문화 곧 고 조선시대의 유적 유물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세계적으로 볼때 국가의 성립은 청동기 시대에 이루어져 왔고, 청동기는 유럽에서 아시아로 전파됐고 한국에서는 기원전 1천년 경에 세워졌으므로 기원전 2333년전에 단군왕검이 조선을 건국했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로 되어 있다. 말하자면 세계 어느 나라든 국가는 청동기시대에 세워져야만 한다는 것이 통설로 굳어진 것이다. 고대 국가가 발생한 대표적 문명은 이집트문명, 메소포타미아문명, 인도문명, 황하문명 등인데 이들을 살펴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일본 와세다 대학의 요시무라 사쿠지 교수는 이집트 문명 전문가로 그가 쓴 『고고학자와 함께 하는 이집트 역사기행』에서 도끼, 단검, 나이프, 침 등의 청동 제품이 고대 이집트 국가의 토착 산출품이 아니라 북방으로부터 전해진 교역품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다. 고대 이집트 왕조는 고대왕국(기원전 2755~2255년), 중세왕국(2134~1784년), 신왕국(기원전 1567~1085년)로 구분하는데, 고대왕국이 청동기 문명에 기초하여 성립했다거나 청동기 문명으로 인해 획기적으로 번성했다는 등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있다는 연구는 찾아 볼 수 없다.



인도 문명도 통일국가형태가 나타난 후기 베다시대(기원전 1000~600년) 코살라, 카쉬, 비데하, 칼링가 등과 같은 왕국이 이 시대에 나타나기 시작했으나 특별히 청동기 문명의 도입과 관련지어 설명되지는 않는다.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청동기가 어떻게 발명되고 이것이 고대 왕조의 성립과 번성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충분치 않다. 청동기시대에 국가가 형성되었다는 이론적 근거로 제시된 논문 중 하나는 1960년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9월호에 실린 시카코 대학교 인류학과 로버트 M. 아담스 교수의 논문 `도시의 기원(The Origin of Cities)`이다. 여기서 아담스 교수는 "지구상의 최고 도시와 최초 도시는 의심할 여지 없이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에서 도시(국가)가 발생한 여러 가지 조건 중의 하나로 청동 무기와 같은 금속기술의 발전을 꼽고 있다. 그러나 도시(국가)의 발생과 발전은 기술적 개발과는 별도로 문화적 사회적 변화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최몽룡 편저, 도시의 기원, 청동기시대의 제문제)



이 청동기 문명의 전파경로에 대해서 스웨덴의 몬텔리우스(G.O.A. Montelius, 1843~1921년)는 1900년에 `초기 청동기시대의 연대관`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유라시아 대륙 북부 청동기의 오리엔트 기원설을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소아시아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생한 청동기가 한 길은 도나우강을 따라 유럽으로 북상했고, 다른 한 길은 남러시아를 거쳐 시베리아와 중국으로 전파됐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청동기의 오리엔트 기원설이다.(정수일, 고대문명 교류사) 국내의 많은 학자들이 이에 동조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유럽의 제국주의 성장과 그 맥을 같이한다. 몬텔리우스는 유럽이나 시베리아, 아시아 각지의 청동기 유물이나 유적을 측정해 보고 철저히 상호 비교한 결과를 바탕으로 유럽 총동기의 아시아 전파설을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19세기 1800년대의 학자들인 핀란드의 아스페링과 덴마크의 와르셰 같은 학자들은 유럽과 시베리아 일원에서 진행된 청동기 발굴 결과를 기초로 하여 다음과 같은 결과를 보고한다. 그리고 현재 이들 아스페링이나 와르셰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소개하거나 비판한 글은 전무한 실정이다.




아스페링(J.R. Aspering, 1842~1915년)은 황금과 동 등 광물이 풍부한 러시아의 예니세이 강 상류의 알타이 산 일대에서 발생한 청동기 문명이 훈족계 이주민에 의해 우랄지방으로 전파되고, 우랄지방에 전파된 청동기가 다시 북유럽의 핀란드에까지 전파되었다고 보았다. 곧 청동기 문명이 시베리아나 극동 아시아 지역에서 발생해 유럽으로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또 덴마크의 와르셰(J.A. Warsha, 1821~1885)도 청동기가 중국을 비롯한 극동 지역에서 나타나 알타이와 우랄산맥을 거쳐 북유럽으로 전파되었다고 한다.



아스페링과 와르셰가 당시 유럽과 시베리아 일원에서 진행된 청동기 발굴결과를 기초로한 이론이 국내에 소개된 것은 2001년 정수일 박사의 『고대문명 교류사』가 발간되고 난 이후부터이다.



최근 우리나라의 청동기 문명에 관한 비교적 최근의 연구 결과가 반영된 『동북아 청동기시대 문화 연구』를 보면 "청동기시대는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5세기경에 이르러, 만주에서는 이보다 이른 시기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책에 나온 대표적 유적지는 강원도 춘천시 서면 신매리 유적 주거지로 연대 측정 결과 기원전 1510년경의 것으로 나타났다.


 이 조차도 남한의 경우가 그렇다는 것이고 북한의 유적지는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북한 학자들은 북한 지역의 청동기 문명이 기원전 4000년부터 시작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요하와 난하 사이의 하가점하층문화 지역에서 기원전 2세기 이전의 유물이 발굴되고 있어 많은 학자들이 만주 지역과 요서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는 청동기 유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 지역은 앞서 말한 러시아 부찐이 고조선의 영역에 포함되는 지역으로 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곧 "고조선이 건국된 기원전 2333년은 신석기시대여서 단군의 건국 기록은 역사가 아닌 신화다."라는 지금까지의 주장과 논리들은 그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청동기시대 유물의 다양성만 가지고 보아도 우리나라는 유물이 많기로 소문난 대영박물관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 비파형동검, 섬세함의 극치인 여러꼭지잔줄무늬거울, 현세와 천계를 연결해주는 팔주령, 쌍두령 등과 특히 숭실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는 여러꼭지잔줄무늬거울은 직경 21센티미터 안에 0.3밀리미터 간격으로 1만 3000개의 가는 선을 넣은 매우 정교한 제품이다. 『한국과학사』를 쓴 전상운 교수는 이 거울이 만들어진 시기는 기원전 4세기경으로 같은 시기 어떤 나라도 이처럼 섬세한 청동기를 만들지 못했다고 한다.



9. 결문(結文)


고대문명에 대한 연구는 종족과 국가 민족의 자존심과 미래 강토에 대한 비젼 그리고 문명의 주도권이 걸려 있는 문제이다.



대한민국의 역사학자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 아마 주장을 포기했거나 아니면 기존의 과학적 연구방법 조차도 팽개쳐 왔기에 중국은 동북공정과 백두산공정 및 한반도공정을, 일본은 후소샤 출판사의 중학교 역사왜곡교과서를 주장해 왔는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대학의 관행상 석사연구원들과 박사연구원들의 논문을 가로채 지도교수 자신의 논문으로 발표하는 행위는 한국 대학에서 관행처럼 내려오고 있다.



필자의 누나는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이미 그런 일을 당한적이 있었고, 그쪽 관련 분야에서 매장당할 것을 우려해 순순히 지도교수에게 논문을 내어줄 수 밖에 없었다는 고백을 들은 적이 있다.



이미 김병준 전교육 부총리 또한 제자의 논문 문제로 인사청문회에서 공격을 받자 자진사퇴하지 않았던가.



만연된 부패가 제대로된 연구를 도출해내는데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이 될 정도로, 한국 역사학자들의 연구행태와 역사를 보는 안목은 심각하다.



이런 반복되는 악순환 속에 지난 60년간 이들로 부터 역사교육을 받아온, 대한민국의 초, 중, 고, 대학의 교사들과 강사진들로 부터 대한민국의 학생들은 교육을 받아왔고, 아직도 변화되려는 노력은 멀게 느껴지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영국의 걸출한 과학사학사 조셉 니뎀이라는 사람이 남긴 『중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그의 영향력 있는 저서의 본문은 중국과 일본에 편향된 경향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책의 맨 마지막에 특별히 붙인 보충글에서 색다른 고백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글의 앞머리를 박창범 교수는 다음과 같이 옮기고 있다.



"이 책을 쓰고 있는 동안에 저자와 동료들의 마음에는 중국 문화권에 있는 모든 민족 중에서 한국인이 모든 종류의 과학적 문제에 대해 여러 세기 동안 가장 큰 관심을 가져 왔다는 신념이 점점 더 커지게 되었다. 우리들은 18세기 예수회 선교사의 해시계에 대한 한국인의 관심과 한국에서 만든 놀라운 천문시계에 주목하였다. 또 7세기에 세워진 한국 천문대와 근대 한국의 관측기록 중 혜성 그림 등을 소개하였다."



"연구가 막상 진행되는 과정에서 접한 한국의 전통 과학의 깊이와 한국인의 과학에 대한 열정이 그의 선입견을 적잖이 무너뜨렸던 모양이다. 한국의 전통 과학에 대한 진심 어린 경의가 이 글에 담겨 있다."고 박참범 교수는 감탄한다.



우리의 과학사 연구가 미진한 동안 나라 안팎에서는 현존 세계 최고의 천문대인 첨성대(633)는 천체를 관측하는 천문대가 아닌 종교적 제단이나 상징물이라는 시비에 휘말려 있고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출토된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751년 이전)이 중국의 것이라는 주장도 등장했으며, 우리 민족이 세계 최초의 발명품이라고 자랑삼는 측우기는 중국의 과학사 서적에 "본디 중국의 발명품으로서 남조선에서 발견되었다"라는 식으로 소개되어 있다. 게다가 서양 학자들까지 이러한 중국의 주장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우리는 서기 이전부터 조선 시대 말까지 2000년에 걸쳐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고대 오로라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 영국의 스티븐슨이 서양에 소개한 책에 한국의 오로라 관측 기록은 일본 최초의 오로라 기록(620)보다 한참 뒤인 993년부터 나온다고 소개되어 있다. 고려 이전의 한국사 기록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전 밤하늘의 모습을 담은 조선 초의 천상열차분야지도에는 고구려의 천문도를 옮겨 새긴 것이라고 쓰여 있다. 그런데, 이것 또한 영국의 루퍼스가 한 논문에서 당나라에서 보낸 천문도가 그 원본일지 모른다는 추측을 한 뒤, 이를 근거로 중국 과학사 책에는 아예 `중국 황제의 하사품`을 새긴 것으로 둔갑해 올라가 있다. 또 니덤은 앞의 책에서 조선이 역서를 편찬한 사실을 두고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조선은 중국의 봉건적 제후국에 불과한 속국인데 황제국에서만 하도록 되어 있는 역법을 어떻게 독자적으로 개발하여 사용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서양인들이 우리의 역사와 전통 과학을 바라보는 시각이 숨김없이 드러난다.



세계 최초 발명품인 고려 금속활자도 직지심체요절(1377)이 구텐베르크의 성경보다 78년이나 앞서서 인쇄되었다는 사실이 1972년에 알려지기 전까지 이것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고 지금도 외국에서는 금속활자의 최초 발명자는 구텐베르크라고 교육하고 있으며, 고려 금속활자에 대해선 들어 볼 기회도 없는 실정이다. 우리의 금속활자의 발명은 역사의 한 켠에서 우연히 튀어나온 돌부리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최근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로 온 국민이 분노를 터뜨렸지만, 사실 한국사의 왜곡은 일본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전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우리 역사에 대한 왜곡과 그것이 퍼져 나가고 있는 양상을 보면 언젠가는 수습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서울대학교 박창범 교수의 견해를 접하면서 나는 사못 대한민국 역사학자들에 대해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대청댐 수몰지역에 있던 충북 청원군 문의면 아득이 마을 고인돌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에 돌판에 새겨진 아득이 돌판 천문도를 통해 우리나라에 최소한 청동기 시대에 별자리에 대한 상당한 관찰과 지식이 이미 있었음이 밝혀졌고(박창범,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김영사, 2004, 104쪽.) 서기 6세기 초에 세워진 평양의 진파리 4호 무덤 천장의 별들, 그리고 북한에서 서기전 30세기경의 것으로 추정하는 함남 지석리 고인돌의 덮개돌에 새기젼 별자리 그림이 남한의 아득이 돌판에 나타난 별분포 형태와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이다.



천문지식이란 자연현상에 대한 관찰과 그 현실적 응용(정치, 종교, 농경)이 이루어졌다는 측면에서 당대의 가장 중요한 과학의 하나이다. 아득이 돌판등은 삼국시대에 중국 천문학이 들어오기 전, 이미 우리에겐 고유한 천문 지식이 발생하고 전승되었음을 말해주는 중요한 근거라 할 수 있다. 박창범, 앞의책, 105쪽.



그런데 역사학자들은 무엇을 지켰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만들어낸 교과서로 부터 무엇을 배웠는가?



도기 136년 9월 19일 화요일 윤 7월 27일

환기 9205년 웅기(신시개천) 5904년 단기 4339년

불기 3032년 유기 2553년 서기 2006년 이슬람력 1385년


참고서적 : 안경전, 개벽실제상황, 대원출판, 2005.

           박창범,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김영사, 2004.

           성삼제, 고조선 사라진 역사, 동아일보사, 2006.

           이형구, 발해연안에서 찾은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김영사, 2004.

           정재승 엮음, 바이칼, 한민족의 시원을 찾아서, 정신세계사, 2004.

           나카무라 사토루 엮음, 동아시아 역사교과서는 어떻게 쓰였을까?, 에디터,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