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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잔 쉼터/東西문화,역사인물

관중(BC?? ~ BC 645)

by 바로요거 2008. 9. 22.

관중


관중(BC?? ~ BC 645)은 관경중(管敬仲)이라고도 하며 춘추시대 초기의 정치가이다. 이름은 이오(夷吾), 자는 중(仲)이며, 영상(穎上: 지금의 안휘성 영상현) 사람이다. 관중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출신은 분명하지 않다.

BC 7세기 경 당시의 중국 주(周)나라 왕실은 이미 통제력을 잃고 있었으며, 이에 실력있는 제후가 패자(覇者)로서 천하를 호령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패자란 우선 주왕조의 종주권을 존중하면서 "제후 회의"를 소집하여 회맹(會盟)을 행하고 중원 제국을 위협하는 주변 소수민족의 격퇴와 중원의 질서 유지를 주된 임무로 삼고 있었다.

최초의 패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한 인물이 바로 제나라의 환공(桓公)이다.

제나라는 지금의 산동성(山東省)에 있었던 조그만 나라였으며, 환공도 그렇게 탁월한 인물을 아니었다. 그러한 그가 춘추오패의 패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관중의 공로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공자(孔子)는 이러한 관중의 공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환공이 비참한 수단에 호소하지 않고 제후들을 복종시킬 수 있었던 것은 관중의 활약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관중은 환공을 보좌하여 제후의 맹주가 되게 하고 천하의 질서를 회복했으며, 그 은혜는 오늘날까지 미치고 있다. 만약 관중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오랑캐의 풍속을 강요 당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司馬遷)도 "관중 없이 환공의 패업이 없고 중원의 평화도 유지되지 않았을 것이다"고 평가했다. 현재 관중에 대한 기록은 ≪사기≫ 「관안열전(管晏列傳)」을 통해서 일부를 확인할 수 있다.

 

관중은 친구 포숙아(鮑叔牙)와 죽마지우(竹馬之友)였다. 이 두사람의 우정에 대해서는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고사를 통해서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일찍이 관중은 집이 가난하여 포숙아와 함께 장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관중은 자주 포숙아를 속이기도 하였지만 포숙아는 관중의 인간성과 뛰어난 재능을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평 한번 하지 않고 최후까지 우정을 버리지 않았다. 관중은 이러한 포숙아의 우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내가 옛날 가난했을 때, 포숙아와 함께 장사를 한 일이 있었다. 이익을 나눌 때 내가 더 많이 가져도 그는 나를 욕심장이라 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에게 이름을 얻게 해 주려고 계획했던 일이 도리어 그를 궁지에 떨어뜨리는 결과가 되었지만 나를 바보라고 욕하지도 않았다. 그는 일에는 잘 될 경우와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나아준 분은 부모님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였다."

 

당시 제나라의 왕은 이공(釐公)이었는데, 이공에게는 제아(諸兒)·규(糾)·소백(小白)이라는 세 아들이 있었다. 관중은 이 중 규의 스승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시기에 친구인 포숙아는 소백의 스승으로 임명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관자(管子)≫ 「대광편(大匡篇)」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 있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포숙아는 이 임명에 불만을 갖고 투덜댔다. 그는 막내인 소백(훗날의 환공)에게 계승할 자리가 돌아올 가능성이 없음을 짐작하고 그러한 사람의 선생에 취임하더라도 장래의 전망이 열릴리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관중은 병을 칭탁하고 집에 틀어박혀 버린 포숙아를 찾아가 세 사람의 상속 후보자의 인물 비교를 시도하면서 소백에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역설한다.

"결국 장래의 제나라를 짊어지고 설 사람은 규와 소백일 것이다. 나는 소백의 재능을 인정한다. 그분은 잔꾀를 부리지 않고 높은 견지에서 사물을 포착하는 스타일이다. 인물의 스케일이 남다르게 웅대함으로 여간해서 남에게 쉽게 이해되지를 않는다. 순서상으로 말하면 규가 먼저지만 불행히 장래 어쩌다가 우리 제나라가 하늘로부터 재난을 받을 경우 규로서는 좀체로 난국을 극복해 나가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숙아여! 그렇게 되었을 경우 국가 안태를 위해서는 자네 힘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라네."

 

포숙아는 관중의 설득을 듣고 비로소 소백의 소승이 될 것을 승낙했다고 한다.

그 후 이공이 죽고 장자인 제아가 뒤를 이어 제나라 14대 왕 양공(襄公)이 되었다. 그런데 양공은 도저히 군주의 그릇이 못되었다. 무도한 행동이 많아 결국 사촌인 공손무지(公孫無知)에게 피살되었다. 이때 규는 관중과 함께 이웃나라 노(魯)로 망명하고 소백도 포숙아와 함께 거(艸+呂)로 달아나 난을 피했다. 그러나 공손무지도 반년을 넘기지 못하고 자신에게 원을 품은 자에 의해 피살당했다.

이에 공석이 된 왕좌를 둘러싸고 급히 중신회의가 열리고 거에 있는 소백에게 사자가 파견되었으며, 이 때 노나라도 제나라에 친노(親魯)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곧바로 규를 제나라로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관중은 별동대를 이끌고 제나라의 도읍지 임치(臨淄)로 향하는 소백군을 요격했는데 직접 활을 쥐고 소백을 겨냥했다. 화살은 소백에게 명중하여 소백은 쓰러지고 관중은 돌아가서 그 사실을 규의 본대에 보고한다. 이미 경쟁 상대가 없어진 상태에서 안심한 규는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유유히 임치로 향했다.

그런데 관중은 여기에서 중대한 실수를 범했던 것이다. 소백을 명중시켰다고 생각했던 화살은 소백의 혁대 바클에 맞았으며, 현명하게도 소백은 그 자리에서 죽은 시늉을 함으로써 위기를 넘기고, 관중이 물러간 뒤를 틈타 곧장 임치를 향해 달렸던 것이다.

이리하여 규를 옹호하는 노나라 군이 제나라 영내에 들어섰을 때에는 소백은 이미 제왕에 옹립되어 있었다. 노나라는 전후를 돌봄이 없이 일전을 시도했으나 어이없이 패하고 제나라의 요구에 굴하여 그들이 옹립해 오던 규를 스스로의 손으로 살해해야만 하는 파국에 몰렸다.  제나라의 왕위를 둘러싼 골육상쟁은 이리하여 소백 진영의 승리로 끝났던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관중의 처분이었다. 소백은 자신에게 활시위를 당겼던 관중을 가차없이 죽이려 하였지만, 관중의 절친한 친구인 포숙아는 소백에게 관중을 죽여서는 안된다고 역설한다.

"신은 다행스럽게도 처음부터 전하를 따랐기에 오늘 이렇게 전하께서 왕좌에 앉는 영광을 함께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신에게 짐이 너무 무겁습니다. 전하께서 제나라 일국만을 통치하실 생각이라면 고혜(高혜)와 저 둘만의 보좌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천하의 패자를 바라신다면 관중 외에는 적임자가 없습니다. 관중을 쓰는 나라는 반드시 천하에 중시될 것입니다. 어떻게든지 관중을 획득해야 합니다."

 

 환공은 자신이 신뢰하고 있던 포숙아의 말을 믿기로 하고 곧장 노나라에 관중의 인도를 요구하였다. 이에 관중을 접견한 환공은 관중의 뛰어난 식견에 감복하고 그를 재상에 임명하여 국정을 모두 맡겼다.

관중은 40년간 제나라를 다스리면서 대내외적으로 개혁정책을 단행하여 정치·군사·경제적인 면에서 모두 제나라를 춘추오패의 최강국으로 만들었다. 즉, 관중은 대외적으로는 패자로서 제나라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대내적으로는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경제정책에 힘을 경주했던 것이다. "농업의 보호 장려", "소금과 철, 금 등 중요산업의 생산관리", "균형재정의 유지", "물자의 유통 및 물가의 조정", "세제 및 병역의 정비", "인재등용" 등은 바로 그가 시행한 주요 정책들이다.

관중은 나라를 유지하는 정신적 지주를 "사유(四維)", 즉, 예(禮), 의(義), 염(廉), 치(恥)라 보았다. 예는 절도를 지키는 것, 의는 자기선전을 하지 않는 것, 염이란 자기자신을 숨기지 않는 것, 치란 남의 악행에 끌려 들어가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는 이 "사유" 중에서 하나가 없으면 안정이 무너지고, 두 개가 없으면 위기에 빠지며, 세 개가 없으면 전복되고, 네 개가 없으면 멸망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관중이 높은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후세 사람들이 그의 사상을 총결하여 쓴 ≪관자(管子)≫라는 책 때문이다. ≪관자≫는 선진시대의 전적 중에서 중국의 고대 경제사상자료가 가장 풍부하게 보존되어 있는 저작이다. 현존하는 ≪관자≫는 서한 말기에 유향(劉向)이 그가 수집한 564편 중에서 중복되는 것을 삭제하고 편집한 것인데, 후에 다시 10편이 소실되어 실제로는 76편만 남아 있다.

≪관자≫는 정치, 경제로부터 의식형태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국가관리와 인민통치를 위한 이론과 원칙을 제시한 책이다. "창고가 풍족하면 백성이 예절을 알고, 의식(衣食)이 풍족하면 명예와 치욕을 안다."라고 하는 것이 바로 ≪관자≫에서 제시한 경제사상의 이론 기초이다. ≪관자≫는 재정, 금융, 화폐, 무역, 세제 등의 경제 각 분야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논술한 책으로, 고대 전적 중에서 이보다 상세하게 경제분야를 논한 저작은 없을 정도이며, ≪관자≫에서 확립된 경제사상은 몇천년간 중국의 봉건경제를 이끌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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