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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잔 쉼터/東西문화,역사인물

자산

by 바로요거 2008. 9. 22.

자산


자산(子産)은 성은 국(國), 이름은 교(僑)이고, 자산은 자이다. 춘추시대 정(鄭)나라 목공(穆公, 재위 BC 627~606))의 손자이며, 자국(子國)의 아들이다. 기원전 6세기 전반 정나라에는 선군(先君) 목공에서 나온 "칠목(七穆)"이라는 일곱 가계(家系)의 중신직이 있었는데, 이들과 그 자손들이 당시의 정나라 국정을 독점하고 있었다. 자산은 바로 이 "칠목"의 한 사람인 자국의 아들로 태어났던 것이다.

자산은 BC 554년 경(卿, 대신)에 임명되었다가, BC 543년에 정경(正卿, 재상)에 취임하여, BC 523년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중원의 정세는 진(晋)과 초(楚) 양대 강국을 중심으로 대립과 항쟁이 지속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 두 나라의 중간에 끼어있던 약소국의 하나인 정나라는 예외 없이 두 강대국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으며, 이 두 강대국의 틈새에서 무수한 침략을 받으며 고초를 치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정나라는 내부적으로도 끊이지 않는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있었기 때문에 정나라는 대내외적으로 매우 불안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자산은 이러한 멸망 직전에 이른 정나라의 재건을 담당하여, 20여년간 정나라의 국내 정치를 개혁하고 의연한 외교 교섭을 전개하여 소국인 정나라를 훌륭하게 부흥시켰던 것이다.

 

☞ 자산의 정책

자산은 재상에 취임한 후 먼저 대내적으로 국론을 통일하고 사회적 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두 가지 정책을 시행하였다.

첫째, 도시나 농촌을 불문하고 신분 관계를 명확히 하여 의복이나 거마 등을 신분에 맞게 규정하고 위반자에게는 엄벌로써 다스렸다. 즉, 신분에 알맞지 않는 사치를 금지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둘째, 농촌 시책으로 농지의 구획 정리와 관개용수의 정비를 추진함과 동시에 농민을 오(伍)라는 오호(五戶) 단위의 조로 편성했다. 즉, 생산력의 향상, 중앙 정부의 뜻을 말단의 농민들에게까지 관철시키겠다는 뜻이었다.

BC 538년에 자산은 다시 농민들에게 새로운 군사비의 부담을 요구하는 "구부제도(丘賦制度)"를 시행하였다. 구부제도란, 전답 16정(井, 이것을 丘라 함)마다 말 1필, 소 3두를 공출시키는 제도이다.

자산은 다시 2년 후인 BC 536년 <형서(刑書)>를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오늘날 전해지지는 않지만, 이것은 중국 최초의 성문법(成文法)이라고 일컫는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정책들은 시행 초기에 백성들과 주변 사람들로부터 많은 원망과 비난을 받기도 하였지만, 자산은 이 길만이 정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굳은 신념으로 이상의 조치들을 꾸준히 시행해 나갔다. 그 결과 시간이 지날 수록 자산의 개혁조치들은 조금씩 효과를 거두게 되었던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자산의 치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자산이 재상이 되어 1년 후에는 어린이들은 못된 장난을 하지 않았다. 또 한창때인 장년은 일에 열중하였으므로 노인이나 아이들은 중노동을 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었다. 2년 후에는 외상으로 물건을 파는 사람이 없어졌다. 3년 후에는 밤이 되어도 문 단속을 하는 집이 없어졌으며, 또 분실물을 줍는 법이 없었다. 4년 후에는 농민이 농기구를 논밭에 둔 채로 집에 돌아오는 것이었다. 5년 후에는 사족은 군역에서 해방되고 또 복상(服喪)의 기간은 어김없이 지키게 되었다."

 즉, 이것은 자산이 개혁정치를 시행 이후 정나라는 어느듯 사회질서가 어김없이 지켜지고 사람들이 태평세월을 구가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산은 외교방면에도 더욱 충실을 기하기 위해 풍간자(馮簡子), 자대숙(子大叔), 공손휘(公孫揮), 비심(裨諶) 등 4명의 인재를 등용하였다. 풍간자는 사물을 결단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자대숙은 미목수려한 재능이 풍부한 인물이었다. 또 공손휘는 여러 외국의 실정에 밝았고, 비심을 작전을 세우는데 뛰어났다. 자산은 이렇게 각각 전문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 4명의 인물을 등용하여 여러 외국과 외교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먼저 공손휘를 불러 상대국의 최신 정보를 청취하고 외교 사령(辭令)을 작성케 했다. 그 다음에 비심을 불러 함께 작전을 세우고, 다시 완성된 작전 계획을 풍간자에게 보이며 결단을 청했다. 그리고 최후에는 자대숙을 외교사절로 파견하여 상대국과 교섭을 하게 하였다.

 

이러한 자산의 뛰어난 정치력으로 정나라는 강대국들 사이에서도 조금도 위축됨이 없이 건재할 수 있었으며, 백성들도 대평성세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공자는 20대의 젊은 시절에 정나라를 방문하여 만년의 자산을 친히 만난 적이 있었다. 이 당시 자산은 일국의 재상이었고 공자는 무명소졸에 불과하였다. 이 때 공자는 자산을 만난 다음 그의 인격과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극도의 존경을 표하였다. 즉, ≪논어≫에서 공자는 자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는 다음의 네 가지 점에 있어서 군자의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째, 행동은 신중했다. 둘째, 상급자에 대한 경의를 잊지 않았다. 셋째, 인민에 은혜를 베풀었다. 넷째, 인민을 부당한 사역에 동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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